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맥 - 신라(新羅)건국과 경주정착 경위
아래글은 박혁거세의 출자(出自:어디에서 기원했는가)와 신라건국에 관한 글입니다.
중요한 논지(論指)는 박혁거세는 지금의 몽골과 북부중국지방인 황하 상류 근처에서 살던 고대민족인 동호족(東湖族)에서 나온 오환족(烏丸族)이며, 인근의 흉노족에게 크게 패하여 그 무리중 일부가 혁거세의 아버지인 우거수에 지도하에 훙노족과 전란을 피해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거쳐 지금의 서울(서라벌)에 정착하였고, 혁거세 사후 인근(한강유역)의 백제의 전신인 십제(十濟)와 평양근교의 낙랑등과 다투다가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충북지방과 경북의 상주지방을 거쳐 경주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박혁거세는 처음부터 오늘날의 경주(慶州)에서 탄생하여 신라를 건국한걸로 압니다. 그러나 시조탄생설화는 문자가 아직 발달하기전 그분의 존엄성과 위대성 그리고 신비성을 제고(提高)할 목적으로 후세의 역사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다소 윤색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신화속에는 역사적 사실이 은유적으로 들어있게 마련입니다.
삼국사기 혁거세조 기록에 보면 마한이나 십제(十濟) 말갈, 낙랑등과 외교,전투 관련사항들이 나옵니다. 당시 낙랑이나 말갈 그리고 십제등은 모두 지금의 평안도(평양),경기도(서울) 강원도 등지에 위치해 있던 것들입니다.
경주에 위치했다면 이들과 접(接)하지 않았으므로 그들(낙랑,말갈,십제 등)과 그렇게 다투거나 할 수 없으며 또한 기록도 남지 않았겠죠.
동호족(東湖族)은 선비족(鮮卑族)과 오환족으로 구분되는데 그것은 거주한 지역에 따른 분류였습니다. 오환족은 자신들의 선조인 동호족이 흉노족에게 크게 패한 역사적 사실로 다시 흉노에 대적했으나 크게 패하고 뿔뿔이 흩어졌고 그런 오환족의 한 지파(支派)가 혁거세의 아버지인 우거수(군장) 였고, 그 우거수가 이끄는 오환족 무리들이 만주와 한반도북부를 거쳐 오늘날 서울 근처에 정착했는데 마침 이곳에 고조선 유민들이 여섯개부족으로 나뉘고 거주하고 잇었고 이들과 연합 혹은 정복을 통해 서라벌(徐羅伐)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오환족의 한 지파인 혁거세 무리가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을 전해들은 오환족들은 계속 차례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거쳐 내려와 합류하게 됩니다.
박혁거세를 고대 지금의 몽골과 북중국인 황하(黃河)를 근거지로하는 오환족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그들이 남긴 여러 명칭(지명)과 풍속등이 오환족의 그것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새라블(서라벌)-서울 우거수 (오환족의 추장,군장,우두머리) 혁거세 거서간(칸,汗,kahn)인 거서간은 오환족식 우두머리(首長) 명칭입니다 등등...
1.신라(새라불)의 건국
2천년의 대제국 단군조선이 망하고 부여(북부여,졸본부여)가 일어서면서 동북아시아는 힘의공백이 발생했고, 중국에서도 주(周)의 권위가 몰락하면서 소국들의 패권싸움으로 지새는 춘추전국시대에 돌입하던 시대였다.
당시 한반도의 남부지역은 말쥬신(馬朝鮮)의 관활지역으로서 몰락한 단군조선왕손들의 봉지(封地)역활이나 하는 낙후된 공지(空地)와 같았다.
이때 전통적인 기마민족인 동호족(東胡族)은 황하(黃河)의 강변초원지대를 국경개념없이 이동하며살았던 황하문명을 일으킨 원조들로서 쥬신제국을 종주국으로 수두3神사상에 철저했으며 서쪽으로는 훈족(흉노족)과 화합하며 살았던 종족이었다.
(우리 배달민족은 쥬신(조선)족을 원류로 부여족,동호족,크게 세종족이다.) 그런데 흉노족의 수장 모돌이 쥬신제국이 망하는 틈을타 쥬신제국의 영토와 중국의패자 한(漢)나라까지 격멸하는등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게됨에따라 동호족과의 결전이 불가피하게되었다.
이때 동호족은 둘로 나누어지는데 한(漢)족과 힘을합쳐 살길을 찾는 선비족 (鮮卑族)과 끝까지 흉노에 항전하는 오환족(烏丸族)이다. (오환족은 내몽고 오환산으로 이주한데서 붙인 종족이름)
B.C.87년 오환족집단의 우두머리 우거수(右渠帥)호공(弧公)이 흉노족과의 싸움에서 크게패하여 일부는 전한(前漢)으로 투항해버리고 호공이 이끄는 나머지 무리는 고구려건국전의 가우리땅으로 넘어오게된다. 이들을 실라족이라한다. 실라(新羅,SILLA)는 황하유역을 일컫는 당시말로서 지금도 몽고에서는 황하(黃河)를 실라로 부른다. 실라는 '새로운 땅 혹은 강'을 의미
당시 가우리(고구려)는 이복형제간인 졸본부여의 고무서세력과 신흥세력 고주몽간의 싸움이 치열한 때인지라 우거수호공은 계속 남으로이동하여 아리수(한강) 북쪽에 자리를잡고 마한(馬韓)의 속국으로서 대실라건국의 첫발을 내딛게된다.
