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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묵상글 (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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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무위지위(無爲之爲),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한다는 뜻입니다.
무위지치(無爲之治)란 말도 있지요.
요순 임금처럼 임금의 이름을 백성이 모를 정도로 임금이 없는 듯 있는데도,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통치하는데도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뜻이지요.
오늘 마태오 복음은 주님께서 하시는 구원행위가
무위지치 하시고 무위지위 하시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듯합니다.
주님은 영을 받아 올바름, 정의를 선포하시는 분인데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아 길거리의 누구에게도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즘 정치권을 보면 다투는 정의와 소리치는 정의뿐입니다.
나는 정의롭고 너는 불의하다고 소리치며 다투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당이 민생정당이라고 주장하지만,
민생은 팽개치고 그저 주장하는 민생일 뿐입니다.
생색내지 않고 말없이 실천하는 민생은 없습니다.
오히려 부러졌다고 갈대를 아주 작살을 내버리고,
꺼져간다고 심지를 아예 꺼버리는 짓이나 합니다.
기세등등한 사람들 심기는 살피고,
기가 꺾인 이들은 깔아뭉개는 짓이나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세등등한 사람들에게 기가 꺾인 갈대들을 일으켜 세우고,
꺼져가는 사람들의 목숨을 되살리시기에 모든 이가 주님께 희망을 겁니다.
주님의 정의는 이처럼 주장하는 정의가 아니라 묵묵히 실천하는 정의이고,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를 살리는 올바름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다른 측면에서 무위지위를 보겠습니다.
내가 하지 않는데 한다는 것은
내가 하지 않는데 하느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뒤집으면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내가 하지 않는 것이고,
내가 하지만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하느님께서 하시게 하는 겁니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드러나지 않게 할 뿐 아니라
내가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을 드러내는 것뿐입니다.
사람들이 무식하고 못생긴 당신을 왜 그렇게 따르냐고 맛세오가 물었을 때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서 자기보다 못나고 죄인인 사람을 발견치 못하셔서
강하고 지혜롭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자기를 뽑으신 것이라고 답하였지요.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자기에게 주셨던 은총을 다른 강도에게 주셨다면
그 강도는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을 것이라고도 하였지요.
어쨌거나 성령의 사람들이 하는 것은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내 이름으로 그리고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가 되기로 결심하고 은총 청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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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머리카락 때문에 어렸을 때 놀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너무 뻣뻣하다고 해서 빗자루, 돼지털이라는 놀림을 받았고, 또 머리숱이 많아서 이발한 지 얼마 안 되었어도 지저분하다고 선생님께 자주 혼났습니다. 머리카락이 빨리 자란다면서, “너 공부는 하지 않고, 야한 생각만 하는구나.”라며 놀리기도 하셨습니다.
아마 고3 학력고사 끝난 뒤였을 것입니다. 한 친구가 미용실에서 커트하고 왔는데 너무 멋져 보이는 것입니다. 당시 유행하던 머리 모양이라면서 멋지게 차려입고 학교에 나타난 것입니다. 당시 ‘두발 자율화’는 아니었지만, 학력고사도 끝났다고 선생님께서는 머리가 길어도 암묵적으로 묵인해 주셨지요. 그래서 친구들은 미용실부터 찾았습니다.
저 역시 친구에게 그 미용실을 물어 찾아갔고, 미용실 선생님께 요즘 유행한 스타일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이발하면서 계속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당시 인기 가수의 머리로 해주셨는데 글쎄 ‘바가지 머리’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니, “이게 학생에게 제일 잘 어울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동네 이발소에 가서 다시 스포츠머리로 이발했습니다. 제게 제일 잘 어울린다는 것을 이때 알게 되었습니다. 남들과 머리카락 자체가 다르기에 남에게 맞게 이발하는 것이 아닌, 나에게 맞게 이발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 머리는 짧은 커트 머리입니다.
자기의 고유함을 찾아야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처럼이 아닌 남처럼 살려고 하면서 자기의 고유함을 찾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남처럼 살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서 왜 그렇게 사느냐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 역시 고유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무지’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없앨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자기들처럼 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지 않았고, 자기들을 향해 위선자라는 말을 하면서 반대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만 옳고, 예수님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았다면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말한 대로, 모든 민족이 희망을 거는 이름입니다.
