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석(Qi Baishi, 齐白石,1860 ~ 1957)
독학으로 시작,당대 탑1을기록 제백석(치바이스)선생
후난 성 샹탄 현의 가난한 농가에 태어나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20대 때는 소향해가
그림을 가르쳤고, 30대 때는 왕개운이 글을 가르쳤다.












제백석(치바이스)석문24경,체루취적도(1910)

송백고립도(松柏高立圖)
제백석,-(치바이스) 이후
제백석(Qi Baishi, 齐白石,1860 ~ 1957)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한 중국의 미술시장은 지금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베이징과 상하이는
물론 홍콩과 마카오, 대만에 이르기까지 주요 대도시에는 곳곳에 갤러리가 성업 중이다.
세계의 화상들은 ‘중국 현대미술 4대 천황’인 왕광이, 장샤오강, 팡리쥔, 웨민쥔의
작품을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이들의 작품은 한국의 화랑가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개혁개방시대(1976~1989)를 거치면서 폐쇄된 사회에서 개방된 세계로의 전환을 경험한
젊은 작가들은 개인과 사회의 대립과 갈등, 인류 문명에 대한 비판과 고민을 중국적인
그릇에 담아 세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그런데 중국 현대작가들의 작품에서 다른 나라 작가들이 함부로 모방할
수 없는 ‘중국’만의 전통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20세기 초에 살았던
1세대들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없이 밀려드는 외래문화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전통을 지키고자 했던 1세대의 고집이 있었기에 그 바탕 위에서 2세대는
마음껏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칠 수 있었다. 이것이 2세대의 작품값보다 1세대의 작품값이 더 높게
책정되는 근본 이유다. 이것이 또한 담담한 필치의 치바이스의 ‘송백고립도’가
최고가를 경신하게 된 비밀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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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선생님, 정말 이 그림을 사실 계획이십니까?”
“그렇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베이징예술전문학교 교장 쉬페이홍(徐悲鴻·1895~1953)이 지인의 초대로
전시장에 갔을 때였다. 전시장에는 베이징 화단을 대표할 만한 작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었는데 한결같이 매너리즘에 빠져 있어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실망한 그는 서둘러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그때였다. 사람들 눈이 거의 닿지 않는
구석에 걸린 그림 한 폭이 눈에 띄었다. 새우 몇 마리가 헤엄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는데, 소재도 참신하고 능숙한 붓놀림이 마치 물속의 새우가 금세 튀어나올
것처럼 기운생동했다. 흥분한 쉬페이홍이 구입 의사를 밝히는 붉은 띠를 걸려고 하자
곁에 있는 지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은 것이다.
“작가가 나이도 많은 데다 베이징 화단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골 목수 출신입니다.
그런 사람의 작품을 사시겠다니 선생님답지 않으십니다. 선생님 명성에 누가 될 수도 있으니
다시 한번 신중히 고려해보시지요?”
“무슨 소린가? 나는 이 작가를 우리 대학의 교수로 초빙할 생각이네.”
1929년 가을의 일이었다.
치바이스와 쉬페이홍(제백석(齐白石)과 서비홍(徐悲鴻)
그로부터 82년이 지났다. 눈밝은 쉬페이홍의 천거로 시골 목수에서 일약 베이징 화단의
총아로 부상한 치바이스(齊白石·1864~1957)는, 2011년 세계 경매시장에서 최고가를
기록한 작가가 됐다. 그의 작품 ‘송백고립도(松柏高立圖)’는 베이징의 자더(嘉德)
경매에서
1위 5720만달러(약 718억원)에 낙찰 된 바 있다.
2위는 원(元)나라 때 화가 왕멍(王蒙)의 ‘치천이거도(稚川移居圖)’가 차지했고,
쉬페이홍의 ‘구주무사낙경운(九州無事樂耕耘)’은 6위였다.
이는 파블로 피카소(7위)와
구스타프 클림트(8위), 에곤 실레(9위)와
앤디 워홀(10위)보다 훨씬 뛰어난 성적이었다.
현재 세계 미술시장에서 중국 미술품의 가치가
어떠한가를 반영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중국 작가들이 유럽과 미국의 ‘수퍼스타’를 물리치고 당당히 세계 미술계의 상층부로
급부상한 원인은 작품 자체의 예술적 가치와 희소성 외에 구매자의 증가를 들 수 있다.
중국은 경제성장으로 신흥 부자들이 증가하고 예술 인구가 확대됐다. 높은 소득수준으로
경제적 안정을 누리게 된 부자들은 부동산과 주식투자를 넘어 자신의 품격을 과시할 수
있는 예술품 수집에 열을 올렸다. 여기에 중국 경제의 가능성을 예측한 서양인들의 관심과
투자도 한몫했다. 중국 미술품은 이제 중국 내수시장을 넘어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최고가를 경신한 치바이스의 ‘송백고립도’를 살펴보자. 축(軸)으로 된
이 작품은 가로 1m, 세로 2.66m로 두 그루 나무 위에 매가 그려져 있다.
작품의 좌우에는 간략한 전서체로 ‘인생장수 천하태평(人生長壽 天下太平)’이라고 적어 놓았다.
화제(畵題)를 전통적인 옛 그림과 달리 그림에 버금갈 만큼 크게 쓴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화제에 비하면 그림은 오히려 소략하고 담담하다. 이는 그림이 감상을 목적으로
제작됐다기보다는 상징성에 초점이 맞춰졌음을 말해준다. ‘장수’를 상징하는 소나무가
보통 사람들의 염원이라면, 천하가 ‘태평’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은 ‘영웅’의 몫이다.
영웅은 매의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그런데 ‘송백고립도’는 치바이스의 작품성을 뚜렷이 보여주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점잖다. 지나치게 전통적이고 과거 형식에 안주한 듯한 혐의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의 작품은 ‘송백고립도’에서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생명력이 넘치고 참신하다.
치바이스는 후난성(湖南省) 상탄현(湘潭縣)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어 목공이 됐다. 그의 아버지는 허약한
아들에게 농사 대신 목공일을 익히게 했다. 그는 16세 때 나무에 꽃을 새기는
목공기술을 배웠고 20세 전후에는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힘든 노동과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는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계속했다. 전각에도 관심이 있어 내로라하는
전각 전문가들을 찾아다녔다. 10여년 동안 전국을 여행하며 예술에 대한 열정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50세에 베이징에 정착했다. 그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 속에서 얻은 감흥을 붓으로 표현할 줄 알았다. 고화(古畵)에서 습득한 문인화의
깊이에 민간예술에서 영감을 얻은 생동감과 경쾌함이 더해졌다. 배추, 무, 오이, 죽순 등
창작의 소재는 친숙한 일상생활에서 나왔고 표현기법은 언제나 새로웠다. 심지어는
쥐나 올챙이도 등장했다. 그는 특히 새우 그림을 잘 그렸는데, 한번은 물을 길으러 가던
아낙이 그의 그림 앞을 지나가다 새우에 넋을 잃고 취해 서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보수적인 베이징 화단에서는 치바이스를 받아주지 않았다. 파격적인 형식과 색감으로 무장한
시골 촌뜨기의 그림은 새로운 것을 거부하는 강고한 화단에서 철저히 외면받고 비난받았다.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쉬페이홍이 그를 발견할 때까지 10년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새로운 화법을 모색했다. 쉬페이홍이 구습에 물들지 않은 치바이스의 작품을 보고 ‘중국 화단의
막중한 짐을 질 수 있는 한 필의 천리마’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60년 동안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밀고 나간 고집스러운 창작력 때문이었다.

