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史99卷-列傳12-崔惟淸-000
崔惟淸[*(崔)讜*(崔)璘*(崔)詵*(崔)宗峻*(崔)坪*(崔)文本*(崔)坪*(崔)雍.
〔최당, 최린(崔璘), 최선(崔詵), 최종준(崔宗峻), 최온, 최문본(崔文本), 최평(崔坪), 최옹(崔雍)의 기사 첨부〕
#高麗史99卷-列傳12-崔惟淸-001
○崔惟淸字直哉昌原郡人
최유청의 자는 직재(直哉)이며 창원군(昌原郡) 사람이다.
六世祖俊邕佐太祖爲功臣
그의 6대조(六代祖)는 최준옹(崔俊邕)인데 태조를 도와 공신이 되었다.
父奭初名錫擢魁科事文順宣三朝位至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禮部事謚譽肅.
아버지 최석(奭)의 그전 이름은 최석(錫)인데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문종(文宗), 선종(宣宗), 순종(順宗) 세 임금을 섬겼으며 벼슬은 수태보 문하시랑 동 중 서문하 평장사 판리 예부사(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禮部事)를 지냈고 시호는 예숙(譽肅)이라 하였다.
惟淸少孤嗜學睿宗時登第乃曰:
최유청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예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儒者當學古入官." 遂杜門讀書不求仕宦
“선비란 옛것을 배운 후에 벼슬길에 들어가야 한다”라고 하고 드디어 문을 닫고 글공부에 몰두하며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有薦者辭以學未就
혹 자기를 추천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직 공부가 미숙하다고 사양하였다.
後被薦直翰林院.
후에 추천을 받아 직 한림원(直翰林院)으로 되었다.
#高麗史99卷-列傳12-崔惟淸-002
仁宗卽位李資謙謀逆大臣有不附己者輒以計誅竄
인종이 즉위한 후 이자겸(李資謙)이 반역을 음모하려고 대신들 중에서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는 자에 대하여 무슨 술책을 써서라도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었다.
平章事韓皦如號剛正非罪見流惟淸姊壻鄭克永爲皦如表弟連坐貶斥惟淸亦失職
예로 평장사(平章事) 한교여(한안인)는 강정(剛正)하다는 사람이었으나 그 역시 죄 없이 유형을 당하였으며 최유청의 매부 정극영(鄭克永)은 한교여의 표제(表弟-외사촌)인 관계로 연루되어 강직당하였으며 최유청도 실직되었다.
及資謙敗召入內侍累遷左司諫出倅尙州有德政.
그러다가 이자겸이 패망한 후 최유청은 내시(內侍)로 소환되어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좌사간(左司諫)으로 있다가 상주(尙州)원으로 나가서 은혜로운 정사를 하였다.
秩滿授侍御史轉御史中丞言事忤旨遷殿中少監尋以諫議大夫.
과만이 되자 시어사(侍御史)로 임명되고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전직되었는데 그가 진언한 정론 중에는 왕의 뜻을 거슬린 말이 있었으므로 전중소감(殿中少監)으로 좌천되었다가 즉시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임명되었다.
如金謝冊命言動中禮金人歎服移牒使加爵祿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책명(策命)을 사례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언어와 행동이 예절에 맞아서 금나라 사람들이 탄복하고 공문을 본국으로 보내 그의 벼슬과 봉급을 올려 주라고 의뢰하였다.
比還拜戶部侍郞後出爲東北面兵馬副使朔方倚如長城召拜承宣.
귀국 후 호부 시랑(戶部侍郞)으로 임명되고 후에 동북면 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로 나가 있었는데 동북 국경 지대가 그를 장성(長城)처럼 믿었으며 소환되어 승선(丞宣)으로 임명되었다.
#高麗史99卷-列傳12-崔惟淸-003
毅宗初陞知奏事出納惟允驟進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兵部事.
의종 초년에 지주사(知奏事)로 승진되어 자기 직무에 충실하였으므로 벼슬이 뛰어올라 중서 시랑 동 중서 문하 평장사 판병부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兵部事)로 임명되었다.