제대로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더 알기 위해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고유함뿐 아니라, 남의 고유함도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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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낯선 이를 냉대하지 마라. 천사일지 모르니, 손님이 오지 않는 집은 천사도 오지 않는다(이해인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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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오그라든 병자를 낫게 하신 일에 대한 바리사이들과 군중들의 반응에 대하여 취하신 두 가지 처신을 들려줍니다. 한편으로는 당신을 죽이려고 모의를 꾸미는 바리사이들을 피하고, 또 한편으로는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을 고쳐 주시면서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곧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과 측은히 여기며 자비롭고 신실하신 모습입니다.
이 사실에서, 마태오복음사가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봅니다. 곧 예언자 이사야는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 위의 두 가지를 메시아의 특징으로 말해줍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마태 12,19-20)
이 말씀을 들으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의 돌보심과 신실하심과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저 자신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사실, 저는 죄 있는 형제들에게 손을 뻗어 위로하기보다, 돌팔매질하기를 자주 했습니다. 형제의 짐을 져주기보다, 오히려 더 큰 짐을 얹어 짓눌렀습니다. 약한 형제를 못 본 척 홀로 두고서, 제 길을 가기에 바빴습니다. 형제를 존중하기보다 하찮게 여기며, 마치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렇게 저는 기 꺾인 이들을 짓밟고, 부러진 갈대는 꺾어버리고, 연기 나는 심지는 꺼버리기를 거리낌 없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제가 넘어지고 부러져 있을 때도, 저를 꺾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저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당신을 배신하고 거부할 때마저도, 결코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부러진 갈대를 꺾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저를 따라다니며 뒤를 처리해주시고, 신실하심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 영혼이 병들어 말라 갈 때, 오히려 저를 택하여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당신의 영을 부으시고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 결코 제게서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저를 따라다니며 뒤를 처리해주셨습니다.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으로 돌보아주셨습니다. 참으로 선하시고 자비하신 모습으로 신실하셨습니다. 그토록 신실하신 사랑, 그 지치지 않는 사랑과 연민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마태 12,20)
주님!
당신은 제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저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배신하고 또 배신하며 거부할 때에도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부러진 갈대를 꺾어버리지 않으시고, 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도망질쳐도 언제나 동행하시고 제 영혼이 병들어 말라갈 때,
오히려 저를 택하시어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이제는 제 갈 길을 가느라 약한 이를 홀로 두지 않게 하소서.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우고, 짐 진 이를 위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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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1. 예수님의 마음으로」 https://cafe.daum.net/bbadaking/LgBG/1913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복을 받기 때문에 좋은 일을 끊임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미움을 사기도 합니다. 아무리 어진 사람도 미워하는 무리가 있는 법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도 선망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견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봄비가 기름 같지만 행인은 그 진창길을 싫어하고 가을 달은 밝고 아름답지만 도둑은 그 밝게 비추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싫어하고 시기질투하며 심지어 미워합니다. 봄비처럼 꼭 필요한 것일지라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병을 고쳐주시며 당신의 소명에 충실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를 모의 하였습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봐 주면 좋으련마는 눈엣가시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사람, 사촌이 땅을 사면 배를 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반대에 대응하지 않으시고 한 발 물러서는 지혜와 인내를 보여주셨습니다. 막무가내로 대드는 사람에게는 한 숨 쉬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도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며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품으셨습니다. 다투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손길로 버림을 받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상처 받은 사람들을 치유 시켜 주시고 낙담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시며 구원해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주면서도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공을 감추시고 결코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철저히 아버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구원사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좋은 일을 해 놓고는 생색을 내다가 그 공을 다 잃고 맙니다. 선한 지향을 갖다가도 이내 시기와 질투심에 그 좋은 뜻을 놓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6,1).고 하셨건만 그 말씀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서로 기도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어딘가 상하고 깨져서 할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되어지는 이들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공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마더 데레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시작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세상,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는 어떻게 살았는지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청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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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어떤 일을 하는데 시간이 걸리면 게을러서이고, 내가 시간이 걸리면 철두철미하기 때문이다. 남이 일을 하지 않으면 게을러서이고, 나는 바뻐서이다. 누가 하라하지 않는데 하면 월권이고, 나는 진취의 기상이 있어서이다. 남이 강력한 주장을 하면 그 사람은 고집스러운 것이고, 나의 경우는 단호한 의견발표이다.” 그야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스캔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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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기 질투는 어디에나 있다 https://cafe.daum.net/rara63/bmQo/5287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복을 받기 때문에 좋은 일을 끊임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미움을 사기도 합니다. 