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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남 윤씨 연동 입향조 윤효정
12세 : 어초은 윤효정(漁樵隱 尹孝貞 1476 ~ 1543. 향년 68세)
녹우당과 고산 윤선도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인물이 고산의 4대조(고조부)인 어초은 윤효정이다.
그는 해남 윤씨 11세 윤경(尹耕)의 7형제 아들들 가운데 막내로서 이곳 해남의 초계 정씨(호장 출신. 정귀영 鄭貴瑛의 딸) 집안에 장가들어 처가의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해남 삼산벌의 연동(蓮洞)에 터를 잡으면서 녹우당의 역사는 시작되었으니, 이때가 1501년이고, 그는 해남 윤씨 어초은파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녹우당 앞에 있는 안내판에는 부인의 성이 해남 정씨라고 했으나, 녹우당 뒤에 위치한 어초은 윤효정의 묘소에 있는 비문에는 분명히 초계 정씨(草溪 鄭氏)라고 나와 있다.
윤효정이 살았던 16세기 전반기에는 보편적으로 남녀균분 상속이었지만, 윤효정은 장자상속제를 유언으로 남겨 이후 해남 윤씨가의 부를 축적하는 바탕이 되었다. 윤효정은 세곡을 못 바쳐 옥에 갇힌 해남 주민들을 위해 세 번이나 곡식을 대납해서 3차례나 옥문을 열게 했다(삼개옥문 적선지가 三開獄門 積善之家)는 음덕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윤효정은 해남 지역을 학문의 길로 이끌었다는 처사촌 동서인 금남 최부(錦南 崔溥 1454 ~ 1504)의 밑에서 공부했다. 금남 최부는 표해록(漂海錄)의 저자로서 영남 사림파의 종장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니 이로 인하여 윤효정과 해남 윤씨는 영남 사림파와 맥이 연결되었다.
윤효정은 비록 성균 생원에 그쳤지만, 그의 세 아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는 등 녹우당 해남 윤씨가를 명문사족으로 자리 잡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현재 녹우당 앞에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는 그의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한 것을 기념해서 심은 것이라고 한다.
해남윤씨는 충신이 많은 집안으로도 알려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해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순절한 윤신, 윤륜, 윤치경, 윤동철을 비롯하여 양근군수로 재직 중 임진왜란 때 항쟁하다 순절한 윤리경, 그리고 정유재란 시 의병을 모집하여 항거하다 순절한 윤익경 등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친일ㆍ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김창국 위원장)는 1926년부터 1943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파 윤정현(1882 ~ 1950)이 전남 해남군 해남읍에 소유한 토지 39필지(9만4천여㎡)에 대해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2009.10.19)
2. 가계(家系)와 관련 인물
13세 : 귤정 윤구(橘亭 尹衢 1495 ~ 1549)
윤효정에게는 장남 윤구를 비롯해서 6형제가 있었음. 윤효정의 큰아들인 윤구는 1516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부교리를 지내다가 기묘사화 때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기묘명현의 한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윤효정의 4남인 윤복(尹復 : 1512. 중종 7 ~ 1577. 선조 10)이 1565년 안동대도호부사로 있을 때에 예안에 있던 퇴계 이황과 교유함으로써 해남 윤씨가 동인과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4세 : 윤구의 3형제 아들 - 윤홍중, 의중, 공중.
윤홍중(尹弘中) – 아들 사회(思悔)가 패륜을 저질러 호적에서 삭제함. 패륜 행위에 대해서는 <광해군일기>를 보면, 아비의 첩을 간음했다는 구체적인 사실이 나와 있으나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친아들을 내쫓고, 동생 의중의 차남인 윤유기(尹唯幾)를 양자로 맞이한 것은 사실이다.
낙천 윤의중 (駱川 尹毅中) – 1585년 좌의정 노수신의 추천으로 형조판서가 되었다. 인조반정 후에 서인들이 집권하던 기간 중인 1643 ~ 1657 사이에 새로 쓴 <선조수정실록>에는 서인과는 반대 붕당인 그에 대한 악평을 새로 더하였으니, 양사와 이이 등 서인계열로부터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청렴치 못하다고 하여 비판을 받고 탄핵 당하였다.
그의 생질들로서 동인에 속한 이발(李潑), 이길(李佶) 형제가 기축옥사(1589년에 일어난 정여립 모반 사건) 때에 죽음을 당하자, 그도 파직 당하여 낙향 중에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은 윤유심(尹唯深)과 윤유기(尹唯幾) - 윤선도 신도비에는 가운데 항렬이 唯가 아니고, 惟로 되어있음 - 인데, 차남인 유기를 형 윤홍중에게 양자 보냈다.
