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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여기 고대에 찬란했던 한 제국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들은 대단한 정복자였고 건설자들이었으며 수많은 신화의 주인공들이기도 했습니다.
앤드류 조지 고고학자/런던대학: 바빌론인들의 사상에 따르면 바빌론은 마르둑 神의 보호 아래 있었습니다.
내레이션: 절대권력을 가진 왕은 야망이 넘쳤죠. 순식간에 서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그의 표적이 됐습니다.
조안 오츠 고고학자/영국 캠브리지대학: 그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했습니다. 근동지역의 대부분을 지배했습니다.
내레이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전쟁을 통해 얻은 전리품으로 사막 한 가운데 엄청난 규모의 도시를 건설했죠. 가히 그 기세가 하늘에 닿을 듯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모든 영광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곤 2천년 넘게 오로지 전설 속에서 존재하는 나라가 됐죠. 독일 베를린에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 이곳에 20세기 최고의 고고학적 발견이라 불리는 한 고대유물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실물크기로 부조된 사자는 금방이라도 뛰쳐 나올 듯 생생하며 푸른색 벽돌로 장식된 14미터 높이의 육중한 성문은 지금도 한 제국의 위용을 드러내는데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요하임 마르찬 고고학자/독일 페르가몬 박물관: 박물관의 규정에 맞춰 (이슈타르문의) 크기가 베를린에 복원된 이슈타르문은 일부에 불과하며 실제 바빌론의 이슈타르문은 이보다 훨씬 큽니다.
내레이션: 바빌론 제국, 사실 불과 100여년 전만해도 유럽인들은 그리스와 로마 외에 他대륙에 고도의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빌론의 등장과 함께 그러한 편견은 순식간에 깨지고 말았다. 이 사실을 최초로 유럽에 알린 사람은 독일의 고고학자이자 건축가였던 로베르트 콜데바이(1855~1925, 1899년부터 18년간 이라크 박물관 유적발굴)였습니다. 그는 19세기가 끝날 무렵인 1899년 미지의 바빌론을 찾아 기차에 몸을 실었죠. 이미 유럽 학자들 사이에 매소포타미아에 관한 근동연구가 활발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기차에 내려서도 다시 3주 넘게 낙타 카라반을 이용 이라크의 사막을 횡단해야만 했습니다. 말 그대로 고대 문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노다지 같은 곳이었습니다. 콜데바이는 인부들과 함께 사막 20미터까지 파고들어갔고 그곳에서 잃어버린 고대의 건물터들을 발견했습니다. 문명의 열쇠를 풀어줄 수십만점의 점토판들도 함께 굴토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이슈카름 성경에나 등장했던 (바빌론 유적발굴 당시 기록사진), 바빌론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그는 그 발굴된 유물을 500 상자에 담아 베를린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곤 수만점에 관한 파편들을 꿰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바빌론에 대한 잊혀진 전설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에 가장 번성했습니다. 사자는 전쟁의 神 이슈카르를 상징하고 이슈카르 문은 바빌론 시에 진입하는 가장 큰 관문이라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바빌론이 존재했다는 땅 이라크, 하지만 이라크는 근래 두 차례의 큰 전쟁을 치렀고 납치와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곳입니다. 수십명의 무장 경호원을 대동한다는 조건으로 전쟁 이후 최초로 바빌론 진입허가를 받은 제작팀, 바빌론엘 가려면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약100킬로미터를 더 가야 합니다. 이라크의 젖줄이라고 할 수 있는 유프라테스 강가의 한쪽 평원, 이곳에 콜데바이가 최초로 발굴했던 바빌론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라크 바빌론 왕국유적), 빼곡히 들어선 흑백기단들, 한 때 이곳이 바빌론의 중심이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옆으로 지상 위 10미터도 넘게 우뚝 솟아 있는 아치형 건축물, 그러나 이 건축물은 사실 바빌론 당시의 것이 아닙니다. 바빌론의 유적을 땅 밑에 그대로 묻어둔 채 그 위에 새롭게 재현해 낸 것이죠. 이 모든 작업은 한 지배자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전쟁 중에도 이곳을 찾아 복원을 독려할 만큼 공을 들였고 유적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별장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사담 후세인 그의 바빌론 복원에 대한 열망은 순식간에 좌절됐고 그가 건설했던 궁은 시민들에 의해 훼손됐습니다. 결국 그는 무자비한 독재자란 죄명으로 지난 2006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죠. 그런 사담 후세인은 어쩌면 이 옥좌에 앉아 바빌론의 영광을 다시 꿈 꾸웠을 지도 모릅니다. (바빌론 이슈타르문 유적), 지하 20미터에서 발굴해 낸 이슈타르문은 실제 바빌론 심장부로 진입했던 가장 큰 관문이기도 하죠. 그렇다면 기단들은 아직 30%도 발굴되지 못한 바빌론은 언제 누구에 의해 건설 됐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사람,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nezzar II, 기원전 634~562 신바빌론 제국의 제2대 왕/구약성경 다니엘서 1~5장 느부갓네살), 이라크 남부지역 출신의 이 젊은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야망이 넘쳤던 이 젊은이는 아버지와 함께 앗시리아로부터 바빌론을 되찾았고 기원전 605년 아버지가 죽자 바빌론의 왕위에 등극하게 됩니다. 바로 함무아비와 함께 바빌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입니다. 그는 등극하자마자 앗시리아의 잔존 세력들을 물리치고 곧 바로 주변국 정벌에 나섰습니다. 그렇게 이집트 일부 시리아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이 그의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명실 공히 제국의 왕이 된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얻은 부를 통해 사막에 역사상 가장 거대한 도시를 건설했죠. 바빌론입니다.
조안 오츠 박사 고고학자/영국 캠브리지 대학: 바빌론은 정말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엄청난 기념물과 건축물이 있는 인상적인 장소였을 것입니다.