아무리 어진 사람도 미워하는 무리가 있는 법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도 선망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견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봄비가 기름 같지만, 행인은 그 진창길을 싫어하고 가을 달은 밝고 아름답지만, 도둑은 그 밝게 비추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싫어하고 시기 질투하며 심지어 미워합니다. 봄비처럼 꼭 필요한 것일지라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병을 고쳐주시며 당신의 소명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를 모의하였습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봐주면 좋으련마는 눈엣가시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 사촌이 땅을 사면 배를 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반대에 대응하지 않으시고 한발 물러서는 지혜와 인내를 보여주셨습니다. 막무가내로 대드는 사람에게는 한 숨 쉬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도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며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품으셨습니다. 다투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손길로 버림받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시켜 주시고 낙담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시며 구원해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주면서도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공을 감추시고 결코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철저히 아버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구원 사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좋은 일을 해 놓고는 생색을 내다가 그 공을 다 잃고 맙니다. 선한 지향을 갖다가도 이내 시기와 질투심에 그 좋은 뜻을 놓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6,1) 고 하셨건만 그 말씀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서로 기도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남이 시간이 걸리면 게을러서이고, 내가 시간이 걸리면 철두철미하기 때문이다. 남이 일을 하지 않으면 게을러서이고, 나는 바뻐서이다. 누가 하라 하지 않는데 하면 월권이고, 나는 진취의 기상이 있어서이다. 남이 강력한 주장을 하면 그 사람은 고집스러운 것이고, 나의 경우는 단호한 의견발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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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복음을 보면 ‘옥합을 깬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인은 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깨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발라 드렸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 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면 좋겠다.” 복음은 유다의 말과 생각이 다르다고 전합니다. 유다는 따로 주머니를 가지고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너희들 곁에 있지만 나는 곧 떠난다. 이 여인이 이렇게 하는 것은 나의 장례를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다른 것들은 잊힐지라도 이 여인의 행위는 기억될 것이다.” 저는 그동안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드린 것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승이시고,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옥합을 깬 여인의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우리도, 아니 나도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깨트려야 할 ‘옥합’은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합니다. 그 옥합 안에는 어떤 것들이 들어있을까요? 전통과 관습이라는 옥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통과 관습이라는 옥합을 과감하게 깨트리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상황이 변한다면 그 시대와 사람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자전거는 페달을 계속 밟아야 넘어지지 않고 전진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늘 개혁이라는 페달을 밟아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기득권이라는 옥합니다. 기득권은 교회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득권은 교회를 내부로부터 병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기득권을 비판하셨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 정작 실천하지 않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기득권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기득권이라는 옥합을 깨뜨린 사건입니다.
요즘의 신앙을 생각합니다. 요즘의 가정을 생각합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성당에 가지 않아도 야단치지 않습니다. 대학에 가면 성당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원에 가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야단치지만 기도하지 않고, 성경을 읽지 않아도 말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일이 되어도 가족들이 함께 모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바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이 먼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들었던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연못에 물고기가 살았습니다. 서로 싸우면서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물이 썩으니 살았던 물고기도 죽었습니다. 신앙이라는 연못이 상하면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 신앙인도 죽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곳에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나야 했습니다. 권력을 향해서 날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욕망을 향해서 날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좀처럼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미가 예언자도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악을 일삼는 자들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결코 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눈앞에 있어도, 진리와 정의가 눈앞에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보였고, 그들은 주님과 함께하는 참된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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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이사야 예언서에 주님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그 내용이 오늘 복음 안에 들어있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 안의 이사야서 내용 중 이 말씀이 제 마음에 남습니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얼마 전 저녁 특강을 다녀왔습니다. 저녁 특강 전 진행자는 사제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 중 이런 내용이 기억에 남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에게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러 오신 신부님께 축복해 주십니다. 또한 세상 곳곳에 있는 당신의 은총이 신부님의 입으로 모이게 하시기 그 말씀이 선포되게 하소서.’
