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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용기
현대의 세상은 어떤 의미로 보든지 결코 환영할 만한 것이 못된다. 온 세계의 사람이 불안과 초조와 의혹과 압박감 밑에 살지 않으면 안되는 이 세대는 분명히 불행한 한 시대다. 그러나 불행함에도 불구하고 교훈은 많이 들어 있는 시대다. 평탄을 잃은 땅이 절경을 낳는 것같이 평온을 빼앗긴 이 시대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진리를 깨닫게 한다.
기독자의 눈으로 현대를 보면 초대 교회시대를 연상케 하는 점이 많다. 오늘날 신자는 자기와 세상과의 사이에 마치 초대교회의 신자와 그 살던 세상과의 사이에 있었던 것과 같은 간격이 있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이는 수백년래의 새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원래를 말하면 기독자와 세상과의 사이에 일치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3,4백년래의 기독교는 그것이 가능한 줄로 믿었고, 그 접근은 나날이 더하여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그것이 미망임을 일조(一朝)에 깨닫게 되었으니 그 놀람을 가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놀랄 것은 그것만 아니다. 두 시대의 신자의 태도가 더 놀랄만치 서로 다르다. 초대의 신자는 그 수로 보나 그 교리, 제도의 정돈 정도로 보나 현대 신자에 비할 수 없을 이만큼 빈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맹렬한 전투심에 불붙고 있었다. 저들은 세상에 대하여 적극적 태도를 취하였었다. 그런데 현대의 신자는 그와 반대다. 극히 소극적이다. 두 사이에 합할 수 없는 간격을 느끼면서도 감히 공세로 나올 생각을 못하고, 수세에 있어서나마도 스스로의 안에 용기가 없는 것을 자인하고 있다. 이는 세계 전반에 걸친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널리 세계는 직접 보지 못하니 그만두고라도 적어도 우리 주위에서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기독자가 스스로 자기내부에 용기의 결핍을 느끼는 것.
이들 사실은 기독자에 대하여 비통한 일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로는 현대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교훈은 바로 여기 있는 듯하다. 세계를 구하기 위하여 기독자에게 전투적 정신을 일으키기를 요구하는 일이다.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단언할 수 있다. 인간이 신앙에 의하여 근본적으로 다시남에 의하여 세계를 구하려 하는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통탄할 세상은 결코 끝을 뵈지 않으리라고. 인간은 재래 전투의 존재다. 고로 인생은 싸움이라는 견해는 반드시 기독교를 기다리지 않고라도 이미 있었다. 이는 어떤 사상가의 의견도 아니요 어떤 시인의 비유도 아니다. 인간이 역사의 과정을 실천하는 동안에 깨달은 진리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다시 더 할 수 없이 분명히 심각히 인생을 전투적 존재로 인정하여 놓았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창세기, 3:15)라고 창조의 처음에 적혀 있다. 예수 자신의 입으로 명백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태복음, 10:34)라고 말씀하셨다. 기독교의 인생관으로 하면 인간에게 싸움이 없는 것은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 저가 영원히 사망에 들어가든지 영원의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든지. 그리고 영원의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간단 없는 싸움에 의하여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저에게 있어서 인생은 단순히 배양할 것이 아니요 공취(攻取)할 것이며 탈환할 것이다. 세상은 비선비악(非善非惡)의 중성적 소재가 아니요 사탄의 권위하에 있는 나라다. 고로 기독자는 자기가 싸움을 하고 있는 자임을 찰나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기독자가 전사로서의 자기의 자격을 잊었다면 어떠할까. 짠맛을 잃은 소금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 현대의 기독교회는 밖에 버려 밟힘을 입는 맛 잃은 소금의 신세에서 지나는 것이 없다. 하나님은 이 모양을 보기에 차마 못하여하시어 이 시대를 보내었다. 평화란 거짓이요, 싸움이 인생의 사실인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모든 가장평화를 뜯어버리고 공중에 세력을 잡은 자로 하여금 겁약한 현대인에 군대적 훈련을 시키게 하는 시대다. 간단하게 말하면 근세 이래의 기독신자가 선한 싸움을 용감히 싸웠던들 이 시대는 아니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들이 그 싸움싸움을 아니 싸웠던 고로 이 싸움의 시대가 왔다. 문예부흥 이래의 그릇된 인문주의는 인간에게서 전투의식을 빼앗고 사이비 평화이상을 세워왔다. 도덕론에서는 발전설이니 완성설이니 하는 것으로 죄의 의식을 둔하게 하여 전취적(戰取的) 생활정신을 말살시키었고, 정치적으로는 외면으로만 하는 국제 협조사상을 가르쳐 국가간의 충돌을 더욱 음성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이제 세계 전쟁이 나면 모든 문명이 다 파괴되고 인류는 다시 야만상태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처럼 전쟁의 화독(禍毒)을 심각하게 만든 것은 이 위선적 평화주의다. 표면으로 평화주의를 가지며 내면으로는 둔하여진 양심을 가지고 과학을 악용하여 비밀리에 전쟁준비를 하려는 데서 현대전술은 나왔다. 고로 그 인문주의와 손을 잡았던 기독자가 이 세대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로 현대전쟁의 의미는 어느 나라가 이기고 어느 나라가 패하는 데 있는 것 아니요 기독자가 인간주의에 향하여 다시 선전을 하게 되는데 있다. 어려운 교훈이다.