내레이션: (그리스 아테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리스를 잘 알고 있죠. 그들은 기원전 300년경 이미 철학과 수학 건축과 예술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그리스의 학자들은 그들보다 약 300년 전에 번성했던 바빌론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요. 헤로도토스(Herodotos, BC 5세기의 그리스 역사학자, 최초의 역사서 역사(Historia) 저술), 기원전 5세기 지금도 유럽인들에게 역사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사막을 건너 바빌론으로 향했습니다. 짧은 쪽 성벽의 길이는 18킬로미터에 달하며 긴 쪽은 무려 92킬로미터까지 뻗어있다. 성벽의 높이는 14미터이며 3중으로 되어 있고 성벽 위로 난 길에는 4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멈추지 않고 비껴갈 만큼 넓었다. 훗날 학자들의 연구결과 당시 바빌론의 인구는 약15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오늘날에 비하면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기원전 6세기 당시엔 세계의 어떤 도시보다도 큰 도시였습니다.
마크 반드 미에룹 교수 고고학자/미국 콜럼비아 대학: 이런 기록들은 모두 바빌론을 직접 방문한 소수의 그리스인들이 그 도시를 매우 거대하다고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스인들이 바빌론의 크기를 현실성 없는 수치로 묘사한 것은 그들이 이전에 알았던 어떤 도시보다 바빌론이 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내레이션: 이제 이곳에서 한때 위대했던 바빌론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연 강수량 100밀리미터도 안 되는 황량한 사막 위에 어떻게 바빌론인들은 거대한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요?
조안 오츠: 관개가 된 경작지는 빗물에만 의존하는 지역보다 농업 생산량이 높습니다.
내레이션: 메소포타미아, 그건 두 강 사이의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이곳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있고 두 강은 오늘날의 터키 북쪽 아나톨리아 고원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강을 따라 기원전 3000년전 가장 오래된 도시들이 탄생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그것이죠. (이라크 남부 늪지대), 이라크 남부,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갈대만 무성하게 자라나는 얕은 호수와 늪지대가 펼쳐져 있습니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가 만들어낸 선물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수천년 전부터 물고기를 잡거나 소를 키우고 또 대추야자를 경작하며 살아 왔습니다. 하지만 자연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방법도 터득했습니다. 인류역사 최초로 관개농업을 시작했으며 소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그 남는 생산물은 교역을 통해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앤드류 조지 고고학자/런던대학: 이 지역에서는 집약적 농업을 통한 잉여생산물이 발생했습니다. 잉여생산물의 소유자는 이것을 저장하고 유지하고 분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같이 모여살게 됐습니다.
내레이션: 이제 사람들은 수확량을 기록해야만 했죠. 기호가 생겨났고 드디어 문자가 탄생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이렇듯 이미 기원전 3000년 전에 문자와 수학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별자리들을 찾아냈습니다. 시계 60분 체계도 만들어냈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적 사회적 체계를 탄생시킨 주역들이었던 셈입니다. 바그다드 남쪽 300킬로미터 아브라함의 출생지로 잘 알려진 우르에 거대한 지구라트가 남아있습니다. 우르(Ur) 지구라트-이라크 남부 나시리아 지역에 있는 기원전 3000년경의 신전탑, 고대 수메르인들이 神을 숭배하기 위해 건설했던 탑이죠.
앤드류 조지: 우르 지구라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기원전 3000년경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에 지어진 것이 확실합니다.
내레이션: 지구라트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집이란 뜻으로 고대로부터 매우 신성시 되던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전쟁의 참화를 비켜나지 못하였지요. 이것이 전투 중 발생한 총탄의 흔적들입니다. 당시의 제사장들도 이 계단을 통해 神에게 다가갔을 것입니다.
앤드류 조지: 우르 지구라트는 3층탑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꼭대기에 신전은 달의 신을 위한 제단입니다. 맨 밑층의 크기는 약60미터X45미터입니다. 정사각형이 아니라 직사각형의 모습이었습니다.
내레이션: 지구라트의 규모만으로도 (우르도시 유적) 당시 우르가 얼마나 번성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땅에 묻혀 버렸지만 지금도 왕궁과 주택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죠. 위에서 내려다보면 오늘날과 달리 강물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 우르는 푸른 나무들이 무성했고 견고한 성벽 너머로는 왕궁이 있었으며 정중앙엔 神을 맞이하기 위한 지구라트가 45미터 높이로 솟아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르는 지구라트를 중심으로 약4500 가구 3만5천 명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도시국가였습니다. 기원전 1800년경 우르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수메르 문명은 그러나 일대 전환기를 맞습니다. 수많은 사막 도시들을 제치고 보르시파가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던 것입니다. 보르시파(Borsippa) 지구라트-이라크 바빌론 남부에 있는 기원전 2000년대의 신전탑, 산성에 송곳처럼 우뚝 솟아있는 보르시파 지구라트,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山이 아니라 모두 흙벽돌로 쌓아만든 거대한 지구라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밑단이 모두 마모되고 중심부만 남아있었던 것이죠.
발터 쿤트너 고고학자/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학: (보르시파 지구라트는) 건축방면으로 보아 기원전 3000년대 말경에 지어졌을 거라 보이며 함무라비 법전의 기록을 보면 기원전 2000년대 초에 보르시파의 시대(Sida) 신전이 복구되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내레이션: 함무라비는 기원전 1800년경 이곳 보르시파를 중심으로 舊바빌론을 건설했습니다. 그는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한 세계 최초의 성문법을 탄생시켰죠. 재임 당시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통해 바빌론을 서아시아 최대의 제국으로 완성해냅니다. 하지만 그의 사후 바빌론은 또다시 위기에 봉착하고 말죠. (국립 이라크박물관), 이라크 전쟁시 수많은 유물을 약탈당했다는 이라크 국립박물관,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라크 전역에서 발굴된 고대 유물들이 복도를 따라 진열되어 있습니다. 통로 끝 박물관 저 중앙에서 만난 앗시리아 유물관, 앗시라아는 본디 기원전 3000년경 탄생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함무라비에 의해 정복당한 뒤 오랜 기간 숨죽여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기원전 14세기 중엽 다시 세력을 키운 그들은 舊바빌론을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일하기에 이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중심 도시 바빌론은 앗시리아인들에게 늘 경계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마크 반 드 미에룹 교수 고고학자/미국 콜럼비아대학: (앗시리아의) 세나 케립 왕은 바빌론을 파괴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세나 케립은 바빌론을 폐허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는 곧 바빌론을 복원했습니다. 바빌론이 없이는 메소포타미아의 문화가 존재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레이션: 앗시리아는 니네베를 중심으로 성장을 거듭하여 함무라비가 건설했던 바빌론 전역은 물론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이라크 남부 늪지대), 그러나 페르시아만에 인접한 이곳 칼데아 지방에서 또 다른 세력이 앗시리아를 노리게 돼죠. 흔히 칼데아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기원전 수천년 전부터 어업과 목축업 농경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들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라는 두 강이 있었기 때문이죠.