완벽하기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갑자기 저를 위해 해 주신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은총이 입에 모여 말씀을 선포하게 해달라는 그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이사야서의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주님 안에 하느님의 영이 함께할 것이고 하느님의 영은 주님으로부터 올바름으로 선포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늘 하느님과 또 그 영과 함께 계셨고 그러므로 주님의 모든 말씀은 주님과 더불어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복음 속 이사야서의 말씀은 이것을 확증합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하느님과 함께하시는 주님은 하느님의 올바름으로 승리하고 모든 민족은 주님의 이름에 희망을 걸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올바름은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가리킵니다. 하느님 안에 드러나는 선함입니다.
우리 주님을 따라가십시오. 올바름 즉, 하늘나라 주님 따라 걷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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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세 개의 손이 있다.
사람에게는 세 개의 손이 있다고 합니다.
오른손
왼손
그리고 겸손
세 개 중 두 개는 눈에 보이는 ‘손’이고 나머지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이중 어떤 손이 가장 귀할까요?
어느 것을 선택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손’ 즉, 겸손은 가진 사람도 있고 가지지 못한 사람도 있어서 더 특별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겸손은 변화무쌍한 보물입니다.
겸손은 감사를 낳고 감사는 평화라는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세 개의 손이 모두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겸손이라는 ‘손’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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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처럼, 어머니처럼, 새처럼
“한결같이, 항구히 하느님 사랑의 품이 되어 삽시다”
“주여, 당신 은총이 어이 이리 귀하신지.
인간의 자손들이 당신 날개 그늘로 숨어드나이다.”(시편36,8)
오늘 복음의 서두 부터가 위기 의식을 느끼게 합니다.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신후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하였고 이런 낌새를 알아챈 주님은 그곳에서 물러가십니다. 그러자 암탉을 따르는 병아리들처럼 군중은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은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며 절대 침묵을 명령하십니다.
복음사가는 이사야 예언서(12,1-4)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를 인용하시며 예수님에게서 ‘주님의 종’으로서의 신원을 발견하십니다. 여기서 묘사되는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이, 섬세하고 고요한 모습이, 자비롭고 지혜로운 주님의 종의 모습이 흡사 하느님의 품, 예수님의 품 같고 어머니의 품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어 생각난 일화가 있어 나눕니다.
수도형제로부터 제주도에 사는 어느 작가의 단편소설 서문 추천의 글을 부탁받았습니다. 6월26일부터 7월15일 완성되기까지 정말 20여일간 달걀을 병아리로 부화시키고자 품고 있는 암탉처럼 자나깨나 마음에 품고 지내며 묵상했습니다. 이런 사정을 어느 자매와 나눈 내용입니다.
“신부님, 잘은 모르지만 작가님도 너무 감사하실 것 같아요. 마음의 깊은 내면의 감정을 울리는 서문이세요.”
“온힘을 다해 썼네요! 20여일 동안 마음에 품고, 마치 병아리들을 부화하기위해 달걀을 품고 있는 암탉처럼! 매일 그렇게 탄생되는 강론이랍니다! 재미있지요! 이렇게 어머니 모성애母性愛를 체험합니다!”
“아, 맞아요. 신부님!! 샛강 조그마한 연못에서 오리가 알을 품고 부화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모습을 여러번 여러해 봤습니다. 그러나 끝내 부화시키지 못하드라구요. 남편 오리가 알을 품고 있는 오리를 어찌나 보호하던지요. 먹을 것을 줘도 꼭 같이 데리고 나와 먹는 모습에 감동했어요. 미물도 저러할진대 사람 못된 인간은 왜 그리 생겨먹은건지 혀를 찰 때가 너무 많습니다.”