B.C.57년 그동안 부족을 이끌던 우거수호공이 죽자 그의아들 불구래(弗矩內)가 13세의 어린나이로 수두(蘇塗)에나가 하늘에 제사지내고 거서간(居西汗)의 위(位)에오르니 이분이 바로 신라(新羅)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이시다. (불구래,혁거세는 '밝음'의 의미로서 하늘의 아들을 뜻함) 혁거세 거서간의 아내인 알영부인은 역시 북방에서 전란을 피해 한반도로 들어온 선비족 계열로 보고있다.
불구래 거서간은 소불(서울)의 아리수(한강)북쪽에 성을쌓고 마한에 조공을 폐지하고 독립을선언하여 나라이름을 새라불(徐羅伐)이라 정하였다. (새라불은 새로운 강변터라는 뜻으로 실라와 같은의미임)
불구래거서간이 이끄는 초기 새라불은 북방의전란을 피해오는 유민들을 아리수(한강)를 건너기전 소불(서울)에 안착시켜 큰세력으로 발전하였다. 세력이커진 박혁거세는 49세때 마한의 왕이 죽은틈을타 일격에 쳐부수니 마한의 잔존세력은 곰나루(웅진;이때는 백제건국3년전)로 도망치고, 동시에 마한동쪽에있던 경기진한(辰韓)까지 공격하여 아리수의 패자(覇者)가된다. 이로서 장차 신라(新羅)로 성장할 큰뿌리를 내리게되었고 소불(서울)에서 큰무라(경주)까지의 장정(長征)준비를 마친셈이되었다. 그러나 박혁거세는 장정의뜻을 이루지못하고 경주근처에도 가보지못한채 65세의 나이로 죽었다.(B.C.5년)
2. 새라불(신라)의 경주정착과정 서기61년 혁거세의손자 새라불3대왕 노례(弩禮)이사금(尼師今)은 북쪽의 낙랑침범과 남쪽의신흥국 십제(十濟)의 북침에 못이겨 아리수를 십제에 양보하고 남으로내려가 낭자곡성(지금의청주)을 취득한다. 서쪽평야지역을 갖고싶어 계속백제를 침공해보지만 번번히 실패하여 와산성 (지금의보은)으로 쫓끼다가 결국 소백산맥을 넘게된다.
소백산맥을넘은 실라족은 사벌(沙伐;지금의 尙州)땅에정착하여 먼저와있던 신쥬신(辰朝鮮)의 유민 金씨집단과 합류하게된다. (우리는 경상도의 김씨집단을 원주민이라 부르지만 실은 북방에서 가장먼저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
실라족과 쥬신족유민들은 다같이 북방에서 부여족(백제주류)에게 많은 핍박을 받은관계로 쉽게동화될수있었다. 그러나 백제천황은 이들의 사벌정착을 가만두지않았다.
초기백제의 엄청스런공격에 실라족과 쥬신족 김씨집단은 온힘을합쳐싸우니 험악한 산세에 백제도 더이상 건드릴수없어 자연스럽게 소백산맥이 백제와 신라의 경계선이되었다.
겨우 백제의 추격을벗어난 새라불은 서기93년 사벌을떠나 고소부리(古所夫里)를 거쳐 이듬해 드디어 큰무라(建牟羅;경주의 북방)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곳엔 이미 석타래집단이 성책을쌓고 완강히 버티고있었다. 석타래(昔脫解)는 오래전 진시황에게쫓겨 건너온 동이족으로서 용성국(龍城國;대동강하류)을 세워 왕이되는데 원래 해상무역을위한 야철술(冶鐵術)의 명인이자 바다로부터 생명의안전을 비는 용왕이라 불리는 무당이었다.
이 용성국이 낙랑의 침략을 받게되자 20여척의 선단을 이끌고 김수로왕이 있는 구야(拘耶;김해)(가야국의성립과정은 다음호에 살펴본다)땅에 상륙하여 김수로왕과 협상끝에 아돌포(阿珍浦;지금의감포)로 옮겨 알천(閼川)에 이서국(伊西國)을세우고 서울을 큰무라(建牟羅)로 정하였다.
(삼국유사에는 김수로왕과 싸움끝에 석타래가 하서지촌(下西知村)으로 쫓겨 간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무라(牟羅)는 마을을 뜻하는 옛말로서 우리민족의 分國인 일본은 지금도 마을을 무라(村)라 부른다.)
한동안 싸움으로 대치하던 朴,金씨측의 새라불과 昔씨측의 이서국은 협상으로 해결키로 뜻을모아 뱍(朴)씨계, 김(金)씨계, 석(昔)씨계의 군장회의를 열어 3성씨가 다같이 동참하는 연합공화정부를 세우기로합의하고, 나라의 왕위도 돌아가며 맡기로 하였으니 당시로서는 상상키어려운 민주공화정부 체제였다.
따라서 3대 노례이사금(朴씨)다음의 4대왕은 석타래(昔씨)가 맡게되면서 큰무라 월성(月城)을 축성한다.
따라서 박혁거세의 최초신라(도읍:소불)는 고구려와는 같은시기,백제보다는 40년앞서지만 경주에서의 박,석,김 신라는 백제보다 120년후에 이루어졌다.