윤구의 딸은 이중호(李仲虎 : 光山 李氏)에게 시집가서, 이급(李汲)‧이발(李潑)‧이길(李洁)‧이직(李溭) 4형제를 두었는데, 특히 이발, 이길이 유명했다.
15세 : 윤유기(14세 윤홍중의 양자)에게는 서자 윤선양(尹善養)이 있었으나, 동생 윤유심의 차남인 윤선도를 양자로 들였다.
원래 그는 이이첨과 같은 북인이었으나 권력을 쥔 이이첨에 의하여 배척당하였다. 1616년 양아들 윤선도가 이이첨의 횡포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그는 파직당하고, 아들 윤선도는 처음엔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된다.
윤유심 – 윤선언(尹善言), 윤선도(尹善道), 윤선계(尹善繼), 서자 윤선하(尹善下) 가운데, 차남인 윤선도를 형 윤유기에게 양자 보냈다.
16세 : 고산 윤선도(1587 ~ 1671. 85세) :
서울 연화방(蓮花坊. 한양의 동부 12방 중 하나. 지금의 서울 종로구 연지동 일대. 종묘와 동대문 사이)에서 태어남.
할아버지 윤홍중의 호 낙천(駱川)이나, 윤선도의 현손인 윤덕희의 호 낙서(駱西)는 모두 서울 동쪽(= 좌청룡)의 낙산(駱山)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고, 선조 8년 (1575년) 동‧서 분당 때에 서울 동쪽에 살던 사람들은 동인, 서울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서인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보듯이 그의 가문도 서울 동쪽에 살았기 때문에 자연히 동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나이 8세에 윤유기의 양자로 들어갔으니, 해남 윤씨 15세(윤유기), 16세(윤선도), 2대 연속 종손이 양자로 계승되었다.
17세에 남원 윤씨 윤돈(尹暾 1551 ~ 1612)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윤돈은 이황, 기대승의 문인이니, 윤선도가 남인이 되는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1616 ~ 1623 : 이이첨 횡포를 비판하는 상소로 귀양살이하다 인조반정으로 해배됨.
인조의 두 아들 봉림대군(효종. 임금의 사부)과 인평대군의 스승이 됨.
1637년 보길도 부용동 경영 – 윤선도의 무릉도원이자 그의 왕국. 병자호란 후에 제주도로 가던 도중에 들러서 경영함.
1638년 병자호란 때에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년 간 귀양살이.
1652년 경기도 양주의 고산(孤山)에 살았기 때문에, 그의 호를 고산(孤山)이라고 정한 것 같다.
1659년 기해예송(효종 승하 시에, 계모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로 일어난 1차 예송) 때에 3년설을 주장하였다가, 기년설을 주장한 송시열 등 서인에게 패배하여 1660년 74세 고령으로 함경도 삼수(三水. 그 이웃의 갑산과 함께 조선시대 최악의 유배지로 손꼽히던 곳)로 귀양 가서 1667년 81세에 해배됨.
83세 되던 1669년 효종이 수원에 지어준 그의 집을 뜯어 배로 옮겨와서 해남에 녹우당을 지음.
1671년(현종 12) 6월 11일 보길도 낙서재(樂書齋)에서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남.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역시 호남 출신인 송강 정철이 서인의 영수로서 당쟁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것처럼, 고산 윤선도도 남인으로서 당쟁의 한 가운데 있었던 것이 공통점이다.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가인(歌人)으로 꼽히지만, 가사는 남기지 않고 시조와 단가 75수를 남김. 대표작으로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을 남겼다.
그와 관련된 ‘윤고산 수적 및 관계문서(尹孤山手蹟─關係文書)’는 보물 제 482호로 지정되어있다.
<윤선도가 사용하던 거문고 ‘아양’, 해체 복원 완성 기사>
국립국악원은 ‘고산 윤선도 유물관(전남 해남)’에 전시된 악기 중 ‘아양(峨洋)’이라 불리는 거문고를 지난 6개월여 간의 복원 작업을 통해 12월 11일에 완성했다고 전했다.
시조 ‘산중신곡’,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尹善道, 1578~1671)의 유품 중 ‘아양(峨洋)’과 ‘고산유금(孤山遺琴)’이라 조각된(이하 ‘아양’과 ‘고산유금’) 두 대의 악기가 윤선도의 후손들에게 전해져 오고 있다.
