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중생세간의 청정을 관찰함(觀衆生世間淸淨)]
【왕생론주】
次觀衆生世間清淨。此門中分為二別:
一者觀察阿彌陀如來莊嚴功德;
二者觀察彼諸菩薩莊嚴功德。
觀察如來莊嚴功德中有八種,至文當目。
【번역】
다음은 중생세간의 청정을 관찰한다. 이 한 문을 두 가지로 분류하면,
하나는 아미타여래의 장엄공덕을 관찰함이요,
또 하나는 저 보살들의 장엄공덕을 관찰함이다.
여래의 장엄공덕을 관찰함에 여덟 가지가 있으니, 아래에서 해당 문구를 해석할 때 다시 하나하나 그 명칭을 열거하겠다.
【왕생론주】
問曰:有論師汎解「衆生」名義,以其輪轉三有,受衆多生死,故名「衆生」;今名佛菩薩為「衆生」,是義云何?
【번역】
묻기를: 어떤 논사가 “중생”이라는 이름의 함의를 피상적으로 해석하기를, (유정중생이) 삼계 내에서 윤회하면서 수많은 생사를 받기 때문에 “중생”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지금 불보살도 “중생”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무슨 이치인가?
*삼계 내에서 윤회함(輪轉三有): 삼유란 삼계의 다른 말로서, 중생이 각자 지은 업에 따라 그 과보로 욕계, 색계, 무색계에 태어나게 되므로, 欲有, 色有, 無色有라고 부른다. 이처럼 중생이 삼계 내에서 계속 윤회하는 것이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회전하는 것과 같으므로, “윤전삼유”라고 부른다.
【왕생론주】
答曰:經言「一法有無量名,一名有無量義」,如以受衆多生死故名為「衆生」者,此是小乘家釋三界中衆生名義,非大乘家衆生名義也。大乘家所言「衆生」者,如《不增不減經》言「言衆生者,即是不生不滅義」,何以故?若有生,生已復生,有無窮過故,有不生而生過故,是故無生。若有生,可有滅;既無生,何得有滅?是故無生無滅是「衆生」義。如經中言「五受陰通達空無所有,是苦義」,斯其類也。
【번역】
답하기를: 《대반열반경》에서 말하기를 “하나의 법에는 한량없는 이름이 있고, 하나의 이름에는 한량없는 뜻이 있다.”라고 하였다. 만일 수많은 생사를 받는 까닭에 “중생”이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소승불교에서 해석하는 삼계 내 “중생”의 함의이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중생”의 함의가 아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중생”이란, 《부증불감경》에서 말한 “이른바 중생이란 곧 불생불멸의 뜻이다.”와 같다. 왜 그런가? 만약 (실제로) 생(남)이 있다면, 생하고(낳고) 나서 또 생해야(낳아야) 하므로, 끝이 없는 과실(無窮過)이 있게 되고, 생하지(낳지) 않을 때도 계속 생해야(낳아야) 하는 과실(不生而生過)이 있게 되는 까닭에 “무생(남이 없음)”인 것이다. 만일 생(남)이 있으면 멸(없어짐)도 있겠으나, 생(남)이 없는 이상 어찌 멸(없어짐)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무생무멸(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음)이 곧 “중생”의 함의이다. 이것은 《유마힐경》에서 “다섯 가지 수음(五受陰)이 공하여 아무 것도 없음을 통달하는 것이 고의 뜻이다.”라고 말한 것과 대체로 같은 의미이다.
*만약 생이 있다면 생하고 나서 또 생해야 하므로, 끝이 없는 과실이 있게 된다(若有生,生已復生,有無窮過): 만약 ‘생’과 ‘무생’이 ‘불이不二’가 아니라면, 이 ‘생’은 자성이 있는 생으로서, 낳음(생)을 고유의 특성으로 하므로 계속 낳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낳음(생)이라 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끊임없이 낳아야 하므로 끝이 없는 과실이 생기게 된다. 예컨대 불은 뜨거움을 고유 특성(자성)으로 삼으므로, 불이 존재하는 한 뜨거운 특성이 있어 물과 같은 적시는 특성으로 바뀌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한 법이 낳음(생)을 고유의 특성으로 한다면 항시 낳아야지 낳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낳고 또 낳는 것이 끝없는 낳음(無窮生)이다.
*생하지 않을 때도 계속 생해야 하는 과실(不生而生過): 예컨대 어느 여자가 “모모”라는 아이를 낳았는데, 만일 이 “낳음(생)”에 실체(자성)이 있다면 “모모를 낳음”이라는 고유의 특성을 갖고 있어서 항시 똑같은 모모를 계속 낳아야 하고, 낳고 나서 또 낳아야 한다. 왜냐하면 “낳음”이라는 법이 하는 일이 낳는 일이므로, 낳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다섯 가지 수음(五受陰)이 공하여 아무 것도 없음을 통달하는 것이 고의 뜻: 수음이란, 오음(색, 수, 상, 행, 식) 가운데 하나로서, 육근(안, 이, 비, 설, 신, 의)을 통해 외부 대상에 대한 감수작용을 말한다. 다섯 가지 느낌(五受)이란, 다섯 가지 수온(受蘊), 즉 괴로운 느낌(苦受), 즐거운 느낌(樂受), 근심하는 느낌(憂受), 기뻐하는 느낌(喜受),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捨受)이다.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은 몸의 느낌을 말하고, 근심하는 느낌과 기뻐하는 느낌은 마음의 느낌을 가리킨다. 이런 다섯 가지 느낌이 모두 인연의 화합으로 생겨났으므로 실체가 없고 자성이 없으며, 당체當體가 공하여 실로 고의 상(苦相)을 찾을 수가 없으니, 이것이 (대승의 勝義諦에서 말하는) 고제苦諦의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