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숙 에세이
아버지의 편수 냄비
요즘 방송은 공중파보다는 종편에서 함량 높은 프로그램을 많이 제공하는 것 같다. 예능뿐 아니라, 드라마도 공중파의 천편일률적이고 안일한 서사구조는 따라올 수 없는 재미와 흥미요소가 있다. 그런 경향을 알고 있으면서도 습관처럼 TV를 켜면 5번부터 차례로 채널을 훑는다. 편의상 화살표를 눌러서 채널을 바꾼다. 그러자면 5번 6번 7번 8번... 공중파가 아닌 채널들이 들어오게 된다. 아주 신기하게도 퐁당퐁당 공중파 채널 중간중간에 홈쇼핑 채널을 깔았다. 물에 빠지지 말라는 징검다리도 아니고, 아주 절묘하게 상품을 파는 광고가 뜬다. 언젠가는 바로 옆 방송에서 눈에 좋은 루테인 성분에 대해 전문가가 나와서 보증하는 인터뷰를 본 거 같은데, 바로 다음 홈쇼핑 채널에서 ‘루테인’ 상품을 팔고 있었다. 와, 대단하다. 방송의 상업성이란...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오늘 ‘만나면 좋은 친구’ 방송을 보다가 채널을 돌리니 냄비를 팔고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냄비세트를 사면 인덕션 1구를 선물로 준다는 거였다. 마침 식탁 위에 1구짜리 인덕션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눈에 쏙 들어왔다. 다른 냄비도 있지만 버릴 것도 있으니 이번 기회에 바꾸자 싶어서 주문을 했다. 냄비 세트에는 편수냄비도 들어 있었다. 그 외에도 스파게티 냄비 등 두 개가 더 있어서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씽크대를 열면 세월만큼 쌓아온 그릇들이 있다. 버린 기억이 없으니 20년도 넘은 손때 묻은 도구들이다. 자주 써서 손 가까이 바깥 쪽에 자리한 것, 곰탕 끓일 때 쓰는 커다란 들통은 덩치가 커서 안쪽 넓은 자리에, 찰밥 찔 때 쓰는 찜통은 크기가 마땅치 않아 자꾸 사들여 여러 개가 보인다. 아주 큰 거, 중간 거, 선물로 받은 작은 거. 한 번도 쓰지 않은 결혼할 때 샀던 세트 그릇도 있다. 치우기는커녕 자리잡고 앉아서 이리 만졌다 저리 만졌다 하니 버릴 것이 또 하나도 없다. 버릴 거라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주 쓴 냄비들이다. 자주 써서 헐거워지고, 타서 그을린 냄비들. 이제는 막쓰기 편해서도 다른 걸로 바꿀 엄두도 내지 못한다.
라면 끓일 때 아이들이 최고로 좋아하며 자주 사용하는 편수냄비. 아! 내게 편수냄비라는 걸 제일 처음 알려준 물건. 이 냄비는 세월로 치면 얼마나 될까. 아버지가 쓰러지시기 바로 전에 우리 집에 들어왔으니까 30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그날, 들떠있던 아버지의 얼굴, 목소리가 다 생각난다. 은행도 믿지 못해 당신 금고를 두셨던 아버지는 ‘투자’라는 걸 해본 적이 없으셨다. 당연히 복권을 사본 적이 있으실까, 아마 없으셨겠지. 그런 아버지가 제약회사 이벤트에 응모를 해보셨던 거다. 생각지도 않으셨을텐데 냄비가 당첨되었다고 아주 좋아하셨다.
조심스럽게 헤쳐나온 당신의 인생이었기에 웬만하면 당신의 노년을 직접 꾸리셨을텐데 건강이 받쳐 주질 않았다. 아버지가 우리 집으로 오시던 날, 작은 빌라에 켜켜이 쌓인 물건들을 처분하고 가볍게 몇 가지 짐을 가지고 오셨다. 거기에 그 편수냄비가 있었다.
언니가 두고두고 아버지께 섭섭해 하는 게 있다. 집을 정리하실 때, 거실 TV 수납장에 있던 언니 결혼식 비디오 테이프를 버리신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동물의 왕국 녹화 테이프와 편수냄비는 챙겨 오셨다.