1982년 윤선도의 14대 종손인 윤형식(고산문화재단 이사장)의 서고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진 이 후, 고산 윤선도 유물관에 보관되어 있지만 안타깝게도 소실된 부분이 많아 연주가 불가능하고 정확한 형태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국립국악원은 조선시대 거문고의 특징을 알아보고 복원된 악기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그 시대 음악을 향유하기 위해 두 대의 악기 유품 중 ‘아양(峨洋)’이라 불리는 거문고를 우선 복원 제작한 것.
국립국악원은 복원 제작을 위해 ▲유물 실측 ▲수종식별▲방사성탄소연대측정(탄소화합물 중의 탄소의 극히 일부에 포함된 방사성동위원소인 탄소-14(14C)의 조성비를 측정하여 그 만들어진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기존 관련 자료 검토를 실시해 소실된 부분의 악기 원형을 복원 제작을 완성하였다.
그 결과 유물의 크기가 15세기에 편찬된 ‘악학궤범’에 기록된 거문고 치수와 유사하며 연대측정결과도 1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수종식별 결과 앞·뒤판이 각각 오동나무와 밤나무로 제작되어 있어 예전과 지금의 거문고 재료가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뉴스와이어) 2009년 12월 14일
17세 : 윤인미 尹仁美, 윤의미 尹義美, 윤예미 尹禮美. 서자 윤순미(尹循美), 윤직미(尹直美), 윤학관(尹學官. 윤선도의 임종을 지킨 아들)
윤인미는 전주 유씨 유영길(柳永佶)의 손녀, 유항(柳恒)의 딸과 결혼했는데, 유영길은 영의정 유영경의 형이다. 유영경(柳永慶)은 전주 유씨로서, 북인 중에서도 영창대군 지지 세력인 소북, 소북 중에서도 탁북에 속했다. 이로 인해 1608년 함경도 경흥으로 귀양 갔다가 그곳에서 사사되고, 인조반정 후에야 관작이 복구되었다. 아들은 윤이석(尹爾錫)이다.
윤의미는 윤선도의 형, 윤선언의 양자로 가서 윤이구(尹爾久)와 윤이후(尹爾厚) 형제를 낳았으나, 윤이후는 윤예미에게 양자 갔고, 윤이구는 아들이 없어서 윤예미에게 양자 간 윤이후의 다섯 아들 중 셋째인 윤종서(尹宗緖)를 다시 양자로 맞이해야만 했다.
윤예미는 아들이 없어서 윤의미의 둘째 아들 윤이후를 양자로 맞이하였던 바, 윤이후는 윤창서(尹昌緖), 윤흥서(尹興緖), 윤종서(尹宗緖), 윤두서(尹斗緖), 윤광서(尹光緖) 5형제를 낳았고, 이 중 셋째 윤종서는 윤이구에게 양자 가고, 넷째 윤두서는 종손인 윤이석에게 양자를 갔다.
18세 : 윤이석(尹爾錫 : 1626 ~ 1694) - 이산현감(尼山縣監)
40세 넘도록 종손이 없어서, 윤선도는 고민 끝에 윤이후(尹爾厚 1636 ~ 1699)의 아들 5형제 중, 그의 점괘에서 가장 좋게 나온 4남 윤두서를 종손으로 영입하였다.
윤이후의 호는 지암(支菴)인데 ‘일민가(逸民歌)’라는 가사를 남겼다.
19세 :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 ~ 1715. 48세) : (명작 순례, 유홍준)
남도 남종화의 시조이며 동시에, 우리나라의 속화(俗畫) 즉 풍속화의 시조이기도 하다. 특히 말 그림과 인물화에 능했다.
조선 후기 삼재(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1676 ~ 1759, 현재 심사정 1707 ~ 1769)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문인화가로서 자화상(국보 제240호)이 특히 유명하다.
“옛 그림을 배우려면 공재로부터 시작하라” – 추사 김정희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7 ~ 1892 : 진도 운림산방의 1대 남종화가)이 1835년 그의 나이 28세 때에 녹우당으로 찾아와서 윤두서의 공재화첩을 빌려가서 몇 달에 걸쳐 모사, 그림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부인 : 첫째, 둘째 부인 모두 전주 이씨와 결혼
첫 부인은 실학의 선구자인 지봉 이수광의 증손녀로서, 맏아들 윤덕희를 비롯하여, 2남 1녀를 낳고 23세에 사망.
둘째 부인도 전주 이씨, 병와 이형상(甁窩 李衡祥. 탐라순력도를 그리도록 함)의 형인, 이형징(李衡徵)의 딸. 이형상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에 쓴 『남환박물』도 윤두서의 제안으로 썼다고 한다. 남인 가문끼리 결혼.