박씨족을 오환족(烏丸族)으로 인식하는 이론적 근거. 아래주소로 가보시면 보다 상세히 나옴.
http://blog.naver.com/knightblack?Redirect=Log&logNo=11957130
출처 : | 함양박씨 친목 관련자료 뿌리찾기 | 글쓴이 : 상서공의 후예 원글보기 |
(4) 흉노의 나라, 신라 문무왕의 능비(陵碑)에 "투후제천지륜전칠엽(秺侯祭天之胤傳七葉)"이란 대목이 나오는데 바로 이 말이 신라와 흉노와의 연계성을 밝혀주는 가장 큰 단서입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투후제천((秺侯祭天)이라는 말은 흉노 단군(제사장) 출신의 제후인 김일제(金日磾)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의 비문은 "김일제(金日磾) 이후 7대가 흘렀다"는 말입니다. 이 비문에서 문무왕은 자신의 선조가 이 김일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죠. 조금 구체적으로 한번 봅시다. 신라계 경주 김씨들은 시조를 '김알지(金閼智)'라고 하고 가락계인 김해 김씨들은 시조로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金首露)'를 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금궤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들 이전에도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김일제라는 것[文定昌, 『가야사』(백문당 : 1978)]인데 이 김일제라는 분이 바로 (김수로와?) 김알지의 선조라는 얘깁니다. 한무제(漢武帝) 당시 곽거병(霍去病·140∼117 BC)은 흉노 정벌에 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휴도왕의 아들인 김일제(金日磾)와 그의 가족을 포로로 잡아왔는데 이 휴도왕의 아들을 한무제가 특히 아껴서 김씨 성을 하사하고 측근에 둡니다. 한무제는 어린 시절을 외롭고 불우하게 보낸 사람이어서 어떤 의미에서 김일제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데다 김일제는 한무제의 생명의 은인(한무제 암살을 막음)이기도 하니 특히 김일제를 총애한 듯합니다. 당시 휴도왕(김일제의 아버지)은 돈황에 가까운 깐수성 지역을 다스린 사람이었는데 이웃 왕이었던 곤사왕(昆邪王)의 계략에 빠져 죽고 김일제와 동생 윤(倫), 그의 어머니 알지(閼氏)가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힙니다. 이 김일제의 일대기는 『한서(漢書)』에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漢書』金日磾傳 ). 현재 김일제의 묘소는 서안(西安)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한무제의 능(무릉 : 茂陵) 가까이에 초라히 묻혀있다고 합니다[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남위향(南位鄕) 도상촌(道常村)]. 김일제에 대해 중국 측에서는 "흉노왕의 태자로 비록 잡혀와 노예가 됐지만 한무제에게 충성을 다한 공으로 '투후(秺侯)'라는 천자(天子) 다음으로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있었고, 죽어서는 제왕이 누워 있는 능의 옆에 묻힐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라고 합니다[김대성,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韓國김씨 시조」『신동아』 1999년 8월호]. 여기서 말하는 투후(秺侯)는 제후국의 왕이라고 합니다. 문무왕의 비문에는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람의 후손이다(秺侯祭天之胤)"이라고 합니다. 『한서(漢書)』에는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祭天]한 까닭에 김씨의 성을 주었다고 합니다. | | | | | [그림 ⑫] 휴도왕의 지배영역 ⓒ김운회 | | |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서 좀 이상한 대목들이 있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김알지(金閼智), 즉 경주 김씨의 시조와 유사한 이름이 나오지요? 무언가 관계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김일제라는 이름이 문무대왕(661~681)의 선조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죠. 여기서 잠시 김일제의 후손들을 한번 알아봅시다. 『한서(漢書)』에 의하면, 한나라 원제(元帝) 초에 김일제의 차남인 김건(金建)의 손자 김당(金當)을 투후로 봉하여 김일제의 뒤를 잇게 했고 다시 김당의 아들인 김성(金星)이 투후를 계승합니다(『漢書』金日磾傳 ). 여기서 문무왕 선조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 문무왕의 비(국립 경주박물관 소재)의 내용을 좀 더 상세히 보도록 합시다. "우리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러운 근원(靈源)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온 화관지후(火官之后)이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바야흐로 융성하였다. 큰 마루(宗)가 정해지고 그 갈래가 형성되어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제 7대를 전하고 있다. 15대 조 성한왕(星漢王)은 하늘에서 바탕을 내렸고 … 진백(秦伯)의 바탕이 되는 덕이 다시 일어났다 … 장례(葬事)는 간소하게 하여 서역식으로 다비하고 동쪽 바다에 띄우라. 죽어서도 용이 되어 너희 나라를 지킬 것이니 … 경진(鯨津)에 뼛가루를 날리시니 대를 잇는 (새)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도다. 우러나는 효성과 우애는 끝이 없었네." 김대성 선생(한국문자학회 부회장)에 따르면, 위의 문무왕의 비문에 나타난 문무왕 선조에 대한 기록인 ① 화관지후(火官之后 - B. C. 2300년대), ② 진백(秦伯 - B. C. 650년대), ③ 파경진씨(派鯨津氏 - B. C. 200년대), ④ 투후(秺侯 : B. C. 100년대), ⑤ 가주몽(駕朱蒙 : B. C. 50년대), ⑥ 성한왕(星漢王: A. D. 20년대), ⑦ 문무왕(文武王 : 661~681) 등에서, ② 진백(秦伯)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인 진 목공(穆公)을 말하고, ③의 파경진씨(派鯨津氏)는 진나라가 망하면서 피난한 경진씨를 파견한 휴도왕, ④의 투후는 김일제, ⑥의 성한왕은 김일제의 4대손인 김성(金星)으로 이 성한왕이 바로 신라 김씨의 시조 김알지라는 것입니다[김대성,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韓國金氏始祖」『신동아』 1999년 8월호]. 그런데 김일제 이후 문무왕까지는 상당히 긴 세월의 터울이 놓여있지요?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과연 여기서 말하는 성한왕(星漢王)이 바로 김알지(金閼智)였을까요? 이 점들을 간략히 보고 넘어갑시다. 한(漢)나라는 당시의 이름 높은 신하였던 왕망(王莽 : B. C. 45∼23)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신(新)나라(8~23)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런데 왕망은 바로 김일제의 증손자인 김당(金當 : 김성의 아버지)의 이모부였습니다. 