조안 오츠: 칼데아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주변 지역에 살았습니다. 인도양과 이란에 가까운 곳입니다. 그리고 미개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교육수준이 높았고 부유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영토에 도시도 지었습니다.
내레이션: 무엇보다 이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역이었습니다. 유럽과 인도에 풍부한 물산들이 이곳에 들어왔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때를 기다렸던 이들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 선두에 네브카드네자르 2세가 있었죠. 기원전 605년 왕으로 등극한 그는 곧 바로 함무라비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바빌론 재건에 나섭니다. 앗시리아로부터 바빌론을 수복한 그는 니네베를 중심한 남아 있는 앗시리아의 잔존 세력을 물리치고 여세를 몰아 서쪽으로 향합니다. 그리하여 지중해 연안에 있는 시리아를 비롯하여 예루살렘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정복하기에 이릅니다.
마크: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을 新바빌론 제국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그는 대규모 전쟁을 일으켜 유다 왕국의 예루살렘을 정복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얻은 부를 통해 바빌론을 재건했습니다. 바빌론을 다시 한번 위대한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내레이션 바빌론은 드디어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야망에 걸맞게 복원되었습니다. 행렬의 길이라고 부르는 이 진입로를 따라가면 높이 14미터 폭 50미터의 이슈타르문이 가로 막았고 그 내부엔 온갖 수목으로 장식된 공중정원, 훗날 바벨탑이라 불리는 지구라트도 건설됐습니다.
마크: 바빌론은 고대에 매우 큰 도시였습니다. 삼각형 모양의 외성 안의 면적은 900헥타르였습니다. 로마 제국 이전까지 지중해 인근에서 이보다 큰 도시는 없었습니다. 바빌론을 둘러싼 성벽은 수십 킬로 미터였고 삼각형의 외성 안에 위치한 직사각형 모양의 내부 도시도 매우 컸습니다. 2.5kmX1.5~2km 정도로 컸습니다. 고대 세계의 가장 큰 도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레이션: 우리는 역사를 통해 제국을 건설하는 것보다 제국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바빌론 이중성벽 유적), 수없이 전쟁을 겪었던 바빌론인들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죠. 이것이 바빌론인들이 쌓았던 성벽, 지금은 반쯤 땅에 묻혀있지만 실제로 훨씬 높아 보였을 것입니다. 돌이 귀했던 까닭에 성벽의 재료는 오로지 흙벽돌이었습니다. 바빌론인들은 흙벽돌 사이에 갈대와 몰타르를 넣음으로써 접착력과 강도를 높였습니다. 그렇게 높이 14미터의 육중한 성벽은 도시 외부는 물론 왕궁과 신전이 있는 도시 중심부를 겹겹이 에워쌌습니다. 바빌론은 철옹성의 도시였죠. 두께 7미터가 넘는 성벽 위로는 마차가 지나다녔고 곳곳에 망루에선 24시간 침입자를 관찰했습니다. 그러나 바빌론의 방어시설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물길, 바로 해자(垓子)였죠. 해자는 폭 10미터 깊이 3미터 규모로 이미 건설된 성벽에 따라 이어졌습니다. 물이 귀한 사막의 도시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시설이었죠.
마크: 바빌론은 유프라테스 강의 지류 중 하나에 위치해 있습니다. 강은 직사각형 모양의 내부 도시를 가로 질렀습니다. 도시 내부에는 여러 갈래의 수로가 있었고 유프라테스 강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 수로에 의해 도시는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었습니다.
내레이션: 이 모든 것은 유프라테스 라는 강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해자는 도시 외곽을 둘러쌓을뿐 아니라 도시 내부를 거미줄처럼 관통해 생활용수로도 활용됐습니다. 때문에 당시 이곳을 방문했던 외부인들에겐 비빌론이 마치 수상도시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바빌론의 하수 시스템을 재현해 본 것입니다. 자연수가 아닌 인공물에 의한 하수 시스템은 인류 역사상 바빌론이 최초로 완성해 낸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팔라 알주바위 박사/이라크 바빌론 네부카드네자르 박물관장: 발전된 하수도 시설은 긴 수로와 연결되어 있었고 지하수가 침투되지 않도록 아스팔트로 덮여 있었습니다.
내레이션: 인류가 이룩한 모든 문명은 강에서 탄생했습니다. 강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진화에 성패가 걸렸던 것입니다. (바빌론시에 있는 다리 유적), 바빌론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물길이 달라졌지만 한 때 유프라테스 강이 흘렀던 강가에 있는 이 벽돌 더미는 당시 바빌론인들이 세웠던 다리의 흔적입니다.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 그들은 우선 튼튼한 각목을 3.6미터 간격으로 박았습니다. 그 밑은 구운 벽돌을 이용해서 단단하게 고정시켰죠. 그런 다음 벽돌의 마모를 막기 위해 지금의 레바논에서 실어온 삼나무로 주변을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그 위 상판을 얹어 완성했죠. 이것은 당시로서는 세계 최첨단의 공법이자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바빌론엔 최소한 이런 다리가 8개는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다리는 성문으로 이어졌고 성문마다엔 각기 독특한 이름들이 있었죠. 적들이 혐오하는 성문/우라쉬(Urash) 성문, 침입자들이 싫어하는 성문/지바바(Zababa) 성문, 군인의 생명을 지켜주는 성문/아다드(Adad) 성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도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문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슈타르(Ishtar) 문, 전쟁의 여신인 이슈타르의 이름을 딴 이 성문은 진입로의 넓이만 22미터에 달합니다. 양쪽엔 14미터 높이의 성벽이 사열하듯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성문 곳곳엔 수많은 사자와 황소, 용과 같은 부조들이 청색 벽돌 위에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모두 바빌론의 神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들이었습니다.
