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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라는 이 비생산적인(?) 직업은 여러 가지 오해 속에서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화가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얻는 이미지나 또는 지나치다 우연히 받는 모티브가 어떤 경로를 겪어서 무엇 때문에 그 시간과 그 장소에서 발현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시시각각으로 보고 듣고 부딪치는 상황들에 대처하면서 반응을 일으킨 한 인간의 생활경험들이 요약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비평가의 눈에도 주도(周到)하게 반영될 수는 없는 일이며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다라서 오늘날 비평의 부재(不在)니 그 무용론(無用論)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우리들은 하루를 살아가는 데에도 무수한 감정의 억양과 굴절 또는 갈등을 겪으면서 그것에 대처해 나가고 있다. 이런 미궁(迷宮)을 거쳐서 떠오르는 화가의 이미지나 그 작품이라는 것도 누군가의 말을 빌리면 '기껏해야 뱀이 벗겨둔 허물'과 같은 프로세스에 불과하며 우리들은 이 주제가 빠져나간 허물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의식이나 감정, 그가 말하고자하는 뜻을 읽는다. 이 어려움과 여기에서 빚어지는 오해에서 오늘날과 같은 비평무용론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연구실을 찾아온 동료의 한 사람이 문을 들어서자마자 내가 손대고 있던 그림을 보고 "오늘은 곰탕거리를 그렸군"하면서 농을 걸러왔다. 내 방을 자주 드나드는 동료들이 내 그림에 대해서 여러 가지 억측과 비평 또는 농과 같은 말들을 걸어오면서 나를 괴롭히거나 자극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갑갑한 심정의 숨통을 돌리는 휴식시간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생김새도 빤빤하고 정상적인 사고(思考)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왜 이런 그림을 그리느냐는 불만과 내 행동에 대한 기이함이 농을 거는 장난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 '곰탕거리'라는 말은 농을 거는 그 사람에게는 농이었지만 내게는 농이 아니라 다른 어떤 계시를 받았던 것이다.
대체로 농담과 같은 인간의 유희 속에는 문학적인 직유(直喩)나 은유(隱喩)와 같은 위트가 작용하는 것인데 이 농은 그것을 담고 있었다. 이 곰탕거리의 [성낸 소]라는 그림은 그 무렵 내 그림의 경향이라고나 할까, 80호 가량의 구형으로 눕혀진 캔버스위에 충만되어서 넘쳐흐르는 힘찬 그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해서 그린 그림이며 그것도 소를 그리려는 처음부터의 의도는 없었고 그 화면을 가득 채우기 위한 라인으로서 바탕의 패턴이 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소의 패턴 속공간에 사람의 두형(頭形)이라든가 손 또는 발이나 발자국과 같은 추상적인 형을 그려 넣었던 것이다.
이 무렵 같은 테마로써 캔버스라는 공간을 Mass로 충만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린 작품[변신(變身)]이나 [형장(刑場)]등이 있다. 앞에서도 말을 했지만 저 [성난 소]는 처음부터 곰탕거리를 그리려는 의도는 없었고 그리고 난 다음에도 그것을 느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동료의 저 농담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하고 그로부터 이 모티브가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을 더듬어 거슬러 올라가면 6·25동란이 휴전협정으로 일단은 마무리를 짓고 예비역으로 귀한하는 병사들과 상이군경들이 거리에 범람하던 시기에서 시작된다. 그 다음이 일련의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의 사이에 내게는 몇 차례의 현실과 같은 생생한 꿈을 꾼 일이 있었다. [성난 소]의 이미지는 이 꿈에서 비롯된 것이다. 감감히 잊고 있었던 일들이 그날 그 동료의 계시에 의해서 밝혀진 것이며 내 속에 잠재하고 있었던 것이 이 작품에 현현(顯現)된 것을 알았다.