“자매님, 유심히 관찰하셨네요. 감동적인 일화! 강론에 인용하고 싶습니다.”
마침내 오늘 강론에 인용하게 되었습니다. 어미품을 찾아 날아 오는 새들처럼 하느님의 집 수도원의 품을 찾아 끊임없이 날아오듯 걸어오는 형제자매들입니다. 마침 김훈 작가의 새에 대한 묵상글도 생각났습니다.
“새가 알을 품어서 새끼를 깨워 내고, 아득히 먼 곳에서 호롱불처럼 깜박이는 생명을 가까이 불러와서 형태를 부여해 주듯이, 나는 나의 체온을 불어넣어 가며 단어와 사물들을 품어 본 적이 있었던가. 당신들과 나는 오랫동안 잘못 살아왔다! 하늘을 나는 모든 새는 그 어미가 체온으로 품어서 태어나는 생명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았다!”
감동적인 고백이요 자신의 무정無情, 무지無知했음을 반성케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날마다 마음 깊이 꼭 품었다 쓰는 강론이어야 되겠다 다짐을 새로 합니다. 사실 이렇게 마음 깊이 품었다 부화하듯 쓰는 매일 강론이었고, 홈페이지에 올리면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로 퍼져 날라 가니 흡사 강론이 살아 있는 ‘은총의 새’, ‘축복의 새’ 같다는 은혜로운 깨달음에 감사했습니다. 더욱 이렇게 강론도 쓰고 자비하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품, 어머니의 품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자각도 새로이 했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는 예수님 모습입니다.
“예루살렘아. 예수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은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13,34)
바로 암탉으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종 예수님은 하느님의 품, 어머니의 품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오늘 주님의 종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신 강인한 인내에 온유와 겸손, 자비와 지혜의 어머니 품같은 예수님에게서 참 목자상을, 참 영성적 삶을 배웁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음과 같은 주님의 종이 우리의 복된 신원임을 깨닫습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12,18-21;이사12,1-4)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제1독서의 미카 예언서에서 질타의 대상인 무자비하고 불의한 부자는 사람도 아닙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자비하신 주님의 품을 떠날 때 구제불능의 괴물도 악마도 폐인도 될 수 있음을 봅니다. 이런 부자 악인들에 대한 심판의 선고이자 회개의 촉구이기도 합니다.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한다.”
하느님의 품을 떠나 무지의 탐욕에 눈이 멀 때, 사람이 얼마나 악해 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광야 인생 여정중인 우리 모두가 자애로운 주님의 종, 주님의 품이 되어 살게 합니다.
“둥지 위를 맴도는 새들처럼
만군의 주님이 너희를 지켜주시리라.
지키고 건져주며
감싸고 구원해 주리라.”(이사3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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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과 사람>
사람이
사람을
없애려한다
사람을
없애려하니
사람이 아니다
사람 아닌 사람이
없애려하니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을
피한다
사람이
피하니
사람이 아니다
사람 아닌 사람을
피하니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을
따른다
사람을
따르니
사람이다
사람이
따르니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을
품는다
사람이
품으니
사람이다
사람을
품으니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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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마태 12,15)
그들의 속셈을 아시다
예수님 가까이 오는 사람은 모의하는 법이 없습니다. 악한 일을 모의하는 사람은 예수님 가까이 오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떠나 밖으로 나가는자들은 예수님을, 그러니까 빛을, 바른 길을, 생명을, 보물을, 진주를, 사랑 그 자체와 평화를 없앨 모의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부수는 사람은 ‘파괴의 아들’ 이라 불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고 합니다. 파괴의 아들들 옆에 머물러 계실 까닭이 없었으니까요.