전주이씨 병와공파 중종에서 소장한 유가의 다섯 성인을 그린 「오성도(五聖圖)」가 윤두서의 작품으로 전한다,
1696년 그의 셋째 형인 윤종서(尹宗緖, 윤이구에게 양자 감. 1664 ~ 1697)가 옥사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귀양 갔다가, 1697년 한양에서 다시 심문 받던 중 죽고 말았다.
1706년에는 그의 친구 옥동 이서의 형, 이잠(李潛)이 숙종의 친국으로 죽음을 당하여 벼슬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접고 말았다.
아들을 9형제나 두었는데, 윤덕희, 윤덕겸, 윤덕훈, 윤덕우, 윤덕렬, 윤덕렴, 윤덕현, 윤덕휴, 윤덕증이다.
20세 : 공재의 장자인 낙서 윤덕희(1685 ~ 1766)는 청나라 초기 안휘파의 새로운 그림 양식을 수용하였다.
보물 제481호로 지정된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 일괄’은 윤덕희가 1719년(숙종 45)에 부친 윤두서의 작품을 모아 화첩이다.
윤덕희의 차남이 21세 청고 윤용이다.
5자 : 윤덕렬 – 21세 윤경(尹憬) – 22세 윤지충(尹持忠), 윤지헌(尹持憲)
윤덕렬의 차녀, 윤소온 尹小溫은 진주목사 정재원과 결혼하여 1녀 3남을 낳았으니, 사위는 만천 이승훈이고 아들은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들이다.
21세 : 청고 윤용(靑皐 尹愹 1708 ~ 1740. 33세) – 해남 윤씨가 3대째 화가로 유명했으나 33세로 일찍 죽음.
* 정약용의 평 : 정약용 - 매조도, 열상산수도 같은 그림들을 남김.
“윤두서의 그림은 성스러우면서도 원숙하고,
윤덕희의 그림은 어질면서도 원숙하고,
윤용의 그림은 신령스러우나 원숙하지 못하니 그것은 그가 젊었을 때에(33세) 돌아갔기 때문이다.”
22세 : 윤지충(尹持忠 1759 ~ 1791) – 전라도 진산 출신(지금은 충남 금산군 진산면). 1791년에 일어난 전라도 진산 사건으로 일어난 한국 천주교 역사상 첫 순교자.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의 외사촌. 이덕일이 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권 100쪽에는 윤지충이 정약용의 외종 6촌이라고 하였으니, 후고를 요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외가인 해남 윤씨들과 가깝게 지내서, 외가로 6촌형인 윤지범(尹持範, 1752-1821)이나 동갑인 윤지눌(尹持訥, 1762-1815)은 평생의 지기 知己들이었다. 동갑인 윤지눌은 문과에 급제하여 같이 벼슬하던 이로서 시동인 詩同人 모임인 '죽란시사 竹欄詩社'의 일원이었다.
당시 전라도 진산군(지금의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서 살던 윤지충은 1791년 신해년 辛亥年에 어머니 권씨가 죽자 윤지충은 외사촌형인 권상연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따라 신주(神主 =위패)를 불사르고 천주교식 제례를 지냈다가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였다는 죄명으로 처형당한다. 이것이 이른바 조선 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인 '진산사건' 혹은 '신해사옥'이다.
외가의 천여 권 장서와 다산초당 제공으로 다산은 강진 유배지에서도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 전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산의 강진 유배 시절, 저술활동에 도움을 주며 학문을 토론하던 제자가 18명인데, 이중 10명이 해남 외가와 강진의 윤씨들이었는데, 그 중 다산과 시문을 주고받으며 귀양살이 중인 다산을 위로한 문사들로는 윤종하, 윤종직 등이 있다.
옥동 이서(玉洞 李漵 1662 ~ 1723) : 여주 이씨. 남인 가문.
공재 윤두서의 친구로서 녹우당(綠雨堂) 현판 글씨를 썼다.
왕희지의 서체를 재해석하여 동국진체(東國眞體 = 우리나라의 참된 글씨체)를 창시하였다.
그가 사용하였던 거문고, 옥동금(玉洞琴)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83호이다.
실학자 성호 이익(1681 ~ 1763)의 셋째 형. 성호 이익의 백형은 청운 이해, 중형은 섬계 이잠, 셋째 형이 옥동 이서이다.
섬계 이잠은 이익에게 학문을 가르쳐 준 형으로서 숙종 32년 1706년, 노론이 당시 왕세자(훗날의 경종)에게 위해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숙종의 친국으로 곤장에 맞아 죽었고, 이로 인해 동생 이익은 일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실학을 연구하였다.
