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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집 지붕위로 달이 기울고 있었다.
어제 낚시터에서 본 달보다는 배가 상당히 꺼진 달이었다. 하현달이 하루 만에 저렇게 빨리 배가 꺼지는 줄 미처 몰랐다.
노인 아니, 형님의 집은 동네에서 외로 떨어진 골짜기의 함석집이었다. 지붕은 함석에 파랗게 색칠을 한 농가지만 안은 입식으로 개조를 해서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어졌다. 단지 불편함이 있다면 아주머니가 계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별을 한 게 아니라 한양에 있는 딸네 집에 외손녀를 봐주러 갔다는 것이다. 사위와 딸이 포도청에서 포졸노릇을 하는 경찰공무원 맞벌이부부라 사는 게 가련해서 불편하지만 형님은 승낙을 하고 보냈노라고 했다.
제가 고쳐줄게요!
그 한 마디가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미처 몰랐다.
지금쯤 영월에 당도하여 김삿갓 어르신과 대작하고 있어야할 시간인데.......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마당에 서있는 보월정에 올라앉아 담배를 물었다. 보월정! 참 참한 이름이고 착실한 반려자다. 아니, 반려 당나귀다. 홍랑은 저도 모르게 보월정의 고삐를 당겨보았다.
타고 달리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노인, 아니 형님의 존함은 김청호씨라고 했다. 처음엔 어르신이라고 불렀다가 홍랑의 나이를 밝히고는 된통 혼이 났다. 막내 동생과 동갑이라며 형님이라고 호명하도록 종용했다. 여태 형님의 무용담을 듣다가 잠시 마당에 나온 것이다.
골목에 묶어둔 개가 이젠 얼굴을 알아보는지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다.
형님은 월남전 참전용사였다. 중사로 전역을 했단다. 처음 보았을 때 빨간 모자를 쓴 것하며 입고 있던 조끼에 달린 여러 개의 배지를 보고 보통 양반이 아니겠구나, 생각했는데 맞아 떨어진 것이다. 메콩강의 정글, 게릴라 소탕작전에 대해 얘기를 듣다가 잠시 나온 것이다. 지원부대가 아니라 전투부대인 해병대소속이었다고 했다.
경운기 엔진의 조립을 오늘 다 하지 못한 것이다.
겨우 분해를 하니 해가 설핏해졌다.
제가 고쳐줄게요!
그 말을 하고 경운기의 연장통을 뒤졌다. 무슨 공구가 있는지 어느 공구가 더 필요한지 파악을 하고 형님을 보월정 뒤에 태우고 면소재지 농기구센터를 향해 달렸다. 형님은 난생처음 타보는 오토바이라며 아이들같이 좋아했다.
보월정 꽁무니에 실려 그렇게 좋아하는 양반은 처음이었다. 경운기가 고장이 난 게 오히려 즐겁다는 투였다. 홍랑의 나이를 묻고는 막내 동생과 동갑이라며 어르신 소리가 듣기 거북하다며 형님이라고 부를 것을 종용했다.
예! 형님! 알겠습니다.
홍랑도 씩씩하게 대답했다.
보월정으로 달리는 사십 리는 금방이었다. 헌데 문제는 거기서 생겼다. 부품이 없다고 했다. 대리점에 주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홍랑이 알기로는 대충 그런 부품정도는 구비를 하고 있지 싶은데 아쉬웠다. 좀 전에 전화를 받은 작자이지 싶은데 직접 보링을 한다니 수가 틀려서 팔지 않겠다는 심보로 없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까짓 단기통 엔진을 보링 하는데 그것도 기술이라고, 어쩌면 경쟁상대가 없는 시골 대장장이라 심술과 자존감이 작용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도 그 생각을 하니 찜찜하다.
방법이 없었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바로 군소재지 고을로 향했을 것인데, 다시 보월정을 돌려 반대방향 군소재지로 달렸다. 거기서 또 사십 리란다.
둘을 실은 보월정은 싫은 내색이나 군소리 없이 달렸다.
군소재지에는 대리점이 있었다. 거기에서 필요한 부품을 구매했다.
오일 링과 압축 링, 피스톤과 슬리브, 크랭크축의 메달, 그리고 개스킷과 엔진오일, 부동액까지 홍랑이 손을 꼽아가며 빠진 것 없이 구매하고 대금은 노인인, 홍랑의 형님이 직접 지불했다. 대금을 지불하며 좀 놀라는 듯했다. 예상했던 금액보다 현저히 싸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다음에 들른 곳은 철물점이었다. 형님의 안내를 받아 철물점을 찾은 홍랑은 경운기의 공구함에 있던 연장은 빼고 필요한 스패너와 렌치를 샀다. 역시 계산은 형님이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필요한 부품을 구매하는 것을 보고 홍랑에게 믿음이 갔는지 보월정 꽁무니에 탄 형님이 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논두렁에 걸터앉아 실의에 찬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동생! 이거 멋진 말이야!
형님! 말이 아니라, 이 놈은 당나귀예요.
홍랑도 한껏 기분이 고조되었다. 돌아오는 길은 뒤에서 형님이 일러주는 대로 지름길로 오니 금방이었다.
도착하여 논바닥에서 신음하는 경운기를 도로로 빼내고 작업은 시작되었다.
홍랑에게는 조수가 생겼다. 농사용 비닐과 빈 물통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을 깔고 오일과 부동액을 빼서 빈 통에 받고 분해를 시작했다. 늙은 조수와 홍랑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동생! 밖에서 뭐 햐? 얼릉 들어와! 마저 마시고 자야재.
보월정에 걸터앉아 지는 달을 보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노인이 재촉했다.
-예 형님! 알겠습니다.
플라스틱 병에 담긴 막소주는 아직 반이나 남아 있었다. 안주는 쇠고기 장조림과 삶은 고구마였다.
-담배 여기서 맘 놓고 피워! 여편네가 없으니 잔소리할 위인이 없어. 동생! 내가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노인, 아니 형님이 홍랑의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메콩강 중간에서 배가 폭파당했다는 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지 거기는 우리는 꼼짝없이 죽었어. 메콩강은 우리나라 한강이나 낙동강처럼 강폭이 좁은 게 아니야. 어느 쪽으로 보나 양양한 바다 같아.......
그렇게 다시 시작된 형님의 무용담을 들으며 홍랑은 소주를 들이켰다. 쇠고기 장조림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짠 맛을 제하면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그 소리가, 그 소리 같아 지겹더라도 들어주어야 한다. 이런 골짜기 외딴집에 홀로 사는 노인네가 얼마나 하고 싶었던 말일까. 거기다가 술기운까지 오르니 할 말은 끝이 없을 것이다. 지겹긴 하지만 들어주는 게. 아니 들어주는 척 하는 게 보시다. 중간 중간에 추임새를 넣어가며 들은 형님의 무용담은, 자정이 가깝도록 계속되었다. 결과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 치열한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동상! 잠이 오는 게 아녀?
-예! 좀 피곤하긴 합니다.
아직도 무용담이 끝나지 않았다.
-그럼 나머지 얘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도록 하고 오늘은 일찍 쉬지.
그래도 할 말이 더 남은 모양이다. 말이 일찍 쉬는 것이지, 잠을 자기에 결코 이른 시간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홍랑은 초저녁잠이 많은 편이라 한계에 달했다는 얘기다.
소주는 조금 남았지만 자리를 털었다.
형님은 안방에서 주무시기로 하고 홍랑은 작은방으로 안내되었다. 형님 말마따나 귀한 손님이라고 보일러를 얼마나 올려 두었는지 방이 후덥지근했다.
홍랑은 보일러를 아예 꺼버리고 자리에 들었다.
분해된 경운기는 도로에 그대로 세워두고 비닐로 덮어두었고 연장과 중요한 부품만 싸서 들어왔다. 형님 말에 의하면 하루에 지나가는 차가 다섯 대도 되지 않으니 그 도로는 마당과 다름없다고 했다. 내일 오전 한 두어 시간이면 조립을 할 수가 있으리라. 지난밤에 낚시터의 텐트에서 우의를 입은 채 웅크리고 잤더니 삭신이 뻐근한 게 잠이 쏟아졌다.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아주 잘 잤다.
아침은 된장국이었다.
노인, 아니 형님은 요리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대파를 숭숭 썰어 넣은 된장국이 구수했다. 된장국이 맛있다며 홍랑은 밥을 두 공기나 비웠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늙은 조수를 데리고 나가 조립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홍랑은 이 부품은 무슨 작용을 하고 이 부품은 원리로 무슨 작용을 한다면서 노인을 가르치면서 조립을 했다. 그건 홍랑이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다시 숙지하는 방법의 하나이기도 했다. 완전히 조립을 하고 점검을 하고 오일과 부동액을 넣고 시운전을 하기까지 세 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부족한 게 있다면 개스킷의 본드를 잊고 사지 않아 급한 대로 폐오일을 발라서 조립을 했다는 점이다. 압축가스만 새지 않으면 되는 일이니 굳이 본드가 없더라도 가능했다. 시운전을 하니 머플러의 배출가스가 무색이었고 제 출력이 나오는 것이었다.
일단 성공!
성공리에 끝이 난 것이다.
노인, 아니 형님은 신기해했고 홍랑은 기분이 뿌듯했다.
홍랑이 경운기를 논으로 몰고 들어가 노인에게 쟁기의 조정법을 알려주었다. 너무 깊게 갈린다 싶으면 이것으로 조정을 하고 경운기의 각도가 얼마만큼 기울어지게 해서 논을 가는 것이 적당한지 알려주고 시범을 보였다.
자지는 만지고 보지는 조지라.
그 말을 들려주며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홍랑이 물었더니 김삿갓의 말이라며 그 뜻을 형님은 또렷이 알고 있었다.
그렇다.
스스로 터득하여 알게 되는 것은 늦게 아는 것이요, 누구의 보호나 가르침을 받아 알게 되는 것은 조지早知, 일찍 깨우친다는 말이다.
홍랑은 시범을 보이고 노인에게 직접 갈게 실습을 시켰다. 두 고랑을 가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보링을 한 엔진은 새 엔진과 다름이 없기에 약 보름 정도를 쓰다가 엔진오일을 한 번 교환하라고 일러주며 농기계센터에 가지 않고 직접 교환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폐오일을 치우고 기름이 잔뜩 묻은 손을 씻는 뒷정리만 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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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영계곡을 달리는 보월정은 정말 스릴이 있었다.
지그재그 도로가 딱 보월정이 달리기에 그만이었다.
이런 산길에서 보월정은 최고의 성능과 위력을 자랑하는 것이다. 커브를 돌며 경음기를 울려보고 기어를 낮추어 엔진소리를 올려보곤 했다. 보월정도 기분이 좋은지 컨디션이 최고였다.
영양에서 노인, 아니 형님 집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출발해서 봉화를 지나고 울진으로 넘어가는 참이었다.
경운기 수리를 완전히 마치고 논을 가는 법을 일러주고 노인이 논을 제대로 가는지 확인을 한 뒤에, 외딴집으로 기름이 묻은 손을 씻으러 들어갔는데 노인, 아니 형님은 후다닥 밥상을 차렸다. 점심을 먹고 가라는 것이었다,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가다가 사먹는 것보다 낫다며 노인이 우기는데 방법이 없었다. 그런 경우에 사양은 돈키호테의 생존수칙에 반하는 것이다. 최대한 맛있게 먹어주는 게 예의고 도리요, 생존수칙에 포함된 내용이다.
점심을 먹고 출발을 하려는데 노인은 노자로 쓰라며 쌈짓돈을 내밀었다.
무슨 노자?
홍랑은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노인은 그냥 보내면 잠이 오겠냐면서, 노자를 주더라도 농기계센터에 끌고 가서 고치는 가격의 반에 못 미친다면서 기어이 홍랑의 쌈지에 찔러 넣어 주었다. 부품가격과 홍랑에게 준 노잣돈을 합치더라도 농기계센터에서 무리하게 요구한 금액의 반절이 되지 않는 건 사실이다.
정말이지 받고 싶지 않아서 버티다가 노인이 애절하게 찔러 넣어주는 바람에 받았던 것이다. 사양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노인이 그게 마음이 홀가분하다면 받는 게 도리다 싶었다.
노잣돈을 받고나서 보월정에 올라앉은 홍랑은 형님께 거수경례를 척 붙였다.
-충성! 육군병장 홍병장 임무를 마치고 복귀합니다. 충성!
복창소리 우렁차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좋았어. 충성!
빨간 해병대 모자를 쓴 형님도 거수경례로 절도 있게 답했다.
기분이 깔끔한, 사나이들의 작별이었다.
봉화를 빠져나와 현동삼거리에 잠시 갈등을 했었다.
태백으로 올라가야 하나 울진으로 넘어가야하나? 어디로 가든 태백산맥을 타게 되어 있다. 태백으로 질러서 김삿갓 어른을 뵈러 영월로 바로 올라가려다가 들은 이야기가 있어 울진으로 보월정의 고삐를 당긴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잘한 일이다. 쇠당나귀 마니아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로가 바로 불영계곡이라고 했다. 이 도로는 마주 오는 수레나 차보다 쇠당나귀를 조심해야하는 도로라고 할 만큼 마니아라는 미친놈들이 많이 찾는 길이라고 했다.
가을에 단풍이 들 무렵이면 쇠당나귀로 길이 복잡할 정도라고 했다.
봉화와 울진의 경계가 되는 고개 정상에는 쉼터가 있고 간이매점이 있었다. 홍랑은 그 고개를 올라가 쉼터에 보월정을 세웠다.