"내가 꾼 꿈은 생시의 그것처럼 선명한 것이었다.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상가의 도매상들이 즐비한 곳이었으며 이 거리를 거쳐야만 했다. 한 여름의 아스팔트길을 걷고 있는데, 항상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이 시장거리가 더운 탓인지 그날은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그 도매상들이 상품을 운반하는 쇠바퀴 끌수레들이 - 마치 그것은 까르쥬(Jean Carzou)가 그린 패전터(敗戰0) 그림에 나오는 야포(野砲)와 같은 수레들이 - 양 길가에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 사이에 쿠리(중국의 중노동자)와 같은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인부들이 서성대고 있었다. 여름 태양이 쪼이는 이 적적한 거리에 서성대고 있는 인부들의 손에는 갈퀴나 포크와 같은 흉기가 쥐어져 있었으며, 이 심상치 않은 곳을 통과하려는 그들의 노여운 눈초리가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겁에 질린 내 발은 지열(地熱)에 녹아있는 아스팔트 속으로 눌리는 것을 느끼면서 간신히 발을 옮겨서 그곳을 빠져 나와서 옆길로 접어드는데 거기에는 또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음향(陰向)으로 된 그늘진 골목에 누더기를 두르고 깡통을 손에 쥔 거지 아이들이 7,8명 뛰어 놀고 있었다. 깡통 밥통들을 짤랑짤랑 소리를 내면서 희희대고 있는 그 너머에서의 이상한 비명소리에 눈을 돌렸더니 거기에는 또 다른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팔 다리가 없는 머리와 몸통만의 아이가 누워 있는데 그 배 위에 쥐가 한 마리 올라앉아서 아이를 물어뜯고 있었다. 그 아이의 외침소리는 이 쥐놈을 죽여달라는 뛰놀고 있는 아이들을 향한 비명이다. 이 쥐놈을 잡아죽이면 맛있는 음식을 얻어서 너희들에게 주겠다는 말을 애원조로 되풀이하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들은 체 만 체 그들끼리만 희희대고 있는 것이다.
이 공포의 전율 앞에서 나는 그 쥐를 향해서 공을 차듯 힘찬 자세로 발을 드는 순간, 그 쥐가 내 얼굴을 향해서 뱉는 피와 살덩이에 놀라서 비명을 지르면서 잠을 깨고 말았다."
이 꿈이 지니는 알레고리 속에는 6·25라는 비극이 농축되어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휴전 이후의 사회적인 상황과 우리들이 겪은 전쟁의 비극과 그 피해의식 같은 것이 이 꿈속에 집약된 것이다.
그러나 저 [성난 소]의 제작시기는 이 꿈으로부터4,5년 이후인 비교적 사회가 안정을 되찾던 무렵이며 내 개인적인 생활에도 그것들을 삼키고 소화될 무렵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것은 생체(生體)의 피비린내가 가시워지면서 '곰탕거리'로 중화된 것인지고 모른다.
이 지옥도(地獄圖)의 이미지가 곰탕거리로 변질된 데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희석된 것도 있겠지만 종래의 예술이 현실과는 다른 차원으로 이상화하려는 고전적 심미주의 적인 형식에서 비롯되고 있다.
인간사회의 비극은 어제나 차바퀴 밑에 깔리듯 땅에 묻혀지고 잊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료가 말한 내 그림에 대한 비유도 결국은 그 작품에 대한 오해와 같은 희석도니 표현이었고 이 그림 속에 묻혀져 있는 비극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저 직관적인 관조에서 터져 나온 위트는 논리적인 사고로서는 나올 수가 없는 희귀한 경험이다. 그것을 객체(客體)로서 거리를 두고 봤을 때 이 심각한 현실이 해학적인 농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저 더러운 전쟁 속에 깔린 비극, 그것을 희화(戱 )로 보고 희극(喜劇)으로 보이는 거리감과 시간의 흐름의 무상함이 여기에 있다. 밀집된 거리에 개미떼처럼 우글대는 사람을 향해서 하늘에서 폭탄을 퍼붓는 광경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 좋은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은 신기한 구경거리이다. 그것은 자기가 직접 당하는 일이 아니라 객관적인 거리감을 가지고 봤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곰탕거리라는 형용은 그 주제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면서도 실체가 빠져나간 허물에 대한 비판적 익살일 수도 있는 것이다.
