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가치를 알아보는 눈, 안목에 대하여』를 읽고
서울공대지 2018 Autumn No. 110
전효택 자원 25회 에너지자원공학과 명예교수,
수필가 / 서울공대
1995-97 편집장
산문집
『아쉬운 순간들 고마운 사람들』
학문 분야에 따라 지식을 깊이 탐구하기만 해도 되는 분야가 있고, 지식 탐구와 동시에 많은 경험(또는 감각)이 필요한 전문분야가 있다. 즉, 지식(knowledge)과 경험(감각,
feeling)을 동시에 갖추어야 고도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분야이다.
『가치를 알아보는 눈, 안목에
대하여』는 지식과 경험을 지닌 미술 전문인이 가지는 안목에 대한 책이다. 저자인 <필리프 코스타마냐>는 프랑스인으로서 이탈리아 회화를 전문으로
하는 미술사 학자이며 미술품 감정사와 학예사를 병행하고 있는 전문인이다.
미술 감상, 특히 서양 회화에
관심이 많은 일반 아마추어라도 인상주의 그림을 좋아하면 적어도 모네, 고흐, 세잔느의 작품을 쉽게 알아보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 표현주의 프랑스
화가인 마티스를, 또는 영국의 자연주의 화가인 터너의 그림을 애호하는 팬이라면 어렵지 않게 그들의 그림을
식별하여 낸다. 다행히 세기말에 들어와서는 회화에 화가의 서명이 들어 있어 식별에 도움이 되고 있다. 중세의 기독교 종교회화나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 작품에는 화가의 서명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세 시대의 교육용 종교화는 성서의 내용과 관련된 그림들이어서 화가의 서명을 감히 화폭에 나타내지 않았다. 작자 미상의 작품을 대상으로 원작자를 밝혀내거나 무명의 거장들이 남긴 빼어난 그림들을 찾아내어 전시하고 세상에
알리는 일은 미술사의 토양을 풍부하게 하는 전문적인 작업이며 탁월한 안목을 지닌 전문가라야 가능한 작업이다. 역자는
저자 코스타마냐를 “상아탑에 갇힌 미술사학자이기보다는 세계 도처를 누비는 미술품 탐정이자 발견자에 가깝고, 미술품 감정사보다 한층 전문성이 더해지고 세분화 되었으니 ‘안목가’라는 명칭이
어울린다.” 라고 묘사하고 있다.
필리프 코스타마냐 지음 김세은 옮김, 아날로그
2017. 303쪽
전문적인 미술 안목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 분야의 재능도 있어야 하나 먼저 정식교육과 탁월한 훈련을 통해 고도의 지식을 습득하여야 하며 특히 훈련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림을 보는 천부적 감각을 키우기 위해서는 그림을 끊임없이 많이 보아야 하며 화가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 또한 사색도 많이 하고 주변의 안목 높은 사람들과 부지런히 교류하여야 하며 탄탄한 인맥이 갖추어져야 한다. 안목가는 미술품 감정사이므로 미술품 수집상과 긴밀한 접촉을 하여야 하며 위작의 폐해를 줄이는 책임이 있는 전문인이다.
탁월한 안목을 지닌 미술품 감정사는
풍부한 도서 자료와 방대한 이미지 저장소를 활용함과 동시에 자신의 능력으로 미술 작품의 원작자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일련의 미술작품에 대한 자기 나름의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작품의 정체를 두 눈으로 직접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미술품 감정의 절대 신은 없다”의 한 예로서 1965년에 미술사의 대가
세 사람이 ‘16세기 유럽미술사 전시’를 기획한 경우를 들고 있다. 프랑스 국내에 소장된 관련 미술품들을 조사하면서 알아보지 못한 <브론치노(1503-1572, 피렌체 파 화가)>의 작품으로서 니스미술관에서 발견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저자가 2005년 감정한 사례이다. 이 작품이 주목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세 명의 대가가 놓친 것은 이 작품이
16세기 작품이 아니라는 견해가 확산되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예술 작품은 자기 자리에 있어야
가장 빛난다 한다. 나는 서울 파고다공원 내에 있는 원각사 13층
석탑(국보 2호, 높이 12m)의 풍화 훼손과 보호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 석탑은
세조 13년(1467)에 대리석으로 건립되었는데 수 백 년이
지나는 동안 풍화와 마모로 붕괴 위기에 노출되어 있었다. 우리 연구진은 이 탑을 박물관 실내로 옮기자는
의견도 제시하였으나 현재 그 자리에 투명 덮개를 씌워 보존하며 전시하고 있다. 백두산 부근의 광개토대왕비(장수왕 2년(414)에
응회암으로 건립, 높이 6.39m)도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이 있던 집안(集安, 지안) 지역에 투명 덮개로 보관되어 전시되고 있다.
거장 화가에게는 단번에 식별
가능한 고유의 필치가 있어 육안 감정이 매우 중요하므로 사진만 보고 또는 디지털 이미지만으로 감정을 끝내서는 안된다. 국내에서도 작고한 유명 여성 화가가 본인 자신이 그린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도 불구하고 미술관 관계자들은
위작이 아니라고 하는 데는 어이가 없다. 작가 자신이 자기 필치와 스타일을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역사가 있는 대가의 미술품이 고가이므로 위작이 활개치는 위조품 시장에서 감정사의 역할과 책임은 실로 크다. 첨단의 감정 기술 방법인 적외선 시험이나 X선 감정 기법 및 연대 추정
방법이 있으나 작품 감정을 도와주는 기법이며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미술품 감정사는 남다른 안목과 개성을 갖출 때 존경
받고 명성을 높일 수 있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발견하고 발표하여야 한다. 그림에 담긴 역사를 파헤쳐
진실을 밝혀내야 하며 언제든 다른 의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반대 의견이 나오면 한 번
더 숙고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고심 끝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연구란 모든 사람이
그 결론을 당연하고 확실하게 받아들여 거듭 인용할 때 오롯이 완성되었다 할 수 있다고 저자는 피력하고 있다. 한
예로서 과학 기술 분야의 국제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들은 “과학기술논문
인용지수”(SCI=
Scientific citation index)에 의해서 그 권위가 인정된다. 노벨과학상 추천 논문들은 인용지수가
보통 오천 회 이상이라고 한다.
미술품 감정사들은 판단 착오에 노출되어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감정 소견을 번복할 권리는 있다. 세상사는 일장일단이 있어 우선 감정사는 미술상과 컬렉터와의
삼각관계를 잘 유지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미술품 감정은 팀워크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최고의 작품을
감정하고 찾아내는 기회가 우연히 오기도 하나 드문 편이며 아름다움은 항상 준비된 자에게 행운이 찾아온다고 하였다.
미술품 감정 의뢰를 받고서 전문가의 눈에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나 주인의 기대에는 미치지 않을 때도 있는데 수익성이 별로 크지 않다고
느낄 때이다. 그렇다고 미술품 감정사는 거짓 감정을 할 수는 없으며 돈을 노리고 일하지 않는다. 원본인지 복제본 인지를 알아내고 그대로 알려 주어야 위작의 피해를 줄일 수 있으며 미술품의 가격이 아닌 가치를
알려야 한다. 원작자를 판별하는 전문가라면 힐끗 한 번만 쳐다보고도 누구의 작품인지 알며, 직접 만져봄으로써 자신의 판단이 확실함을 증명할 수 있고 자신의 예감이 적중함을 입증할 확고부동한 증거를 댈
수 있다. 미술품 전문가는 유구한 역사를 품은 성당이나 생각지 못한 곳에 숨어 잠자고 있는 걸작을 깨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