이들 형제들은 모두 공재 윤두서와 교류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성호 이익이 윤두서의 제문에서, “우리 형제는 자신이 없었지만 공의 칭찬을 듣고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 동국진체(동국진체 = 우리나라의 참된 글씨체) 성립 과정
1. 신라 말기 : 왕희지체(김생)
2. 고려전기 ~ 무신집권기 : 구양순체(유신, 탄연, 최우)
3. 원 간섭기 ~ 조선 초 : 송설체(松雪體 = 원의 조맹부체, 촉체 蜀體)
4. 선조 ~ 인조 : 한체(韓體 = 한석봉체)
5. 서인 :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체 = 양송체(兩宋體)
6. 남인 : 미수 허목 = 미수체(眉叟體)
7. 옥동 이서가 남인들의 미수체가 널리 이용되지 못하자 동국진체를 창시, 이것은 왕희지체(= 진체 晉體)를 바탕으로 미법(米法)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였으니 이것을 그의 호를 따서 옥동체(玉洞體)라고도 하였고, 이것을 공재 윤두서가 계승하고, 다시 소론계의 백하 윤순(白下 尹淳)이 계승하였으니 그는 동국진체에 명조풍(明朝風)을 가미하였고, 이것을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 ~ 1777)가 완성하였다.
* 녹우당의 현판 글씨들
1. 녹우당(綠雨堂) : 옥동 이서가 씀. 집 뒤 비자나무 푸른 숲에 바람이 불면 비가 오는 소리 같다는 뜻.
2. 운업(芸業) : 운업(芸業)이란 “운(芸)은 잡초를 가려 뽑아 숲을 무성하게 하다”의미와 “업(業)은 일, 직업, 학문, 기예의 뜻”으로 “늘 곧고 푸르며 강인한 선비이자 충신 열사의 정의로운 적극적 행위 개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녹우당 선대 당주들의 이상과 녹우당 당호를 설명하고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정관(靜觀) : 동국진체의 완성자인 원교 이광사가 씀. 선비는 홀로 있을 때에라도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다.
4. 7언 절구 : 윤효정의 둘째 아들 졸재 윤행(拙齋 尹行)의 11대손 나산 윤성호(懶山 윤성호)가 지음.
蓮生此地一根連 幾到春風花樹草 松柏在山魚在沼 漁樵古蹟盡然然
연생차지일근연 기도춘풍화수초 송백재산어재소 어초고적진연연
壬子花會 懶山稿
임자화회 나산고
연은 이 땅에서(= 연동 蓮洞) 한 뿌리로 이어졌는데,
세월은(=춘풍) 얼마나 흘렀는지 자손(=화수)들이 많네.
송백은 산에, 물고기는 연못에 있으니,(오랫동안 그 후손들이 계승한 것)
어초은( =윤효정)의 옛 자취는 그대로 끝없이 이어가리라.
<임자년 꽃피는 때에 나산(윤성호)의 글>
정재원(丁載遠 1730. 영조 6 ∼ 1792. 정조 16) :
나주 정씨. 8대 옥당(8대에 걸쳐 연속적으로 홍문관 벼슬을 한 집안)으로 유명한 남인 가문
첫 부인 의령 남씨 소생 :
– 장남 정약현(1751 ~ 1821). 다산이 쓴 그의 묘지명이 남아 있음. 부인은 경주 이씨, 이부만의 딸. 정약현의 처남이 한국 천주교회사의 유명 인물인 광암 이벽이다. 정약현의 맏딸 정명련(丁命連)과 결혼한 첫째 사위가 1801년 황사영 백서 사건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황사영이고, 셋째 사위는 홍재영 부부인데, 홍재영 부부는 1839년 기해박해 때에 순교자가 된다.
둘째 부인, 해남 윤씨 소생 :
딸 = 만천 이승훈(蔓川 李承薰. 평창 이씨). 이승훈은 조선의 첫 영세자로서 영세명은 베드로.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순교하였고, 1868년 아들 이신규(李身逵)와 손자 이재의(李在誼), 1871년에는 증손 이연구(李蓮龜), 이균구(李筠龜) 등 4대에 걸쳐 순교자가 나왔다.
차남 : 정약전 – 1801년 신유박해 때에 흑산도로 귀양 가서 어류학 백과사전인 자산어보를 남김.
3남 : 정약종(1801년 신유박해 때에 순교) - 정약종의 장남 정철상(1801년 순교), 차남 정하상(1839 기해박해 때에 순교)
4남 : 정약용(다산, 여유당전서 500여권을 저술함),
8세에 어머니 해남 윤씨 별세. 이후 큰형수에게서 보살핌을 받았고, 12살 때는 새로 서모로 들어온 잠성 김씨(岑城金氏)에게서 다산이 결혼할 때까지 양육 받음. 다산이 지은 잠성 김씨의 묘지문이 남아 있음.
