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
민족 시인, 노산 이은상
석야 신웅순
몇 해 전 지인께서 노산 이은상 시조 선집을 보내주었다. 읽어보라는 숙제였다. 명색이 시인 30년이 넘었는데 여태껏 못 읽었으니 참으로 부끄럽다.
시는 새벽에 읽어야 제격이다. 정신이 전일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냈다. 겨울은 낮이 짧아 밤의 나머지가 새벽까지 길게 이어진다. 동이 틀려면 아직 멀었다. 시조를 읽으면서 복잡한 상념들이 머리를 스쳐간다.
경술국치, 해방, 한국전쟁 등 굵직한 현대사들이다. 현대시조 문학사의 서술은 당연하데도 누가 가능성을 물었는가. 시조는 개인의 기록이며 역사의 기록이다. 노산 선생을 뵙지는 못했으나 가슴 한 구석에 늘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민족 시인이며 애국시인이다.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베어지고 없구려
지팡이 던져 짚고
산기슭 돌아나니
어느 해 풍우엔지
사태져 무너지고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구려
- 이은상의 「옛동산에 올라」
그는 와세다대학 사학과(1925-1927)에서 청강을 하고 일본동경 동양문고(1927-1928)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1928년 고향 마산의 명산 노비산에 올랐다. 거기서「옛동산에 올라」명시조를 남겼다. 그리고 노비산 이름을 따 호를 노산이라고 했다. 이 시조는 홍난파가 미국유학 시절 1932년경에 작곡한 곡으로 1933년에 그의 가곡집 『조선가요작곡집』을 통해 발표한 작품이다. 고등학교 음악책에 실렸던 노래이기도 하다.
필자는 음악을 좋아한다. 젊었을 때는 클래식과 가곡을 좋아했고 나이 들어선 판소리와 전통 가곡을 좋아했다. 애창곡은 아니나 그 때의 버릇이 남아 지금도 현대 가곡을 가끔 부르곤한다.
필자는「근대가곡의 시조·전통가곡 수용 고」에 관한 논문을 쓴 적이 있다.「성불사의 밤」,「옛동산에 올라」,「장안사」,「봄처녀」,「금강에 살어리랏다」,「고향생각」,「사랑」등 홍난파가 작곡하고 이은상이 작사한 곡들이 연구 대상이었다. 노산 선생과는 학문적으로 이런 인연이 있었다.
차창을 돌아볼 때
산도 나도 다 가더니
내려서 둘러보니
산은 없고 나만 왔네
다 두고
저만 가나니
인생인가 하노라
- 이은상의 「인생」
많은 상념들이 스쳐갔다. 1931년 6월 5일 안주역에서 썼다는「인생」이란 시조이다. 안주역은 평안남도 안주시 칠성동 서쪽에 있는 기차 정거장이다. 28살 때 쓴 시조이다. 사유의 폭이 얼마나 넓고 깊으면 그 나이에 이런 시조를 썼을까 싶다. 젊은이들이 철이 들지 않으면 시대를 살아갈 수가 없었던 때였다. 이젠 갈 수가 없으니 마음이 아리고 슬프다. 뉘 시인이 있어 그 역에서 노산 선생을 생각할까.
이은상은 1903년 경남 마산 출생으로 호는 노산이다. 1931년 이화여전 교수,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에서 근무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감옥을 거쳐 광양 유치장에 구금, 해방과 함께 출옥했다, 1967는 시조작가협회 회장, 한글학회 이사, 1978년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81년 대한민국국민훈장 무궁호장 수상, 1982년 영면했다. 노산 시조집 등 46권의 저서가 있다.
수집어 수집어서
다 못타는 연분홍이
부끄러워 부끄러워
바위 틈에 숨어 피다
그나마
남이 볼세라
고대 지고 말더라
- 이은상의 「진달래 1」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작품이다. 누군가가 다 피지도 못하고 고대지고 마는 영재에 비유하기도 한 작픔이다. 쓴 날짜가 1932년 3월 6일이니 29세 때의 작품이다. 이런 동시조도 이 나이에 썼다. 필자가 외우고 있는 몇 안 되는 아름다운 시조 중의 하나이다.
수줍어 다 못 타고 부끄러워 숨어 피다니 그나마 남이 볼까 고대 지고 말다니 이보다 더 허망한 꽃이 어디 있을까?
