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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미학 원문보기 글쓴이: 민얼굴(김성한)
어무이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김성한
“아바이가 없으면 덕수 니가 가장이지?”
한국전쟁 피난 중 흥남 부두에서 헤어진 아버지가 남긴 말을 일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온 ‘국제시장’ 영화 주인공 덕수 씨. 그는 사 남매 맏이였다. 동생의 학비를 대기 위해 이역만리 파독 광부가 되고, 여동생의 결혼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총알이 난무하는 베트남으로 떠난다. 1,000m가 넘는 지하 막장 탄가루 더미에서, 포탄이 작렬하는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긴다. 그러다 월남전에서 입은 총상으로 의족을 한 채 절뚝절뚝 절며 귀국한다. 장남으로 태어난 죄 아닌 죄의 형벌이 저리도 무겁다는 말인가.
극장 안이 갑자기 코 훌쩍거리는 소리로 술렁인다. 옆자리 아내도 눈물을 닦고 있다. 지지리 가난한 오 남매 맏이에게 시집와 고생을 바가지로 한 지난날이 떠올라서일까.
나는 지금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강산이 너덧 번이나 변한 세월임에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날도 나는 매연 풍기는 아스팔트길을 걸어서 학교에 갔다. 사촌 형으로부터 퇴 물림 받은 교복을 입고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반달음질 치며 걸어갔다. 호주머니 속에는 그 흔한 동전 한 닢이 없었기 때문이다. 드르륵! 투박한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담임선생님이 불렀다.
“성한아 너희 어무이(어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전화가 왔다.”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3층짜리 학교 건물이 휘청거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신 나이 겨우 삼십 대 후반인데…. 막냇동생이 세 살, 그 위로 일곱 살, 아홉 살. 저 어린 자식들을 놔두고 가면 안 되는 데.
어머니는 가야산 자락 적송마을에서 딸 부잣집 막내로 태어났다. 외할머니 나이 마흔 넘어 얻은 늦둥이였다. 바로 위 언니와는 일여덟 살이나 차이가 났다. 늦둥이라 어려서는 가족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어머니 나이 채 열 살도 되기 전에 외조부모님이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그러다 보니 아들딸 오 남매나 되는 큰 외삼촌 집에 얹혀 살 수밖에. 바쁜 농사일에 당신 자식 건사도 어려운 외숙모가 그 어린 시누이를 제대로 돌봤을까? 눈칫밥만 먹다 어머니 나이 스무 살에 우리 집으로 시집왔다. 집안 어른들이 정해준 대로 신랑 얼굴 한번 보지 않고 혼례를 올렸다고 한다. 사흘 신행을 마치고 가마도 없이 논밭 사랫길을 타박타박 걸어서 시집오던 날, 새색시 눈에는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오 남매 둘째인 아버지는 결혼하자마자 분가를 했다. 할아버지로부터 산골 다랑논 서 마지기에다 뙈기밭 하나를 물려받았다. 집도 안방, 건넛방에다 대청마루가 있는 그 당시로서는 남들 못지않은 살림을 타고났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였다. 어릴 적 아버지는 집안일은 나몰라하고 늘 밖으로 나돌았다. 땅거미가 안마당에 내려앉는 저녁 무렵이면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그 시각 앞집 순이 아버지는 쇠꼴을 한 짐 지고 집으로 들어오지만, 아버지는 사립문을 열고 나갔다. 앙다문 입이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 같았다. 부엌 솥에 보리쌀을 안치던 어머니가 소맷자락을 붙잡고 말려보았지만, 아버지는 홱 뿌리치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저 어린 자식들을 어떡하라고.”
어머니는 부엌 바닥에 털썩 주저 않았다.
소문에는 삼거리 주막집에서 노름한다고 했다. 이튿날 새벽이면 아버지는 꾀죄죄한 차림에다 휑한 눈으로 돌아왔다. 옷에는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밤을 꼬박 샜는지 집에 오자마자 코를 드르릉 골며 주무셨다. 어머니는 온종일 들일 하느라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는 데도.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이삿짐을 싸고 있었다. 새로 옮겨 갈 집은 동네 맨 끄트머리 초가집이었다. 그때까지 살던 번듯한 기와집은 노름빚 때문에 넘어갔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봄날,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강원도 평창인가, 어느 먼 곳으로 돈 벌러 갔다고 했다. 하긴 아버지는 신혼 때부터 진득하게 집에 눌러 있지 않았다. 무슨 역마살 끼가 있는지 구주 탄광촌으로, 만주로 늘 돌아다니다가 몇 년 만에 집에 왔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 혼자 농사를 지었다. 앞앞이 말은 안 해도 젊디젊은 새댁 가슴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으리라. 다랑논 서너 마지기로는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다. 어머니는 늘 아래뜸 과수원에 날품을 팔러 다녔다. 그 품삯으로 자식 학용품도 사주고, 명절에는 옷가지라도 사 입혔다.