한나라 당시에는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선양(禪讓 : 평화적 정권교체)의 이데올로기가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왕망은 쉽게 정권을 장악했지만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고대 유교에 치우친 정책을 시행하여 결국 20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하게 됩니다. 이후 왕망은 중국사의 대표적인 역적 중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러니 왕망의 외가(外家)였던 김일제 집안은 이제 중원에서는 발붙이기가 어렵게 되었죠. 아마 이 때 김일제의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진 듯합니다. 그래서 이후 이들 김일제의 후손들이 비교적 안전한 한반도의 남부로 피신했다는 말입니다. 연구자들은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부 김해, 일본의 규슈 등지에 이 시대의 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이 광범위하게 출토되는 것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다시 문제는 성한왕이 김알지인가 하는 점으로 돌아가 보면 김알지라는 이름 자체가 김일제의 어머니(알지)와 유사한데다 대개 시기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다소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서(漢書)』에 따르면, 김일제의 어머니는 두 아들(김일제와 김윤)을 잘 가르쳐 황제가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겼는데 김일제의 어머니가 병으로 죽자 어명으로 감천궁(甘泉宮)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휴도왕 알지(休屠王閼氏)'라고 표제를 붙였다고 합니다(『漢書』金日磾傳 ). 여기서 이제 한반도의 김알지가 출현하는 장면을 봅시다. 참고로 알지의 지(智)나 씨(氏)는 모두 음을 빌려 쓴 말이고 발음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알지를 발견한 사람은 탈해 이사금(57~80)인데 『삼국사기』에 나타난 이 사건의 대목이 좀 이상합니다. 한번 보시죠. "(65년) 왕이 금성 서편 시림(始林)에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새벽에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 자리에 금궤(金櫃)가 있어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다. 왕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내게 준 아들이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총명하여 이름을 알지(閼智)라 했고 금궤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하였다. 그리고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고 하고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三國史記』新羅本紀 脫解尼師今)." 위의 내용을 보면 금궤에서 아기가 나오니 자기의 아들로 삼고 나중에 나라 이름까지도 바꾼다? 이상한 일이죠. 금궤에서 나온 사람이니 토착민은 아니겠죠?(혹시 금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묘사한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그런 구전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예 나라 이름도 김알지를 상징하여 바꾸었다고 하니 뭔가 이상합니다. 제가 보기엔 위의 기록은 김알지와 탈해이사금의 연합세력이 신라를 장악한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탈해이사금도 힘든 과정을 통해 왕이 되었으니 기반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반대 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김알지 세력이 탈해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탈해 이사금은 김알지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했겠지요. 이에 대하여 김알지가 양보했다고 합니다. 그 뒤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 이사금(262~284)이 신라의 13대 왕으로 등극합니다. 따라서 김알지는 탈해 이사금을 보좌하면서 긴 세월동안 착실히 힘을 키운 것으로 보입니다. 인내심이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탈해에 대한 의리를 지켰겠지요.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왕망이 실각한 후 김일제의 일족들은 피의 숙청을 피해 자신의 고향인 휴도국(休屠國)으로 도주하여 성을 왕씨(王氏)로 바꾸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휴도국 고지(故地)에 있는 비석으로 확인이 된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김일제의 후손 중 한 갈래가 신라로 들어오고, 그 내력이 문무왕의 능비(陵碑)에 새겨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좀 더 깊이 살펴봅시다. 김알지의 출생과 관련된 토템은 나무(木)라는 것입니다. 북방 초원지대에서 하얀 색깔의 자작나무(白樺樹 : 백화수)는 바로 생명(生命)을 의미하는 신수(神樹)라고 합니다. 열도 쥬신(일본)이 신라(新羅)를 가리켜 시라기(白木)라고 부르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림(鷄林)이라는 말과 관련해 보면, 쥬신 신앙에서 새는 인간과 하늘[天神]을 연결하는 매개체(媒介者)입니다. 즉 쥬신 가운데는 조장(鳥葬)을 치르는 풍속이 있는데 이것은 새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에 운반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겠지요. 김병모 교수는 이런 내용의 기록들이 김알지의 사상적 고향을 암시해 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김알지의 성(姓)인 김(金)은 금(Gold)이고 이름인 알지(閼智)도 알타이 언어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언어에서 금(Gold)을 의미합니다. 즉 알타이 언어의 알트, 알튼, 알타이가 아르치, 알지로 변한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김알지는 금(金) + 금(金)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금궤라는 말도 "문자 그대로" 금궤로 이해해도 될 듯도 합니다. 