인생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다 간다. 그래서 노산의 진달래꽃을 잊을 수가 없다. 이영도의 진달래꽃은 4.19를 생각나게 하고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민족의 한을 생각나게 한다. 인생을 생각나게 하는 꽃이 노산의 진달래꽃이라면 어떨까.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등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피 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이은상의 「고지가 바로 저긴데」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시조로 기억하고 있다. 1954년 제야에 쓴 작품이다. 휴전 협정,서울 환도 후 통일에의 의지와 비원을 노래한 전쟁 시조이다.
이은상은 그의 자신의 글에서 '고지가 바로 저긴데'라는 시조를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수난하는 민족이다. 통일과 번영을 위해 싸우는 민족이다. 지금 이 밤에도 쉬지 않고 싸 우는 것이다. 기어이 고지를 점령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고지는 자유와 평화와 승리를 전취할 수 있는 지점을 이름이다. 우리는 그 고지를 바라보며 달리는 것이다. 바로 그 고지가 우리 눈앞 에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들의 행진을 포기할 수 없다. 중단해서는 안 된다. 끝까지 그 고지 를 점령해야 한다. 이것이 제 1연의 뜻이다.
그 당시 우리는 패배의 쓴잔을 맛보았었다. 가는 곳마다 처참한 전쟁의 자취 뿐이요, 그 중에서 도 서울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깨뜨릴 수 없는 심 장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심장은 나라 사랑하는 의기와 정열을 이름이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가장 소중한 보배인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심장을 안고 가자. 반드시 우리에게는 영광의 시대가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내일을 향해서 간다. 이 유혈 속에서 통일과 번영의 내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굳이 그것을 노래하고 싶었다. 이것이 제2연의 뜻이었 다.(http://cafe.naver.com/doraemi/8616)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김구 선생이 육군 포병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노산은 그 이듬해 단오날 서울 신당동에서 상치쌈을 먹다 불현듯 백범 선생이 생각이나 그만 목이 메고 만다. 그 때 쓴 시조이다.
단오날 상치쌈에 쑥갓이랑 실파랑 얼러
한 입 우겨 넣다 가신 님 생각한다
그 날도 바로 이 상에 마주 앉으셨더니
봉창 밑 두들기며 찾아 오시던 그 님 생각
가슴에 멍이 든 것 좀체로 안 가셔서
쌈을랑 두 손에 움켜 쥐고
목이 그만 멘다
- 이은상의 「목이 그만 멘다- 백범 선생 그리워」
(1946년 호남신문사 사장 재직시 김구 선생과 함께)
그는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호원 경찰서와 함흥감옥에 구금되었다. 1943년 9월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며 1945년 1월-1945년 8월에는 사상예비금속으로 광양유치장에 재 구금, 해방과 함께 풀려났다.
홍원 옥중에서 읊은 시조이다.
평생을 배우고도
미처 다 못 배워
인제사 여기 와서
ㄹ(리을) 자를 배웁니다
ㄹ(리을)자
받침 든 세 글자
자꾸 읽어봅니다
제 ‘말’ 지키려다
제 ‘글’ 지키려다
제 ‘얼’ 붙안고
차마 놓지 못하다가
끌려와
ㄹ(리을)자 같이 꼬부리고 앉았소
- 이은상의 ‘ㄹ’자
노산은 민족시인이며 애국시인이다.
1960년 이승만 대통령 선거 지원 유세를 했고 이후 박정희 군자정권을 찬양하는 글을 썼썼다. 이어 전두환 대통령 당선을 경하한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http://cafe.naver.com/doraemi/8616) 애국시인·민족시인으로서의 찬양과 권력의 어용지식인으로서의 비판은 지금은 그가 안고가야할 화두가 되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읽혀지는 시조 한 수를 소개한다. 1968년 8월 7일 대천 바다에서 썼다는 시조이다.
파도야 너 왜
내 발 아래 와 우는 거냐
굳이 너 왜
날 붙들고 우는거냐
내 가슴
찢어 놓고서
같이 울자는 거냐
- 이은상의 「파도야」
‘명분’이냐 ‘실기’이냐. 이러한 명제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떳떳한 것인가. 각자의 고독한 선택이다. 당근과 채찍은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쥐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강추위가 몰아쳤다. 추운 만큼 봄은 바짝 뒤쫓아 올 것이다.
서예문인화,2016.2.56-59쪽.
` 공감 1 댓글 쓰기
[출처] 민족 시인, 노산 이은상 -석야 신웅순|작성자석야
첫댓글 내 가슴 찟어 놓고 같이 울자는 거냐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무한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