양쪽으로 펼쳐지는 산하의 봉우리가 장난이 아니다. 봉우리마다 다 이름이 있다는데 홍랑은 알지 못한다. 삼각대, 좌망대, 향로봉, 청라봉, 어느 게 어느 건지는 모르지만 우뚝 우뚝 솟은 봉우리가 가을이면 산안개에 드러나면 운치가 있어 사진작가나 화쟁이들이 많이 찾는다고 들었는데 안개가 없어도 감탄이 터져 나올 만했다.
홍랑은 매점에서 깡통으로 된 커피를 하나 샀다.
쉼터 나무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한 무리의 쇠당나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진 방향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몇 구비 밑에서 올라오는데도 지그재그 도로라 쉼터에는 보였다. 저 무리들은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이다.
봉화에서 울진 방향으로 넘어가는 것보다 울진방향에서 봉화로 물을 거슬러 넘어오는 것이 더 운치가 있다고 들었지만 홍랑은 영양에서 현동삼거리를 거처서 왔으니 애석하게도 울진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불영계곡은 예로부터 울진의 소금강이라고도 불리며, 물과 기괴하게 생긴 암석 그리고 나무가 조화를 이룬 명승지로 이름이 드높다. 홍랑의 보월정이 달려온 이 도로는 결과적으로 말하면 태백산맥 등뼈를 종단하여 넘는 길인데 산맥의 도드라진 등뼈 밑으로 터널공사를 하고 있단다. 운치보다는 편리성을 도모하는 인간들의 욕심 때문이다. 아니, 인간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 존재와 소멸의 법칙에 준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소멸이 된다고 했다.
그렇다.
모든 존재대상은 소멸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빠르게는 홍랑의 쌈지에든 노잣돈도 그렇고, 서글픈 얘기지만 홍랑의 육신도 예외일 수는 없다. 이 길도 마찬가지고 더 나아가서는 우주 삼라만상이 소멸의 법칙에 준할 것이다. 예외는 없다. 예외가 있다면 오로지 소멸이라는 단어뿐이다. 터널이 뚫리고 이 길이 없어진다고 아쉬워 말자. 그건 법칙이다. 존재와 소멸이 화두처럼 자꾸 홍랑의 노리에 박히고 있었다.
쉼터에서 울진방향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불영사가 있다. 신라 진덕여왕이 마립간의 왕관을 쓰고 있던 시절에 창건된 절이니 천오백 년이 넘는 고찰이다. 이제는 그 절을 찾는 사람이 아니면 이 길을 이용할 사람이 없어진다는 얘기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한 무리의 쇠당나귀가 쉼터로 요란하게 들어왔다. 그 무리들의 쇠당나귀는 헤어보니 일곱 마리였다.
다가가서 관심을 보이는 게 예의다.
홍랑도 그랬다. 누군가가 다가와 보월정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스릴 가운데 하나의 요소다.
둘러보니 모두가 할리데이비슨 가문의 순수혈통이고 올드카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으니 강릉에서 내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마니아들이 우르르 매점으로 몰려가고 홍랑은 서 있는 쇠당나귀 하나하나를 훑어보았다. 두 마리가 홍랑의 보월정과 동성동본이다. 하지만 생긴 건 다 다르다. 세상에 똑 같은 쇠당나귀는 단 한 마리도 없다. 커스텀이나 튜닝이라는 이름으로 모두들 제 취향대로 불꽃문양을 넣고 꾸미기 때문이다.
남들은 쇠당나귀를 헤아릴 때 한 대, 두 대, 이렇게 대라는 기계에 사용하는 명칭을 쓰지만 오로지 홍랑은 마리, 라는 단위를 사용한다. 이유는 그렇게 불러야 당나귀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여겨지고 영혼을 불어넣어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홍랑은 보월정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걸어서 불영사로 들어갔다. 가면서 보니 계곡은 깊었고 물은 엄청 맑았다. 은어들이 사는 일급수라 여름이면 계곡을 찾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것이다. 천축산 불영사라고 적힌 일주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 기록을 살폈다.
특이한 것은 옛날에 백극재白克齋가 울진현령으로 부임한 지 삼 개월 만에 급병을 얻어 횡사하니 그 부인이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불영사로 와서 남편의 관을 탑전塔前에 옮겨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올렸다. 사흘 만에 남편이 되살아나 관을 뚫고 나오자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탑료塔寮를 환희료, 법당을 환생전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는 점이다. 왜 환생전이라고 했을까, 부활전이라고 하지? 홍랑은 천천히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환생전이라는 법당 밖에서 간단하게 합장을 하며 삼배를 올리고 나왔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리나 산세와 봉우리들은 빼어난 경관을 이루어 홍랑의 입에서 감탄사를 연발하도록 만들었다. 존재와 소멸의 법칙에 의하면 이 경관도 언젠가는 소멸 되겠지. 생각하니 아쉽다.
쉼터에 올라오니 한 무리의 쇠당나귀 족속들은 떠나고 보월정만 외로이 서 있었다. 정상에 해야 할 일은 다했다. 더 남았다면 시를 한 수 읊는 것인데, 쩝! 안타깝다. 이젠 보월정을 타고 쉬엄쉬엄 계곡을 구경하며 내려가면 된다.
울진에는 무슨 온천이 있다고 들었다. 거기에 가서 오랜만에 묵은 때를 좀 벗겨내야 하겠다. 역시 내려가는 길은 스릴이 있었다. 도로가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홍랑의 팔뚝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스릴을 만끽할 만큼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이었다. 모퉁이를 돌면 또 다른 절경이 병풍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보월정에 올라앉은 홍랑은 세상의 모든 길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고개를 다 내려와서 도로가에 보월정을 세웠다. 그리고 바로 옆의 계곡으로 내려갔다. 정말 맑은 물이었다. 소문이 날만 했다. 손을 씻고 맑은 물을 손으로 퍼서 입을 헹구었다. 물은 상당히 차가웠다. 손바닥을 한손 퍼서 마시고는 담배를 빼물었다. 주위의 나무는 싹을 틔우고 있었다.
두두두두
또 한 무리의 쇠당나귀가 고개를 오르게 위해 지나가고 있었다. 어른 보아도 대여섯 마리는 넘겠다. 모두가 할리데이비슨 가문의 혈통들이다.
정말이지 쇠당나귀 라이딩 코스로는 소문이 난 모양이다.
우리 한 번 더 올라갔다가 내려올까? 보월정?
보월정의 엉덩이를 툭 치며 보월정에게 물었다.
한 번 더 올라갔다가 내려고 싶을 만큼 욕심이 나는 길이었다.
울진온천이 아니라 간판에 적힌 상호는 덕구온천이었다. 울진 읍내를 벗어나자 이정표가 있어 찾기는 수월했다. 온천수의 김이 술술 나는 탕은 큼직했고 손님은 한산했다. 물이 유난히 매끄러운 그 탕에 느긋하게 몸을 담그고 있으니 밖에 세워둔 보월정에게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만 즐기고.......
보월정이 투덜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나가서 데리고 들어올 수는 없는 이치다.
탕에서 나온 홍랑은 보월정을 부른 것이 아니라 때밀이 총각을 불렀다.
생전에 그런 일이 없던 홍랑이었지만 쌈지가 두둑하니 호강을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때밀이 총각은 근육이 잘 발달된 키가 후리후리한 총각이었다. 그의 근육을 쓰다듬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돈키호테는 허세 좋게 내질렀다.
스포츠 마사지까지 부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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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음양오행으로 보면 화火에 해당되니 쇠를 다루는 일이 몸에 맞는 것이요.
맞은편에 앉았다가, 홍랑이 그렇게 하라고 한 바도 없는데 주제넘게 안주접시와 소주병을 직접 들고 홍랑의 개다리소반으로 건너와 앉은 중늙은이의 말이었다.
-화극금火克金이라고 했소.
-그렇잖아도 대장장이올시다.
홍랑은 무뚝뚝하게 대답을 했다.
삼척에 있는 싸구려 국밥집이었다. 홍랑은 온천욕을 마치고 깔끔한 몸과 마음으로 해안도로를 타고 삼척으로 올라왔다. 삼척에 닿으니 사람들의 억양이 달랐다. 홍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넘어온 것이다. 바다의 풍경에 취해 있어서 도경계 이정표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달리다보니 삼척읍내였다.
삼척읍내를 한 바퀴 돌고나니 저물녘이었다. 저녁부터 해결하고 잠자리를 구하려는 심산으로, 보월정을 농협주차장에 세워두고 재래시장을 구경하며 천천히 걸어서 한 바퀴 돌다가 만만한 국밥집이 있어 들른 것이다. 혼자서 먹기에 간단한 소머리국밥이었다.
헌데, 맞은편 개다리소반 앞에 앉아있던 중늙은이가 말을 걸었다. 앞머리가 약간 벗겨진 중늙은이였다. 그의 개다리소반에는 소머리수육에 소주가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서너 잔을 마셨는지 소주는 반 병 남짓 남아있었다. 그의 눈길을 의식해서인지 숟가락질이 거북했다.
-선생께선 어디서 왔소?
눈치만 살피다가 드디어 말을 건 것이었다.
-구미라는 고을에서 왔소이다.
-오! 구미! 참 명당자리에서 오셨소이다. 헌데, 관상은 이빠이, 아니 그건 쪽바리 말이고 시쳇말로 끝내주는데 명이 좀 짧네.
-명?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을 전제로 한다고 했소이다. 세상에 안 죽는 사람이 어디 있겠능교? 생로병사의 법칙에 순응해야 되는 거지. 되지도 않은 관상을 가지고. 명줄이 짧기는, 지금 나이에 죽어도 호상이겠다.
홍랑은 퉁을 먹였다. 그 말을 기화로 중늙은이는 주섬주섬 안주접시와 소주를 챙겨서 홍랑의 개다리소반으로 넘어와 마주앉은 것이다.
-입이 보살이라고 방정맞은 소리는 하지 마시고 목생화木生火라고 했는데 부인께서 목木이라면 끝내주는데 아무래도 수水이지 싶소이다. 수극화水克火, 물로 불을 끈다. 그러니 공처가로 살았고 관상에 명줄이 짧은 거요.
-그럼 이 나이에 이혼을 하고 목木부인을 찾아 나서란 말인교?
-아! 그런 게 아니고 단지 내 말은 어디까지나 음양오행에 근거해서........
홍랑은 뒷말을 듣지 않고 중간에서 잘랐다.
-음양오행 따지지 마시고, 그렇게 잘 보시면 당장 내가 오늘 저녁에 어디에서 잠을 잘지, 그것부터 말해보시오. 내가 궁금한 것은 바로 이 문제이오다. 음양오행의 풀이는 나도 들어서 알고 있소.
-오늘 저녁 잠자리? 그거야 쉽지. 바로 우리 집 건넌방이오.
홍랑의 국밥을 끌어넣던 숟가락이 멈칫, 했다. 그리고 낭창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 집 건넌방은 하루 숙박료가 몇 냥이나 되는데?
숙박료 같은 건 받지 않아
혹시 너? 박수무당이가? 난 무당집에서는 안 자! 꿈자리가 사나워.
틀렸어. 박수무당이 아니야.
그럼 점쟁이나 철학관?
틀렸어. 이 바보야. 그냥 혼자 공부한 거야.
중늙은이는 혼자서 공부한 거란다. 동양철학을 혼자서 공부를 하다 보니 눈에 사람이 보이더란다. 확실히 눈에 보이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더러 있어서 좀 더 공부를 해야 되는데 홍랑의 관상만은 정확히 보이더라는 것이다.
은행에 다니다가 십 여 년 전에 명예퇴직을 하고 심심풀이로 공부를 한 작자라고 하며 주머니를 뒤져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을 보니 무슨 동양철학연구소의 법조 김정문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그대의 관상을 보니,
이번에는 홍랑이 먼저 말을 꺼내 기선제압을 했다.
-출세운이 없어 지점장은 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재물운이 있는 것도 아니니 남의 돈만 헤아리다가 늙어서 명함을 들고 다니며 담뱃값 벌이를 할 정도.
대충 그렇지 싶어서 넘겨짚은 말이었다. 홍랑은 관상은 볼 줄 모를 뿐 아니라 관심도 없는 물건이다.
-내 관상에 그렇게 적혀있소이까?
중늙은이 법조는 홍랑의 말에 되물었다.
-탁월한 관상쟁이들은 거울을 보고 자기 관상도 본다고 하던데, 관상을 본다면서 한 번도 거울을 본 적이 없소?
홍랑은 또 퉁을 먹였다.
퉁을 먹이고 곽분양에 대한 설을 풀었다.
곽분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당나라의 명장이요, 정치가인 곽자의라는 실존 인물이었다.
백자천손으로 유명한 곽분양도 동경銅鏡, 구리거울을 보고 자기 관상이 그렇다는 걸 알고 관상 대로 하여 수壽를 늘리기 위해 백百의 아들과 천千의 손자를 두었는데....... 곽분양은 팔자가 좋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지금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곽분양의 행락도라는 병풍이 수천 냥을 호가한다는 얘기까지 했다.
이야기를 다 서술하자면 길다. 홍랑은 아는 대로 두서없이 설을 풀었다. 중요한 건 동경으로 자신의 관상을 보았다는 점이다. 홍랑은 그 점을 강조했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지 모호한 미소를 머금고 이야기를 묵묵히 들은 법조가 술을 권했다.
마시고 싶지만 보월정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고 했다.
보월정?
중늙은이 법조는 보월정이 무어냐고 물었다. 보월정에 대해서 말을 하라면 신이 나는 홍랑이다.
보월정의 가문부터 출력까지 장황하게 미주알고주알 홍랑이 설하자 법조는 그 귀하디귀한 보월정을 어디에 세워두었느냐고 물었다. 시장 옆구리 농협주차장에 세워두었다고 했다.
이 바보야 그러면 술을 마셔도 돼!
그 말을 하며 법조는 주모를 불러 잔을 하나 더 청했다.