문씬 나싼 알리/국립 이라크박물관장: 마르둑은 바빌론 神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지금 보시는 용은 마르둑입니다. 용의 머리와 뱀의 꼬리를 갖고 있으며 뱀의 가죽으로 되어 있고 사자의 이빨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르둑 神의 위력을 나타낸 것입니다. 마르둑 神은 바빌론 시대 모든 神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내레이션: 만약 적이 이 성문을 통과했다면 가장 먼저 이 신성한 동물들을 거쳐야 했을 것입니다. 황소로 상징되는 날씨의 神 이다르, 바빌론의 주신이었던 마르둑의 상징이었던 용, 그리고 왕을 상징했던 사자, 이 모두는 적이 공포감을 극도로 느낄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장치이기도 했죠.
마크: 사자, 황소 그리고 용은 금색 자기 벽돌로 장식됐고 배경은 푸른 색 벽돌이었습니다. 밤에는 금색으로 빛나는 동물의 형상들만 보였을 겁니다. 밤에 이 길을 걸으면 신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내레이션: 이슈타르 문을 통과하면 3,4층 높이의 주택들 사이로 도심을 관통하는 중앙대로가 있었습니다. (바빌론 중앙 행진로 유적), 그런데 이곳에서도 놀랄만한 사실이 밝혀졌죠. 대로에 깔린 검은 물체, 이것은 아스팔트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또 있었죠. (바빌론 남쪽 왕궁 알현실), 왕궁 한쪽에 마련된 이 드넓은 공간, 연구결과 이곳은 당시의 왕이 외국사신들을 접견하는 알현실로 밝혀졌습니다. 여기에는 이미 그리스인들이 최초로 발명했다고 전해지는 아치 기술이 사용되고 있으며, (바빌론 남쪽 왕궁 알현실 벽장식), 섭씨 1450도를 유지해야만 구워낼 수 있는 청색 벽돌, 즉 최첨단의 세라믹 기술 또한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웅장하게 꾸며진 알현실은 훗날 이곳을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왜 바빌론인들은 한결같이 푸른색을 즐겨 사용했을까요.
요하임: 푸른 색이 주를 이룬다는 점이 두드러집니다. 오늘날에도 근동지역에서 푸른색은 매우 특별한 뜻을 갖는데 보호와 방어를 의미합니다.
내레이션: 기원전 600년대 바빌론은 세계 최대의 도시였고 거주인구만 15만 명에 달했습니다. 이는 기원전 300년대 로마의 인구가 채 10만명이 안되었다는 점에 견주면 놀라운 사실입니다. 유프라테스 강의 항구는 무역선들로 넘쳐났습니다. 북방의 실크로드와 남방의 해상로를 따라 상인들이 몰려왔죠.
조안 오츠: 무역상인들이 이 지역을 다녔습니다. 이미 기원전 2000년경에 나라들 간의 교역이 활발했습니다. 배도 다녔는데 당시 메소포타미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카넬리아는 인도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내레이션: (동영상), 이것이 입체영상으로 복원해본 당시 바빌론 거리의 풍경입니다. 노점엔 터키에서 생산된 카펫과 중앙 아시아로부터 갖고온 달콤한 포도와 대추야자가 있고 열대 과일 망고도 보입니다. 도자기와 향신료, 아프리카의 상아 천금색 같은 수많은 물건이 이곳에서 만나고 이곳을 통해서 세상 곳곳에 흘러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난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기원전 5세기 이곳을 방문했던 그리스의 학자 헤로도토스에 의해서 입니다. 바빌론을 두루 여행했던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쓴 책 역사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죠. 여자들은 남자들이 자신을 고를 때까지 기다려야한다.
앤드류 조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여성과 관련된 또 다른 내용이 나오는데 바로 바빌론의 결혼시장에 관한 것입니다. 남성이 아내로 삼고자 하는 여성을 경매로 샀다고 합니다.
내레이션: 남자는 자신이 고른 여자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지불한 후 성지 이후의 곳에서 함께 거주한다. 헤로도토스가 본 것은 바빌론의 결혼시장 풍경이었습니다. 여자들은 강요가 아닌 자의에 의해 무대에 섰고 남자들은 자신들이 마음에 드는 여자를 선택할 수 있었죠. 그리스인들의 시각에선 바빌론은 이처럼 생경하면서도 세상에 온갖 재미난 이야기들이 넘치는 사막 끝, 동방의 경이로운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얘기들은 훗날 유럽인들의 바빌론에 대한 환상을 더욱 자극하는 요소들로 작용하였습니다. 바빌론에 새해가 밝아옵니다.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이날은 바빌론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성스러운 날이 밝자 모든 성문이 열리고 각 지방에서 찾아온 각기 다른 神의 행렬이 줄을 잇습니다. 바빌론의 주신 마르둑에 대한 신년 하례의식이 시작된 것이죠.
앤드류 조지: 바빌론의 신년 축제는 음력으로 새해 첫 달의 며칠간 열렸는데 대략 3월~4월의 춘분 무렵이었습니다.
내레이션: 춘분은 낮의 길이와 밤의 길이가 정확히 일치하는 날입니다. 바빌론인들에겐 이 날이 새해였죠. 또한 이 날은 바빌론의 神 마르둑이 우주의 혼란을 잠재우고 질서를 바로 세우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앤드류 조지: 축제의 핵심은 바빌론의 神 마르둑이 천지가 창조될 때 그의 원초적인 적인 바다의 神을 이긴 것을 축하하는 내용입니다.
