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엄마, 우리 행궁동 골목길 데이트해요.”
독일에서 잠시 귀국한 조카의 주선으로 행궁동에 나들이를 갔다. 우리 삼 남매가 신풍초등학교를 졸업했기에 행궁동은 잘 알고 있다. 예전에 행궁동 골목 해설사 교육을 받은 적이 있어 나와는 인연이 있는 행궁동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행궁동은 낯설게 다가왔다. 원주민이 살던 집들이 하나둘씩 음식점이나 카페로 바뀌고 신축하는 건물들도 새로운 가게로 들어서고 있었다.
너무나 익숙한 곳인데 낯선 행궁동 골목길을 일정을 모른 채 조카를 따라나섰다. 먼저 맛집으로 소문난 퓨전 음식점으로 향했다. 예약받지 않아 그냥 갔더니 20번 이상의 대기 번호표를 주었다. 맛이 있으면 얼마나 있길래 하는 마음으로 근처의 멕시칸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음식과 음료수는 조카가 알아서 주문했다. 내 입맛을 고려하여 주문해서인지 거부감없이 맛있게 먹었다. 나이가 들면서 음식도 익숙하지 않으면 낯설어 몸이 먼저 거부하기 마련이다.
다음에 간 곳은 한옥으로 지어진 예쁜 책방이다. 한적하게 평일을 즐기고 싶은 여행자는 갈 수가 없다. 주말에만 문을 여는 동네 책방이다. 간판에 “좋은 책, 좋은 사람, 좋은 사회를 위하여 경기서적”이라고 쓰여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앞마당이 먼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아기자기하게 너무 예쁘게 꾸며져 있어 여기가 책방이 맞나 싶다. 동네의 작은 책방이라 책 종류가 많지 않다. 귀여운 소품과 작은 문구류도 진열되어 있다. 포스트잇에 쓰여 있는 몽글몽글한 느낌을 주는 글을 읽어보는 재미는 덤이다. 무엇보다 서까래 천장의 멋스러움이 내마음에 쏙 들었다. 다음에 우리 집을 새로 짓는다면 서까래를 이용하여 거실을 꾸미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조카와 나는 책을 한 권씩 골랐다. 서로 계산하겠다고 우기다가 결국 한 권씩 선물로 사주기로 합의했다. 나는 정혜신의 적정 심리학 『당신이 옳다』를 골랐다. 그때 나는 마음에 난 상처가 약을 발라도 덧나기 일쑤라 아주 힘들었다. 책을 읽으며 위로받고 많은 생각을 했던 시기였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경기서적 맞은 편에 있는 빈티지한 감성 꽃집인 ‘더플라워 랩’에서 꽃바구니를 직접 만들어 보는 체험이었다. 세심한 조카는 보라색을 좋아하는 큰엄마를 배려하여 보라 계열 꽃으로 예약해놓았다. 예전에 꽃꽂이를 배우던 어느 날이 생각나기도 했다. 일주일마다 집안에 새로운 꽃이 등장할 때면 온 가족이 어찌나 좋아하던지. 평범한 실력인데도 과하게 칭찬하며 좋아해 주는 가족들의 관심에 한동안 꽃꽂이를 즐겼었다. 강사님이 꽃에 대한 특성과 꽃 이름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꽃을 직접 만지고 가위로 적당하게 잘라서 바구니에 하나하 나 꽂았다. 마음속 아픔들이 하나씩 잘려 나가고 치유라는 이름의 꽃으로 환하게 피어났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완성된 꽃바구니를 바라보았다. 꽃송이마다 표정이 살아있어 나를 어루만지며 토닥토닥해 주었다.
카페 ‘치치’에서 오랜만에 조카와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이야기보따리를 풀자 지나간 기억들이 줄줄이 소환되었다. 그리운 사람을 추억하고 함께 하는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사촌이지만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내길 당부했다. 멀리 독일에 살고 있어 나와는 가끔 소식을 전하지만, 사촌인 저희끼리는 자주 소통하는 눈치였다.
집으로 돌아오자 내 마음을 읽고 잠시나마 치유의 시간을 만들어 준 조카의 마음이 온몸으로 전해져 투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보랏빛 꽃바구니는 나를 보듬으며 사랑의 미소를 보내주었다. 참 고운 조카의 마음이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