술잔?
홍랑의 오늘밤 잠자리가 법조의 건넌방으로 굳어지기에 충분한 주문이었다.
보월정을 그곳에 잘 세웠다고 했다. 법조의 집이 바로 농협 뒤에 있다는 것이다. 골목이 좁아 법조의 나귀도 농협주차장에 세운다는 것이었다. 농협주차장은 본디 농협 소유가 아니라 국유지 공터인데 동네사람들과 농협에서 주차장으로 쓰고 있단다.
법조는 홍랑의 잔을 채워주고는 술잔을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왜 화극금火克金이냐 하면 불로 쇠를 녹이는 이치라 그렇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산소불로 쇠를 절단하는 이치. 그건 홍랑도 알고 있는 이치다. 음양오행도를 보면 공식처럼 나오는 사항이다.
홍랑은 소머리국밥을 깨끗이 비우고 있었고 법조가 공수한 쟁반의 소머리수육은 식어서 굳어 있었다. 법조는 주모를 불러 소머리수육을 한 접시 더 시키고 굳은 것도 데워서 달라고 했다.
목생화木生火는 나무는 제 몸을 태워서 불꽃을 살리니 목木부인을 만났으면 화火인 홍랑에게 제 몸을 다 바쳐 헌신하며 살았을 것인데 아쉽다는 말이었다. 홍랑은 음양오행의 원리를 이해는 하고 음양오행도를 그리라면 보지 않고도 그릴수가 있지만 어떤 부류의 인간이 토土인지, 어떤 인간이 목木인지, 인간을 보고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구별하는 안목이 없었다.
그 구별하는 법을 법조에게 알려달라고 했다.
인마! 그거 구별하는 눈을 지니는 데 십 년이 걸렸어. 술자리에서 잠시 잠깐 되는 게 아니야. 술이나 처먹어. 그런데 대장장이가 되어서 무슨 물건을 만들었어?
구리를 녹여 전선을 만들었어. 구리는 쇠가 아니라 동이라서 몸에 맞지 않는 거 아니야?
상관없어 같은 부류야. 금金에 속해. 구리동銅 자에 쇠金변이 들어가니 금속인 거야.
화극금火克金이라 그런지 대장간에서는 그다지 시달리지 않고 삼십 년을 대장장이 한 생활담을 법조에게 들려주었다. 법조는 홍랑보다 여섯 살이 더했고 동양철학에 심취되어 있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알아 가면서 소주를 세 병이나 더 비웠다.
밤이 제법 깊었다.
그 주막에서는 마지막 길손이 되도록 앉아서 떠들었던 것이다. 인간은 술잔이라는 매체를 놓고 그 시간 정도 마주앉아 떠들고 나면 지니고 있는 벽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홍랑과 법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법조의 얼굴에도 홍조를 띠고 있었지만 홍랑도 알딸딸했다. 적당한 취기였다.
끝에 가서는 홍랑과 법조가 싸웠다.
대판 싸운 것이다.
술값과 밥값을 서로 내겠다고 주모 앞에서 싸웠는데 법조가 쌈지에 넣은 홍랑의 손을 잡고 말했다.
수극화, 수극화水克火! 너는 화火고 나는 수水야, 음양오행 이치상 너는 나를 이길 수가 없어. 물로 불을 확 꺼버린다?
좋아. 그럼 네가 내라. 이 자식아.
홍랑은 할 발 뒤로 물러섰다.
언제 싸웠냐는 듯이 둘은 어깨동무를 하고 재래시장 골목을 빠져나왔다. 재래시장은 파장인지 슬슬 문을 닫는 집들이 보였다.
법조의 집은 과연 농협 뒤에 있었다. 농협주차장에서 보월정을 보고 한참이나 법조에게 자랑을 더 했다.
-오! 참으로 출중한 당나귀일세.
보월정에 대한 법조의 총평이었다. 법조의 집에는, 예상과 달리 무슨 철학연구소라는 간판이 달려있지 않았다.
일반 단독주택이었다. 거실에 들어가니 거실이 아니라 서재였다. 양쪽 벽을 채우고도 모자라 책은 구석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술기운에 대충 훑어보아도 동양철학에 관한 서적이었다. 책 더미를 보니 홍랑은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야! 법조. 마누라는?
한양에 출타중이다. 인마.
내가 주무실 건넌방이 어데고?
책은 거실 뿐만이 아니라 건넌방에도 가득했다. 꿈자리가 어지럽기로 따지면 차라리 박수무당집이 낫겠다.
야! 법조. 인간의 얼굴을 보고 음양오행을 제대로 찾아내려면 이 책을 다 읽어야 하나?
그럼. 쉬운 게 아니야 인마! 난 십년 했어. 그냥 읽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대가리 굴려가며 연구도 해야 되는 거여? 내 대가리를 봐! 그래서 까진 거야.
너도 어지간히 돌대가리인 모양이다. 십 년 한 게 그 정도이니, 나는 손들었다. 너나 공부 더 해라. 나는 그냥 잘래.
법조의 건넌방에 그대로 누웠다. 옷도 벗지 않은 채.
법조의 건넌방에 엎디어 손에 잡히는 책을 가물거리는 눈으로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자다가 갈증에 깨어나니 빗소리가 들렸다.
이게 뭐야?
홍랑은 벌떡, 아니 화들짝 일어나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봄비!
봄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다. 몇 시나 되었을까? 홍랑은 법조가 자리끼로 머리맡에 가져놓은 보리차를 마셨다. 술기운은 완전히 사라지고 숙취도 없었다. 거실로 나왔다.
법조는 안방에서 자고 있는 모양인지 서재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거실은 비어있었다. 거실에 달린 시계를 보니 새벽 네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보월정이 비를 맞고 있을 거다.
보월정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홍랑은 급해졌다. 홍랑은 거실을 빠져나와 좁은 마당을 살폈다. 거기서 헌 비닐을 찾아냈다. 그런 비닐이 집에 있는 걸 보니 법조는 아마도 부근의 공터에 텃밭에 농사를 짓고 있는 모양이었다.
비닐을 들고 농협주차장으로 나갔다. 가로등 밑에 서있는 보월정에게 정성스레 덮어주고 바람에 비닐이 날리지 않게 주위에 있는 벽돌조각을 주워서 여미고 들어왔다.
다시 누웠으나 맨숭맨숭,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홍랑은 씻고 거실의 앉은뱅이 탁자 앞에 앉았다. 그리고 손에 집히는 대로 책을 잡았다. 잡고 보니 풍수에 관한 책이었다. 동양철학을 연구하려면 풍수에 관한 책도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이다. 책은 벌써 법조의 손길이 묻어 있었고 중간, 중간에 밑줄도 그어 놓은 책이었다. 접어둔 페이지부터 읽었다. 무학대사의 도선비기를 풀이하는 책이었다.
읽어보니 재미가 있었다.
명당의 이치와 보는 방법을 꽤나 논리적으로 서술한 책이었다. 읽으며 생각하니 법조가 동양철학에 푹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업서당을 나와 은행에 근무하며 평생을 숫자의 정확성, 수치를 맞추는데 진을 뺐던 법조가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과학적인 근거를 들어 설명한 책이고 철학이니,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도 모르고 읽고 연구를 했던 모양이다.
책은 재미가 있었다.
더 좋은 것은 탁자에 재떨이가 있다는 점이다.
홍랑이 책을 훑어보며 담배를 서너 대쯤 피웠을 적에 안방에서 법조가 나왔다.
인마! 너 책을 안 본다며?
밖에 비 온다. 이 놈아!
홍랑은 책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대수롭잖게 대답을 했다.
비? 잘 됐네. 오늘 여기서 하루 쉬면서 단단히 배우고 가라.
홍랑에게는 우의가 있노라!
내리는 비가 무서운 게 아니고 길이 미끄럽다는 말이다. 한양 간 마누라는 모레 온단다. 마음 놓고 쉬면서 배우고 가거라.
모레? 잘 됐네! 그 동안 홀아비니 분탕질이나 하면 되겠네. 얼른 내가 자리를 피해 주어야 하겠네!
홍랑이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 말을 뱉었을 적에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법조는 이미 화장실로 들어가고 난 다음이었다.
훑어보니 과연 법조가 그 나이에 빠질 만한 책이었다. 도선국사가 조선에 풍수를 들여온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무학이 정리하여 발전시키고 승려들을 중심으로 계승되고 발전한 과학적인 학문으로 정리한 것이 지금의 풍수지리학이다.
무학대사는 속세에 둔 홀어머니가 죽자 평생 향불이 꺼지지 않는 명당을 찾아 묘를 썼다는 말인데, 지금도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이들이 찾아와 좌향과 산세, 명당이 갖추어야할 요건들을 둘러보느라 향이 꺼질 날이 없다고 했다.
야! 홍랑! 곰치 먹으러 가자. 속이 쓰리다.
화장실에서 나온 법조가 제안했다.
곰치가 뭐야?
삼척 명물인데 해장에 끝내준다. 삼척에 왔으면 꼭 먹고 가야할 음식이다.
그래?
홍랑은 책을 덮었다.
둘은 어젯밤에 만났던 재래시장으로 갔다.
봄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객지의 비는 언제나 그렇듯이 궂고 처량하게 내리는 법이다. 삼척의 비도 예외는 아니었다.
*
아리랑~ 아라~ 리오~
황금투구를 쓴 홍랑의 입에서는 정선아리랑의 한가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선은 아리랑의 고장이다. 고개를 가뿐하게 오른 홍랑은 보월정을 타고 내리막을 내려가면 정선읍내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걸 알고 있다.
아침나절에 삼척에서 출발을 했다.
법조와 곰치국을 해장으로 먹고 나오니 비는 멎었다. 비구름이 한쪽으로 몰려가고 말간 하늘이 드러났다.
법조가 하루 더 쉬어가라고 했지만 뿌리치느라고 애를 먹었다.
야! 법조! 너? 내 얼굴에 그려진 역마살이 보이지 않느냐? 보이지 않는다면 그대는 공부를 다시 더 해야 하느니. 그리 알고.
만남도 존재했음으로 소멸한다.
헤어짐이라는 이름으로.
소멸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 알고!
이 말만큼 깔끔한 말은 없다. 다시 만나도 좋고, 우연한 재회가 없더라도 상관없다. 그리 알고! 지저분한 관계를 다 털어버리기에 충분한 말이다. 하여 홍랑은 누구와 헤어질 때 안녕이라는 말보다 이 인사말을 즐겨 사용한다.
아무튼, 그리 알고.
그리 알고를 외치기까지 법조가 발목을 잡는 통에 애를 먹었다. 거기서 하루를 더 유하게 되었다면 홍랑은 필시 관상쟁이가 되었으리라.
삼척을 벗어나 해안도로를 타지 않고 바로 정선으로 향하는 국도에 보월정을 올린 것이다. 싹이 트고 있는 산천은 수려했다. 그 수려한 풍광에 취해있다 보니 벌써 정선인 것이다. 곰치국은 법조의 말대로 든든했다. 한 나절을 달렸는데 아직 시장기를 느끼지 못하겠다. 먹은 거라고는 보월정의 여물을 먹이는 당나귀주막에 들러 그곳에 딸린 간이주막에서 종이컵커피를 한잔 마신 게 고작이었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읍내에 당도하니 마침 오일장 장날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이렇게 때가 잘 맞을 줄이야?
전생에 쌓은 공덕이 많아서 그런 모양이라고 홍랑은 생각했다. 정선의 오일장은 현존하는 장으로는 조선에서는 가장 유명한 오일장이지 싶다. 이 장을 구경을 하기 위해 한양에서 오는 사람들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오일장이 서는 날마다 한양의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유람기차가 있다는 말도 있긴 한데 홍랑이 타볼 일은 없을 거다. 보월정이 있고 또 눈감으면 코를 베어간다는 한양은 가고 싶지도 않은 까닭이다.
사람한테 부대끼는 게 싫어서 나선 길인데 콩나물시루 같은 거기는 왜 가?
정선아리랑 가락은 구성지며 느리다. 발랄한 밀양아리랑에 비하면 엄청 느리다. 예서는 생활 리듬을 그렇게 느리고 구성진 가락에 실어야하는 땅이다. 정선아리랑.
아~ 라~ 리오~~
오일장에는 보월정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보월정을 장터 입구에 있는 우편국 앞마당에 세우고 걸어서 시장으로 들어섰다. 난전에는, 벌써 나왔나? 냉이, 달래가 보였다. 봄은 그 사이 강원도까지 올라온 모양이다.
뭐부터 먹어야 하나?
점심나절이 훌쩍 지났으니 민생고부터 해결을 해야 눈에 보이는 게 있을 거다. 난전을 지나가니 먹자골목이 있었다. 굽고, 지지고, 볶는 골목이었는데 그 규모가 장난이 아니었다. 난전에 천막을 치고 생긴 골목인데 앉아있는 장꾼들의 입성을 보니 모두가 객지사람들로 보였다.
한양에서 정말 기차가 내려왔나?
먹자골목으로 들어가 휘젓고 다녔다.
장꾼들이 앉은뱅이의자에 앉아서 먹는 걸 보니 국밥보다는 메밀전병이 당겼다. 그래! 이곳 특산물이 메밀전병이었지. 홍랑도 젊은 색시들이 메밀전병을 먹고 있는 난전에 앉은뱅이의자를 당기고 엉덩이를 걸쳤다. 주모는 할머니였다. 다른 음식은 만들지 않고 메밀전병만 굽는 집이었다.
-월메나 디릴까?