내레이션: 약 12일간에 걸쳐 계속된 신년 축제의 마지막 날, 여러 지방의 神들을 태운 행렬이 바빌론의 중심지인 이곳 바벨탑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곤 탑의 맨 꼭대기에 있는 이 신상, 함무라비 이래 바빌론의 주신이었던 마르둑에게 경배, 바빌론의 왕 역시 이날 마르둑을 통해 한 해 동안 행사할 모든 권력을 위임받게 돼죠. 이렇듯 바빌론인들은 바빌론을 번성케 한 모든 힘의 근원인 神 마르둑이 부여한 것이고 마르둑이 있는 한 바빌론의 영광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훗날 성경 창세기(11장)의 기록은 바빌론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묘사된 바빌론인들은 침략자이자 우상 숭배자들이었고 하늘에 도전하는 무모한 세력들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바벨탑이 있습니다. 하늘에 닿을만큼 높았다는 탑, 과연 바벨탑의 진실은 무엇일까. 왜 성경은 그렇게 묘사했던 것일까. 끝. (EBS 다큐프라임 1478회 위대한 바벨론 제1부 바벨론 시티에서 정리).
① 여기 고대에 찬란했던 한 제국의 역사가 있다. 그들은 대단한 정복자였고 건설자들이었으며 수많은 신화의 주인공들이기도 했다. 바빌론인들의 사상에 따르면 바빌론은 마르둑 신의 보호 아래 있었다. 절대권력을 가진 왕은 야망이 넘쳤다. 순식간에 서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그의 표적이 됐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근동지역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하지만 이들은 전쟁을 통해 얻은 전리품으로 사막 한 가운데 엄청난 규모의 도시를 건설했다. 가히 그 기세가 하늘에 닿을 듯 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모든 영광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곤 2천년 넘게 오로지 전설 속에서 존재하는 나라가 됐다. 독일 베를린에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 이곳에 20세기 최고의 고고학적 발견이라 불리는 한 고대유물이 복원되어 있다. 실물크기로 부조된 사자는 금방이라도 뛰쳐 나올 듯 생생하며 푸른색 벽돌로 장식된 14미터 높이의 육중한 성문은 지금도 한 제국의 위용을 드러내는데 전혀 손색이 없다. 박물관의 규정에 맞춰 이슈타르문의 크기가 베를린에 복원된 이슈타르문은 일부에 불과하며 실제 바빌론의 이슈타르문은 이보다 훨씬 크다.
② 바빌론 제국, 사실 불과 100여년 전만해도 유럽인들은 그리스와 로마 외에 他대륙에 고도의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바빌론의 등장과 함께 그러한 편견은 순식간에 깨지고 말았다. 이 사실을 최초로 유럽에 알린 사람은 독일의 고고학자이자 건축가였던 로베르트 콜데바이(1855~1925년)였다. 그는 19세기가 끝날 무렵인 1899년 미지의 바빌론을 찾아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미 유럽 학자들 사이에 매소포타미아에 관한 근동연구가 활발하던 시기였다. 그는 기차에서 내려서도 다시 3주 넘게 낙타 카라반을 이용 이라크의 사막을 횡단해야만 했다. 말 그대로 고대 문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노다지 같은 곳이었다. 콜데바이는 인부들과 함께 사막 20미터까지 파고들어갔고 그곳에서 잃어버린 고대의 건물터들을 발견했다. 문명의 열쇠를 풀어줄 수십만점의 점토판들도 함께 굴토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슈카름 성경에나 등장했던 바빌론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는 그 발굴된 유물을 500 상자에 담아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수만점에 관한 파편들을 꿰 맞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빌론에 대한 잊혀진 전설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에 가장 번성했다. 사자는 전쟁의 神 이슈카르를 상징하고 이슈카르 문은 바빌론 시에 진입하는 가장 큰 관문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바빌론이 존재했다는 땅 이라크, 하지만 이라크는 근래 두 차례의 큰 전쟁을 치렀고 납치와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곳이다.
③ 수십명의 무장 경호원을 대동한다는 조건으로 전쟁 이후 최초로 바빌론 진입허가를 받은 제작팀, 바빌론엘 가려면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약100킬로미터를 더 가야 했다. 이라크의 젖줄이라고 할 수 있는 유프라테스 강가의 한쪽 평원, 이곳에 콜데바이가 최초로 발굴했던 바빌론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다. 빼곡히 들어선 흑백기단들, 한 때 이곳이 바빌론의 중심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 옆으로 지상 위 10미터도 넘게 우뚝 솟아 있는 아치형 건축물, 그러나 이 건축물은 사실 바빌론 당시의 것이 아니다. 바빌론의 유적을 땅 밑에 그대로 묻어둔 채 그 위에 새롭게 재현해 낸 것이다. 이 모든 작업은 한 지배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전쟁 중에도 이곳을 찾아 복원을 독려할 만큼 공을 들였고 유적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별장을 지었다. 하지만 사담 후세인 그의 바빌론 복원에 대한 열망은 순식간에 좌절됐고 그가 건설했던 궁은 시민들에 의해 훼손됐다. 결국 그는 무자비한 독재자란 죄명으로 지난 2006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사담 후세인은 어쩌면 이 옥좌에 앉아 바빌론의 영광을 다시 꿈 꾸웠을 지도 모른다.