셋째 : 황씨 부인
첩 : 잠성 김씨 소생 – 5남 정약황, 서녀 = 채홍근(번암 채제공의 서자)
<해남 윤씨 인물 자료>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 20명, 무과 급제자 : 13명
대한민국의 유명 인물 : 윤근환(제3대 농림부장관), 윤관(제12대 대법원장), 윤내현(단국대 역사학과 교수), 크라운제과의 윤태현(창업주), 윤영달 회장, 윤영일(20대 국회의원) 등
3. 녹우당(綠雨堂) : 초록비 내리는 집
(김봉렬의 한국건축이야기 1권. 시대를 담는 이야기)
사적 제167호.
이 건물은 원래 효종이 사부였던 윤선도를 위해서 경기도 수원에 지어줬던 것인데, 윤선도가 목재를 배에 싣고 와서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한다. 녹우당 현판 글씨는 공재 윤두서의 벗이었던 옥동 이서인데, 뒷산 비자나무의 초록빛 숲에 부는 바람소리가 비 내리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부친 이름이라고 한다.
녹우 = 늦봄(4월 20일 전후 곡우 무렵)과 초여름 사이의 잎이 우거진 때에 내리는 비.
9천 평의 비자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제241호로 지정되었는데, 뒷산인 덕음산의 바위가 드러나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어초은 윤효정의 유언에 따라 그 후손들이 500여 년 동안 비자나무 숲을 지켜왔다고 한다.
나무는 아름다워서 관상용이고, 열매는 기름과 약용으로 쓰이고, 목재는 탄력이 있어서 바둑판으로 쓰인다.
이 건물의 특징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경북 안동에서는 흔하지만 전라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자형 집
2. 석양을 막기 위한 차양 설치 – 서향 건물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실용적인 장치
3. 솟을 환기구 – 안채의 두 부엌 위에 있는 해남 윤씨가의 전매 특허. 원래는 송광사, 선암사 같은 전남 지역 사찰 요사채에서 자주 사용하던 형식.
4. 주요 출입구는 남쪽으로 내었다. 대문, 중문, 협문.
5. 안채의 주요한 방들은 모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음.
추원당(追遠堂. 옛 선조를 추모하는 집)은 녹우당 뒷편에 있는데,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고산선생의 고조부(4대조) 윤효정의 제각으로 1935년에 새로 지었다. 시향(時享)은 음력11월 15일 어초은 사당에서 지내고, 이곳 추원당에서는 제관과 참배하는 후손들이 숙식을 하며 문중회의를 한다.
4. 녹우당의 풍수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
인걸은 지령이라. ‘시골의 면장이라도 되려면 논두렁, 밭두렁 정기라도 받아야만 된다.’라고 생각한 것이 한국인의 유별난 풍수관이었다. 이곳 녹우당의 풍수는 과연 어떤가?
연동의 형국은 덕음산(德陰山 : 덕의 그늘. 산의 정상 부분이 평평한 것을 풍수가에서는 토체 土體라고 한다. 토는 덕을 상징)을 주봉으로 배산(背山, 玄武)하고 좌우에 그 지맥이 안아 싸고 있는 듯한 형상일 뿐만 아니라, 동쪽 계곡에서 발원한 작은 개울이 마을 앞 들판을 흘러 임수(臨水)하고 있으며, 들판 건너 안산(案山)은 일자문성 一字文星의 평평한 두부 모양의 토체 형상이고, 조금 우측의 문필봉은 노적봉처럼 생겨서 먹을 것이 풍부한 격이다. 좌청룡, 우백호가 세 겹이나 되는 명당에 입지한 녹우당은 갑좌(甲坐 =서향)이기 때문에 저녁에 따가운 햇살이 파고드는 것이 흠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최고 중요한 희망은 문과를 거쳐 벼슬하는 것이어서, 조선시대 양반들의 집터나 서원, 향교에는 거의 문필봉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에 일본 사람들이 인부를 데리고 올라가 이곳의 문필봉 정상을 삽으로 파내었다고 한다.