즉 신라의 선주민들이 이전엔 한 번도 보지도 못한 화려한 각종 금세공 장식품들을 가득 담은 궤짝을 대단히 인상적으로 보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과 관련된 것은 모두 금궤로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로 말한다면, "금궤에 들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금궤를 들고 온 이방인(strangers carrying golden chest)"이었겠지요. 아니면 금마차를 타고 온 이방인일 수도 있겠지요. 이전까지 신라지역 사람들이 중요시한 것은 구슬이지 금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김알지가 성한왕인가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자료가 없으니 일단은 연구과제로 두어야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김알지의 후손인 문무왕(태종 무열왕의 아들)이 자신의 선조로 김일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 신라 왕계, 즉 경주 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쥬신의 선민족인 흉노 계열이므로 그들의 문화가 고구려나 백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이 신라 금관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겠습니다. 즉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의 주요 활동 무대가 오로도스라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나관중『삼국지』에 나오는 쥬신의 장수 여포(呂布)의 고향 가까운 곳이었단 말입니다. 현재로 본다면 란저우(蘭州) - 타이위안(太原) 북부 지역이라는 말이지요[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사계절 : 2001) 262쪽]. 바로 몽골쥬신의 활동영역입니다. 흉노는 스키타이와 더불어 유럽, 중앙아시아 - 중국을 연결하는 매개체였습니다. 즉 흉노는 알타이를 기반으로 하여 유럽,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세력으로 때로는 중국과 교역하고 때로는 전쟁을 했다는 말입니다. 흉노는 동서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상인 세력으로 중개무역을 주관했습니다. 마치 오늘 날의 한국이나 일본처럼 당시 흉노나 스키타이는 국제무역(중개무역)의 중심 세력의 하나였다는 것이죠[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249쪽 참고]. 그러니 흉노가 금을 중시할 수밖에요. 금은 매우 고가(高價)인데다 상대적으로 매우 가볍기 때문에 유목민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교역품이 없지요. 비유하자면 요즘의 반도체나 휴대폰과도 다르지 않지요. 따라서 일반적으로 보듯이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 그 기마민족들이 신라를 점령 지배하여 신라 왕족이 된 것이 아니라, 1세기경에 이미 신라에 와 있던 흉노 휴도왕의 아들(김일제)의 후손들이 점점 세력을 키워서 4세기경에 정권을 장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초원길을 통하여 상당한 부분 중앙아시아나 유럽 쪽의 금장식 제품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거나 구매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신라의 김씨 왕계는 북위나 고구려를 통해 초원길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북위(386~543)의 시기와 신라의 마립간 시대가 대체로 일치합니다.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비로소 중국(양나라)과의 교역로가 열립니다(522 : 법흥왕 8년). 이 시기부터는 금관도 사라집니다(아마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겠지요. 쥬신 고유의 샤머니즘 전통도 약해져갔을 것입니다). 즉 금관은 마립간 시대[눌지 마립간에서 지증 마립간 시기(417~514)]에 집중적으로 출토됩니다[조유전·이기환,『한국사 미스터리』88쪽]. 그러면 김씨 세력이 신라에서 정권을 잡는 데 왜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초기 신라 사회가 가진 복잡성(複雜性)에 기인한다고 봐야겠습니다(신라는 작은 나라지만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① 신라 자체가 워낙 허약하여 오랫동안 외침에 시달리고 백제와 고구려의 속국 수준의 국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② 김일제의 후손들의 이동도 부여의 경우와는 달리 국가적 규모가 아니라 일종의 가문의 이동이었으므로 세력을 키우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고, ③ 부여처럼 6부 촌장의 연합체(고조선 유민)가 일찌감치 구성되어 이들 세력이 강력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기록들이 『삼국사기』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사(南史)』에 따르면, "신라는 절을 하는 등 살아가는 행태를 보면, 고구려와 서로 비슷하다. 신라는 문자가 없어 나무에 새겨 서로의 신표롤 삼는다. 그리고 말은 백제를 통해서 통역이 될 수 있다(其拜及行與高麗相類.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 『南史』「列傳」)"고 하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기록인데 신라가 문화나 습속이 고구려와 매우 유사하며 말은 백제와 대단히 유사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라의 기원이 된 6촌이 고조선 유민이라고 하니 그 고조선의 습속과 고구려의 습속 또한 차이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들 모두는 요동(遼東)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나무에 새겨 신표로 삼는 것은 유목민들의 습속이기 때문에 『남사(南史)』의 기록은 신라가 고구려·백제와 더불어 쥬신의 나라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한족(漢族)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국지』에 나타난 기록과 같이 진(秦) 나라에서 이주해온 신라의 일부 유민들도 진나라가 한족(漢族)의 나라가 아니므로 신라와 한족(漢族)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죠. 여기서 신라와 진시황(秦始皇)의 진(秦)과의 연관성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니 한번은 거론해야겠군요. 『삼국지』에는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다. 