집안 형편이 그러하니 나는 중학교에 진학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는 왜 남들처럼 번듯한 집에서 검정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지 못하지?’ 그게 불만이었다. 방학이 시작되는 날은 괴로웠다. 도회지에 나가 공부하는 친구들이 책가방을 둘러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 나는 꼴망태를 메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온종일 산 속에서 헤매다 어둠살이 내려앉으면 집으로 돌아왔다. 수돗물을 먹어서인지 얼굴이 뽀얀 그들과는 달리 햇빛에 그은 시커먼 내 얼굴을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싫어서였다.
그렇게 한 일 년을 보내다가 중학교는 정식 인가가 나지 않은 고등공민학교에 들어가 고입 검정고시를 봤다. 고등학교는 그 당시 명문인 T 공고 기계과에 합격하고도 입학금이 없어 속칭 ‘따라지 학교’라 불리는 J 상고 특설반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새벽이면 신문 배달로, 방과 후에는 초등학생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교에 다녔지만 두 다리 뻗고 누울 방 한 칸이 없었다. 천장 높이가 채 1m도 안 되는 친척 집 2층 다락방에서 몸을 옹송그리며 잠을 잤다. 그나마 오래가지 못했다. 집수리 때문에 쫓겨났다. 거처할 곳이 없어 친구 자취방을 전전하던 중에 어머니 병환이 위중하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
후다닥 가방을 챙겨 들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첩첩산골 마을이라 버스가 하루에 서너 번밖에 다니지 않았다. 헐레벌떡 집에 도착하니 안마당에는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집안이 적막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고 있었다. “엄마~” 소리에 어머니가 눈을 한번 뜨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어물대다 스르르 눈을 감았다. 장남 얼굴 한번 보고 가려는지? 아니면 ‘저 어린 동생을 맏이인 네가 잘 보살펴야한다.’라는 부탁 말씀하고 가려는지?
그날도 철없는 동생들은 깔깔 웃으며 장난을 쳤다.
그 몇 달 후 나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산 뻐꾸기가 몹시 울어대던 어느 봄날, 나는 자취(自炊) 보따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와 함께 오리방천 너머 자갈밭을 개간해 참외 농사를 지었다. 참외밭 초입에는 원두막 하나가 서 있다. 소나무를 잘라서 만든 네 기둥 허리에는 널따란 평상(平床)이 매달려 있고, 지붕은 수숫대로 덮여 있다. 땅바닥으로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사다리는 흡사 이층 건물 계단 같았다. 나는 여름 한 철을 그곳 원두막에서 지샜다. 낮에는 참외 농사일을 거들고, 밤이면 원두막에서 남폿불을 켜놓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 수험서조차 살 형편이 못되어 사촌 형에게 빌린 책으로 공부했다.
저녁노을이 앞 냇가 물속으로 내려앉은 어느 날이었다. 서울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초등학교 동창생이 찾아왔다. 방학이라 재 너머 고향에 다니러 왔다고 했다. 그것도 여자 친구까지 데리고.
그 친구는 이태 전까지만 해도 읍내 중학교를 다녔다. 서울로 간 지 채 2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말씨까지 변해 버렸다. 말 뒤꼬리가 올라가는 나긋나긋한 서울말을 했다. 거기에다 얼굴은 뽀얗고, 옷맵시 또한 서울 티가 줄줄 흘렀다.
‘공부 잘하던 너도 별수 없구먼…….’
땀 냄새 나는 삼베옷을 걸친 내 몰골을 곁눈질하며 깔보는 표정이 역력했다. 초등학교 때에는 속된 말로 ‘코찔찔이’에다 공부도 그렇고 그런 녀석이었다. 두 남녀가 손잡고 다정스레 오리방천을 걸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내 얼굴이 이유 없는 분노로 벌겋게 상기되었다. 하늘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보았다. 강물을 향해 돌팔매질까지 했다. 물 위의 백로가 놀라 훨훨 날아가 버렸다.
‘그래 이 친구를 이기는 길은 오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것뿐이야.’
그날부터 밤을 새다시피 공부를 했다. 수험서에는 빨강·노란색 밑줄로 범벅이 되어 갔다. 이를 악다문 내 얼굴은 날이 갈수록 홀쭉해지고 눈은 떼꾼해져 갔다. 몸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 해 가을걷이가 얼추 끝날 무렵, 나는 대구 Y 고등학교에서 5급 을류 (현 9급) 공무원시험을 봤다. 다행히 느낌이 좋았다. 가방을 들고 나가는 내 발걸음이 전에 없이 가벼웠다.