그런데 현대의 기독자는 여기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오랫동안 나약에 젖어 있은 그들은 이 뜻하지 않았던 환난에 직면하여 창황실색(蒼皇失色)하고 한갓 소리를 높여 “주여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고 울부짖는다. 그 정형(情形)이야 가엾기는 가엾다 할지라도 근본적 깨달음에 이르기에는 아직 멀다. 저들은 자기의 약(弱)을 안다. 그러나 그 약(弱)의 원인이 무엇임을 아직 모른다. 저들은 용기를 원한다. 그러나 용기가 어디로 쫓아오는지를 오히려 생각지 않는다. 저들은 엘리아를 알고 모세를 알고 베드로, 요한을 알고 바울을 안다. 그러나 그들의 권능이 그저 하나님이 주어서만 있었던 줄 알고 그 내적 조건이 무엇이었는지를 모른다. 고로 그 열심있는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일향응답(一向應答)하지 않는다. 고로 기도를 할 때는 열심으로 하여도 그 방문 밖에 나와 난문제가 다시 안전(眼前)에 던져질 때는 “그러니 어찌 하노” 하고 막혀버린다. 그들은 자기의 기도가 하나님에게 상달되게 못하는 원인이 자기 내부에 있음을 생각지 않는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23~24)
이것이다. 요점은 여기 있다. 저들의 맘이 오히려 죄에 잡혀 있다. 그런고로 저희에게 용기가 날 수 없다. 누가 참 용자(勇者)냐 누가 사탄의 권세 앞에서 무서워하지 않는 자냐. 그 양심이 죄에서 해방된 자다. 현대의 신자는 이것을 잊고 있다. 저들의 맘이 근본적으로 죄의 독에 마비되어 있음을 생각지 않고 있다. 모세의 권능을 말하지만, 그가 그렇게 권능 있게 되기는 무엇에 의하여선가. 그가 애굽에 있어 당시의 학문을 다 배우고 귀한 자리에 있었을 때에도 보통사람의 하는 정의의 생활을 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을 때 얼마나 약하였나. 일시적 열정에 몰려 살인을 행한 후는 나이 40이 되매 심중에 사상이 발한 그이 건만도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여 광야로 도망하지 않았나.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의 학교에서 수련을 받은 후는 어떠하였나. 잿물과 비누로 표백하듯이 시내 산의 하나님의 불꽃 가에서 40년 인간생활에 젖은 양심을 말갛게 씻어 죄에서 해방된 사람이 되고 하나님 앞에 철저히 겸손한 사람이 될 때 전 애굽의 위엄도 두려워 않는 용감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현대의 신자는 그 권능만을 원하고 그 맘이 맑아지기를 구하지 않는다. 저들로서 만일 옳은 기도를 한다면 능력을 구하고 지혜를 구하며 어려운 장면을 어떻게 면하고 나올 것을 생각하기 전에 “주여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죄에서 건져주시옵소서” 할 것이다. 능력 을 주고 안 주는 것은 주에게 있으매 말할 것 없고, 우리 할 것은 스스로가 깨끗한 영혼이 되기를 원하는 일이다.