녹우당 앞의 연못은 윤효정이 팠는데, 그가 이곳에 정착하여 집을 지었으나, 두 번 연속 화재가 났기 때문에 이유를 알아보니, 집터의 화기(火氣)가 세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 위치를 처음 위치에서 조금 뒤로 물리고, 화기를 누르기 위하여 집 앞에 연못을 파서 백련을 심어서 동네 이름도 백련동(白蓮洞)이었다가 후에 연동(蓮洞)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연못의 흙을 파낸 것으로 5개의 언덕을 만들고 연못 안에 3개의 인공 섬을 만들어 마음 심(心)자 형태로 정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연못 안에 방형과 원형으로 된 두 개의 섬이 나란히 있다. 그리고 마을 앞이 너무 허해서 연못 주변에 소나무를 심어서 큰길에서 녹우당이 훤히 드러나게 보이지 않도록 보완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을 몰무덤이라고 한다.
명풍수로서 윤선도와 친척 간(처고모부였다고 함)이었던 이의신(李懿信 광해군 때에 교하 천도설을 주장)과의 에피소드가 있는 윤선도의 묘소는 전남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에 있는데, 산태극 수태극의 명당으로 이름났다.
1만 평의 집터에 50만 평에 달하는 장원을 가진 녹우당은 유교적 만다라가 구현되어 있는 세계이다.
이러한 형국 때문인지는 몰라도 해남 윤씨가는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고 지금까지도 오랫동안 번영을 누리고 있다.
호남지역에서 일어났던 동학농민운동과 해방 직후 좌, 우익의 대립이 극심하던 시국과 6․25 때에 적 치하에서 지내면서도 구례 운조루와 마찬가지로 녹우당의 옛 건물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나름대로 이 지역에서 인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 부의 축적 과정과 유지
메디치가의 부와 문화 예술 지원으로 피렌체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게 하였듯이, 녹우당의 부가 물적 토대가 되어 예술혼이 꽃핀 것 같다.
아래는 문화일보 2017.10.25. 기사(박경일 기자의 기행)를 발췌한 것이다.
“해남 윤씨 가문의 이런 문화적 성취 바탕은 ‘돈’이었다. 해남 윤씨 가문은 대대로 바다를 막아 농토를 일구는 개간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해남 윤씨의 간척사업은 민간에서 이뤄진 것으로는 가장 규모가 컸다. 어초은이 처음 관으로부터 간척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고위 관료였던 사돈의 정치적 도움이 적잖았으니 돈을 버는 과정에서 필요한 ‘현실감각’까지 두루 갖추고 있었다.
훗날 문화적 성취를 이룬 후손들도 쌓아 놓은 돈을 그저 쓰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윤선도 역시 환갑 무렵 진도의 갯벌을 개간하는 사업을 벌였는데 바다를 막아 만든 땅이 자그마치 198만㎡, 그러니까 60만 평이나 됐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3분의 2쯤 되는 땅이다. 그가 이 땅에서 번 것만으로도 평생 쓰고도 남을 정도가 아니었을까.”
어떤 이는 어초은 윤효정의 재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원칙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첫째, 윤씨 집안 며느리는 상속할 재산이 많지 않으면 절대로 결혼을 못한다
둘째, 아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위 공무원을 획득, 재산을 보호, 증식시킨다.
셋째, 간척을 통해 합법적으로 토지 소유를 늘려 나간다. 특히 서해안의 간척을 많이 했는데, 이러한 땅을 언전(堰田 : 방죽 언, 보를 막을 언)이라고 하였다. 그 중 유명한 것이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의 간척 사업인데, 이것은 14세 윤의중 때부터 시작하여 19세 윤두서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어느 정도 간척지가 조성될 정도로 규모가 큰 것이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지금도 공재 윤두서 고택이 있고, ‘백포별서도(白浦別墅圖)’라는 부채 그림을 남기기도 하였다.
해남 윤씨가는 수백 명의 노비들을 조세 운반에 필요한 노무에 동원, 백성들의 공물, 세곡을 징수하여 서울로 운반하는 전 과정에 개입하여 이익을 챙겼다고도 한다.
* 윤선도 가문의 유산 상속 과정
1. 윤효정(윤선도의 고조부) – 처가 초계 정씨가문의 재산을 상속 받음
2. 윤의중(윤선도의 조부) - 재산을 많이 모아서 호남 제일의 갑부로 탄핵을 받을 정도
3. 윤유기(윤의중의 차남으로서 백부 윤홍중에게 양자 감) - 양자 갈 때에 생부 윤의중에게서 노비 133명, 땅 550여 두락을 증여 받음. 충청도 면천(오늘날 충남 당진 일대)에도 토지가 있었음. 양부의 노비 251명을 포함하여 384명의 노비를 물려받아 윤선도에게 550명의 노비와 토지 1천 두락 이상을 물려 주었다.
일반적으로 1두락은 1마지기(200평)로 보는데, 이무영의 소설, <제1과 제1장>에 나오는 셈법에 따르면, 22마지기에서 40섬의 곡식이 생산된다고 봄. 그렇다면 윤선도가 물려받은 1천 두락에서는 연간 1,820석의 곡식이 나왔을 것이다.