이 나라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 진(秦)나라 때 사람들이 괴로운 노역을 피해 한(韓) 지역으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마한(馬韓)은 그 동쪽 땅의 일부를 그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성(城)과 울타리(柵)가 있었고 말하는 것이 마한과는 다르고 진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三國志』魏書 東夷傳 辰韓)"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진나라 유민들의 일부가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흘러 들어온 것 같습니다. 『후한서(後漢書)』에도 "진한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가 망해서 도망해 온 사람으로 피난 가는 것이 고역이라고 말했다. 한국(韓國)의 마한 땅이 적당할 것 같아서 마한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진(秦)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고 하였다(『後漢書』東夷傳 辰韓)."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 중국 사람들이 진나라 때 난리가 나서 시달려서 동쪽으로 오는 자가 많아서 대개 마한의 동쪽 땅으로 몰려들어 진한과 어울려 살더니 점차 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한이 이를 꺼리어 신라에 대해 책망하였다(『三國史記』新羅本紀 弟1 始祖 38年)."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후한서』의 기록은 다소 차이가 있죠? 『삼국사기』(新羅本紀 弟1 始祖 38年)의 기록으로 보면 『후한서』의 기록과는 달리 진나라 사람들이 신라의 주 세력으로 자리 잡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제3대 유리왕 9년에 6부 촌장들에게 신라건국의 공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각기 성(姓)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양산촌장은 이씨(李氏), 고허촌장은 최씨(崔氏), 대수촌장은 손씨(孫氏), 진지촌장은 정씨(鄭氏), 가리촌장은 배씨(裵氏), 고야촌장은 설씨(薛氏) 등으로 성씨를 하사 하였다고 합니다(『三國史記』新羅本紀 儒理尼師今). 그런데 위의 기록(진 나라 사람들의 이주)과 관련한 문제는 시기적으로 진나라 말기라면 B. C. 3세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김일제와는 일단 무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진(秦)나라는 정통 중화를 표방하는 한족(漢族)과는 거리가 먼 민족입니다. 춘추 전국시대까지도 중국의 영역은 작아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초나라 왕이) 나는 야만적인 오랑캐[蠻夷]라서 중국의 호시(號諡)와 같을 수 없다(「楚世家」)." 라든가 "진(秦)나라는 중국의 제후들의 회맹(會盟)에 참여하지 못하고 오랑캐[夷翟]로 간주되었다(「秦記」)."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진나라나 양자강 유역에 있던 초나라 등을 제외한 황하 유역의 국가들을 중국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우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신라 왕족인 김씨들도 진시황(秦始皇)과 연계를 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진나라 자체가 흉노의 계열인 점도 있겠지만 이것은 간단히 해명될 문제만은 아닌 듯도 합니다. 즉 신라 건국의 비밀을 밝히는 많은 견해 가운데 휴도왕을 진시황(秦始皇)의 아들인 부소와 연계를 시키는 견해도 있습니다. 진시황의 맏아들인 부소(扶蘇)는 당시 정치적 정변의 희생물이었지만 총명하고 용맹하며 충성심이 매우 강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참고로 전등사의 삼랑성(정족산성)을 쌓은 단군의 세 아들의 이름도 부소(扶蘇)·부우(扶虞)·부여(扶餘)라고도 합니다. 머리 아프죠? 일단 넘어갑시다]. 간단히 말하면 진(秦)과 신라(新羅) 및 금관가야(伽倻)의 지도층은 공교롭게도 그 조상을 모두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로 동일하게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호씨(少昊氏)는 원래 동방의 큰 신으로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동해 밖의 먼 곳에 소호의 나라가 있고 그의 왕국은 온갖 새들이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정재서,『이야기 동양신화』(황금부엉이 : 2004) 164쪽]. 한 마디로 '새의 나라'지요. 소호씨는 산동반도 - 요동 - 한반도 등(일반적으로 보는 동이의 영역)에 이르는 쥬신의 영역과 관련이 있는 신입니다. 후일 소호씨는 서쪽으로 가서 서방의 신이 됩니다. 그래서 가을의 신인 욕수와 더불어 서방을 다스립니다. 뿐만 아니라 북방에 사는 외눈박이 일목국(一目國 : 눈이 작은 흉노로 추정됨) 사람들도 소호씨의 후손이라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소호씨는 동이(東夷)와 서융(西戎), 북적(北狄)의 신이라는 것입니다(그래서 대부분 쥬신의 시조들이 알에서 태어나시는 모양이죠?). 소호의 후손이 처음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기도 합니다[정재서,『이야기 동양신화』163~165쪽]. 영락없는 쥬신의 신입니다. 이 점을 좀 살펴봅시다. 먼저『좌전(左傳)』에 따르면 "진(秦)은 소호(少昊)씨의 후예다."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보시죠.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어서 성(姓)을 김씨로 하였다(新羅人自以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 『三國史記』百濟本紀 義慈王)" 이 기록은 경주 김씨였던 김부식(『삼국사기』편찬자)이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하여 내린 결론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기록만으로 나타난 것을 토대로 퍼즐을 맞추어 보면 진시황(秦始皇) → 부소 → 휴도왕 → 김일제 → 김알지 → 내물왕 → 문무왕 등의 계보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12대조는 수로왕인데 황제(黃帝)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직계라고 합니다. 따라서 가야와 신라는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다고 강조합니다(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 :『三國史記』金庾信列傳). 그런 면에서 보면, 김일제의 후손이 한쪽으로는 가야로 가고 한쪽은 신라로 왔다는 일부의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겠군요.