늙은 주모는 억센 강원도 사투리로 물었다. 은전으로 두 냥 어치를 주문했다. 홍랑이 대장장이로 일을 할 적에 같은 대장장이 중에서 고향이 정선인 작자가 있었다. 홍랑과 동갑내기인 그 작자의 말에는 항상 강원도의 억양이 묻어 있었다. 대장간이 자동화가 되고 같은 날 대장간에서 손을 털고 나왔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혹시 고향으로 돌아왔다면 이 난전에서 만날 수도 있겠다.
쩝. 그런 일이 일어나면 좋으련만.
은전으로 두 냥 어치를 시켰는데 큼직한 접시에 한 접시가 나왔다. 한 눈에 보아도 점심요기로는 충분하겠다.
먹어보니 맛이 장난이 아니다. 이런 맛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토록 유명해진 거겠지. 옆에 앉아서 먹던 새댁들은 아마도 한양에서 온 모양이다. 먹으면서 떠드는데 들어보니 한양 말투다. 그녀들은 먹으면서 늙은 주모를 불러 가지고 가겠다며 두 접시를 싸달고 부탁을 했다. 먹으면서 노닥거리는, 엉덩이가 무거운 새댁들보다 홍랑이 먼저 일어났다. 충분히 점심 요기가 된 것이다.
홍랑은 장터를 돌아다니며 구석구석 둘러보고 버선을 한 켤레 샀다. 빨아 신지 못해서 사흘간 신고 있던 참인데 이미 거지발싸개가 되어버린 것이다. 버선을 갈아 신고 보월정이 있는 우편국 앞으로 오니 포졸 두 놈이 보월정을 둘러싸고 있었다.
뭐가 잘못 되었나?
고개를 갸웃하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포졸들은 보월정을 구경하고 있던 참이다. 한 놈은 아예 보월정에 올라앉아 있었다. 장터에 들어갈 때는 몰랐지만 우편국 바로 앞이 포도청이었던 거다. 친절한 포도청, 간판이 그렇게 적혀 있었다. 가까이 가니 홍랑의 손에 들고 있는 황금투구를 보았는지 젊은 포졸이 말을 걸었다.
오토바이 주인 되십니까?
그렇소만 이건 오토바이가 아니라 당나귀라오.
당나귀? 참 멋있습니다. 이게 몇 시시입니까?
팔팔삼이오. 헌데 아우라지를 어디로 가오?
여량면에 있습니다.
그건 아는데, 여량면을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소이다.
포졸이 들려준 말에 의하면 이쪽으로 쭉 가다가 사거리가 나오면 오른편으로 돌아서 십리쯤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왼편으로 가라고 했다. 아마도 삼거리에는 이정표가 있을 거라고 했다. 들어보니 길은 단순하다. 시골길이란 다 그렇다.
홍랑은 보월정에 올라앉아 시동을 걸었다.
시동을 걸자 포졸들은 화들짝 놀랐다. 소리가 너무 크기 때문이었을 거다.
이야! 이거 소리 죽이는데요.
홍랑은 우편국 마당을 빠져나오며 포졸들에게 손을 들어보였다. 그리 알고. 포졸들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포졸들이 말한 대로 오른편으로 돌아 한 십리쯤 달리니 이정표가 있었다. 아우라지는 자갈이 많은 좁은 개울이었다.
홍랑은 강가에 적힌 안내판을 읽었다.
강원도 무형문화재인 정선아리랑의 발상지 중의 한 곳으로서, 대관령에서 발원되어 흐르고 있는 송천과 삼척에서 발원하여 흐르고 있는 골지천이 합류되어 "어우러진다" 는 강원도 사투리로 아우라지라 불리고 있으며 오른쪽에서 흘러드는 송천을 양수라고 하고 왼편에서 오는 물길인 골지천을 음수라 칭하여 장마철에 양수가 많으면 홍수가 예상되고, 음수가 많으면 장마가 끊긴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야지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물도 음양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구먼.
안내판을 다 읽은 홍랑의 말이었다.
남한강 상류가 되는 아우라지에서 물길을 따라 목재를 한양으로 운반하던 유명한 나루터로 각지에서 모여든 사공의 아리랑 소리가 끊이지 않던 곳이지 싶다.
정선아리랑도 아무래도 이 좁은 개울에서 유래되었지 싶은데 가락이 흘러가는 뗏목처럼 느리고 구성지다.
나루는 예로부터 이별의 장소로 홍랑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이별의 슬픔이 배어 있는 곳이란 말이다. 뗏목과 행상을 위하여 객지로 떠난 임을 나루터에서 애달프게 기다리는 암컷과 수놈의 애절한 마음을 읊은 것이라 정선아리랑이 구성지게 된 연유지 싶다.
그런 유래가 있다는 것 외에는 별로 볼 게 없었다. 홍랑은 물가로 들어갔다. 상류라 그런지 물을 엄청 맑았다. 산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홍랑은 자갈밭에서 납작한 돌을 주어 잔잔한 물에 물수제비를 날렸다. 사람은 없이 빈 계곡이었다. 단지 있었다면 멀리 떨어진 상류에 자갈밭을 거닐며 밀애를 나누는 한 쌍의 처녀총각이 전부였다. 홍랑은 적당한 돌을 찾아서 물수제비를 여러 번 날렸다.
성공이다.
일곱 개의 물수제비를 만드는 데 드디어 성공을 한 것이다. 필시 오늘은 길인을 만날 것이다. 그 일곱 개의 물수제비를 만들기 위해 홍랑은 그렇게 많은 돌을 던진 것이다. 홍랑은 맑은 물에 손을 씻고 보월정이 있는 곳으로 나왔다. 등 뒤에서 아리랑 가락이 추적추적 구성지게 따라오고 있었다.
홍랑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리~ 랑~ 아라~리~~오~`
가락은 아우라지의 물속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홍랑도 소리 내어 그 구절을 따라 했다.
아리~랑~ 아라~리~~오~
그렇게 시작된 아리랑가락은 당나귀 병원을 찾을 때까지 홍랑의 입에서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 그 다음은 가사를 모르는 까닭이었다. 정말이지 정성아리랑은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지 못하는 가락이었다. 고개를 넘지 못해 더 애절했던 것이다.
당나귀병원은 정선 읍내에 있었다. 읍내를 두 바퀴를 돌고서야 찾아낸 병원이었다.
대성 오토바이 센타.
간판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
아무래도 당나귀 엉덩이에 주사를 한 대 맞고 가야할 일이었다.
*
우사에 있는 소들의 인상이, 아니 소니까, 우상이라고 해야 되겠다. 우상은 참 온순해졌다. 이젠 얼굴을 알아보는 모양이다. 소뿐이 아니라 우사를 지키는 도사견도 홍랑을 알아보고 꼬리를 흔든다. 소도 개에 못지않게 주인을 알아보는 영악한 짐승이라고 했는데 단 하루 만에 소들과 안면을 턴 것이다. 짚을 씹던 소들이 사료를 실은 수레를 끌고 들어가자 영악하게 사료인 줄 알고 짚을 입으로 물고 이리저리 흔들며 설레발을 치고 있다.
사료를 너무 일찍 싣고 왔나?
소도둑놈은 소가 짚을 다 먹고 난 다음에 사료를 주라고 했는데, 짚을 다 먹었는지 확인을 하지 않고 사료를 싣고 온 것이다.
소는 송아지까지 합쳐 백삼십 마리 정도가 되는데 기다란 우사에 크기와 종류에 따라서 아홉 칸으로 나누어 놓았다. 소의 크기와 종류에 따라 주는 사료의 양도 틀린다.
먼저 발효시킨 짚을 주고 짚을 어지간히 먹고 난 다음에 사료를 주라고 주인 소도둑놈이 말했는데 소가 짚을 물고 설레발을 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사료를 빨리 싣고 온 모양이다. 어제 저녁은 우사에 딸린 관리사에서 잤다.
소는 위가 두 개가 붙은 짐승이라 되새김을 한다. 짚을 적게 먹으면 되새김을 할 거리가 없어 허기 때문에 자구 운다고 했다. 일단 짚으로 배를 채우고 그 다음에 영양분이 충분하도록 사료를 주어야지 비육우로서 살이 찐다고 했다.
소도둑놈, 진성호씨는 만난 곳은 당나귀 병원이었다.
그 시골병원에 가니 거기는 새끼당나귀 의원이라며 이런 고가의 큰당나귀는 아직 만져보지 못했다면서 의사인 오토바이센터 주인이 난색을 표했다. 아마도 노인들이 들이나 동네 나들이를 하는 새끼 당나귀를 수리하고 파는 곳인 모양이다. 그럼 주사기라도 좀 빌리자고 했다. 홍랑이 직접 주사를 놓으면 간단한 일인데 주사기에 해당하는 연장이 없었던 까닭이다. 연장은 얼마든지 쓰라고 했다. 보월정이 중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었다.
먼 길을 달려오는 동안 심장에 해당되는 카브레이더의 조정 나사가 풀려 혈압이 올라 숨소리가 고르지 못했다. 혈압을 측정해가면서 심장의 박동, 박자를 맞추면 되는 일이다. 그 맥박이 뛰는 박자는 홍랑의 귀에 익숙했으므로 결코 어려운 진료가 아니다. 그 진료를 하고 있는 동안 당나귀병원 원장은 인턴으로 전락해 구경을 하고 있었다. 한창 심장 박동소리를 진료를 하고 있는데 소도둑놈이 들이닥쳤다.
당나귀병원 원장의 선배가 되며 또 사돈팔촌의 이종사촌형님과 친구란다. 그 소도둑놈이라는 작자는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급하게. 수고비는 얼마든지 쳐줄 수 있다고 했다. 마구간을 깨끗이 쳐놓았고 시간에 맞추어 소여물만 주면 된다고 떠들어댔다.
그런 소리를 그냥 흘려들으면 돈키호테의 생존수칙에 반하는 처사다.
-소여물 주는 일이라? 소인이 하겠소이다. 하루에 얼마를 쳐서 주시겠소이까?
-선생께서?
어디서 굴러온 개뼈다귀야? 생면부지의 객지 놈을 어떻게 믿고?
소도둑놈이라는 작자는 보월정과 홍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소를 팔아서 도망가면 어데서 잡는데?
그렇게 쳐다보는 소도둑놈의 작자의 얼굴에는 그렇게 씌어 있었다.
야, 인마! 내가 어디를 봐서 소도둑놈같이 생겼어? 이 소도둑놈같이 생긴 놈아!
속으로 퉁을 먹이며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말을 가까스로 꿀꺽 삼키고 듣는 사람 기분이 상하게 않게 좋은 말로 했다. 그런 일로 싸울 바는 못 된다. 노자가 없어 안달이 난 것도 아니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무학대사의 말이 있소이다. 어전에서 한 말씀이고 임금이 수락을 했으니 국법이나 다름없소이다. 소를 돌보는 일이오? 그렇게 못 믿으면 안 들은 걸로 하고. 소가 비싸긴 하지. 견물생심이라고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지.
그런 소리를 하며 급하다는 사람의 부아를 지르다가 호패를 맡기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호패를 맡긴다는 건 당나귀병원 원장의 아이디어였다. 하루에 금화 열다섯 냥으로 당나귀병원 원장이 또 중재를 섰다. 못 믿는 게 괘씸했지만 워낙 다급하다고 하니 홍랑이 못 이기는 척 그러자고 수락을 했다.
낙찰!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소도둑놈은 베트남 여행을 떠나기로 되어있었단다.
고등학교 동기들과 하는 계모임에서 환갑이 되는 해 기념으로 하롱베이로 삼박사일 여행을 가기로 되어 있어 일찌감치 소를 돌보아 줄 사람을 구해 놓았다는 것이다. 헌데, 구해놓은 작자가 오늘, 캄보디아에서 와서 공장에 다니고 있는 나이가 어린 장모가 교통사고 죽는 바람에 믿는 곳이라고는 나이 많은 사위뿐이라 공장이 있는 대전으로 줄행랑을 쳤다는 것이다. 하여, 일이 꼬였고 다급해졌다는 것이다. 정선 땅에선 우사를 맡길 만한 젊은 사람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젊은이들은 도회로 나가고 전부 노인들만 사는 고을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젊은 사람이라곤 읍사무소와 보건소 직원이 고작이라고 했다.
언제 떠나느냐고 물으니 저녁을 먹고 나귀를 끌고 인천공항으로 가야한다는 게다. 내일 새벽 비행기라고 했다.
당장 가서 소여물 주는 방법을 배우고 여장을 꾸려야 한다면서 다급하게 설치는 바람에 다음에 보월정을 마저 손보기로 하고 소도둑놈을 따라 나섰다.
소도둑놈의 나귀가 앞장을 서고 홍랑의 보월정이 뒤를 따랐다.
앞장 선 소도둑놈은 조금 전에 되짚어 나왔던 아우라지 가는 길로 가는 들어섰다. 아우라지 입구를 지나 십리쯤 가다가 농로로 들어섰는데 마을과는 좀 떨어진 농로 끄트머리 산 밑에 우사가 매달려 있었다. 멀리서 한 눈에 보아도 대형 농장이었다.
그곳에 당도하자 해가 설핏해졌다.
큰 도사견 두 마리가 우시 입구를 지키고 있었고 CCTV가 설치되어 있어서 꼭 붙어 있을 이유는 없고 소여물 주는 시간만 맞추고 심심하면 나들이를 해도 좋다고 했다. 소여물은 암모니아로 발효시킨 짚을 먼저 주고 다 먹고 난 다음에 영양소에 해당하는 사료를 주어야 한다고 했다. 짚은 소의 허기를 채우고 되새김질 하는 데 있고 사료는 비육우의 살을 찌우는 데 있단다. 짚을 다 먹기 전에 사료를 주면 짚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에게 저녁 여물을 줄 시간이었는지 소도둑놈이 직접 시범을 보였다.
홍랑도 실습에 들어가 손수 거들며 보고 배웠다.
