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발발 당시 남침하는 인민군의 전차(자주포)를 육탄돌격으로 파괴하여 유일하게 전선을 사수하며 3일간 남침을 저지하였다. 그 뒤 용문산 전투, 무극리 전투(동락리 전투), 초산 진격 등의 전공을 세웠다.
특히 동락리 전투에서 1개 대대 병력으로 1개 연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고, 전 부대 장병이 일계급 특진하는 기록을 세웠다.[1]
1950년 10월 26일에 국군과 연합군 최초로 압록강변까지 진격에 성공하여 압록강 물을 떠다 이승만 前대통령에게 헌수하였다.[2]
1973년 11월 20일 근무중이던 초병이 미상의 폭음을 감지하여 상부에 보고, 시추공으로 굴착작업 끝에 1975년 3월 19일 북한의 기습남칭용 2번째 땅굴인 제2땅굴을 발견하였다.[3]
이 정도만 봐도 6.25전쟁 내내 1사단과 맞먹는 위용을 자랑하는 부대입니다.
6.25전쟁 초반에 다른 부대들은 후퇴하기 급급했지만 유일하게 6사단만이 서부전선의 붕괴때문에 포위를 우려해서 후퇴한 부대이며 이승만 대통령께 압록강물을 헌수한 최초의 부대이죠
그런데! 왜! 1사단만이 상승부대라고 불렸을까요? 6사단도 1사단 못지않게 혁혁한 전과를 세웠는데 말이죠
그 이유는 바로 1사단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6.25전쟁 내내 안겪었고 미군이 인정한 백선엽장군이 지휘한 부대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6사단은 초산전투 이후에 사창리전투에서 전력의 40%을 잃어버려 사단의 해체위기까지 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사단만이 상승부대라 불리죠
그럼 왜 해체위기까지 갔을까요? 그건 초산전투 이후에 중공군의 개입때문입니다
10월 25일 아침 압록강까지 진격해서 통일의 꿈에 젖었던 국군은 중공군의 개입과 공격으로 그 꿈을 가슴에 묻고 모든 전선에서 대거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은 이때를 노렸고 국군이 중공군의 깊숙히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았을땐 이미 포위된 상태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단이 포위당했고 이 포위망을 뚫는 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또한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부대도 있었고 수뇌부에서도 방어선을 구축해서 막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신속한 후퇴를 지시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습니다.
우리의 6사단 또한 압록강까지 진격한지 하루만에 중공군의 존재를 알고 후퇴를 시작했지만 중공군은 6사단 2연대를 유인 격멸하기로 했습니다.
2연대는 이러한 사실을 모른채 7연대의 안전한 후퇴를 위해 7연대의 좌측면과 후방을 엄호하기 이동해 이동했고 그 순간 중공군의 매복공격과 함께 포위되었습니다. 동시에 7연대 또한 2연대와 마찬가지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6사단의 2연대와 7연대가 포위된 순간 사단본부와 같이있던 19연대 그리고 근처에 있던 국군 8사단도 중공군에게 동시 다발적으로 공격을 받아 지원하기는 커녕 방어하기 급급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받은 사단장 김종오는 7연대에게 "귀 연대는 휴대할 수 있는 중장비를 제외한 모든장비를 소각파괴하고 최선의 수단을 다해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2연대에게도 사단이 도와줄방법이 없으니 알아서 탈출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마지막으로 지시했을땐 "귀 연대는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음. 최선을 다해 철수작전에 성공하기 바람"이라는 명령이 아닌 기원문이였습니다.
결국 방어를 하면서 후퇴를 해야했는데 야간이 되었을땐 항공기 지원마저 끊겼고 중공군은 꾕과리와 피리를 불면 심리전과 함께공격을 했고 7연대와 2연대는 급격히 전의를 상실하고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결국엔 임부택 7연대장은 "연대 전 장병들은 적진을 각개돌파해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7연대는 와해되었고 2연대 또한 살아남기 위해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6사단의 병사들은 목숨을 건 후퇴를 했고 11월 6일 초산에서 포위를 뚫고 철수 작전을 완료하게 되었을땐 10월 26일과 비교하면 사단병력은 50% 중장비 모두 잃게되었습니다.
초산전투 이후 1.4후퇴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후퇴를 해야만 했고 이로인해 국군의 질은 심각하게 저하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중공군은 국군을 우습게 봤고 미군과의 직접전인 격돌을 피하고 국군 방어지역을 돌파하여 미군을 포위섬멸하는 방식으로 공격전략을 수정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춘계 대공세라고도 불리는 중공군 제 5차 공세 때 중공군은 6사단이 방어하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 지점인 광덕산을 집중공격했습니다.
(춘계대공세때의 사진들)
중공군은 사창리에 진입한 6사단을 지형을 이용하여 포위공격하였고 6사단은 이에 맞서싸우는듯 하였으나 중공군 특유의 꾕과리와 피리를 부는 심리전이 공격과 함께 시작되자 초산에서 겪어던 악몽이 되살아 났고 이 때문에 6사단은 전의를 상실한채 무질서한 패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인해 6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후방에 배치한 미군 포병대대 마저 포위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무질서한 패주로 서측 미 해병 제1사단과 동측의 미 제24사단 사이에 대규모 돌파구가 났으며 6사단은 전력의 40%를 상실하고 장비는 모조리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사창리 전투)
이를 보고 받은 제8군단의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는 국군 6사단장 장도영을 만나 "당신 전투 할줄 압니까?"라는 치욕적인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장도영 장군은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 라고 답변했고 밴플리트 사령관은 장도영 장군의 눈빛을 유심히 바라본 후에 6사단을 해체하지 않고 다시한번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쉬어갑시다;; 이정도 쓰는데도 굉장히 힘들군요;;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라는 책에서 거의 보고 쓰다시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첫댓글 우아앙 그래도 1사단보다 쳐지는 건 사실이잖음?
아니, 중공군떄문에 작살난 6사단에 비해 백선엽의 1사단이 운이 좋았던 건가요?
개인적으로 1사단은 백선엽 명성이랑 운이 합쳐져서 불패사단으로 불린다고 생각됩니다 ^^
백마고지 전투의 백마부대 9사단은요..?
백마부대는 6.25전쟁 중인 10.25에 창설되어서 6.25전쟁중에 주옥같은 전투에 그다지 활약을 못했죠
전쟁 끝마지에 백마고지 전투가 컸긴 했지만 다른 사단에 비하면 꿇립니다
아..내가 근무했던 9사단이......
제가 근무하던 사단이군요. 국군 최선임 연대를 보유한 사단이지요. 전 6사단 직할대인 22 전차 대대를 나왔습니다.(전차부대는 예외적으로 대대급 부터 단대호가 붙습니다)
오오미 명문사단에서 복무하셨군요ㅋ
사... 사창리!!! 27사단의 라스베이거스 -_-ㄱ
ㅋㅋㅋ 저도 27사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