예수의 마지막 저녁의 일은 이 경우에 우리에게 가장 힘있는 교훈이 된다. 그 마지막 저녁 다락방에서 저녁을 먹을 때로부터 이튿날 새벽 유대 사람의 손에 잡혀가게 될 때까지의 하루 저녁은 형용할 수 없는 고뇌의 저녁이었다. 이 어려운 장면을 놓고 두 인격의 행동이 두드러져 나타난 것이 있다. 하나는 물론 주요, 또 하나는 베드로다. 보통 인정의 판단으로 하면 이 경우에 누가 용자 같았고 누가 약자 같았느냐 하면 전자는 베드로요 후자는 예수라 할 수밖에 없다. 예수는 평일에 두고두고 이번 길이 있을 것을 모르지 않았고, 스스로 자취(自取)한 길이다. 그러나 그렇건만도 정작 그 고난이 미간 아래에 올 때는 두려워서 “내가 감히 민망하여 죽게 되었으니” 하였다. 이는 무한한 고뇌를 머금은 일어(一語)다. 이를 듣고 우리는 무한한 애착을 느끼지만, 이는 약자의 탄성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는 말을 듣고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의외로도 약한 말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난다.
거기 비하면 베드로의 행동은 잘 대조된다. 저는 예수가 너희가 이제 다 나를 저버린다고 할 때 팔을 뽐내며 단단 맹서(盟誓)하였다. “내가 주와 같이 죽을지언정 알지 못한다 하지 않겠나이다”라고. 그리고 군사들이 와서 실지로 잡을 때는 칼을 빼어 대항했다. 장(壯)이 아니고, 용(勇)이 아닌가. 그러나 조금 후에는 어떠하였나. 하나는 죽을 데로 가는 양같이 묵묵히 죽음을 바라보고 들어갔고 하나는 저주하는 말로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 베드로의 용(勇)은 왜 그리 약했으며, 예수의 약(弱)은 어찌 그리 용(勇)했던가. 다른 것 아니요, 하나는 죄의 사람이요 하나는 죄의 세력 하(下)에 있지 않는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하고자 하는대로 마옵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한 이 한마디가 그것을 잘 표시한다.
이것은 예수의 지상 30년 생애의 목표였다. 첨부터 나중까지 그의 생활은 이것으로 꿰뚫려 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 저에게는 일호(一毫)의 사심이 없었다. 한 점의 욕념(愁念)이 없었다. 인간주의가 편영(片影)조차도 없었다. 거기 예수의 예수인 점이 있다. 베드로는 장한 듯하나 인간의 범역(範域)을 벗어나지 못한 맘이 있다. 감정, 의지의 정도를 지나지 못하였다. 도덕학자는 인간의 의지는 수양하면 무한한 힘이 있고, 자유가 있는 듯이 말하지만 실지에 있어서 그런 것은 없다. 자유 의지(自由意志)란 말만 듣기 좋은 것이요 사실로는 없다. 오직 죄 없는 혼만이 자기의지를 자유로 쓸 수 있고 강할 수 있다. 고로 아직 죄에서 놓이지 못할 때의 베드로의 결심은 저를 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누가 죄가 없을 수 있나. 의인(義人)은 없나니 한사람도 없다고 한 그대로 아닌가.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사탄의 멍에 아래 있을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여기 있다. 사람은 죄에서 완전히 깨끗할 수 없으나 스스로 죄에 속해 있음을 통절히 뉘우치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 해서 그에게 용(勇)을 주고, 지(智)를 준다. 강자가 되는 제일보는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고백하는 일이다. 기독교가 세상과 싸우는 무기는 이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군인으로 서기를 자원하고 그 군적에 이름을 둘 때 저에게 공급되는 무기는 이 회개다. 스스로 죄인인 줄 아는 것, 고로 예수의 전도는 다른 말이 아니었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이것이었다. 기독교의 목표는 다른 데 있지 않고 이 회개에 있다. 그리하여 사탄의 멍에 아래 약하게 있는 자를 놓아서 용감한 전사로 세우자는 것이다.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초대교회에 있어서 저같이 강한 투사는 없었는데 그렇게 약하던 그가 어떻게 그렇게 강하여졌나.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고 회개에 있다. 닭이 운 후, 나와서 슬피 울고 회개한 것, 이것이 새 베드로의 생활의 출발이었다. 그 후부터 그는 약자가 아니었고 강자였다. 그러나 회개는 일시로만 다 되는 것이 아니요, 끊임없는 회개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에게 죄의 유혹은 끊임없이 있기 때문이다. 전기의 스위치를 트는 것같이 사람은 항상 그 양심을 회개의 방향으로 틀어가지고 있어야 한다.