어느 칸에 얼마를 주는지 홍랑은 눈여겨보았다. 큰 소들이 있는 곳은 외발수레로 네 수레, 송아지가 있는 곳은 두 수레를 실어다 소가 먹기 좋게 펴주어야 하는 것이다.
홍랑은 외발수레를 보경사에서 끌어보았다. 자신이 있었다.
사료는 큰 황소가 있는 데는 세 포대. 송아지가 있는 칸에는, 여러 마리지만 두 포대를 주면 족하다고 했다. 물은 관리사가 있는 곳에서 펌프 스위치를 올리면 자동으로 구유에 차도록 만든 시스템이다. 마지막 송아지가 있는 칸의 구유에 물이 차면 스위치를 끄면 되고 입구를 지키는 도사견의 사료는 따로 있었다. 소는 하루에 세 번, 개는 아침저녁으로 두 번 만 주면 된다는 것이다. 개는 배가 차면 잠만 잔다면서 적당히 배가 고프도록 만들어야 잘 지킨다는 것이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숙지 끝!
그 다음 관심은 관리사다. 홍랑이 나흘간 기거해야 될 관리사인데 밖에서 보았을 때는 우사에 붙여지은 조립식 패널로 볼품이 없었지만 안에 들어가니 아방궁이 따로 없었다.
아늑했다.
이 아방궁을 나흘간 마음대로 쓸 수가 있다니.
홍랑은 천하를 거느린 진시황이 부럽지 않은 기분이었다.
밥을 해 먹을 부엌살림은 밥솥부터 시작해서 다 있었고 냉장고에는 다리가 부러진 송아지를 직접 잡았다며 쇠고기가 꽉 채워져 있었다.
소도둑놈이 아니라 소백정이구먼.
송아지 고기라 육질이 부드럽다며 육회를 해 먹어도 좋고 구워 먹어도 상관이 없단다.
너? 소고기 좋아하냐?
소도둑놈이 냉장고 문을 열어서 보여주며 물었다.
못 먹는 게 딱 두 가지가 있지.
그게 뭔데?
안 줘서 못 먹는 거 하고 없어서 못 먹는 거!
그건 나도 그래.
소주는 플라스틱으로 된 병이 박스채로 주방에 있었다. 주방과 거실, 침실을 살폈지만 어디를 보아도 사나흘 기거하는 데는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이 욕실의 보일러시설이었다. 더운 물에 매일 몸을 씻을 수가 있다는 점이다. 홍랑이 욕실을 둘러보는데 소도둑놈은 차라리 잘 되었다고 했다.
뭐가 잘되었는데?
그 자식에게 맡겼으면 소여물 주는 시간에만 오고 잠은 집구석에 가서 새파란 마누라 끼고 퍼질러 잘 거 아니야? 야간작업하느라 코피가 터져서 아침에 늦게 나올지도 모르고, 너는 여기서 숙직하잖아?
숙직? 인마! 나도 나가서 자고 올 수가 있어. 참한 색시만 생기면.
미안하지만, 여기는 참한 색시가 없어. 다 퇴물이야.
읍내에는 다방도 없냐?
음! 다방? 그런 물건도 괜찮다면 여기 데리고 와서 자라. 괜한 여관비 낭비하지 말고.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그리 알고.
소여물과 더불어 홍랑의 여물에 대해서 다 설명하고 소도둑놈은 나귀를 돌려서 서둘러 떠났다. 집에 들러 여장을 꾸리고 가다가 눈을 좀 붙이고 가려면 바쁠 것이다. 교통이 불편한 고을이라 인천공항까지는 자신의 나귀를 이용할 수밖에 없노라고 했다. 계원들은 한양과 경인지역에 산재해 있는데 새벽에 인천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인마! 소를 피둥피둥하게 만들어 놓을게. 걱정하지 마.
홍랑은 소도둑놈의 나귀 꽁무니에 대고 소리쳤다.
소도둑놈을 보내고 홍랑은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쌀을 씻었다. 점심을 메밀전병으로 때워서 그런지 배기 실쭉했다. 소는 이미 소도둑놈과 실습으로 저녁을 주었고 이제는 홍랑의 배를 채워야 했다.
홍랑의 배가 든든해야 소가 살찐다.
여기에 있는 동안은 홍랑도 비육우다. 스스로 사육을 하며 또 사육을 당해야 하는 입장이다. 최대 정성을 기울려 진수성찬을 만들어야지.
암! 그렇고말고.
밥을 하다가 생각하니 개 사료를 주는 것을 잊었다. 일단 개와 친해져야 한다. 그래야 홍랑을 보고 짖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니 그것이 우선순위로 해야 할 일이다.
홍랑은 저녁을 준비하다가 말고 나와서 개 사료를 찾았다.
그렇게 짖어대던 개가 사료를 바가지에 담아 들고 가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자고로 개와 친해지려면 대가리를 쓰다듬어 주어야 한다. 홍랑은 그 사실을 기억하고 사료를 처먹는 도사견의 머리를 번갈아 가며 두 마리 다 쓰다듬어 주고 들어와 반주로 소주를 마셨다. 안주와 반찬은 소도둑놈이 말한 육회나 구운 고기가 아니고 좋은 부위를 골라 생고기로 먹었다. 찾아보니 참기름과 소금이 있었다. 소금을 뿌린 참기름에 찍어서 먹었는데 육질이 연해서 혀에서 살살 녹았다.
소도둑놈은 소의 여물을 주는데 가급적이면 저녁은 늦게 주고 아침은 빨리 주라고 했다. 소가 공복상태로 있을 적에 살이 빠진다는 말이었다.
저녁 먹은 걸 설거지를 하고 우사에 불을 켜고 점검차원에서 우사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배가 찬 소들은 홍랑을 그야말로 소 닭 보듯 했다. 진짜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고락을 같이 해야 할 홍랑인데 소들은 몰라보고 있었다. 봄바람이지만 골짜기의 밤바람은 차가웠다. 우사의 불은 밤새 밝혀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소가 장난을 치거나 싸움을 하다가 다치는 일이 없는 것이다.
*
아무래도 소 사료를 서둘러 싣고 온 것 같다.
소가 짚을 물고 흔들며 설레발을 치는 걸 보니.
아침여물은 빨리 주는 게 좋다고 하기에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서 식전에 소여물을 싣고 우사로 들어갔다. 공복상태인지 소들이 짚을 보고 환장을 했다. 적당한 양을 맞추어 소들이 먹기 좋게 골고루 펼쳐주고 개 사료를 주고 바로 소 사료를 수레에 실었는데 그게 불찰이었다. 소가 짚을 다 먹었는지 미처 확인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일단 사료를 주고 짚을 처먹나 안 처먹나 보고 버려진 짚이 많으면 다시 짚을 좀 더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소여물을 주고 개 사료까지 주고 펌프를 돌려 물이 구유 끝까지 찼는지 확인을 하고 들어가 홍랑 자신이 먹을 여물을 준비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우사를 다시 한 번 더 확인을 해야겠다.
아무래도 오늘은 아침을 먹고 빨래를 좀 해야 할 것이다.
보경사 헌수에게 얻은 개량한복도 그렇고 갈아입은 자신의 옷도 때가 꼬질꼬질 했다. 품위유지를 준수하는 홍랑이지만 빨아서 입을 짬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다. 개량한복은 보월정을 타는데 어울리지 않고 거추장스러우니 여기에서 소여물을 줄 때 작업복으로 입다가 버릴 생각을 하고 읍내 나가서 청바지와 점퍼를 하나 사서 입는 게 낫겠다.
오전 사료는 주었으니 점심나절 까지는 자유시간이다.
아침을 먹고 우사를 찬찬히 둘러보니 소도둑놈이 우사를 비울 준비를 단단히 했는지 소똥을 치울 거리가 없이 깨끗했다. 허드레 시간에 무얼 하라고 저렇게 소일거리를 없앴을까? 아쉬웠다. 쩝.
다만, 오늘 새벽에 사료를 너무 일찍 싣고 간 탓에 소가 설레발을 치느라 흩어진 짚을 소가 밟고 있었다. 큰일도 아니다. 저건 짬이 날 때 소도둑놈이 모르도록 치우면 되는 일이다. 설마 짚의 양까지는 파악을 못하겠지.
인간은 모름지기 이렇게 실수를 하면서 배워가는 것이다.
홍랑은 우사 칸칸이 돌아다니며 그렇게 버려진 짚이 얼마가 되는지 눈대중으로 파악하고 두 수레를 실어다 소가 먹기 좋게 다시 펴주었다. 끝까지 다 펴주고 기분 좋게 손을 털었다. 헌데 이 빌어먹을 소가 배가 찼는지 또 짚을 물고 흔들며 설레발을 치고 있었다. 홍랑은 옆에 있는 빗자루를 들고 설레발을 치는 소의 주둥이를 때렸다. 그리고는 쇠파이프 사이로 대가리를 내민 소들의 주둥이에 닿지 않도록 짚을 앞으로 다 당겨냈다.
굶어라! 이 소대가리같이 멍청한 새끼들아!
홍랑은 보월정을 농장 밖으로 꺼내고 문단속을 했다. 게으른 해가 그제서 뒷산 산마루에 올라오고 있었다.
개새끼들이 어딜 가느냐고 짖었다. 아니다. 잘 다녀오라는 인사였다.
그래! 아저씨 장보러 간다. 금방 올게!
그 소리가 보월정 뒤로 날아가 잘게 부서졌다.
장날이 아니라 그런지 아침 장은 썰렁했다.
청바지를 하나 사려고 했는데. 쩝.
마냥 장터에서 장이 서도록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제 갔던 당나귀병원으로 갔다. 문이 닫히기는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가서 시간을 보내지?
다방은 문을 열었겠나? 모닝커피나 한잔 할까?
생각하니 농장의 관리사에 다른 것은 다 있는데 커피가 없었다.
수일 안에 수작을 부리려면 일찌감치 다방 마담에게 얼굴 도장이라도 찍어주는 게 괜찮겠다.
보월정을 당나귀병원 앞에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다방을 찾아 슬금슬금 내려가고 있는데 바로 앞에 읍사무소라는 관가가 있었다. 홍랑은 거기로 들어섰다. 시골 읍이라 민원인은 없는지 대기 번호표를 뽑을 필요가 없었다. 두리번거렸지만 그런 걸 뽑는 기계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참한 규수가 물었다. 강원도 사투리가 아니었고 미색이 고운 얼굴이었다.
-대기 번호표를 어디서 뽑죠?
-호호호. 여긴 그런 거 없어요. 무엇을 떼러 오셨나요?
커피 한 잔 주면 가르쳐 주지!
뭘 떼러 왔는지 먼저 가르쳐 주면 한 잔 주지!
이 바보야! 난 커피 안마시면 생각이 잘 안 나!
곧장 커피가 대령 되었다. 참한 규수의 섬섬옥수로 타온 것이다. 커피맛보다 종이컵 언저리에 처발라 준 진한 손맛이 달콤하겠다.
-선비께선 어떤 문서를 떼러 오셨소이까?
-이 고을을 스쳐지나가는 과객인데 이 고을엔 무엇이 유명한지 정보를 입수하러 들렀소이다. 원님을 불러서 원님께 직접 물어야 하는 것이옵니까?
홍랑은 머리를 조아렸다.
이 바보야! 저기 입구에 관광안내서가 있잖아?
돌아보니 관광안내서가 여러 종류가 잡지 가판대처럼 생긴 곳에 꽂혀있었다.
이거, 가지고 가도 되나?
얼마든지. 이 바보야!
그리 알고.
홍랑은 손을 번쩍 들어 보이고 관광안내서를 두 종류를 뽑아 들고 관가를 나섰다. 안내서를 대충 훑어보니 가는 길까지 상세하게 그려진 것도 있었다. 유용하게 써먹을 물건이다. 이미 모닝커피는 마신 다음이라 다방은 찾을 필요가 없었다.
당나귀병원 앞으로 가니 아직까지 문을 열지 않았고 키가 아담한 노인네가 앞바퀴에 펑크가 난 새끼당나귀를 끌고 나타났다. 이 병원 원장은 저런 노인네의 당나귀를 고쳐주고 밥을 벌어먹는 모양이다. 생각하니 참 복 받을 양반이다. 이런 고을에 장사가 시원찮다고, 유일한 당나귀병원을 도회로 옮겨가면 저런 노인네는 어디 가서 당나귀 치료를 받나?
-아직 문을 열지 않았어요. 기다려야 해요.
-기다리긴 뭘 기다려! 이 친구 집이 바로 뒤에 있는데?
상투머리가 아니라 백발을 곱게 빗어 넘긴 노인은 당나귀를 보월정 옆에 세워두고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노인은 당나귀병원 원장을 데리고 나와 문을 열었다. 당나귀병원 원장은 홍랑에게 먼저 인사를 했고 아침 여물을 주고 나왔느냐고 물었고 사돈팔촌의 이종사촌 형님이 되는 소도둑놈은 인심이 후해서 마음에 들게 하면 계약한 금액보다 웃돈을 더 쳐서 줄 거라고 했다. 홍랑은 기분 좋게 여물은 잘 주고 나왔으며 그런 노자는 기대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어제 빌린 수술도구를 다시 빌렸다. 홍랑은 보월정의 심장 박동소리를 들으며 적절한 혈압을 찾아서 귀로 진료를 했다. 그 시간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새끼당나귀 고치는 걸 지켜보던 노인이 보월정에 관심을 가졌다. 얼마짜리 당나귀냐고 묻는 것이었다. 홍랑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당나귀라고 하며 부르는 게 금이라고 했다. 노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질문에 답을 내렸다.
-비싸겠는데? 천 냥은 충분히 넘겠는 걸!
