왁자지껄함이 사라졌다 아이는 다 컸고 태어나는 아이도 없다 어느 크레바스에 빠졌길래 이다지도 조용한 것일까 제 몸을 깎아 우는 빙하 탓에 크레바스는 더욱 깊어진다 햇빛은 얇게 저며져 얼음 안에 갇혀 있다 햇빛은 수인(囚人)처럼 두 손으로 얼음벽을 친다 내 작은 방 위로 녹은 빙하물이 쏟아진다
꽁꽁 언 두 개의 대륙 사이를 건너다 미끄러졌다 실패한 탐험가가 얼어붙어 있는 곳 침묵은 소리를 급속 냉동시키면서 낙하한다 어디에서도 침묵의 얼룩을 찾을 수 없는 실종상태가 지속된다 음소거를 하고 남극 다큐멘터리를 볼 때처럼, 내레이션이 없어서 자유롭게 떨어질 수 있었다 추락 자체가 일종의 해석, 자신에게 들려주는 해설이었으므
크레바스에 떨어지지 않은 나의 그림자가 위에서 내려다본다 구멍 속으로 콸콸 쏟아지는 녹슨 피리소리를 들려준다 새파랗게 질린 채 둥둥 떠다니는 빙하조각을 집어먹었다 그 안에 든 햇빛을 먹으며 고독도 요기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얼음 속에 갇힌 소리를 깨부수기 위해 실패한 탐험가처럼 생환일지를 쓰기로 한다 햇빛에 발이 시렵다
감상(초보 시인을 위한 현대 창작 이론과 실제 조극래)
웃고 시끄럽게 떠들던 내 곁의 사람들로부터 나는 이탈되었다. 크레바스에 빠진 것처럼 공황 상태다. 실직 상태가 되었다. 연금수령에 해당할 계절은 아직 까마득하다. 그런데도 세상은 나를 밀칠 때가 되었다며 빙하의 틈안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시베리아가 나를 덮친다. 희망은 얇게 저며져 얼 음 안에 갇혀 있다. 내 작은 방 위로 녹은 빙하 물이 쏟아진다.
젊음의 세계와 노인의 세계 두 개의 대륙을 건너다 미끄러졌다. 어디에서도 침묵의 얼룩을 찾을 수 없는 실종상태가 지속한다. 추락한다는 것이 이 렇게도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구나. 크레바스에 빠지고서야 비로소 몸이 해석한다.
어떻게 하면 이 빙하의 골짜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아무도 나를 거들떠 보지 않는 이 빙하의 고독, 새파랗게 질린 채 둥둥 떠다니는 빙하 조각을 집 어 먹었다. 그 안에 든 햇빛을 먹으며 고독도 요기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우선은 살아남아야겠다. 생활일지라도 써내려가야겠다. 발이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