옛날의 엘리아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름을 듣는 용감한 선지(先知)였다. 꿰어진 털옷을 입고 흐트러진 머리에 막대 하나만을 가지고 군왕 앞에 서기를 두려워 않았고, 임금 편에서 무서워서 피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번 인간적 열정에 몰려 바알신(神)의 예언자들을 도륙(屠戮)하고 대성공을 한 줄로 믿었던 때는 약한 인간이 다시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여자 이세벨을 무서워하여 광야로 도망하였다. 생각하여보라. 좀 전에 단신, 수 백 명 대적을 저쪽에 두고 싸우던 사람이 이제 두 눈이 휘둥그레, 숨이 턱에 닿아 광야로 달음질을 치다가 로뎀나무 그늘 밑에 꺼꾸러져 “하나님이여 이제는 죽여줍소서” 하는 것은 어떠한 추태인가. 어젯날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사람도 오늘날 죄의 사람이 되면 이런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저는 다시 회개하였다. “내가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한 자로소이다.” 스스로 죄의 사람임을 알았다. 그럴 때 천사가 다시 저에게 임하여 힘을 주었다. 고로 오늘날 우리의 할 기도는,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혹은 “제가 죄인임을 깊이 알게 하여주옵소서” 할 것이다. 권능 지혜만을 구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 현대 신자는 본말을 거꾸로 한 것이다.
근세 이래 인간주의는 우리 맘의 핵심에까지 뿌리를 박았다. 고로 우리가 자신을 악한 것으로 고백하기는 비상히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신자가 자기의 개개의 건과(愆過)를 회개하는 일은 행한다. 그러나 인간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회개인 줄은 모른다. 그러나 도리어 근본적 의미의 회개는 이 이외의 것이 아니다. 인간 그것, 자기이성(自己理性)에 의지하고 자기의지에 의지하고 자기를 구경(究竟)의 목적으로 아는 그 인간 그것을 신 앞에서 부(否)라 정(定)하는 것 이것이 회개다. 이 학문, 이 예술, 이 인간 자기를 위한 이 문명이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것으로, 그에 반하는 것으로 알아버려야 할 터인데 현대인은 그것을 하지 못한다. 현대 신자의 약함이 여기 있고 오뇌(懊惱)가 여기 있다. 바울은 “내가 강할 때에 약하고, 약할 때에 강하다” 하였는데, 현대 사람은 스스로 강자가 되어가지고 있는 고로 저의가 죄 앞에 약할 수밖에 없다. 인간주의는 오랫동안 사람을 향하여 신 앞에 복종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해(害)하는 것이요, 인간중심주의를 버림은 스스로 빈곤에 빠짐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사실, 인간을 부정하고 신에게로 나가기만 하면 무한의 부(富)가 거기 있고, 무한의 영광이 거기 있는데,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은 다 내 것이 되는데, 이를 행하여본 자는 아는데, 현대인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자기 가진 것이 있는 줄 아는 고로 버리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진 것이 있는 사람처럼 약한 것은 없다. 부자는 가산(家産) 때문에 약하고 교장은 학교 때문에 약하고 학자는 지식 때문에 약하다. 이른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기보다도 어렵다는 것이다. 무일물자(無一物者)처럼 용감한 것은 없다. 저에게 아까울 것은 아무것도 없고 앞에 있는 목표만이 뵈기 때문이다. 일찌기 선한 싸움에서 용감하게 싸워 이긴 자들은 다 이렇게 인간과 그 가진 모든 것을 무용한 것으로 버린 사람들이었다. 고로 우리는 우선 회개하여야 한다. 스스로의 교만(驕慢)을 뉘우치고,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 12:1~2).
우리는 비록 미약하기 밀알 같아서 사탄이 우리 깔이기를 밀알 깔이 듯할 터이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의(義)의 편에 서기를 원하기만 하면, 저가 우리 믿음을 보전하여 그때에 필요한 용기와 지혜를 주어 이기게 할 것이다(누가복음, 22:31~32 참조).
성서조선 1938. 8 115호
저작집30;18-221
전집20;9-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