時郞中鄭敘坐陰結大寧侯流外惟淸敘妹壻也敘宴大寧惟淸假器皿
당시 낭중(郞中) 정서(鄭敍)가 대녕후(大寧侯-왕의 아우)와의 은밀한 사건에 관련되어 6품관 이하의 지방관으로 나갔는데 최유청은 정서의 매부이므로 정서가 대녕후를 초대할 때에 정서에게 그릇을 빌려 준 일이 있었다.
壹諫劾以失大臣體貶南京留守使連貶忠廣二州牧使.
이에 대하여 간관(諫官)들이 말하기를 “최유청이 대신의 체면을 잃었다”라고 하였으므로 남경 유수사(南京留守使)로 강직되었으며 연이어 충주(忠州)와 광주(廣州) 목사(牧使)로 강직되었다.
雖久淹外寄處之怡然王悟其忠直無他欲復拜平章事
그가 비록 지방으로 강직되어 오랜 기간을 지냈으나 태도가 태연하였으므로 임금도 그가 충직하고 다른 뜻이 없는 것을 깨닫고 다시 평장사(平章事)로 임명하려 하였다.
有沮之者乃以守司空左僕射致仕.
그러나 저해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소환되어 수사공 좌복야(守司空 左僕射)로 있다가 그 후에 연로하여 치사하였다.
#高麗史99卷-列傳12-崔惟淸-004
鄭仲夫之亂文臣皆被害諸將素服惟淸德望戒軍士勿入其第以至期功之親俱免禍.
정중부 난에 문관들이 모두 살해당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평소부터 최유청의 덕망에 감복하고 있었는지라 군사들에게 그 집은 다치지 말라고 경계하였던 까닭에 최유청을 비롯한 친척까지 모두 다 화를 면하였다.
有刑部尙書韓就者湍州人也工術數能言人禍福亦以智保全官至中書侍郞平章事.
또 형부상서(刑部尙書) 한취(韓就)는 단주(湍州) 사람으로 술수(術數)를 잘 알아서 능히 사람의 화와 복을 예언하였는데 지혜로써 몸을 보전하였고 벼슬이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까지 이르렀다.
明宗立以惟淸宿德舊望拜中書侍郞平章事尋守司空集賢殿大學士判禮部事仍令致仕
명종이 즉위하자 최유청의 지난날의 덕행과 명망이 있었음을 알고 그를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임명하였다가 이어 수 사공 집현전 태학사 판예부사(守司空集賢殿太學士判禮部事)로 올리고 이내 치사케 하였다.
四年卒年八十謚文淑.
4년(1174년)에 죽으니 향년이 80세였으며 시호를 문숙(文淑)이라고 하였다.
#高麗史99卷-列傳12-崔惟淸-005
自幼至老手不釋卷經史子集靡不該通又酷好浮圖日誦佛經
최유청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경사자집(經史子集)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고 또 부도(부처)를 혹신하여 날마다 불경을 외우고 있었다.
所至學生沙門質問者坌集
그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학생과 승려들이 모아 들어서 배우며 질문하였다.
嘗奉詔撰李翰林集註柳文事實王覽之嘉賞鏤板以傳
일찍이 왕의 조서를 받고 이한림 집주(李翰林集注)와 유문사실(柳文事實)을 편찬하였는데 왕이 그 책을 보고 가상히 여겨 출판케 하였다.
又有所著文章數百篇及南都集.
그 외에 문장 수백 편과 남도집(南都集)의 저작이 있다.
子八証詡諲讜詵讓二人祝髮.
아들은 여덟을 두었는데 최증(崔證), 최후, 최린, 최당, 최선(崔詵), 최양(崔讓)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승려로 되었다.
証詡讜詵皆登第歲廩母
최증, 최후, 최당, 최선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그의 어머니는 국가로부터의 연봉을 받았다.
証禮部尙書詡閣門祗候諲錄事讓雜職署令讓孫雍.
최증은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최후는 합문지후(閤門祗侯)로, 최린은 녹사(錄事)로 되었으며 최양의 손자는 최옹(崔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