徐悲鴻-쉬페이홍의 ‘우공이산,愚公移山’(부분), 1940
쉬지 않고 꾸준하게 한 가지 일만
열심히 하면 마침내 큰 일을
이룰 수 있음을 비유한말.
원래 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 에 나오는 이야기다.
태형,왕옥 두 산은 둘레가 700리나 되는데
원래 기주 남쪽과 하양 북쪽에 있었다.
북산의 우공(愚公)이란 사람은 나이가 이미 90에 가까운데
이 두 산이 가로막혀 돌아다녀야 하는 불편을 덜고자 자식들과
의논하여 산을 옮기기로 하였다.
흙을 발해만까지 운반하는 데 한 번 왕복에 1년이 걸렸다.
이것을 본 친구 지수가 웃으며 만류하자 그는 정색을 하고
“나는 늙었지만 나에게는 자식도 있고 손자도 있다.
그 손자는 또 자식을 낳아 자자손손 한없이 대를 잇겠지만
산은 더 불어나는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언젠가는 평평하게 될 날이 오겠지”하고 대답하였다.
지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산신령이 산을 허무는
인간의 노력이 끝없이 계속될까 겁이 나서
옥황상제에게 이 일을 말려 주도록 호소하였다.
그러나 옥황상제는 우공의 정성에 감동하여 가장 힘이 센 과아씨의
아들을 시켜 두 산을 들어 옮겨,
하나는 삭동에 두고 하나는 옹남에 두게 하였다고 한다.


제백석(Qi Baishi, 齐白石, 1860년 ~ 1957년)은 중국의 화가이다.
후난 성 샹탄 현의 가난한 농가에 태어나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20대 때는 소향해가 그림을 가르쳤고, 30대 때는 왕개운이 글을 가르쳤다.
바이스는 후난省 상탄縣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그에게 곡굉이 잡는 법을 가르쳤으나 너무 어리고 힘이 약했기 때문에목공일을 배웠다.
그는 열 두살에 목공일을 하면서도 일감이 없는 밤이면 글을 읽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가 스물 일곱 살이 되어서야 스승을 만나 지도를 받게 된다.
바이스는 서른 살 이후에 점차 그림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는 그림을 계속 배우면서 표구하는 법도 배우고, 시도 짓고 전각도 배웠다.
그의 그림은 우선 세필화를 배우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자연의 여러 모습과 생물의 동태를 이해하고 가늠하여 수묵과 채색으로 표현했다.
'사물의 겉모습만을 모사하는 데 그치지 않겠다'
'사물을 그릴 때 그 형태를 그리지 않는다'
'형관이나 종파를 들먹이는 것이 싫고, 무조건 임모하는 것도 싫다'
'전대의 대가들의 그림을 세심하게 따라하는 것은 죽은 공부다'
'팔대산이의 냉일함을 닮았다 하나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바이스는 굵은 선이 특기이다.
마치 용과 뱀이 춤추며 날듯 필력이 넘친다.
그러나 팔대산인의 기묘하고 간단한 필치에 담긴 의미심장한 깊이는 따르지 못했다.
그림의 운치로 말한다면 팔대산인과 비교하는 것은 조금 어려울 듯 싶다.
내가 청화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 바이스 노인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대문에 들어서자 문에 그림값을 붙여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응접실에 들어서자 벽에도 그림 값이 붙어 있었다.
고상해야 할 화가가 어찌 이럴 수 있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언짢았다.
그러나 지금 이 자서전을 통해 유년시절부터 노년에 이르는 험난한 인생길의 배경을 알고 나니
비로소 반감이 깨끗이 사라진다.
뤄자륜 (중국 사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