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셋째 주 그룹큐티나눔
누가 큰 자인가?
마태복음 20:17-34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겸손히 주를 섬길 때(찬송 212장, 구 347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이 땅에서는 대개 지위가 높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타인 위에 군림하고, 지위가 낮고 힘없는 자들은 권력자들에게 예속됩니다. 그러나 천국은 다릅니다. 자신을 낮추는 자가 높은 사람이고, 다른 이를 섬기는 자가 큰 사람입니다. 가장 크고 높으신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까지 섬기심으로 천국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역설의 진리에 눈뜬 자들입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주님은 섬김과 희생의 걸음을 떼시지만, 제자들은 서로 높은 자리만 탐할 뿐입니다(17-28절).
1)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을 겪을 거라 하십니까(18, 19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질 것이고,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여 이방인들에게 넘길 것이다. 이방인들의 손에서 조롱당하고 채찍질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나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총 네 번 예고하셨는데, 본문은 그 가운데 세 번째 예언이다. 첫 번째 예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항변했고(마 16:21-22), 두 번째 예언에서 제자들은 근심했다(마 17:22-23).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고, 누가 높아지느냐의 문제로 서로 다툰다. 이와 같이, 분명한 말씀을 듣고도 내 생각이 가득 차 반발하는 마음, 혹은 그저 잠시 걱정하고 잊어버리는 모습, 때로 말씀과 전혀 상관없이 욕심으로 다투고 경쟁하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다.
2) 세베대의 두 아들(야고보,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구한 것은 무엇이고(20, 21절), 이 일을 알게 된 열 제자의 반응은 어떻습니까(24절)?
① 두 형제의 어머니가 구한 것: 자기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구했다.
② 열 제자의 반응: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예수께서 변화산에 오르실 때 동행한 최측근 제자들이었다. 이들의 믿음이 온전하지 못할 때, 주님과의 가까움은 오히려 높아지기 위해 경쟁하고 시기하는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 온전한 믿음 안에 거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과 가까운 만큼 더욱 낮아지는 종이 되었다. 베드로는 제자들과 교회의 대표자로서 누구보다 앞서 고난을 받았고, 요한은 핍박과 유배 생활을 굳건히 견디며 다섯 권의 성경을 남겼다.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로서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임 당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다.
3)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26-28절)?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다.”
오늘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비교와 경쟁이 치열한 시대다. 미디어에서는 연일 유명인들의 화려한 삶이 비춰지고, SNS에서는 내 주변 사람들의 성공과 소유를 알리는 게시물들이 쏟아진다. 어느새 내 삶은 초라해지고, 부러움과 열등감, 질투심이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화려한 삶,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공에 있지 않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고, 그때가 되면 진정 가치 있고 빛나는 삶이 누구의 삶이었는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때에 영원히 빛날 삶은 낮아지는 섬김의 삶이다.
나눔 1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맺을 삶의 열매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성공과 섬김의 갈림길에 섰던 경험이 있다면 서로 나눠봅시다.
나눔 2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는 ‘경쟁과 지배’가 아닌, 자발적인 ‘희생과 섬김’으로 운영되는 곳입니다. 오늘날 세상 조직과 교회 공동체가 서로 어떻게 다른지 각자 경험을 나누고, 우리 공동체가 세상 조직과 다른 ‘섬김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 어떤 부분을 개선해야 할지 이야기해봅시다.
2. 예수님은 두 시각 장애인의 시력을 회복시키십니다(29-34절).
1) 두 시각 장애인이 소리 높여 예수님에게 요청한 것은 무엇입니까(30, 31절)?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는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이들에게 간혹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라는 표현을 한다. 눈은 보이지만, 그 보이는 상황에 적합한 판단을 하지 못한다면 보이는 게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영적으로 어두웠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기는 보았으나 보지 못하여 누가 크냐를 놓고 다투는 가운데, 오히려 두 시각장애인은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진리를 보고, 그의 긍휼을 구하고 있다. 이 묘한 대조 속에서 우리는 과연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2) 그들이 소리 지르며 예수님을 불렀을 때, 무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합니까(31절)?
꾸짖어 잠잠하라 하였다.
어쩌면 무리는 장애인들에게 예의를 갖추라고 꾸짖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예의는 중요하다. 그러나 예의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 무엇보다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믿음에 관한 부분이다. 시각장애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불렀고, 무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른 채 장애인들을 꾸짖었다. 간혹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일하는 사람을 제지하거나 꾸짖기도 하는 일 말이다.
3) 두 시각 장애인이 앞을 본 후에 한 일은 무엇입니까(34절)?
예수님을 따랐다.
시각장애인들의 소원은 보는 것이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이 보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때때로 육신의 안목에 가려 영적인 일을 바로 보지 못하는 우리도 진리를 선명하게 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갖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볼 것을 간절히 구하다가 보게 된 후에 즉시 예수님을 좇았던 장애인들처럼, 선명한 영적 안목을 소망하고, 그 안목으로 주님을 따르는 일이야말로 신자의 간절한 바람이어야 할 것이다.
나눔 3 예수님에게서 긍휼을 본 시각 장애인들은 실상을 보는 이들이었고, 그들을 꾸짖으며 예수님의 긍휼을 가로막으려 한 이들은 영적인 시각 장애인이었습니다. 우리 삶에, 혹은 우리 주변에 예수님의 긍휼을 막아놓은 부분은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주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시길 기도합시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낮아지고 섬기는 주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공동체 _ 긍휼이 필요한 세상에 예수님의 긍휼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