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신문 ♤ 시가 있는 공간] 꽃잎 붉게 / 심상숙
심상숙 추천
꽃잎 붉게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御人)*
심상숙
화선지 위로 핏방울 퍼붓던 날
당신은 태어났지요
앉은뱅이 서당 훈장이 천자문 불태우고
학교로 보냈지요
청년 외조부가 위안스카이(袁世凱) 앞에 갈 때는
등짐장수로 변장했다죠
상해 정부 고개 넘다 부러뜨린 산삼 뿌리 속
고종황제 청병조서(請兵詔書) 품은 채
충청 경상, 문경 갈평 골짜기마다 매복해
도 선봉대장 화살로, 총으로 왜군을 대파시켰다죠
이순(耳順)의 정경로 라는 가명으로
감옥소 짓는 강릉에 몸 숨기면서
해변 식료품점 과수댁과 혼인했을 때
소학교에서는 우리말 교과서를 몽땅 빼앗았다지요
목숨 다해도 일본말은 할 수 없어 딸의 학교에 가
간떼이 간떼이**만 연발하셨다죠
가발 쓴 일본인 담임은
조선 소녀 볼만 쓰다듬다 현해탄을 건너가고
일본어 학교, 조선말 집안
머리 위로 걸상 들고 무릎 꿇는 벙어리 당신,
“고무신” 글 제목으로 조선 총독 상을 받았다죠
마루 밑 놋숟가락, 놋 요강, 부젓가락
쇠붙이 끌어모은 대동아전쟁 무기공장 같은
바로 그날
머나먼 소련의 포로 폴란드 장교들,
죽음 같은 하루 노역 끝낸 자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가슴속 프루스트를 강의하고 서로를 얼싸안았다죠
눈앞의 홀로코스트 이슬방울 하나,
써먹을 데 없는 학습도
물이고 생명이더라고, 공부가
끝내 예술로 목숨으로 남던
그날
열여섯 소녀는 해방을 맞아
부친의 고향 땅 제천으로,
지하 방공호에 냉수 떠 놓아드리며
청풍일기(淸風日記) 써 내려가는
정미왜란창의록(丁未倭亂倡義錄) 앞에
먹을 갈던 아리따운 포도 연으로,
나는 당신에게 어떤 획으로 남았을까요
당신의 담임목사 모친상에 엎드려 써 내린
붉은 천의 은물, 명정(銘旌)이던가요
어린 날 가슴에 달아주던 아사 꽃자리 재봉이던가요
맨 처음 시 한 줄,
시원의 은유는 당신이었습니다
화선지 위로 핏방울 뿌려지던 날
당신은 태어났지요
오늘처럼 꽃잎 붉게 흩날렸을
그날,
*어머니 생전의 필적, 족자에 쓰인 글귀
**간단복(원피스)
(심상숙 시집 『겨울밤 미스터리』 114쪽, 예술가, 2023)
[작가소개]
심상숙 추계예술대학교문예창작과졸업(2018), 서울교육대학교교육대학원석사졸업, 단국대학교교육대학원석사졸업, 서울시초등교원38.2년정년퇴임, 2012년『목포문학상』신인상, 2013년『조선여성문학상』우수상, 『김장생문학상』본상, 2014년『시와소금』신인상, 2018년《광남일보》신춘문예<첫차>당선, 《매일신문》시니어문학상, 2021년<예성천문예대전>입선, 『문예바다』공모시 당선, 2022년『김포문학상』우수상, 문학동인(시포넷)(시쓰는사람들), 《미래신문》시가있는공간 게재 中, 시집 『흰 이마가 단단하구나』 『겨울밤 미스터리』.
[시작 노트]
3·1절 태극기가 꽃샘바람 타고 휘날린다. 집집마다 휘날린다.누군가는 유리 창문에 붙이는 태극기를 발명도 하겠지만, 필자는 아니다. 3·1절 국경일 태극기는 푸른 하늘가에 빨강, 파랑, 하양, 검정이 휘날려야 태극기다.
올해의 3·1절 기념사가 고무적이다. ‘통일은 비단 한반도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확장하는 것이 바로 통일’이라고, 또한 ‘우리의 통일 노력이 북한 주민들에게 희망이 되고 등불이 되어야 한다. 북한 주민들을 향한 도움의 손길을 거두지 않고,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을 것’임을 밝히고 있다.
동그랗게 눈 뜬 ‘나라 사랑’하나가 시인의 가슴속에 정말 아무도 모르게 내걸려 펄럭이는 날이다. 조국이 있어야 나도 있다. 독자인 당신은 애국자입니다.
글: 심상숙(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