노인의 새끼당나귀는 타이어를 빼서 상태를 보고는 교체하기로 했다. 홍랑이 보아도 그게 고생을 덜하고 싸게 먹히지 싶었다. 혈압을 다 맞춘 홍랑은 당나귀병원 원장에게 그리 알고를 외치고는 보월정을 타고 장터로 내려갔다. 장터에 포목점에는 문이 열려 있었고 갖가지 옷이 진열되어 있었다. 주인인지, 앙증맞게 생긴 두건을 쓴 젊은 아낙네가 홍랑을 맞았다.
어서 옵쇼.
이미 어서 왔소.
홍랑은 포목점을 둘러보고 청바지를 골라 허리에 맞추어보고, 또 길이를 맞추어보고 길이를 가위로 잘라 달라고 했다. 요즘 바짓단을 박음질해서 입는 작자는 없다. 멀쩡한 바지를 일부러 찢어서 입고 다니는 세상인데, 수선집이 어딘지 모르거니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아낙이 바짓단을 자르는 동안 몸에 맞는 점퍼도 하나를 골랐다.
이기 전부 얼마고?
계산을 하니 너무 싼 것이었다.
귀를 의심하고 다시 물어도 변함없이 은전 열두 푼이라는 것이었다.
옷이라는 물건을 사보지 않아서 품질은 모르겠지만 홍랑이 예상한 은전의 반절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자고로 시장 물건은 흥정을 하는 재미로 사야 하는 건데 너무 싸서 그런 옥신각신하는 재미란 기대할 수가 없었다. 쩝. 아쉽네.
쌈지를 푸니 젊은 아낙네는 오늘 해장의 마수라고 하면서 기분 좋게 버선을 한 켤레 덤으로 주었다. 버선도 필요한 물건이었는데 깜빡한 것이다. 그걸 받고 그냥 넘어갈 홍랑이 아니었다. 하여 속에 입을 셔츠도 하나 더 골랐다. 속옷은 법조를 만나던 날 재래시장에서 두벌이나 샀으니 필요가 없다.
옷을 종이봉지에 넣어서 건네주며 젊은 아낙네는 오늘 마수걸이인데 외모가 출중하고 입이 무직한 사내가 와서 장사가 잘 될 거라는 말을 했다. 기분이 나쁜 소리는 아니었다.
홍랑은 옷이 들어있는 종이봉투를 괴나리봇짐에 넣고 보월정에 올라앉았다. 젊은 새댁이 포목점 밖까지 따라 나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깔끔한 인상이었다.
그리 알고.
왔던 길을 되짚어 가면 되는 것이다. 읍내를 벗어나 봄바람이 하늘거리는 시골 도로를 한참 달리다가 홍랑은 길에서 불법 유턴으로 보월정을 돌렸다. 커피를 산다는 걸 깜빡한 것이다. 다시 달려왔던 길을 되짚어 읍내 초입에 들어서니 만물상이 있었다. 거기서 홍랑은 일회용 믹스커피, 아니 작대기커피를 작은 것으로 한 통을 들고 은전 두 냥을 던져주었다.
보월정 심장이 뛰는 소리 쌈빡하고,
마주치는 봄바람은 홍랑의 기분을 한껏 고조시켰다. 농장으로 돌아오니 점심여물을 줄 시간이었다. 개도 꼬리를 흔들고 소들도 멀뚱히 쳐다보면서 반기고 있었다.
이젠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
먼저 아침에 소의 대가리가 닿지 않도록 멀찍이 떼어 놓은 짚을 발로 툭툭 차서 소가 먹도록 하고 그 사이 수레에 적정량의 짚을 실어다 소들이 먹기 좋게 펴주었다. 그리고 관리사로 들어가 아침에 해둔 밥으로 홍랑의 배를 채웠다. 느긋하게 커피로 입가심을 하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와서 우사를 돌아보니 소가 짚을 깨끗하게 처먹었다.
진즉에 그럴 것이지.
홍랑은 빗자루를 쥐고 소 주둥이를 때릴 일은 없었다. 생각하니 그런 일은 금물이다. 설치해놓은 카메라에 찍혀 녹화가 될 것인데 후일에 소도둑놈이 돌려서 보기라도 한다면 그런 낭패가 없다.
깨끗이 먹은 걸 확인하고 사료를 실었다. 사료포대를 본 소들이 환장을 하는 것이었다. 이제야 터득을 했다. 역시 자지는 만지고 보지는 조지라는 말이 맞다.
*
오늘도 집에 다녀간 흔적이 없다.
매일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먼저, 다녀간 흔적이 있나 없나, 찾는 게 일이다. 아침에 어질러놓고 간 그대로다. 이젠 기다리다 지쳐서 욕을 할 기운도 없다.
종호씨 말마따나 정말 배를 타러 간 것인가?
오늘은 아이들 배식을 마치고 설거지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종호씨 타이어가게에 들렀었다. 너무 답답해서 들리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 일삼아서 들렀다. 종호씨 가게도 장사가 시들한지 썰렁했다. 경기가 좋지 않아 하나있던 직원을 내보내고 종호씨가 직접 한다고 했다. 어디를 가나 경기가 안 좋다는 말뿐이다.
마침 손님이 없어 종호씨가 타주는 싸구려커피를 마시며 마주 앉았다.
-어디 가서 무슨 일이 난 게 아닐까요?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는데?
종호씨는 그런 걱정은 말라고 했다.
사고가 났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금세 연락이 온다고 했다. 종호씨 생각으로는 아마도 어디 배 타러 갔지 싶다고 했다.
-배요? 무슨 배?
평소에 와서 재취업이 어렵다며 어디서 들었는지 원양어선은 손이 모자라 외국인들에게까지 손을 빌린다며 그곳에 끼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것이다.
김강자여사는 처음 듣는 소리다.
여기서 다른 공장에서 경력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허드렛일이나 하는 잡부가 되어 최저임금을 받으니 담뱃값도 안 된다면서 배를 타고 나가면 전에 다니던 공장의 임금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했는데 종호씨가 반대를 했다고 했다. 그것도 원양어선이라야지 그 정도를 받는다고 했다. 전화가 안 되는 걸 보면 필시 그럴 거라고 종호씨는 짐작하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도 힘이 부쳐서 그만 두는 일을 이 나이에 할 수가 있겠냐고 번번이 퉁을 먹이며 만류를 했는데, 그것 때문에 종호씨에게 연락도 안 하고 사라졌지 싶다고 종호씨는 단언했다.
종호씨의 말에 의하면 원양어선은 한번 나가면 짧게는 육 개월 길게는 일 년이 넘게 있다가 돌아오는 배도 있다고 했다. 알레스카가 어디 붙었는지는 모르지만 알레스카 쪽으로 명태를 잡으러 나가는 배는 일 년이 넘도록 있다가 동태를 한 배 가득 차야지 싣고 들어온다는 말도 들었다는 것이다. 가끔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혹한 직업을 보면 그런 게 나온단다.
김강자여사는 종호씨 앞에서 말했다.
-지금 돈 문제가 아니에요. 나이가 있으니 담뱃값벌이면 족하지요. 그만큼 일을 했는데 또 놀면 어때요? 내가 돈을 안 번다고 구박이라도 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 혹시 돈을 융통해 간 건 없나요?
종호씨는 그 물음에 고개를 흔들었다.
전혀 돈 얘기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건 다행이지만 이 인간이 늙어서 또 객기를 부리다가 무슨 일을 내는 건 아닌가? 숙경이에게도 뭐라고 딱 부러지는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만약 원양어선을 타고 나갔다면 하나 있는 딸 결혼식도 못 보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아이들 식을 올리지 않고 동거부터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강자여사가 주제가 넓다고는 하지만 그런 일을 종호씨와 상의할 노릇이 아니다. 아직은 그렇다.
종호씨는 곧 무슨 연락이 있을 거라며 기다려보자고 했다.
김강자여사는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종호씨는 그 말에 또 고개를 저었다.
그런 불길한 상상은 하지 말고 기다려보잔다.
종호씨의 말을 들으며 그 사이에 어쩌면 집에 와있을 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김강자여사는 식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집으로 서둘러 돌아왔는데 예감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집에 오기는커녕 꿩 구워 먹은 소식이다.
김강자여사는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없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주먹을 쥐고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드리다가 옆으로 픽, 쓰러진다.
포기를 했는지, 어지간히 피곤했는지 모르겠다.
*
송아지를 낳았다.
홍랑이 들어가서 빨래를 깔끔하게 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헌데 어디를 보아도 빨랫줄은 없었다. 해서 봄볕이 잘 드는 곳에 짚을 펼쳐놓고 그 위에 늘고 나서 우사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다.
암소 두 마리만 따로 넣어둔 칸에 앙증맞은 새끼 송아지가 한 마리가 늘어난 것이었다. 이제 막 낳았는지 어미 소는 제가 낳은 태를 먹고 있었다. 홍랑이 알기로는 소라는 짐승은 그 시간만 육식동물이 되는 것이다.
이거 횡재했네.
새끼를 낳을 소가 있다는 말을 소도둑놈에게 들은 바가 없다.
암소 두 마리만 따로 넣어둔 칸이니 임신한 소를 따로 분리사육하고 있었다는 말인데 바빠서 그랬는지, 깜빡했는지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
금세 낳은 송아지는 털이 양수에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동그란 눈을 뜨고 처음 보는 세상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저 송아지가 난생처음 보는 인간이 바로 홍랑이다. 홍랑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렇다면 저건 내 새끼다.
내 새끼라고 생각하니 너무 귀여웠다. 시골에서 자란 홍랑은 송아지를 낳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소의 출산과정에서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건 아니다.
옛날 할머니들은 송아지를 낳으면 마구간 앞에 개다리소반에 맑은 물을 한 대접 올려놓고 삼신할머니께 잠깐 빌기도 했는데 홍랑은 그런 심정을 이제야 이해하겠다. 홍랑도 바로 그런 심정이었다. 양수가 식었는지 금세 낳은 송아지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저걸 좀 닦아주어야 하겠다. 홍랑은 수건을 가지러 관리사로 내달렸다. 가만히 생각하니 다방아가씨를 불러온다는 생각은 대대적인 수정이 필요했다.
부정 탄다.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거다.
이거? 농장 문 앞에 금줄이라도 쳐야하는 거 아니야?
작금에는 찾기 힘들지만, 옛날 베이비붐 세대에는 금줄을 치는 집이 참 많이 눈에 띄었다. 새끼줄을 거꾸로 꼬아서 아들을 낳으면 빨간 고추를 매달고 딸을 낳은 숯을 매달던 시절이었다. 금줄이 쳐진 집 삽짝 앞을 지나가도 아들을 낳았는지 딸을 낳았는지 알 수 있었던 시절이었고 금줄이 쳐진 집에는 동냥을 얻으러 다니던 거지도 피해가던 시절이었다.
농장 앞에 금줄을 친다면 고추를 매달아야 되나, 숯을 매달아야 되나?
홍랑은 잠시 헷갈렸다. 미처 송아지가 암송아지인데 수놈인지 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수건을 가지러 들어간 홍랑은 보일러 물을 한 양동이 받아 들고 나왔다. 미지근한 물이었다. 물수건을 만들어 찐득한 양수를 닦아줄 요량이었다. 쇠파이프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도 어미 소가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어미 소는 이미 홍랑을 주인으로 간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지근한 물을 수건에 적셔 송아지를 정성스레 닦아주며 보니 수놈이었다. 양수에 퉁퉁 불은 불알망태가 한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송아지의 양수를 닦아주기는 처음이다.
내 새끼야! 너는 나와 전생에 각별한 연이 있는 거야.
송아지에게 다정하게 속삭였다. 엉덩이를 닦아주면서 보니 송아지 엉덩이에 쇠똥이 묻어 있었다. 홍랑은 송아지를 살짝 안아서 뒤집고 엉덩이에 물을 조금 부어 소똥을 깔끔히 제거해 주었다. 송아지는 본능적으로 일어나려고 앞다리를 세우며 비틀거렸다. 어린 시절 경험한 바에 의하면 송아지는 낳은 지 한 시간정도가 지나면 일어서서 어미 소의 젖을 물고 빤다.
아무래도 이 칸의 소똥은 치워야겠다. 송아지가 누울 곳이 없다. 짚을 한 아름 가져다 구석자리에 송아지가 누울 곳을 만들어주고 거름자리 옆에 있는 똥을 치우는 수레를 찾았다. 그리고 플라스틱 삽도 찾아냈다. 우사 밑바닥은 콘크리트로 되어 있어서 삽질하기가 수월했다. 그 칸을 깨끗이 청소하니 소똥이 두 수레였다. 그 사이 송아지는 벌떡거리다가 일어서서 어미 소의 젖을 빨고 있고 어미 소는 혀로 송아지를 핥아주고 있었다.
소똥을 만진 김에 마저 하자. 빼어든 칼이니.
홍랑은 수레를 끌고 다니며 모든 칸의 소똥을 말끔하게 치웠다. 엉덩이에 소똥이 묻은 소는 빗자루로 쓸어내려 깨끗하게 만들어주었다. 모아두면 일이지만 그때그때 치우면 소일거리로 적당하다. 운동 삼아서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은 평생 하라고 해도 하겠다. 주인인 소도둑놈이 오면 여기서 일을 하면서 눌러 산다고 할까? 당연히 그러라고 하겠지만 그렇게 눌러앉으면 보월정이 서운해 할 터인데 고민이네. 쩝
소똥을 다 치운 홍랑은 새끼를 낳은 어미 소에게 사료를 한 바가지 퍼다 주었다. 산고에 고생했을 소에게 보너스로 준 것이다. 거듭 보아도 송아지는 참 예뻤다. 홍랑은 벌 써 한 시간이 넘게 송아지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이미 송아지가 있는 칸 앞에는 관리사 앞에 있던 플라스틱의자가 놓여있었다.