한 달 후 즈음이었다. 그 당시 합격자 발표는 서울신문에 실렸다. 산골 동네이다 보니 신문 보는 사람이 없어 시오 리나 떨어진 면소재지 우체국까지 걸어갔다. 합격자 발표란에 떡하니 들어 있는 내 이름 석 자와 수험번호를 보고 또 보았다. 늙은 우체국장이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물었다.
“자네가 새마골 적송댁 아들이 맞는가?”
“예”
“축하하네.”
“요사이 공무원 시험이 어렵다던데.”
우체국 문을 나서는 내 등 뒤로 우체국장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튿날 어머니 산소를 찾은 나는 대성통곡을 했다.
몇 달 뒤, ‘조건부 행정서기보 김성한. 월포우체국 근무를 명함.’이라는 발령문서가 도착했다. 월포가 어디인가? 지도를 찾아보니 포항을 지나 북쪽으로 한참이나 올라가는 바닷가 마을이었다. 줄곧 가야산 밑 산골에서 자란 나를 그 먼 곳까지 가라니. 지금이야 교통사정이 좋아서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지만, 70년 초반 그 당시에는 온종일 걸렸다.
발령이 났다는 소문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친척 아저씨가 “나한테 부탁하지, 그러면 전화국이나 가까운 우체국으로 발령 나도록 할낀데. 내가 저 위에 높은 사람을 잘 안다 아이가.” 그 소리를 들은 아버지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당신 잘못으로 아들 공부도 못시키고 이른바 ‘백’조차 없어, 저 어린 자식을 그 먼 곳까지 가도록 하다니.
그 이튿날이었다. 첫차를 타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집을 나섰다. 삼거리 주막 옆 버스 정류장까지는 아버지도 함께 나오셨다. 버스 차장(안내양)의 ‘오라이~’하는 소리에 버스는 떠나가지만,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손을 흔들고 계셨다. 그 지난해 아내를 잃고, 그나마 의지하던 오 남매의 장남마저 멀리 떠나보내야 하는 아버지 마음이야 오죽했으랴. 아마도 밤새 뒤척거리다 잠 한숨 제대로 못 이루셨을 게다.
동해안 월포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자갈 깔린 신작로를 털털거리며 달려가는 버스도 숨이 차는지, 마을 앞에 다다르면 숨 고르기를 자주 했다.
해거름 녘이 다 되어서야 월포에 도착했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온종일 내리쬐던 태양은 노을과 함께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고, 끼룩거리던 갈매기들도 날개를 접었다. 짐 보따리를 양어깨에 둘러멘 채 버스에서 내려 빨간 우체통이 서 있는 건물 앞에 섰다. 적송(赤松) 널빤지에 ‘월포 우체국’이라고 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삐거덕거리는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늙은 우체국장이 “김 주임, 먼 곳에서 온다고 고생이 많았네.”라며 반갑게 맞이했다. 동네 아낙네들이 ‘총각’하고 부르던 호칭이 갑자기 ‘김 주임’으로 바뀌었다. 호적 초본이라도 떼러 고향 면사무소에 들르면, 면장이 ‘김 서기’하며 호적계 직원을 부르던 생각이 났다. 뒷방에서 우편물을 매만지던 집배원들이 일손을 잠시 놓고 악수를 청했다. 해풍에 그은 얼굴들이 씩 웃는다. 갑자기 아침에 손을 흔들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햇빛에 그을려 시커먼 아버지 얼굴이.
한 달 뒤 첫 봉급을 타는 날이었다. 싯누런 봉투 안에는 현금이 17,000원 가까이 들어 있었다. 7,000원 하숙비를 제하고 7,000원을 집으로 보냈다. ‘아버님 전 상서’로 시작되는 편지도 함께 보냈다. 편지 위로 어깨 축 처진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머니가 안 계신 그을음이 낀 부엌도, 동생들의 꾀죄죄한 입성도 눈앞에 어른거렸다. 주소를 쓰고 있는 편지 봉투에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렇게 마음고생, 몸고생해서 들어간 우체국.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새내기 공무원 때에는 공휴일도 없이 우편물을 실은 리어카를 끌기도 했다.
“너는 책상에서 사무 보는 줄 알았는데, 우애(어찌해서) 리어카를 끌고 다니노? 공무원이 돼서 막 노동 할라꼬 들어 왔나?”
어디서 그 얘기를 들었는지,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낸 적도 있었다.
출근은 남보다 먼저 하고 퇴근은 늘 꼴찌였다. 그래도 별로 고된 줄 몰랐다. 유년시절 배가 고파 송기떡으로 허기를 면하던 일, 도시락 대신 물로서 배를 채우던 초등학교 점심시간, 원두막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하던 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들로부터 ‘일벌레’라는 소리도 들었다. ‘독종’이라는 소리도 에둘러 들려왔다.