④ 지하 20미터에서 발굴해 낸 이슈타르문은 실제 바빌론 심장부로 진입했던 가장 큰 관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기단들 아직 30%도 발굴되지 못한 바빌론은 언제 누구에 의해 건설 됐을까. 그것은 바로 이 사람,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nezzar II, 기원전 634~562 신바빌론 제국의 제2대 왕/구약성경 다니엘서 1~5장 느부갓네살) 이다, 이라크 남부지역 출신의 이 젊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야망이 넘쳤던 이 젊은이는 아버지와 함께 앗시리아로부터 바빌론을 되찾았고 기원전 605년 아버지가 죽자 바빌론의 왕위에 등극한다. 바로 함무라비와 함께 바빌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다. 그는 등극하자마자 앗시리아의 잔존 세력들을 물리치고 곧 바로 주변국 정벌에 나섰다. 그렇게 이집트 일부 시리아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이 그의 수중에 들어왔다. 명실 공히 제국의 왕이 된 것이다. 그는 여기서 얻은 부를 통해 사막에 역사상 가장 거대한 도시를 건설했다. 바빌론이다. 바빌론은 정말 거대한 도시였다. 엄청난 기념물과 건축물이 있는 인상적인 장소였을 것이다.
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리스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기원전 300년경 이미 철학과 수학 건축과 예술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렇다면 당시 그리스의 학자들은 그들보다 약 300년 전에 번성했던 바빌론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기원전 5세기 지금도 유럽인들에게 역사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사막을 건너 바빌론으로 향했다. 짧은 쪽 성벽의 길이는 18킬로미터에 달하며 긴 쪽은 무려 92킬로미터까지 뻗어있다. 성벽의 높이는 14미터이며 3중으로 되어 있고 성벽 위로 난 길에는 4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멈추지 않고 비껴갈 만큼 넓었다. 훗날 학자들의 연구결과 당시 바빌론의 인구는 약15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오늘날에 비하면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기원전 6세기 당시엔 세계의 어떤 도시보다도 큰 도시였다. 이런 기록들은 모두 바빌론을 직접 방문한 소수의 그리스인들이 그 도시를 매우 거대하다고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인들이 바빌론의 크기를 현실성 없는 수치로 묘사한 것은 그들이 이전에 알았던 어떤 도시보다 바빌론이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이곳에서 한때 위대했던 바빌론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연 강수량 100밀리미터도 안 되는 황량한 사막 위에 어떻게 바빌론인들은 거대한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관개가 된 경작지는 빗물에만 의존하는 지역보다 농업 생산량이 높다.
⑥ 메소포타미아, 그건 두 강 사이의 땅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이곳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있고 두 강은 오늘날의 터키 북쪽 아나톨리아 고원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강을 따라 기원전 3000년전 가장 오래된 도시들이 탄생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그것이다. 이라크 남부,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갈대만 무성하게 자라나는 얕은 호수와 늪지대가 펼쳐져 있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가 만들어진 선물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수천년 전부터 물고기를 잡거나 소를 키우고 또 대추야자를 경작하며 살아 왔다. 하지만 자연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방법도 터득했다. 인류역사 최초로 관개농업을 시작했으며 소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그 남는 생산물은 교역을 통해 해결해야만 했다. 이 지역에서는 집약적 농업을 통한 잉여생산물이 발생했다. 잉여생산물의 소유자는 이것을 저장하고 유지하고 분배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같이 모여살게 됐다. 이제 사람들은 수확량을 기록해야만 했다. 기호가 생겨났고 드디어 문자가 탄생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이렇듯 이미 기원전 3000년 전에 문자와 수학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별자리들을 찾아냈다. 시계 60분 체계도 만들어냈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적 사회적 체계를 탄생시킨 주역들이었던 셈이다.
⑦ 바그다드 남쪽 300킬로미터 아브라함의 출생지로 잘 알려진 우르에 거대한 지구라트가 남아있다. 고대 수메르인들이 神을 숭배하기 위해 건설했던 탑이다. 우르의 지구라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기원전 3000년경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에 지어진 것이 확실하다. 지구라트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집이란 뜻으로 고대로부터 매우 신성시 되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전쟁의 참화를 비켜나지 못하였다. 이것이 전투 중 발생한 총탄의 흔적들이다. 당시의 제사장들도 이 계단을 통해 신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우르 지구라트는 3층탑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꼭대기에 신전은 달의 신을 위한 제단이다. 맨 밑층의 크기는 약60미터X45미터다. 정사각형이 아니라 직사각형의 모습이었다.
⑧ 지구라트의 규모만으로도 당시 우르가 얼마나 번성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 땅에 묻혀 버렸지만 지금도 왕궁과 주택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오늘날과 달리 강물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 우르는 푸른 나무들이 무성했고 견고한 성벽 너머로는 왕궁이 있었으며 정중앙엔 神을 맞이하기 위한 지구라트가 45미터 높이로 솟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르는 지구라트를 중심으로 약4500 가구 3만5천 명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도시국가였다. 기원전 1800년경 우르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수메르 문명은 그러나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수많은 사막 도시들을 제치고 보르시파가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산성에 송곳처럼 우뚝 솟아있는 보르시파 지구라트,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山이 아니라 모두 흙벽돌로 쌓아만든 거대한 지구라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밑단이 모두 마모되고 중심부만 남아있었던 것이다. 보르시파 지구라트는 건축방면으로 보아 기원전 3000년대 말경에 지어졌을 거라 보이며 함무라비 법전의 기록을 보면 기원전 2000년대 초에 보르시파의 시대(Sida) 신전이 복구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⑨ 함무라비는 기원전 1800년경 이곳 보르시파를 중심으로 舊바빌론을 건설했다. 그는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한 세계 최초의 성문법을 탄생시켰다. 재임 당시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통해 바빌론을 서아시아 최대의 제국으로 완성해낸다. 