아버지가 언젠가 동네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천진하게 하셨던 말씀이 있다. ‘나는 혼자서는 못 살 거 같아요. 혼자 있어 본 적이 없지요’ 그때, 우리 집에 오시기 전에 아버지는 혼자였다. 긴 병을 앓으시던 엄마는 돌아가신 지 얼마되지 않았고, 나는 멀리 일산으로 이사왔고, 직장으로 조카들을 우리 집에 맡겨야 했던 언니도 일산으로 옮겨와 있었다. 학교를 다니던 남동생은 누나 집으로 들어가시겠다는 아버지의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에게 독립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마치 버림받은 듯이 섭섭해 하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집을 팔고, 정리하는 시간 동안 한 달여를 혼자 계신 거 같다.
꼼꼼하게 남겨둘 살림과 버릴 것들을 정리하기에는 아버지의 건강상태가 좋지 못했다. 누군가 물건을 가져가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새것이든 헌것이든 몇 푼을 받고 그냥 가져가라고 하신 거 같다. 그런 와중이니 언니의 마음까지 생각해서 결혼식 비디오니 버리지 말아야지 하고 헤아리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쓰러지시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이제 겨우 추수리신 상태였으니까. ‘혼자 있는 것이 어려우시다’는 아버지시니 얼른 시간이 가서 딸네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지 하는 마음뿐이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편수냄비는 그렇게 우리 집에 남게 되었다. 일산에서 서울로 이사올 때도, 월계동에서 중계동으로 이사올 때도, 또한번 집을 옮겼을 때도 편수냄비는 계속 라면을 끓이는 중이었다. 때로는 다른 국물이 담기기도 하면서.
편수냄비를 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세상에 절로 주어지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기에 당신도 공짜로 남에게 베푸는 것은 인색하셨던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는 손자들에게는 아낌없이 베푸셨다. 엄마랑 사셨을 때는 집안일 도우시는 걸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우리집에 계실 때는 아이들이 장난감을 어지르고 다른 것을 하고 있으면 당신의 속도로 천천히 장난감을 쓸어 담기도 하셨다. 딸내미에게 요구하시기보다는 무엇이든 도우려고 하셨다.
‘승진이한테 너무 소리치지 마. 마음이 여린 아이니까 살살 달래야지’하시며 나보다 손자의 성향을 더 잘 아셨던 아버지. 아버지랑 살았을 때, 좀 잘해 드릴걸, 아버지 손을 잡고 산책도 많이 나갈걸, 조곤조곤 아버지 이야기를 좀 더 들어 드릴걸. 참으로 죄송한 마음뿐이다.
오늘도 나는 그을린 편수냄비를 버리지 못하고 씽크대 맨 앞쪽에 넣어둔다. 쓰기 편하게. 며칠 후면 새로 들어올 편수냄비는 저 뒤쪽에 들어가서 자기 차례를 기다려야 하리라.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버리지 못했다
저에게 결핍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살아온 날들이 무난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써오는 글들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주제는 엄마, 아빠, 나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상대방이 ‘됐다 그만해라’ 할 때까지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충분히 차고 넘쳐야 피폐했던 마음이 온전히 복원된다는군요.
서툴게 쓰는 제 글에는 아픈 엄마가 나오고, 소심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뭔가를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내가 자주 나옵니다. 쓸 때마다 소재나 주제가 다르지만 엄마, 아빠는 여러 갈래로 변주되면서 매번 등장합니다. 가까이 있었으면서 온전히 다하지 못했다는 죄스러움이 마음속에 남았기 때문이겠지요. 털어냈다고 생각했는데도 아직도 나는 한참을 더 걸어야 할 거 같습니다. 충분히 차고 넘칠 때까지 말입니다.
글의 본질에 들어가지는 못하면서 꾸준히 글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주변에는 저보다 훨씬 글을 잘 쓰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분들은 겸손하게 ‘나는 이제 작가가 되겠다는 열망은 버렸어. 읽고 쓰는 사람으로 만족하려고.’ 하면서 열심히 읽고 쓰십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사람이어도 충분히 행복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무심하게 신문에서 작게 나온 공모전 기사를 보고는 오려서 지갑에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 기회로 ‘시와 산문’을 만나게 되었네요. 이 소중한 기회가 좀 더 글을 잘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은 동력이 될 거 같습니다. 평범한 글을 선택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무언가를 끄적이는 아내를 무심한 듯 세심하게 바라봐 주는 남편에게 감사드립니다. 엄마의 건강을 걱정하는 총명한 딸, 감성어린 군인 아들, 우리 아이들이 자기 나이에 맞는 젊음을 누리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