그래서인지 80년대 후반, 지방 체신청에서 서울 체신부로 영전되기도 했다. 그 당시 중앙부처에는 대학을 나온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자격 미달(?)인 셈이었다. 그렇다고 혈연(血緣), 지연(地緣) 등 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꾀부리지 않고 일했던 게 높은 사람 눈에 띄었던 모양이었다.
세월이란 수레바퀴가 돌아감에 따라 차츰 생활도 안정되어 갔다. 방 한 칸짜리 사글셋집에서 두 칸 전셋집으로, 한 대여섯 번이나 옮겨 다니다 결혼 9년 만에 대도시 변두리 콧구멍만 한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난생처음 내 집 마련을 한 셈이다. 이삿짐을 옮기고 난 그날 저녁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이사한다고 허둥대느라 점심을 걸렀는데도 배고픈 줄 몰랐다. 두 살, 네 살짜리 젖먹이 때문에 세를 놓을 수 없다는 어느 배불뚝이 아줌마의 차가운 말 한마디에 속울음을 삼킨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 집에서 자식들은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아내 성화에 못 이겨 여전히 이사는 다녔다. 전근도 잦았다. 대구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천안으로, 다시 지방 중소 도시로…. 다행히 짠순이 마누라 덕분에 아파트 평수는 넓혀졌다.
자식들도 별 탈 없이 성장하여 대학을 마쳤다. 비록 명문 대학은 아니어도 졸업하자마자 회사에 취직했다. 지금은 결혼하여 아들딸 낳고 오순도순 잘 살고 있다. 집도 장만하여 다락같이 오르는 전세금 걱정도 없다. 요즈음 우리 부부는 손주 재롱에 푹 빠져 있다.
동생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 조실부모하여 사춘기 때에는 한번쯤 빗나갈 법도 한데 속 섞이는 동생이 없다.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읜, 어머니 얼굴조차 기억 못하는 막냇동생. 그는 요즘말로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S 시설공단에 취직하더니, 몇 년 전에는 기능장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수천 명이 넘는 회사원 중에 기능장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손꼽을 정도라고 한다. 합격 통지 전화를 받은 그날, 부모님이 살아계셨으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었으리라.
몇 해 전, 나는 40년 가까이 되는 기나긴 공직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퇴직 후에는 좀 쉴 만도 하건만…. 길들어진 버릇은 버리지 못하는지? 수필, 가곡, 시 낭송을 배우러 다닌다. 나는 뭔가 배운다는 게 즐겁다. 힘이 난다. 젊었을 때 못 배운 한풀이라도 하려는 건가.
수필집도 두어 권 펴냈다. 책표지 제목도 「민얼굴이 향내가 더 난다」,「잉걸불」등 소박하게 지었다. 어깨에 힘 빼고 체면 벗어던진 시골 장터에서 만난,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정겨운 민얼굴 같은 글이 나는 좋다.
오늘도 서재에 앉아 글을 쓰다 말고 사진첩 속 어머니 사진을 본다. 생머리에 하얀 모시옷 차림이다. 사진 속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뜬금없이 며칠 전에 본 영화 국제시장 주인공 덕수 씨가 울며 한 말이 떠오른다.
“아부지, 이만하면 내 잘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요.”
가만히 어머니를 불러 본다.
“어무이, 저도 이만하면 잘살았지예?”
사진 속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모르게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의 눈물이 찔끔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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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고생 하셨군요...
그 시절에는 아버지들이 왜들 그러셨는지...
저도 아내와 함께 국제시장 그 영화 보았습니다...
6,25전쟁으로 고생 많았던 어린시절이 생각나서 울었습니다...
오늘 선생께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 눈물나게 하시는군요... ~*~... ~*~... ~*~...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좀 거시기 했습니다만~
한국 전쟁 동이들은 다 그랬지요. 마음을 털어놓고 나니 힐링이 됩니다.~`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음이 아려옵니다.를 드립니다.
어려웠던 시절.... 아아
이제 옛말 하면서 사실수 있으니...
격려와 성공하신 선생님의 인생에
늘 건강하시고 건필하소서.
감사합니다.
국제시장을 보니 지난 날이 생각나서 끼적여 봤습니다.
저는 어릴적 가난은 독이 아니고 약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마음도 몸도 편안합니다. 가난이라는 약발이겠죠~`ㅎㅎㅎ
5월말이나 6월쯤 강촌에 살지 싶읍니다.
70년도 봉급 17,000원 눈에 확 들어옵니다. 65년도 첫 봉급 6,800원 평생 그 봉급 액수가 잊혀지질 않습니다. 꼭 50년전
일이 어제 같습니다. 우리들의 옛날 일이 그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