하지만 그의 사후 바빌론은 또다시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라크 전쟁시 수많은 유물을 약탈당했다는 이라크 국립박물관,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라크 전역에서 발굴된 고대 유물들이 복도를 따라 진열되어 있다. 통로 끝 박물관 저 중앙에서 만난 앗시리아 유물관, 앗시라아는 본디 기원전 3000년경 탄생한 나라였다. 하지만 함무라비에 의해 정복당한 뒤 오랜 기간 숨죽여 살아왔다. 그러다 기원전 14세기 중엽 다시 세력을 키운 그들은 舊바빌론을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일하기에 이른다. 메소포타미아의 중심 도시 바빌론은 앗시리아인들에게 늘 경계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앗시리아의 세나 케립 왕은 바빌론을 파괴했다. 기록에 의하면 세나 케립은 바빌론을 폐허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는 곧 바빌론을 복원했다. 바빌론이 없이는 메소포타미아의 문화가 존재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앗시리아는 니네베를 중심으로 성장을 거듭하여 함무라비가 건설했던 바빌론 전역은 물론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페르시아만에 인접한 이곳 칼데아 지방에서 또 다른 세력이 앗시리아를 노리게 된다. 흔히 칼데아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기원전 수천년 전부터 어업과 목축업 농경을 하며 살아왔다. 이들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었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라는 두 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⑩ 칼데아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주변 지역에 살았다. 인도양과 이란에 가까운 곳이다. 그리고 미개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교육수준이 높았고 부유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영토에 도시도 지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역이었다. 유럽과 인도에 풍부한 물산들이 이곳에 들어왔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때를 기다렸던 이들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그 선두에 네브카드네자르 2세가 있었다. 기원전 605년 왕으로 등극한 그는 곧 바로 함무라비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바빌론 재건에 나선다. 앗시리아로부터 바빌론을 수복한 그는 니네베를 중심한 남아 있는 앗시리아의 잔존 세력을 물리치고 여세를 몰아 서쪽으로 향했다. 그리하여 지중해 연안에 있는 시리아를 비롯하여 예루살렘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정복하기에 이른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을 新바빌론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는 대규모 전쟁을 일으켜 유다 왕국의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이 과정에서 얻은 부를 통해 바빌론을 재건했다. 바빌론을 다시 한번 위대한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⑪ 바빌론은 드디어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야망에 걸맞게 복원되었다. 행렬의 길이라고 부르는 이 진입로를 따라가면 높이 14미터 폭 50미터의 이슈타르문이 가로 막았고 그 내부엔 온갖 수목으로 장식된 공중 정원, 훗날 바벨탑이라 불리는 지구라트도 건설됐다. 바빌론은 고대에 매우 큰 도시였다. 삼각형 모양의 외성 안의 면적은 900헥타르였다. 로마 제국 이전까지 지중해 인근에서 이보다 큰 도시는 없었다. 바빌론을 둘러싼 성벽은 수십 킬로 미터였고 삼각형의 외성 안에 위치한 직사각형 모양의 내부 도시도 매우 컸다. 2.5kmX1.5~2km 정도로 컸다. 고대 세계의 가장 큰 도시였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제국을 건설하는 것보다 제국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수없이 전쟁을 겪었던 바빌론인들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바빌론인들이 쌓았던 성벽, 지금은 반쯤 땅에 묻혀있지만 실제로 훨씬 높아 보였을 것이다. 돌이 귀했던 까닭에 성벽의 재료는 오로지 흙벽돌이었다. 바빌론인들은 흙벽돌 사이에 갈대와 몰타르를 넣음으로써 접착력과 강도를 높였다. 그렇게 높이 14미터의 육중한 성벽은 도시 외부는 물론 왕궁과 신전이 있는 도시 중심부를 겹겹이 에워쌌다. 바빌론은 철옹성의 도시였다. 두께 7미터가 넘는 성벽 위로는 마차가 지나다녔고 곳곳에 망루에선 24시간 침입자를 관찰했다. 그러나 바빌론의 방어시설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물길, 바로 헤자(垓子)였다. 해자는 폭 10미터 깊이 3미터 규모로 이미 건설된 성벽에 따라 이어졌다. 물이 귀한 사막의 도시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시설이었다. 바빌론은 유프라테스 강의 지류 중 하나에 위치해 있다. 강은 직사각형 모양의 내부 도시를 가로 질렀다. 도시 내부에는 여러 갈래의 수로가 있었고 유프라테스 강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수로에 의해 도시는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었다. 이 모든 것은 유프라테스 라는 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해자는 도시 외곽을 둘러쌓을뿐 아니라 도시 내부를 거미줄처럼 관통해 생활용수로도 활용됐다. 때문에 당시 이곳을 방문했던 외부인들에겐 바빌론이 마치 수상도시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 바빌론의 하수 시스템을 재현해 본 것이다. 자연수가 아닌 인공물에 의한 하수 시스템은 인류 역사상 바빌론이 최초로 완성해 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발전된 하수도 시설은 긴 수로와 연결되어 있었고 지하수가 침투되지 않도록 아스팔트로 덮여 있었다.
⑫ 인류가 이룩한 모든 문명은 강에서 탄생했다. 강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진화에 성패가 걸렸던 것이다. 바빌론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은 물길이 달라졌지만 한 때 유프라테스 강이 흘렀던 강가에 있는 이 벽돌 더미는 당시 바빌론인들이 세웠던 다리의 흔적이다.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 그들은 우선 튼튼한 각목을 3.6미터 간격으로 박았다. 그 밑은 구운 벽돌을 이용해서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그런 다음 벽돌의 마모를 막기 위해 지금의 레바논에서 실어온 삼나무로 주변을 에워쌌다. 그리고 그 위 상판을 얹어 완성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세계 최첨단의 공법이자 가장 큰 규모였다. 바빌론엔 최소한 이런 다리가 8개는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다리는 성문으로 이어졌고 성문 마다엔 각기 독특한 이름들이 있었다. 적들이 혐오하는 성문/우라쉬(Urash) 성문, 침입자들이 싫어하는 성문/지바바(Zababa) 성문, 군인의 생명을 지켜주는 성문/아다드(Adad) 성문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도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문이 있었다. 바로 이슈타르(Ishtar) 문, 전쟁의 여신인 이슈타르의 이름을 딴 이 성문은 진입로의 넓이만 22미터에 달했다. 양쪽엔 14미터 높이의 성벽이 사열하듯 에워싸고 있었다. 성문 곳곳엔 수많은 사자와 황소, 용과 같은 부조들이 청색 벽돌 위에 장식되어 있었다. 모두 바빌론의 神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들이었다.