1959년 개인전을 가졌을 때 알렉산더·헬스(주한서독총영사, 미술평론가) 씨는 신문평(코리언·리퍼블릭)에서 저 「성낸 소」를 보고 말하기를 "이 소는 작가의 객체로서의 소가 아니라 주체로서의 그 자신을 나타낸 것이며 그것은 표의문자적(表意文字的)인 상징이다."라고 했다. 이 헬스씨의 비평이 잘 된 것인지 어떤 지는 모르겠지만 내 작품 이상으로 난해한 함축성이 있는 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악마의 소가 나라는 형용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내 그림을 표의문자와 같은 것으로 형용했다는 데 대해서 아직도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
저 꿈속에 나오는 갈퀴나 포크 등의 흉기를 들고 서성대는 쿠리의 등장을 외상도 입지 않고 살아남은 우리들에 대한 죄의식(罪意識) 같은 것을 강요하거나 유발시키는 장면이다. 그 다음 제 2의 장면의 깡통을 들고 희희대는 거지 아이들의 등장은 이 사회의 무정한 에고이즘을 반영한 것이며 이 무렵의 상이군경들의 외침 속에는 '나눠 먹자'라는 구호로서 가정이나 기관을 침입하는 사례가 성행되고 있었다. 마지막의 머리와 몸통만의 아이의 외침소리는 전쟁의 불가항력 속수무책을 뜻하고 있으며 그 호소나 절규에 아무런 반응이 없는 비정한 인간사회를 상징하고 있는 장이기도 하다. 또한 상이군경들의 목발이나 갈퀴는 저 누워있는 아이의 몸통과 대응하고, 느닷없이 등장한 쥐의 공포는 이 무렵 쥐의 피해를 막기 위한 쥐약을 남용한 나머지 빚어진 인명이나 가축의 피해가 막심했던 데서 기인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쓰여진 이시가와 다쯔죠의 소설 「제 4 공화국」은 쥐떼들이 코카사스의 곡창(穀倉)을 휩쓸어 그곳을 불모(不毛)로 만들고 모스크바나 스탈린그라드와 같은 도시를 습격해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소장품을 모조리 뜯어 먹는다는 쥐의 공포를 묘사한 내용이며 이 영상(映像)들도 저 드라마를 엮는 데 가담하고 있다.
이 꿈의 내용들은 물론 내 개인적인 관념이나 감정의 프로세스이지만 이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공통의 감정이기도 할 것이다. 이 꿈의 이야기는 이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고 말하기 싫었던 숨겨둔 상처와도 같은 것이었지만 이 아픔의 상처를 여기에서 드러내는 우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1950년대 외지(外誌)에서 본 기사에 파리의 밤아가씨들의 수가 5만이며 이와 같은 수의 미술가들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5만의 미술가들 중 제대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수는 그 1%에 불과하면 그 밖의 사람들은 밤거리의 아가씨들과 같은 고달픈 신세라는 것이다. 미술가들의 이런 비참한 생활은 파리뿐만이 아니라 그 밖의 여러 도시에서 더욱 심할 것이며 이들은 멋쟁이도 거지도 실업자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생활은 진지한 인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며 파리의 밤아가씨들도 그들 생활의 룰 속에서는 나름대로의 진지한 삶을 꾸려가는 같은 인간가족들이다.
고전주의의 미학은 미와 질서의 전형(典刑)이며 이것을 풍월을 읊는 미학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며, 이러한 상식을 바탕으로 하는 예술관은 예술을 타락시키고 인간이나 사회나 정치 전쟁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 점잖고 고상한 예술을 만들어 왔다.
오늘날의 예술이 마귀 쫓는 기능을 상실한 것은 서구적인 새로운 신화(神話)가 등장하고 부터이다. 이 기능은 인류를 괴롭히는 적에 대항하는 무기로서의 예술이다. 이 구신화(舊神話)의 거세에 따라서 예술은 다만 인간의 감관만을 즐겁게 하는 미인이나 꽃과 같은 대상에로 옮겨져 왔다.
그러나 몇 차례의 인류멸망의 위기를 겪으면서 예술이 탐미주의적인 미에만 머물 수 없다는 결의를 보이고 있다. picasso의 Mask사상(思想)이나 Guernica라는 회화는 그것을 뜻하고 있다. Guernica의 저 주술적인 광기와 노여움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와 적개심을 심었고 독재자와 군국주의에 대항하는 결의로 하여금 100만의 원군을 얻어서 2차 대전을 승리에로 이끌었다.
