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1917년 간도의 명동촌이란 곳에서 태어나, 비교적 행복하고 아름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아주 다정다감한 소년이었고, 중학교 때는 동시를 많이 썼다. 그의 동시들은 갈등이 없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화해의 세계를 소박하게 보여준다.
은진중학교와 명동중학교를 거쳐 윤동주는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중학시절, 민족의식을 자극할만한 여러가지 정치적 사건들을 체험하긴 하지만, 그의 중학 시절은 대체로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문학소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윤동주가 천진난만한 동시의 세계에서 한 걸음 나아가 민족이 처한 구체적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22세 무렵으로 보인다. 그러나 윤동주의 민족과 시대에 대한 인식은 조심스럽고 내면적이고 실존적이었으며, 굳은 실천적 신념이 아니라 내면적 갈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윤동주의 본격적인 시 세계는 [자화상]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그 동안 윤동주는 고향인 명동촌의 삶으로 표상되는 화해와 사랑의 세계에 머물고자 하였으나 그럴 수 없다는 막연한 느낌으로 혼란스러워하였는데, [자화상]에 이르러 그 혼란된 자신의 모습에 대한 명징한 인식이 이루어진다.
1939년 9월에 씌어진 작품이다.단순한 듯하지만 자신의 내면 모습을 미묘하고 섬세한 무늬로 그려낸 수작秀作이다.
유년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와 현실적 존재가 되기 위해 이런 자신을 버려야 하는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1943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영어의 몸이 되었다. 그리고 해방되기 직전에 이국의 감옥에서 짧은 삶을 마쳤다.
(별 헤는 밤, 윤동주, 이남호 선, 해설, 민음사간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