그거 눈이 즐겁네.
우사에 불을 밝히고 짚으로 여물을 주고 짚을 먹는 동안 저녁을 먹던 홍랑이 숟가락을 멈추었다. 그리곤 후다닥 관리사를 박차고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임신한 소가 송아지에겐 위험한 대상이 된다. 어미 소는 제 새끼라 본능적으로 핥아줄 것이 분명하니 위험한 존재가 아니지만 옆의 소는 아무래도 그냥 두면 안 되겠다. 별일이 없더라도 같이 한 우리에 두어서 덕이 될 건 없는 이치다. 소도둑놈은 다리가 부러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했는데 저 혼자 놀다가 다리가 부러지지는 않았을 것은 당연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홍랑의 마음이 바빠진 것이다.
미루어서 될 일이 아니다.
우사에는 비어있는 칸이 여유가 얼마든지 있었다.
먼저 빈 칸의 문을 열고 사료를 한 바가지 퍼서 미끼로 가져다놓고 새끼 송아지가 있는 칸의 문을 열고 빗자루로 등을 두드려 임심한 소를 몰아냈다. 임신한 소는 빈 칸으로 사료를 보고 혀를 날름거리며 그곳으로 들어갔다. 얼른 쇠파이프로 된 문을 닫았다.
분리 성공!
뭔가 불안했고 아슬아슬했는데 바로 그것이었다. 홍랑은 손을 털고 다시 관리사로 들어와 식어버린 밥과 소고기찌게를 비벼서 후딱 먹었다.
이 고을에는 뭐가 볼 게 있나?
소가 짚을 다 먹은 것을 확인하고 사료를 실어다 먹기 좋게 주고 구유에 물을 확인하고 들어와 배를 깔고 엎드렸다. 홍랑이 배를 깔고 보고 있는 건 아침나절 관가에서 가져온 관광안내도다. 두 종류인데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화암동굴.
나전역.
아라리촌 아라리마당.
쭉 훑어보았지만 관심이 가는 곳은 그 세 곳뿐이었다.
설명을 자세히 훑어보니 아라리촌 아라리마당에서는 양반증서도 준단다.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상품으로 별 걸 다 만들었군!
구태여 그런 걸 받지 않아도 홍랑은 이미 양반반열에 올랐다. 상놈이 어찌 보월정을 타고 다니겠는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보월정으로 인해 대장장이였던 홍랑이 양반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고마운 보월정!
입맛을 쩍 다시고 다시 관광안내도를 훑어보았다. 그 나머지는 아이들의 놀이동산이다. 바이크레일, 모노레일, 관심이 없는 관광지다. 어디 불전함을 털만한 참신한 절은 없을까? 한나절 만에 다녀올 수 있는 그런 절이었으면 좋겠는데, 쩝.
그 생각을 하다가 홍랑은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정암사!
태백산 정암사가 이 부근 어디에 있지 싶다. 홍랑이 알기로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오대적멸보궁 중의 하나로 정선에 있다는 걸로 알고 있다. 홍랑은 다시 관광안내도를 살폈지만 정암사는 나와 있지 않았다. 예전에는 오대적멸보궁을 다 외웠는데 지금은 자신이 없다. 홍랑은 앉은 자리에서 손을 꼽아가며 헤어본다. 스스로를 시험하는 일이다.
첫 번째로 태백산 정암사는 정선에 있고, 사자산 법흥사는 영월에 있고, 그 다음이 양산 통도사, 그리고 설악산 보정암, 그 다음이 어디더라?
손가락 네 개는 굽혔는데 하나가 문제다.
-그게 어디더라? 내가 늙긴 늙었군.
혼자 중얼거리는 홍랑은 육대 적멸보궁으로 말하면 속하는 태조산 도리사는 수시로 오르내렸다. 구미에 있는 까닭이다. 보월정을 사고 나서도 서너 번은 넘게 갔지 싶다. 요즘은 육대적멸보궁을 얘기한다. 도리사를 추가한 까닭이다. 도리사의 진신사리는 문서만 있고 발견이 되지 않았는데 현대에 와서 발견이 되어 사리함과 진신사리가 직지사와 도리사에 나뉘어 잘 보관되어 있다. 육대적멸보궁에 속하는 도리사는 알겠는데 하나가 어디더라? 입에서 맴도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일단 그건 좀 있다가 찬찬히 생각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우사부터 한 바퀴 둘러보고.
홍랑은 슬리퍼를 꿰차고 관리사를 나왔다.
보월정을 타고 오대적멸보궁을 둘러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도 괜찮겠다. 그곳을 둘러보며 속세에 찌든 마음의 때를 씻는 것이다. 이제는 그럴 나이가 되었다. 그거 참신한 생각이다. 중구난방 헤매지 말고 목적지를 정하고 다니면 쌈빡한 길이 될 것이다. 내가 미처 이 쌈빡한 생각을 왜 못했지?
-오대적멸보궁의 불전함을 노린다? 흐흐흐.
송아지가 떨고 있다. 슬리퍼를 끌고 우사를 한 바퀴 둘러보는데 오늘 세상에 나온 송아지에게 눈길이 갔다.
존엄한 생명의 탄생!
저 송아지도 언젠가는 소멸되겠지? 존재했다는 이유로 소멸이 된다. 존재와 소멸의 법칙이 얼른 홍랑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홍랑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허무한 생각은 말자. 새 생명 앞에서 소멸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도 않거니와 그런 소리를 들먹이는 자체가 구업에 해당한다. 구업을 지어 나중에 불이 이글거리는 지옥고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며 송아지를 유심히 관찰하니 떨고 있는 것이다. 떨고 있는 송아지를 어미 소는 뜨거운 혓바닥으로 핥아주고 있다.
-저걸 어떻게 하지?
방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송아지는 젖을 빨아야 한다. 안고 자고 싶지만 홍랑의 나오지도 않는 젖을 빨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밤바람이 어미 소 자궁의 양수보다는 차가운 것이겠지. 가련했다.
뭐 바람막이라고 설치할 것이 없나?
주위를 둘러보다가 홍랑은 관리사로 내달았다. 그때 번쩍 머리에 떠오르고 입술 밖으로 울컥, 뱉어지는 말이 있었다.
-어? 그렇지. 오대산 상원사!
바로 상원사였어. 이제야 오대 적멸보궁을 다 알았군! 일단 송아지부터 어떻게 좀 하고.
홍랑은 방으로 들어가 이불장을 뒤졌다. 애기들이 덮는, 작은 담요 같은 걸 찾았으나 없었다. 홍랑은 급한 김에 자신이 펼쳐둔 이불을 들었다가 패대기를 쳤다. 옷걸이에 소도둑놈의 작업복으로 보이는 겨울 점퍼가 보였던 까닭이다. 가볍고 따뜻하겠다. 그걸 들고 나섰다. 요즘은 농촌에서도 새끼줄을 찾기 힘들다. 소도둑놈의 농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급한 김에 여물로 줄 짚을 덮었던 천막을 찢었다. 한 줄로 길게 찢어 줄을 만들었다. 송아지가 있는 곳으로 가니 홍랑의 손에 든 희한한 물건을 보고 어미 소가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야! 야! 괜찮아.
어미 소의 대가리를 몇 번 긁어주고 송아지 등에 잽싸게 점퍼를 펼쳐서 걸쳤다. 크기가 딱 맞았다. 벗겨지지 않게 앞에 한 줄을 묶고 뒤에 한 줄을 묶었다.
작전 완료!
우사 밖으로 나와서 보니 어미 소가 송아지의 대가리를 핥아주고 있었다.
-내가 아까 어디라고 얘기했더라?
누우니 또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찬찬히 손을 꼽으며 생각을 해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홍랑은 소도둑놈의 책상에 공책 북 찢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글로 쓰면서 체크를 했다. 태백산 정암사는 정선에 있고. 사자산 법흥사는 영월에 있으니 김삿갓 어른을 만나러 가면서 들르면 되는 일이고.......
오대적멸보궁을 다 돌아야지.
암! 그렇고말고.
종잇조각에 적어가면서 보니 그 다음은 통도사다.
통도사는 양산에 있는 관계로 홍랑이 가끔 갔었다.
홍랑이 통도사를 처음 본 것은, 처음 간 것이 아니고 분명히 본 것이라고 했다. 처음 본 것은 군에 있던 시절이었다. 홍랑은 군복무를 최전방이 아닌 부산에서 해안경계병으로 마쳤다. 그곳이라고 전방처럼 훈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육 개월 동안 해안경계병으로 근무를 하면 두 달간은 교육을 받으며 훈련을 받게 된다.
교육대에 들어간 시절이었는데 무슨 전투훈련을 했는데 홍랑이 심지 뽑기를 잘못하는 바람에 대항군으로 뽑혔던 것이다. 아마도 말년병장시절이었지 싶다. 되지도 않게 대항군으로 뽑혀 말년을 기구하게 보낸다고 투덜거리며 인민군 복장을 하고 군용트럭을 타고 내린 곳이 양산 부근의 무슨 산이었다. 그 훈련은 사흘간 지속되는데 대항군은 전투식량만 먹고 잡히지 않고 피해 다니며 고지를 탈환해야 했다.
떨어지는 가랑잎도 조심하라는 말년을 기구하게 보낸다고 투덜거리며 산에 숨어 있다가 야간에 이동을 하는 것이다. 대항군은 이인일조가 된다. 산을 타고 훈련을 받는 아군들에게 잡히지 않고 부대까지 침투하면 포상휴가가 기다린다. 허나, 홍랑은 훈련만 마치면 제대다. 말년병장이 아니더라도 대게는 훈련 마지막 날 잡혀준다. 그렇지 않으면 훈련을 받는 중대원들이 심한 얼차려를 받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전투식량을 먹으며 후임하나를 데리고 나침반을 보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이동하는 산에서 뒤를 따르던 후임이 감탄사처럼 뱉었다.
아! 통도사
힐끔 돌아보니 나무들 사이로 고래등짝 같은 시커먼 기와지붕이 보였다. 그게 통도사였고 적멸보궁의 지붕이었던 것이다. 홍랑이 통도사를 본 건 그랬다. 지붕만 보고 스쳤을 뿐이다. 그 다음 제대를 하고 부산에 갈 일이 있으면 통도사에 들렀다가 가곤 했다.
통도사는 삼보三寶의 사찰이다. 불, 법, 승, 삼보사찰로서 불교계의 으뜸가는 사찰로 꼽는다. 불보사찰은 적멸보궁이 있는 통도사, 법보사찰은 팔만대장경의 경판을 간직한 합천 해인사, 승보사찰은 수많은 대승을 길러낸 순천의 송광사이다. 승보사찰이란 승려의 계를 받는 사찰을 말하는 것인데 통도사는 이 세 가지를 다 지니고 있는 절이라는 말이다.
통도사의 금강계단이란 현판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쓴 것으로 유명하다. 홍랑은 그 현판을 사진으로 찍어 전화기의 메인화면에 올려놓고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적멸보궁이 다 그렇듯이 통도사도 예외는 아니다. 법당에는 부처님이 없고 커다란 유리를 박아 놓았다. 유리너머에 금강계단이 있다. 사리를 모신 곳이다.
홍랑은 통도사라고 적은 부분에 볼펜으로 가위표를 했다. 너무 자주 가보아서 볼 곳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 설악산 봉정암인데 봉정암은 보월정으로 갈 수가 없는 곳이다. 길은 길을 물고 있다고 했는데 거기엔 길이 없다. 아니, 있긴 한데 보월정이 오를 수 없는 계단이다. 겨우 올라가봐야지 백담사까지가 고작이다. 봉정암도 이미 가보았다. 대장간에 다닐 적에 같은 대장장이들과 설악산 대청봉에 등산을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봉정암이 들러 절밥을 얻어먹고 객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왔다. 밤샘 기도를 하는, 불교에 심취한 대장장이도 있었지만 홍랑은 적멸보궁을 둘러보고 내처 잤다.
봉정암에도 가위표를 했다.
거기도 갈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보월정으로는 못 가니 가위표시를 한 것이다.
그럼 어디어디가 남는 거야?
사자산 법흥사는 영월에 올라가면서 들르면 되고, 정암사는 내일이나 시간을 봐서 들르면 되는데 하나가 문제다.
오대적멸보궁을 다 돌아보면 죽어서 인간의 몸을 받고 환생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이야 교통이 좋아져서 마음만 먹으면 다 돌아볼 수가 있지만 옛날에는 사정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홍랑은 오대적멸보궁이 아니라 도리사를 포함해서 육대적멸보궁을 돌아보는 셈이 되는데 하나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적어가던 종잇조각을 윗목으로 밀쳤다.
어느 보궁이라고 했더라? 아까 분명히, 송아지 이불을 가지러 들어오면서 기억해 냈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조금 전에, 나 여기 있지롱, 하며 나왔다가 기억의 뒤편으로 홀라당 숨어버린 것이다. 입에서 나올 듯 맴돌며 나오지 않으니 미치겠다.
늙기는 늙었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하는 걸 보니.
누군가 말했다. 다리가 떨릴 때는 이미 늦었고 가슴이 떨릴 때 여행을 하며 견문을 넓혀야 한다고. 아직 다리가 떨릴 나이는 아니지만 가슴이 떨리는 나이도 아니다. 보월정으로 오대적멸보궁을 돌아보기에 적당한 나이다. 거듭 생각해도 대장간에서 적절한 시기에 잘린 것이다. 정말 잘된 일이다.
그런데 마지막 남은 하나가 어디더라?
홍랑은 머리를 쥐어뜯다가 일어났다.