우리들의 값어치가 있는 일들은 반드시 심혈(心血)을 기울인 결과에서 얻어진 것이다. '피눈물나는 노력' '피땀을 흘려서'라는 말들은 새로운 말이 아니라 예로부터 내려오는 격언이지만 인류가 역사를 살아오면서 모든 어려운 일들이 이것으로 하여금 해결되고 이겨 나온 것이다. 이 심혈을 기울인 일은 무적(無敵)이다. 그것은 마귀를 물리칠 수도 없앨 수도 있는 것이며 이것을 믿지 못하면 마귀나 죽음에 조롱당하는 인류멸망에의 길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 피의 진지한 대결에서 기적을 만들어 왔다. 이 피의 열과 의지에서 마귀를 위협하고 적을 몰아 낼 수가 있었다. 이 생명의 계속에의 신념과 열(熱)의 영속(永續), 죽음과 싸우는 깊은 사상을, 그 광기와 분별있는 의지만이 예술을 만들고 값어치 있는 내일의 삶을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원시신앙의 중심적인 마법은 이 피의 주술에서 나오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행해지고 있는 방패로서의 부적(符籍)도 피빛이며 굳은 약속을 맺는 도장의 인주도 피빛이며 그것은 피의 귀중함을 나타낸 혈맹이다.
원시 기독교 미술의 아이콘(Icon)이나 미니어추어(Miniature)도 마찬가지로 주색으로 그린 성상(聖像)이나 성경삽화(聖經揷畵)이지만, 이 Miniature라는 어원이 라틴어의 미니엄(Minium)에서 비롯된 주색을 뜻한 말이다. 이 미니어추어와 아이콘이 그 후 단색채에서 다색채(多色彩)로 옮겨지면서도 그 주제(主題)의 이니시얼만은 주색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민화(民話) 속에도 이 피의 기적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다. 열녀나 효부와 같은 이 피의 공포 앞에서는 모든 마귀들은 무릎을 꿇거나 달아난다. 또한 자기의 진지한 결의를 혈서(血書)로서 표명하는 관례가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남아 있으며 예술은 때로는 이 혈서와 같은 것이다.
예술을 보고 듣는 사람들의 직접 직관에 호소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정의가 있다. 그러나 이 직접 직관의 전달기능이 오늘날처럼 무력한 시대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의 하나는 19세기 이후의 예술이 많은 변혁을 일으키면서 난해성(難解性)을 드러낸데서 기인하고 있다. 또한 이 개혁의 사조(思潮)가 모든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지 못하고 여기에 대한 보수적인 입장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과를 통해서 말하려는 원죄(原罪)를 읽지 못하고 그 사과의 미에 머물고 마는, 산수도(山水圖)에서 산수를 숭앙하는 산악신앙(山岳信仰)의 영매(靈媒)를 경험하지 못하고 그 풍월(風月)의 미에 머물고마는, 이 오해받고 있는 예술의 전달기능의 새로운 검토가 요망되고 있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예술의 호소력이나 설득력이 이처럼 무력한 데 대한 불안과 초조에서이다. 앞에서 나는 미술비평의 무용론(無用論)을 말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오늘날의 예술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비평은 작품 그 자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을 그대로 받아넘길 수만은 없는 복잡하고도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 그것은 흙 속에 혼유되어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보석을 보석이라고 우겨대는 말과 같은 것이다.
작가는 독자의 취향에 접근하기보다는 그 창작에서 겪은 경험과 같은 것을 독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이 경험 속으로 이끌어 넣은 길잡이를 작가 스스로가 하기보다는 오늘날의 미학이나 미술비평이 맡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의 맥루한 사상(思想)의 선풍 속에서도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많은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오늘날의 인간소외나 인간성 상실의 문제가 이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은 인간관계의 대화의 기능으로서의 언어적 형식에 있다.
구텐베르크 이후의 활자문명은 인간의 사고(思考)를 선적(線的) 논리적으로 이끌어왔고 종래 오관(五官)으로 파악하던 대상을 시적(視的)으로 만들고 있다.
원시인들이 사물을 직접 직관으로서 대처하는 초감각적인 조직화 능력은 시각이나 촉각, 후각이나 청각과 같은 오관으로 하여금 파악된 뛰어난 인식이었다. 그 후 인간이 시적(視的) 인식에로 기울여지면서 그 밖의 감관은 퇴화되고 활자나 영상과 같은 간접적인 미디어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기계화된 미디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의 뜻을 희석시키면서 오해와 허위를 조성하고 우리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우리들은 이것을 회복해야만 하며 예술은 이 직접적인 경험의 산물이다.