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갑시다. 즉 위에서 말하는 황제(黃帝)는 한족(漢族)의 조상으로 보고 있어서 상당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황제는 농경민인 한족의 신인데 소호씨는 이미 보셨다시피 쥬신의 신입니다. 그래서 상당한 왜곡이나 해석상의 오류가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황제가 동방의 신들을 낳은 것처럼 묘사한다는 말이죠. 즉 황제 이후에 쥬신이 있는 듯이 묘사한단 말입니다('황하문명의 주역, 쥬신' 참고). 이런 식의 신화 조작은 중화사상이 구체화되는 한(漢)나라 이후의 일로 생각됩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도 소호씨가 황제의 아들이라는 말은 없지요(『史記』第一 五帝本紀). 일단 제가 보기에 김일제 이전은 고증 및 연구가 어렵기 때문에 김일제 이후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저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분석을 토대로 나타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라가 알타이 지역의 쥬신 선민족(흉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겠죠. 그래서 일단 신라는 고조선계와 흉노계의 연합세력으로 봐야겠습니다. 앞으로 더 깊이 있는 다른 연구결과가 나오게 되면 다소 수정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 신라와 흉노의 관계를 문화적인 측면에서 살펴봅시다. 대표적인 예로 제철기법과 편두로 나눠 살펴봅시다. 먼저, 2000년 「황남대총 발굴 기념 학술대회」에서 박장식ㆍ정광용 두 교수는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철기유물을 분석한 결과 당시 경주지역에 유행한 대표적인 기술체계는 저온환원법에 의한 제강법이었으며 이는 비슷한 시기 백제지역에서 유행하던 방법과는 근본적으로 판이하다고 합니다. 박장식 교수(홍익대)는 B. C. 1500년부터 사용된 철의 제강법은 크게 두 가지, 중국식과 유럽식으로 나뉘는데 유럽식은 액체상태의 주철(탄소함량이 많아 단단하나 쉽게 부서지고 낮은 온도에서 녹는다)로 도구를 제작한데 반해 중국식은 탄소를 거의 함유하지 않은 순철을 두드려 모양을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에서 이 두 가지 철강법이 동시에 발견된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신라에서는 유럽식 기술이 쓰인 반면 백제는 전통 중국식으로 철을 다뤘다 합니다. 보존과학자인 정동영 박사 또한 황남대총 출토 금동제품의 분석을 통해 신라의 금동제품이 금순도 98% 이상의 아말감도금의 방법을 이용했음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하여 당시 신라의 금속공예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강조합니다. 다음으로, 신라와 흉노의 관련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로 편두(扁頭, cranial deformation)를 봅시다. 편두(扁頭)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있고 고랑 같은 주름이 머리에 죽 둘러 있었고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것인데 이것은 두개골이 인위적으로 변형된 상태를 말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편두를 하면 말 타고 투구를 쓰고 전투하기가 쉬워 생존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편두와 같은 습속은 유목민들의 일반적인 습속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편두라는 것이 마치 흉노족의 자취처럼 나타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흉노의 이동경로로 추정되는 몽고에서부터 프랑스까지 유적을 발굴해보면, 그 유적의 주인공들이 편두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게르만 지역의 튀링겐과 오덴발트에서도 훈족의 편두가 발견되는 것으로 추정해보면 훈족의 영웅 아틸라의 제국에서 편두는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에서도 "만주지방에서는 고래로 편두하는 관습이 있다.(제2권)"고 적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도 흉노의 일반적인 습속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지 에서도 "진한(辰韓) 사람들은 편두(三國志 魏書 東夷傳)"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라의 금령총에서 발견된 기마인물형 토기의 주인공도 편두인데다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4세기대의 목곽묘에서 모두 10여 개의 변형두개골 즉 편두가 보고 되었습니다. 아니, 금령총은 그렇다 쳐도 김해라면 한반도의 남단인데 그 곳까지 이 습속이 나타나고 있다니오? 놀라운 일이지만 좀 깊이 생각해보면, 이 사실은 신라인들이 흉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라의 금관이 왜 유달리 작은지를 알 수 있게도 하는 것이지요. 편두가 아니면 이 왕관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편두가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귀족이나 왕족들은 편두라는 얘기지요. 최치원도 봉암사 지증대사비문(智證大師碑文)에서 "편두(扁豆)는 지존(至尊)의 상징"이라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편두는 북방계의 남하를 보여주는 예가 되는데, 이에 대해서 『후한서(後漢書)』는 "진한 사람들이 갓난아기의 두개골을 판판하게 만들려고 유아의 머리를 돌로 눌러놓는 특이한 관습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삼국지(三國志)』의 내용("아이를 낳으면 이내 돌로 머리를 누르는데 이것은 머리를 작게 만들려는 것이다" : 『三國志』魏書 東夷傳 弁辰)을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두를 마치 '몬도가네'식(엽기적)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청나라의 명군(明君) 건륭제(乾隆帝)는 분통을 터뜨리며 한족(漢族)의 역사가(歷史家)들이 몰상식하다고 말합니다. 건륭제는 기본적으로 만주 쥬신들이 자신의 습속에 대해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아서 생긴 문제로 개탄하면서 "만주 땅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를 나무로 만든 요람에 넣어두는 오랜 관습이 있는데,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요람 속 유아의 머리 뒷부분이 편편하게 되는 것이고 진한 사람들도 분명히 똑같은 관습을 가졌을 것(『欽定 滿洲源流考』卷首 諭旨)"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한족들은 이민족들을 엽기적으로 몰아가서 야만인으로 몰아 부친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류의 일은 명나라가 가장 심했습니다. 