4. 윤선도 – 생부 윤유심에게서 66명, 양부인 윤유기에게서 550명, 도합 616명의 노비와 토지 1천 두락에, 처가인 남원 윤씨 윤돈의 재산도 많이 상속받았을 것이다. 비록 임진왜란을 겪었다 해도 윤선도 가문의 재산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에 1637년 이후 보길도를 경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가문의 전성기에는 녹우당이 있는 연동 앞 삼산벌 50만 평(2,500두락)을 모두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50세가 넘어서야 명주옷이나 모시옷을 처음 입었는데, 시골 있을 때 네가 명주옷을 입은 것을 보고 몹시 불쾌했었다. 이런 복식(服飾)은 모름지기 물리쳐 가까이 말고 검소한 덕을 숭상하도록 하여라."
고산 윤선도가 함경도 유배지 삼수에서 맏아들 윤인미에게 보낸 '기대아서(寄大兒書)'에 나오는데, 이것을 보면 당대 제일의 부를 자랑하던 고산 가문은 의외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심을 잃지 않고 500년 넘는 긴 세월 동안 부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16 ~ 17세기 호남의 3대 부호, 사족 가문은 다음과 같다.
광주의 회재 박광옥(懷齋 朴光玉 1526 ~ 1593), 보성의 우산 안방준(牛山 安邦俊 1573 ~ 1654). 해남의 고산 윤선도 가문.
<해남 윤씨 세계표> (/다음은 서자들임. 밑줄 친 굵은 글자는 친부 계승)
세 | 이름 | 비고 |
1 | 존부 存富 | 시조. 탐진(=강진군) 거주 |
2 | 광혁 光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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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형 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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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효정 孝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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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천즙 川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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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환 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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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록화 祿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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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광전 光琠 | 중시조 |
9 | 단봉, 단학(丹鶴) | 윤단학 노비허여문급 및 입안(1354). 보물 제483호 |
10 | 사보(思甫), 사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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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종, 경(耕), 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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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효인, 효의, 효례, 효지, 효상, 효원, 효정(孝貞) | 어초은공파조 |
13 | 구(衢), 이, 행, 복, 후, 종 | 기묘명현 |
14 | 홍중(종손), 의중(毅中), 공중 | 호남 갑부 |
15 | 유심(唯深), 유기(윤홍중에게 양자 감. 종손), 유순 | 윤홍중의 아들, 사회(思悔)는 불륜으로 축출 당함. |
16 | 선언, 선도(善道. 유기에게 양자 감. 종손), 선계, /선하 | 윤유기에게는 서자 윤선양이 있었음. 윤고산 수적 및 관계문서(尹孤山手蹟─關係文書)’ 보물 제482호 |
17 | 인미(종손), 의미(義美. 선언에게 양자 감), 예미, /순미, 직미, 학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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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이구, 이후(爾厚. 예미에게 양자 감) | 종손은 인미의 아들 이석(爾錫) |
19 | 창서, 흥서, 종서(이구에게 양자 감), 두서(斗緖. 인미의 아들, 이석(종손)에게 양자 감), 광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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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덕희(德熙. 종손, 화가), 덕겸, 덕훈, 덕후, 덕렬(德烈), 덕렴, 덕현, 덕휴, 덕증 |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 일괄 보물 제481호.(윤덕희 엮음) |
21 | 덕희 아들 _ 종(종손), 용(愹. 화가), 번, 굉, 저 덕렬 자녀 - 경, 징, 차녀(윤소온=정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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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경의 아들, 지충(持忠) |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
<참고 자료>
1.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1권, 유홍준. 1993. 창작과비평사
2.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 2002. 푸른역사
3. 공재 윤두서, 이내옥. 2003. 시공사
4. 김봉렬의 한국건축이야기 1권(시대를 담는 이야기). 2006. 돌베개
5. 공재 윤두서(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선구자), 박은순, 2010. 돌베개
6. 명작 순례(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 2013. 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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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1.26(일) 녹우당에 갔을 때 제가 설명한 내용을 보완한 것인데, 너무 길어서...ㅠㅠㅠ
흥미 위주로 적었기 때문에 사실관계는 100% 보증할 수 없습니다.
프린트 해서 꼼꼼하게 읽었어요. 너무 너무 고맙습니다. 다시 한번 더 가고 싶네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윤지충이 녹우당 후손인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정리해 주신 자료 감사합니다. 저도 프린터해서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오류가 많을 듯하여 염려됩니다.
질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