저 선적 사고의 논리성은 우리들의 직접 직관의 기능을 퇴화시키면서 모든 것이 이 논리성 위에서만 인식되고 가치가 주어진다. 따라서 예술의 전수기능(傳授機能)의 재검토가 시급한 것이며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인간들 서로가 체온을 맞댈 수 있는 인간관계의 커뮤니케이션을 바랄 수가 없을 것이다.
부덕을 위한 碑 1986
향상, 1096
바람의 노래, 1989
형상, 1993
우리의 현대미술의 전개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한 시점으로 떠오르는 것은 1957년이다. 이 해 거의 동시적으로 등장한 네 개의 단체-모던·아트, 창작미협. 신조형파, 현대미협-는 한국현대미술의 장을 새롭게 여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상의 네 단체는 그 인적구성이나 이념의 색깔이 각각 다르면서도 고루한 형식주의의 리어리즘의 아성에 도전하는, 이른바 유대를 은연중 띄었던 것 같이 보인다.
조형이념에 의한 동지적 결속이나 뜨거운 창작의 열망에 있어 이들이 펼쳐보였던 행동의 지평은 새로운 미술의 풍토를 열어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현대미술의 기점을 57년으로 잡고 있는 것이 어느덧 정설화되어가고 있음도 여기에 기인함이다. 중견작가들로 구성된 모던·아트와 창작미협은 비슷한 연배의 작가들임에도 대단히 대조적인 면을 들어내고 있었다고 하겠다. 모던·아트의 구성멤버가 순수한 재야작가를 표방해 온 중견들의 결속인 반면, 창작미협은 국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작가들 모임이란 사실과, 모던·아트가 지적인 조형논리와 방법을 펼쳐보인데 대해 창작미협은 감성을 바탕으로 한 리리시즘의 심화를 공통된 언어로 추구하고 있음이었다. 젊은 작가들의 진취적인 행동윤리와는 대조적으로 이들 중견그룹들이 지향한바 조형의 관심의 폭은 우리 현대미술의 전개에 주요한 인자로서 크게 작용한 것이기도 했다. 특히 지적 조형의 전통과 바탕이 빈약한 이 땅에 모던·아트가 전개해 보인 방법의식은 적지 않은 영향 감화를 미친 것이 되었다.
대체로 60년에 접어들면서 이들 단체가 각기 내외적 상황으로 인해 해체되거나 그 이념활동을 끝내고 있는데 모던·아트 역시 60년에 이르러선 휴면상태로 들어가고 있다. 더러는 해외로, 더러는 세상을 떠나는 등 많지 않은 멤버들의 손실도 들어나고 있다.
鄭点稙은 모던·아트멤버로써 남아난 몇 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오랫동안 대구지방에 정주해 왔기 때문에 서울에서의 활동은 모던 아트 이후엔 그렇게 자주 대할 수 없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만큼 모던·아트의 체취를 오래 간직하고 있는 작가도 따로 없을 듯하다. 몇 사람 현존하는 모던·아트회원들 작품들도 변화되거나 이념적 변질을 들어내고 있는데 비해 그는 비교적 모던·아트의 정신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않은가 생각된다. 말하자면, 그는 초기 모던·아트가 구현해 나갔던 이념과 방법을 그 나름으로 심화시켜오면서 오늘에 이른듯 하다. 이미 지적한대로 모던·아트는 대단히 지적인 화면논리와 견고한 구성지향을 지속해 보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는 것이기도 하다.
5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의 편력은 다소의 변화적 요인들로 점철되기도 하지만 대상을 요약하고 표현을 절제하는 환원주의적 의식은 일관된 톤으로 유지되고 있는 인상이다. 그러한 환원주의를 가장 진하게 반영하는 것이 기념비적인 형상이라고 하겠다.
그의 최근 몇 년래 작품은 이전의 견고한 구성적 성향에서 다소 벗어난듯한 인상을 준다. 견고하게 쌓아올리는 성향에서 다소 벗어난듯한 인상을 준다. 견고하게 쌓아올리는 상형이 아니라 거의 일회적인 운필에 의해 마감되는 유동적인 상형의 등장을 보이고 있다. 마치 모필에 의해 구사되는 서예의 획과 같은 즉흥적인 발상이 부상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작품은 이전의 환원주의적 방법에서 결코 빗나간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듯하다. 오히려 환원의 방법이 더욱 심화되어 간 양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곧 자기세계의 밀도와 무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특한 자기방법을 가꾸어 온 유닉한 작가로서의 이미지도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 吳光洙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