일단 천천히 생각하고 송아지에게 입힌 점퍼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을 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홍랑은 슬리퍼를 끌고 우사를 한 바퀴 돌며 송아지를 살폈다. 점퍼를 입혀주고 줄을 야무지게 매어서 그대로 있는데. 점퍼의 양쪽 팔 부분이 좀 축 늘어져 있어 송아지가 앉았다가 일어나면서 제 발로 밟아서 벗겨질 수도 있겠다.
가위가 있으려나?
홍랑은 관리사로 들어가 가위를 찾아서 들고 나왔다.
가위를 들고 들어가니 또 어미 소가 적의를 드러냈다. 또 어미 소의 대가리를 긁어주는 방법뿐이다. 대가리를 좀 긁어주고 바로 돌아서서 잽싸게 송아지에 입힌 점퍼의 덜렁거리는 팔을 잘라냈다. 그냥 들어가려니 섭섭해서 어미 소에게 또 한바가지 사료를 주었다. 산고를 치른 놈에게 주는 특별서비스였다.
*
소식이 끊어진 지 열흘이 넘었지 싶다.
도대체, 이 양반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정말 종호씨 말대로 정말 원양어선을 타고 나갔다면 어쩌나?
그 약골에 배길 수나 있을까?
종호씨 말에 의하면 원양어선을 타고 나갔다면 수일 내로 어선이나 선박회사에서 통장번호를 알려달라는 전언이 올 거라고 했는데 매일 우편함을 들여다보지만 그런 건 없었다. 이 나이에 무슨 돈이 필요해서 원양어선을 타? 그렇다면 일 중독자가 분명하다. 외국에서는 그런 사람을 두고 칭찬은커녕 워크홀릭이라고 비아냥거린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김강자여사는 지금 살고 있는 집 한 채면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집은 숙경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고 샀으니 이십 년은 넘었다. 살 때에는 집을 담보로 은행대출을 받았지만 이미 다 갚았으니 온전히 우리 집이다. 부동산에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동안 지가가 올라 값이 엄청 나갈 것이다. 나중에 늙어서 돈이 필요하면 집을 팔아서 아파트로 들어가면 된다.
늙은이 둘이 살 아파트니 평수가 큰 것도 필요 없을 것이다. 청소하기만 번거롭지 큰 아파트는 사양이다. 대략 스물다섯 평 정도면 족할 것이다.
만약 집을 팔아서 시내 변두리에 새로 지은 그런 아파트를 사려면 세 채를 사고도 남겠다. 또 몇 년 후에는 노령연금과 국민연금이 나올 것이다. 그 연금으로 생활하면 되는데 지금 나이에 무엇이 모자라 원양어선인가, 명태를 잡는 배를 타?
숙경이 하나뿐인데, 누구에게 물려주려고 그 고생을 해?
김강사여사는 모로 누워 혼자 중얼거린다.
생각하니 무슨 욕심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사람팔자 길들이기 나름이라고 놀아도 놀아본 놈이 논다고 했다. 일이 없어 불안한 마음은 이해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나이에 원양어선은 아닌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나 잘 다녀왔소. 하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면 좋겠다.
한 평생을 살면서 이 양반에게 살갑게 대한 적이 없다.
문득 생각하니 그렇다.
아프지 않고 큰 사고 없이 여태까지 살아준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일인데, 오토바이 좀 타고 다니며 마실을 다니면 어때?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친구들도 좀 만나고, 하루 종일 골목에서 오토바이 시동을 걸어 놓고 붕붕거리는 것도 아닌데 들락거리는 동안 좀 시끄러우면 어때? 이웃에 살면서 그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웃도 아니지.
아직도 바닷바람은 차가울 텐데 옷가지도 챙겨가지 않았고. 알레스카인가 어디는 춥다고 소문이 났던데 큰 병이나 얻어서 돌아오는 게 아닐까? 늙으면 몸 하나 건강한 게 최고인데, 이 양반은 무슨 일만 보면 몸을 아낄 줄 모르는 게 병이다, 하긴 그 덕에 빚 없이 잘 먹고 살았지. 부모님께 타고난 재산은 없어도 남의 집에 돈은 빌리러 다니지 않았다. 그러면 되었지. 뭐가 부족해?
정말이지 장난스럽게. 나 왔지롱! 하면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면 좋겠다.
어디를 갔거나 이번에 들어오면 군소리를 안 하고 사골을 푹 고아서 보양을 좀 시켜야 될 일이다.
그러나저러나 숙경이한테는 무어라고 말을 하지?
부모노릇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
소도둑놈이 돌아왔다.
새벽 여물을 주고 정암사에 다녀오니 점심여물을 주기에는 좀 늦은 시간이었다. 정암사까지는 보월정으로 삼십 분이 좀 넘게 걸렸는데 그 미색이 고운 미선보살을 따라다니며 기다리느라 좀 늦었던 것이었다. 허겁지겁 소여물부터 주고 홍랑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한 숨 잠깐 눈을 붙이고 나와서 늘 하던 대로 수레를 끌고 칸칸이 다니며 소똥을 치우고 있는데 소도둑놈의 나귀가 들이닥친 것이었다.
잘 갔다 왔나?
어? 소똥 치우고 있네? 별일 없었나?
소도둑놈은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농장으로 온 모양새였다. 입성을 보니 분명했다. 알록달록한 점퍼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송아지 낳았데이! 소가 낳은 게 아니라 내가 낳았데이. 황송아진데 내 거다.
소도둑놈은 희색이 만연하며 송아지가 있는 곳으로 갔다. 홍랑은 흐뭇한 기분으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이번 칸에는 한 수레만 치우면 끝이 난다. 자고로 소똥이란 그때그때 치워야지 소의 발이 무르지 않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소도둑놈은 굉장히 게으른 작자가 분명하다. 이 칸을 치우면 겨우 두 칸이 남는다. 이젠 소들도 길이 들었는지 홍랑이 수레를 끌고 들어가면 알아서 비켜준다. 옛날, 초식동물일 적에는 괜찮았는데 사료를 준 다음부터 잡식동물로 변해서 소똥냄새가 좀 고약해졌다.
송아지 옷은 누가 저렇게 하라고 하더나?
미친놈! 여기 누가 올 사람이 있노?
너? 소 먹여 봤나?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리 잘 해?
송아지를 둘러보고 온 소도둑놈의 강원도억양이 짙은 사투리였다.
공항에서 바로 왔는갑재? 피곤하겠네?
홍랑은 소도둑놈에게 집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여독을 풀고 나오라고 했다. 아마도 이 시간에 도착한 걸 보니 밤비행기를 타고 온 듯했다. 어차피 저물어서 홍랑이 오늘 떠나기는 힘들다. 여기서 나가면 바로 숙소부터 알아봐야할 시간이라 여기서 하룻밤 더 자고 내일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뒤였다. 어제는 새벽여물을 주고 화암동굴을 다녀왔고 오늘은 정암사를 다녀왔다. 우사의 관리사는 잘 곳을 걱정하지 않는 메인캠프로는 그만이었다.
야! 시키지도 않았는데 정말 잘 해 놓았네. 소도 살이 통통하게 붙었고.
거? 일하는데 말 시키지 말고 들어가서 자고 내일 아침 먹고 느긋하게 나와라.
너? 정말 잘했네. 나 송아지 땜에 엄청 걱정했었다. 너 나하고 여기 살자.
-주인장 나으리께서 오시면 그 말씀을 하실 줄 알았소이옵니다. 하오나, 소인은 가야할 길이 멀고 역마살이 강한지라 여기에 머물고 있을 몸이 못되오이다.
-하! 그러하옵니까? 일단 소인은 대인의 분부대로 들어가서 여독을 풀고 내일 아침나절에 나오겠소이다. 나머지 상의는 내일 아침나절에 올리도록 하지요.
소도둑놈은 홍랑에게 구십 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나귀에 올랐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뱉었다.
그 새끼 그거. 우사를 정말 거울 알같이 해놓았네!
소도둑놈이 돌려보내고 마지막 똥을 치우고 빗자루를 찾아 우사 통로를 쓸고 나니 저녁여물을 줄 시간이 되었다. 농장입구에 묶어둔 개새끼들도 홍랑을 보고 사료를 달라고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홍랑은 늘 하던 대로 소에게 먼저 짚을 주고 저녁을 먹었다. 오늘은 고기를 잔뜩 썰어 넣은 쇠고기 국이었다.
정암사는 생각보다 웅장하지 않고 단아한 적멸보궁이었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홍랑이 정암사에서 느낀 건 비우라는 것이었다. 욕심의 그릇을 비워야 새것이 담긴다는 법을 배운 것이다. 애당초 불전함에는 관심도 없었다. 노자가 넉넉한데 불전함을 기웃거릴 이유가 없었다. 어제 본 화암동굴은 금맥을 찾는 인간의 욕심이 만든 동굴이라면 정암사는 부처의 손길로 이루어진 절이었다.
정암사가 있는 고한은 찾기가 쉬웠다. 고한은 화암동굴로 가는 반대 방향에 있었다. 정선 읍내를 벗어나자 이정표가 워낙 잘 되어 있어서 한 번도 묻지 않고 바로 찾아갔었다.
어디를 가나 자장율사의 기록이 있다는 건 적멸보궁의 공통점이다. 자장이 당나라에 가서 부처님의 보물을 한 보따리 싸들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진신사리도 그 때 들여온 것인데 전국 각지에 나누어서 봉안하게 된 것이다. 정암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안내판에는 자장부터 거론했다.
정암사를 향하는 보월정의 길은 정말이지 스릴이 있었다. 읍에서 고한으로 넘어가는 꼬부랑길은 보월정을 위해 만든 길에 다름 아니었다. 직선도로에서는 질주 외에 다른 스릴을 느끼지 못한다. 꼬부랑길이 훨씬 스릴이 있고 보월정이 내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잘 들린다. 보월정은 소리로 타는 것이라 하였다.
적멸보궁이라 보월정을 타고 절 안으로 들어가는 무례함은 범하지 않았다. 보월정을 주차장에 세우고 걸어서 일주문을 들어서니 눈에 띄는 보살이 하나가 법당을 나서고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오! 잘생긴 오빠! 여기에 왔네. 오늘도 멋있는 오토바이 타고 왔어?
이 가시내야! 오토바이가 아니라, 그 이름 고명한 보월정이야.
갈 적에 나 좀 태워줘!
청바지를 사면서 포목점에서 만났던 아낙네였다. 보통 고운 얼굴이 아니었다.
오빠! 다시 읍으로 가는 거 맞지?
그래, 가기는 하는데 빨리 가야 돼! 할 일이 있어.
아낙의 이름은 미선이라고 했다. 미선보살?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다시 보니 참 미선美善하게 생겼다. 오늘이 아버지 제사라 아버지 위패를 모신 절에 새벽기도를 왔다는 것이다.
다른 형제들은 안 왔나?
형제? 나 무남독녀, 외동딸이거든, 제사를 모실 사람이 없어.
올 적에는 새벽에 버스가 없어 택시를 타고 왔는데 갈 적에 좀 태워달라는 것이었다. 버스를 타고 갈려면 해거름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홍랑은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런 보시는 당연히 해야 한다. 보월정에 참한 규수를 태우는 게 꿈인데 규수가 아니라 미선보살처럼 중고품이라도 감지덕지다.
태워서 간다?
좋다고 했다. 미선보살이 먼저 손을 쳐들고 손바닥을 마주치는 걸로 약속을 했다. 보월정 같은 가문의 당나귀에 여자를 태우면 뽕 간단다. 새끼당나귀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육체적, 정신적 쾌감을 맛본다고 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까닭이겠지만 남들은 그랬다. 쩍 벌리고 타면 아랫도리에 닿는 그 진동과 소리의 박자로 인해 남자들보다 농도 짙은 스릴을 느낀다고 들었다. 보월정 가문의 당나귀를 사면 마누라는 절대로 태우지 말라는 말이 있다. 세 번 혼이 난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위험한 물건을 비싸게 샀다고 혼이 나고, 두 번째 태워주면 더 빨리 달리라고 혼이 나고, 세 번째 내려놓으면, 일찍 사지, 왜 이제야 샀느냐고 혼이 나는 물건이란다.
헌데, 이 여편네가 기도가 금세 끝난다고 했는데 한나절이었다. 홍랑은 어느 절을 가도 삼배면 끝인데 무슨 기도를 그렇게 오래하는지 모르겠다. 수미단에서 기도를 마치고 영산전에 가서 또 백팔배를 했다. 미선보살이 기도를 하는 동안, 홍랑은 사리가 봉안되었다는 탑에도 올라가보고 절 담 너머의 물이 맑다고 소문난 개울에 가서 사색에 잠기며 비우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한나절이 다 되어 미선보살의 기도가 끝이 났다.
소가 점심을 굶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고 마음이 바빴다.
빨랑 타라! 이 가시내야!
보월정에 올라앉은 홍랑이 말했다.
쩍 벌리고 탈까?
당연히 그래야지.
미선보살은 치마를 입었지만 옆으로 타지 않았다.
나를 꽉 안아!
물컹!
등짝에 닿는 젖가슴의 감촉에 홍랑은 전율을 느껴야 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헌데, 속력을 내어 굽이굽이 돌때마다 신음을 냈다. 가식적으로 놀라는 척, 내는 소리가 결코 아니었다.
오빠! 좀 천천히 가.
홍랑은 보월정의 고삐를 더 당겼다.
아우! 나 죽네!
원색적인 신음이었다. 그 신음을 들으며 세상 끝까지 더 달리고 싶었지만 읍내는 금세였다. 미선보살은 보월정에서 내리며 청바지라도 하나 줄 터이니 들어가자고 했지만 홍랑은 마음이 급했다.
-소인! 진정 그러고 싶지만 수많은 입이, 눈이 빠지게 소인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후일을 도모하심이 어떤지요.
오빠 짬이 나면 꼭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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