어쨌거나 이 장에서는 편두라는 만주의 풍속이 한반도 남부 지역까지 멀리 전하여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신라와 북방의 연계성을 더욱 쉽게 분석할 수 있지요. 신라가 단순히 고구려의 영향만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최근의 고분 발굴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 1998년과 2003년 각각 발굴된 삼연(三燕) 시기 선비족의 무덤인 랴오닝(遼寧)성 베이퍄오(北票)시 라마(喇口麻)동 묘지와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고구려 태왕릉이 바로 그 대표적인 유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삼연(三燕) 시기란 4세기 초 사마염이 세운 서진(西晉)이 붕괴하고 쥬신이 남하하여 세운 전연(前燕 : 337~370)·후연(後燕 : 384~409)·북연(北燕 : 409~438)의 시기를 말합니다. 전연과 후연은 모용(慕容)씨의 나라입니다. 전문가들은 2004년 4월 출판된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고고학보(2004년 제2기)』에 나타난 라마동 묘지 출토 각종 마구(馬具)들은 신라고분의 출토품뿐만 아니라 가야와 백제, 왜의 마구의 연원까지 추적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300여기에 달하는 라마동 묘지에서 나온 부장유물은 3670여 점에 달하는데 여기에는 생활용품·무기류·마구 등 매우 다양한 유물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토기는 고구려와 유사하고 각종 마구들은 신라초기 고분 출토품과 비슷하며 금동제 말안장 가리개는 전체 형태가 왜의 5세기경의 대표적인 금제품인 오사카(大板)부 하비키노(羽曳野)시 곤다마루야마(譽田丸山) 고분의 출토품과도 흡사하다고 합니다. 미술사가인 권영필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는 당시 고신라가 북방 유목민족 세력권에 있었으며 황남대총 유물은 그 문화 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신라는 고대 동-서 교역로였던 비단길과 동해안 통로를 통해 4~5세기 국제문화를 적극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통일 이전의 신라는 황남대총 축조시기를 기점으로 이전의 전기 초원문화와 이후의 후기 초원문화로 나누고 중앙아시아 흉노족이 한나라 멸망직후의 국제정세 혼란을 틈타 신라에 영향력을 미쳤다고 풀이합니다. 금관에 나타나는 나무 가지형의 모양새는 알타이 주변과 중앙아시아 수렵민족의 신앙적 상징과 거의 같고 금장식편(영락)이 달린 형식은 중국에 없고 러시아 돈강 유역이나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출토된 기원 전후의 유물과 비슷한데다 얇은 금판을 새 날개 형태로 오리고 수많은 영락을 단 금관 장식이나 금제 귀고리, 허리띠 조형 등은 로마와 터키 일대에서 크게 유행했던 것이라고 합니다[권영필,「황남대총과 신라의 국제교류」『황남대총의 재조명 국제학술회의』자료집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 2000)]. 저는 이 견해와는 조금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이전에 있어왔던 흉노 세력(김일제 후손의 김씨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선택적으로 북위나 고구려를 통해서 중앙아시아나 유럽의 금 문화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지요. (5) 북으로 가는 신라, 남으로 가는 부여 황남대총의 거대한 무덤 속에는 수많은 유물들이 있는데 그 속에는 뜻밖의 유물이 있었죠. 바로 투명한 색깔의 그릇 파편들, 바로 유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유리 목걸이에서 발견된 사람의 얼굴은 동양인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분야의 전문가인 이인숙 박사는 유리 분석실험을 통해 황남대총의 유리는 중국계 유리가 아니라 멀리 떨어진 로마계 유리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였습니다. 결국 로마의 유리가 신라까지 흘러 들어온 것이죠.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로마의 유리는 중국이나 바다가 아니라 초원의 길을 통해서 왔다고 합니다. 그 근거로 드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4~5 세기 신라 지배자급 무덤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묘제, 적석목곽분이라고 합니다. 적석 목곽분은 남러시아의 시베리아 초원지대에서 활약한 스키타이 민족(기마민족)의 매장 풍습인데다 유물들도 기마민족들의 애호품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초원의 길에는 이들 스키타이인들과 또 다른 주인공, 흉노(쥬신의 선민족)가 있었던 것이지요. 대체로 초원길 서부지역은 스키타이, 동부 지역(알타이)은 흉노라고 보시면 됩니다. B. C. 2세기경 스키타이는 역사에서 사라지지만 초원지대를 장악한 새로운 유목세력에 의해 동과 서로 교역은 계속 유지됩니다. 정수일 교수에 따르면, 신라는 로마문화를 수용하여 자기의 환경에 걸맞게 변형·발전시킴으로써 각종 장신구와 금은제품을 로마와 공유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수일 교수는 로마의 누금감옥 기법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세공 장식품들이 신라에는 흔하게 나오지만 당시 중국이나 일본 유물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고구려에도 별반 없으며, 백제는 신라와 관계가 좋을 때의 유물에서만 약간 나온다고 합니다. 이상의 논의를 보면 신라의 계통과 부여-고구려-백제가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즉 신라 쪽이 보다 고조선계와 흉노(쥬신 선민족) 쪽에 더 가까운 종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일한 쥬신이라도 한족(漢族)과의 교류와 그 영향력의 강약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신라가 중국의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에 좀 더 흉노적이라는 말이지 근본적으로 이들이 다르다는 말은 아니지요. 희한한 말이겠지만 한족(漢族)의 영향을 받은 부여계보다는 경제력·제도·문화의 면에서 세련되지는 못하면서도 금은 세공 기술이나 유물들은 훨씬 더 발달해 있는 나라가 신라라는 말이지요.
http://cafe.daum.net/jb2001/7ldi/193?q=%EC%8B%A4%EB%9D%BC%EB%B2%95%ED%9D%A5%EC%99%95%EC%9D%80%EB%B0%B1%EC%A0%9C%EC%97%90%EC%86%8C%EC%98%B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