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대경로 4859 (서악동 843)
관람시간 : [3월~10월] 09:00-18:00 / [11월~2월] 09:00-17:00 연중무휴
관람요금 : 어른 2,000원 / 청소년 1,000원 / 어린이 500원
무료주차
건무문이 들어가는 입구다.
태종무열왕과 문명왕후의 재미있는 이야기 만화가 있다.
경주 태종무열왕릉은 신라 제29대 무열왕(재위 654-661, 김춘추)의 무덤으로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입구를 들어가면 바로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경주 태종무열왕릉비가 있는 비각이 보인다.
좌측에는 문화해설사의 집과 무열왕릉 영상관이 있으나 무열왕릉 영상관은 코로나19로 운영하고 있지는 않다.
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본명은 김춘추이다.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661년 6월에 죽어, 죽은 왕에게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아직 발굴조사를 하지 않았으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장식이 소박한 편으로 무덤 주위에 자연석으로 둘레돌(호석)을 돌렸다.
무덤앞 동북쪽에 경주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가 있다.
통일신라시대 비석은 당나라의 영향으로 거북모양의 받침돌과 비석의 몸체위 머릿돌에 용을 새긴 것이 대부분이다.
이 비석은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최초의 것이다.
비석은 몸체(몸돌, 비문)가 없어진 채 거북 받침돌(귀부 龜趺) 위로 머릿돌(이수 螭首)만 얹혀 있다.
머릿돌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라고 새겨 놓아 비석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었고 등에는 큼직한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새겼다.
등 중앙에 비석을 세우기 위한 네모난 홈이 있고, 주위를 연꽃 조각으로 장식하였다.
머릿돌은 자우에 3마리씩 용 6마리가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다.
문무왕 원년(661)에 건립하였으며, 비문은 당시 명필가로 유명했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쓴 글씨를 새긴 것이다.
비각을 뒤로 하고 무열왕릉으로 이동한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가치가 있으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20호로 지정되었다.
태종무열왕릉
신라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로 인해 성골 출신만 왕이되다가 최초로 진골 출신인 김춘추가 왕이 되었다.
그래서 신라에서 유일하게 시호와 묘호를 함께 가지게 되었다.
시호는 무열왕이고 묘호는 태종이다. 그래서 태종무열왕릉이 된 것이다.
능은 밑둘레 112m, 높이 약 8.5m로 비교적 큰 편이다.
김유신은 후에 문무왕의 어머니인 문명왕후가 되는 자신의 여동생을 김춘추와 혼인시키고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성골남성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아 마지막 성골 여성이 왕위를 잇고 있던 진덕여왕시기에
진골신분인 김춘추를 이용해 본인의 가야출신 진골이라는 신분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훗날을 도모한
킹메이커의 역할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김유신이 우직한 장군으로 묘사되어 오해하기 쉬운데...
진평왕부터 이후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그리고 무열왕과 문무왕에 이르기까지 다섯 왕의 옆에서 신임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군사적 역량보다는 정치적 역량이 뛰어났던 인물이 아니면 사실 불가능하다고 본다.
무열왕릉 뒤 편으로 서악동 고분군으로 4개의 봉분이 보인다.
누구의 묘인지 알려지지 않아 서악동 고분군으로 지칭된 것이다.
1964년 8월 29일 사적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서악리고분군으로 불리다가 2011년 7월 28일 고시로 경주 서악동 고분군으로 명칭변경되었다.
4개의 대형 무덤들은 경주분지의 대형 무덤과 비슷한 형태로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 시설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봉분이 거대한 점, 자연돌을 이용해 둘레돌을 두른 점 및 무열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으로 보아
안에는 나무로 된 네모난 방을 만들고 그 위와 주변에 돌무더기를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형식으로 추측할 수 있다.
무덤의 주인에 대해 법흥왕릉,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흥대왕릉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밖으로 나가면 서악동 귀부가 있는 비각의 모습이 보인다.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발가락의 숫자가 틀리다.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 거북이의 앞발은 발가락이 다섯개이고 뒷발은 발가락이 네개이다.
그런데 서악동 귀부의 거북이는 네발의 발가락이 모두 5개이다.
서악동 귀부는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웠던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629-694)의 묘비를 받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의 묘가 김인문의 묘고 오른쪽의 묘는 김양의 묘이다.
김양은 태종무열왕의 9세손으로 김주원(金周元)의 증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여(貞茹)이다.
흥덕왕 사후 김균정(金均貞)을 도와 왕위쟁탈전에 참여하였으나 패하여 청해진의 장보고(張保皐)에 의탁해 있다가
839년에 청해진의 군사를 이끌고 경주로 쳐들어가 민애왕을 시해하고 신무왕을 즉위시켰다.
그 공으로 김양은 창부령(倉部令)에 임용되었고 이어서 시중(侍中) 겸 병부령(兵部令)에 임명되었으며
그의 딸을 문성왕에게 시집보냈다.
문성왕 19년(857)에 나이 50세로 죽자 그는 서발한(舒發翰)에 추증되고 김유신의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었으며
태종무열왕릉에 배장(陪葬)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열전 김양전과 김인문전에 각각 기록된 것처럼
김양묘는 태종무열왕릉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작은 딸린무덤〔陪葬〕형식으로 배치된 것이며,
김인문묘는 그보다 좀더 남쪽에 있으면서 약간 봉분이 크고 왼쪽에 묘비의 귀부가 남아 있다.
묘비의 절반 이상은 결손되고 마멸이 심해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다.
다만, 비면에 남아 있는 조문흥대왕(祖文興大王)·태종대왕탄미기공(太宗大王歎美其功)·공위부대총관(公爲副大摠管)
등의 글귀로 미루어보아 김인문묘비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열전 김인문전에는 효소왕이 695년(효소왕 4) 10월 27일에
김인문을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추증하고 경주의 서쪽 들판에 예로써 장례를 치렀다는 내용이 전하고 있어서
이 때 김인문의 무덤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서악동에는 태종무열왕릉을 중심으로 김양묘와 김인문묘가 자리잡고 있는데,
당시 서원(西原)에는 김씨왕실의 장례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김인문이 유능한 왕족으로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공훈을 세웠기 때문에 이곳에 성대하게 장례를 치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