⑬ 마르둑은 바빌론 神들의 우두머리였다. 지금 보시는 용은 마르둑이다. 용의 머리와 뱀의 꼬리를 갖고 있으며 뱀의 가죽으로 되어 있고 사자의 이빨이 있다. 이것은 마르둑 神의 위력을 나타낸 것이다. 마르둑 神은 바빌론 시대 모든 神들의 우두머리였다. 만약 적이 이 성문을 통과했다면 가장 먼저 이 신성한 동물들을 거쳐야 했을 것이다. 황소로 상징되는 날씨의 神 이다르, 바빌론의 주신이었던 마르둑의 상징이었던 용, 그리고 왕을 상징했던 사자, 이 모두는 적이 공포감을 극도로 느낄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장치이기도 했다. 사자, 황소 그리고 용은 금색 자기 벽돌로 장식됐고 배경은 푸른 색 벽돌이었다. 밤에는 금색으로 빛나는 동물의 형상들만 보였을 거다. 밤에 이 길을 걸으면 신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거다. 이슈타르 문을 통과하면 3,4층 높이의 주택들 사이로 도심을 관통하는 중앙대로가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놀랄만한 사실이 밝혀졌다. 대로에 깔린 검은 물체, 이것은 아스팔트였다. 놀라운 것은 또 있었다. 왕궁 한쪽에 마련된 이 드넓은 공간, 연구결과 이곳은 당시의 왕이 외국사신들을 접견하는 알현실로 밝혀졌다. 여기에는 이미 그리스인들이 최초로 발명했다고 전해지는 아치 기술이 사용되고 있으며, 섭씨 1450도를 유지해야만 구워낼 수 있는 청색 벽돌, 즉 최첨단의 세라믹 기술 또한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웅장하게 꾸며진 알현실은 훗날 이곳을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왜 바빌론인들은 한결같이 푸른색을 즐겨 사용했을까.
⑭ 푸른 색이 주를 이룬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오늘날에도 근동지역에서 푸른색은 매우 특별한 뜻을 갖는데 보호와 방어를 의미한다. 기원전 600년대 바빌론은 세계 최대의 도시였고 거주인구만 15만 명에 달했다. 이는 기원전 300년대 로마의 인구가 채 10만명이 안되었다는 점에 견주면 놀라운 사실이다. 유프라테스 강의 항구는 무역선들로 넘쳐났다. 북방의 실크로드와 남방의 해상로를 따라 상인들이 몰려왔다. 무역상인들이 이 지역을 다녔다. 이미 기원전 2000년경에 나라들 간의 교역이 활발했다. 배도 다녔는데 당시 메소포타미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카넬리아는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다. 노점엔 터키에서 생산된 카펫과 중앙 아시아로부터 갖고온 달콤한 포도와 대추야자가 있고 열대 과일 망고도 보인다. 도자기와 향신료, 아프리카의 상아 천금색 같은 수많은 물건이 이곳에서 만나고 이곳을 통해서 세상 곳곳에 흘러갔다. 그런데 아주 재미난 이야기도 전해진다. 기원전 5세기 이곳을 방문했던 그리스의 학자 헤로도토스에 의해서다. 바빌론을 두루 여행했던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쓴 책 역사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자신을 고를 때까지 기다려야한다.
⑮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여성과 관련된 또 다른 내용이 나오는데 바로 바빌론의 결혼시장에 관한 것이다. 남성이 아내로 삼고자 하는 여성을 경매로 샀다. 남자는 자신이 고른 여자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지불한 후 성지 이후의 곳에서 함께 거주한다. 헤로도토스가 본 것은 바빌론의 결혼시장 풍경이었다. 여자들은 강요가 아닌 자의에 의해 무대에 섰고 남자들은 자신들이 마음에 드는 여자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의 시각에선 바빌론은 이처럼 생경하면서도 세상에 온갖 재미난 이야기들이 넘치는 사막 끝, 동방의 경이로운 도시였다. 그리고 이런 얘기들은 훗날 유럽인들의 바빌론에 대한 환상을 더욱 자극하는 요소들로 작용하였다. 바빌론에 새해가 밝아왔다.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이날은 바빌론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성스러운 날이 밝자 모든 성문이 열리고 각 지방에서 찾아온 각기 다른 신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바빌론의 주신 마르둑에 대한 신년 하례의식이 시작된 것이다. 바빌론의 신년 축제는 음력으로 새해 첫 달의 며칠간 열렸는데 대략 3월~4월의 춘분 무렵이었다.
@ 춘분은 낮의 길이와 밤의 길이가 정확히 일치하는 날이다. 바빌론인들에겐 이 날이 새해였다. 또한 이 날은 바빌론의 神 마르둑이 우주의 혼란을 잠재우고 질서를 바로 세우는 날이기도 했다. 축제의 핵심은 바빌론의 神 마르둑이 천지가 창조될 때 그의 원초적인 적인 바다의 神을 이긴 것을 축하하는 내용이다. 약 12일간에 걸쳐 계속된 신년 축제의 마지막 날, 여러 지방의 神들을 태운 행렬이 바빌론의 중심지인 이곳 바벨탑에 모여들었다. 그리곤 탑의 맨 꼭대기에 있는 이 신상, 함무라비 이래 바빌론의 주신이었던 마르둑에게 경배, 바빌론의 왕 역시 이날 마르둑을 통해 한 해 동안 행사할 모든 권력을 위임받게 된다. 이렇듯 바빌론인들은 바빌론을 번성케 한 모든 힘의 근원인 神 마르둑이 부여한 것이고 마르둑이 있는 한 바빌론의 영광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 믿었다.
ⓑ 하지만 훗날 성경 창세기(11장)의 기록은 바빌론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성경에서 묘사된 바빌론인들은 침략자이자 우상 숭배자들이었고 하늘에 도전하는 무모한 세력들이었다. 그 중심에 바벨탑이 있다. 하늘에 닿을만큼 높았다는 탑, 과연 바벨탑의 진실은 무엇일까. 왜 성경은 그렇게 묘사했던 것일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