그들은 그분을 없앨 방도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도를 찾지 않는 우리는 그분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예언자의 이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묻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는 문의를 받아 줄 준비가 되어 있었고 나를 찾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는 만나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이사 65,1). 그분께서는 자기들 목자를 잊어버린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물러가십니다. 이는 그들의 심판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악을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물러가신 것이 두려워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모든 이를 고쳐 주시며 당신의 전능하신 힘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마땅해 해야 하는 일을 자랑하는 마음 없이 하는 분이기에,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영성의 예술은 깨어남의 예술이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어야 합니다. ‘항상 깨어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되어라”(루카 12,36 참조). 기다리는 자들은 깨어서.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주인이 오시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필 것입니다. 그들은 기다리면서,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 일이 제아무리 낯설다고 해도, 어쩌면 주인이 오셨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내다볼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매사에 우리의 주님이 오시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야 합니다.“(206)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교의 분파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유대인과 아랍인의 전쟁에서 '성전'은 없다
이슬람의 ‘지하드'는 이슬람 신앙의 기본 교의에 포함될 만큼 이슬람 사람들에게 중요한 종교적 신념으로서 작동하는 동시에 오용과 변질로 인한 위험이 큰 종교적 신념이다. 놀랍게도 <꾸란> 안에는 '지하드'를 독려하는 수많은 구절이 담겨 있다. 대표적인 구절을 몇 군데 인용해 보자.
“믿는 자들이여, 너희가 싸움터에서 불신자들을 만날 때 그들로부터 너희의 등을 돌리지 말라. 그러한 날에 등을 돌리는 자는. . . . . . 알라(하나님)의 진노를 자아낼 것이며, 그의 주거지는 지옥이 되리니 최후가 저주스러우리라.
그들을 살해한 것은 너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케 하셨으니 그들에게 던진 것은 그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던지셨음이라."(<꾸란> 8:15-17 )
"알라를 믿고 선지자와 함께 성전(聖戰)하라는 말씀이 계셨을 때, 그들 가운데 재산과 명예를 가진 자들은 그대에게 우리를 남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앉아 있는 자들과 함께 하리라고 말하더라. . . . . . . 그러나 선지자와 그리고 그분과 힘께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들의 재산파 명예로 성전하니 그들에게는 번성함이 있으리라. 그리하여 알라(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으니, 밑으로 강이 흐르는 그곳에서 영생하리라. 그것이 바로 위대한 승리라."(<꾸란> 9 : 86-89 , 9 : 20-21)
“선지자여, 불신자들과 위선지들을 대항하여 성전(聖戰)하되 그들에 대하여 엄격하라. 그들의 거주지는 지옥의 사악한 말로이니라." (<꾸란> 66 : 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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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 절망에도 오직 단 하나 희망의 끈만은 / 굿뉴스 게시판
박윤식 [big-llight] 2024. 7. 19. 20:47 ㅣNo.174337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 그는 백인 정권의 인종 차별에 의연히 맞서 반역죄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에게는 최악의 정치범이라는 죄명이 주어져 면회는 6개월에 단 한 번만 허용되었고 편지도 아주 엄격히 제한되었다. 바깥세상과 철저하게 단절되어, 어둠과 고독 속에서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무력감을 다 견디었다.
그는 이러한 상상할 수도 없는 지옥과 같은 상황에서도, 할아버지가 손자의 이름을 지어 주는 남아공의 오랜 관습에 따라 딸이 낳은 손자의 이름을 ‘희망’이라고 지었다나. 절망스러운 자신의 삶 속에서도, 이렇게 그는 결코 마지막 보루인 그 끈만은 놓지 않았던 게다. 결국 일흔이 넘은 백발에 석방되었고, 그가 꿈꾸었던 흑백 화합의 꿈을 안고는, 남아공의 대통령이 되셨다.
“보아라, 내가 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 곧 그분 의로움이란 하느님께서 당신 약속을 지키시는 것이리라. 그분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드디어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어 그들에게 영원한 나라, 곧 젖과 꿀이 당신 나라를 선사하신다.
이렇게 ‘주님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은 버림받은 이들을 안아 주시고, 아픔을 안은 이들의 상처를 꼭 싸매 주셨다. 또한 용기를 잃은 이들을 일으키시며, 죄인들을 사랑으로 맞아 주시어 그들이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셨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면 다른 이들이 은연중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예수님은 그 반대이셨다. 그분은 약하고 병든 이들을 고치시면서도 자신만은 끝내 숨기기를 바라셨다. 그렇게 아무에게도 다투지도 소리치지도 않았기에, 아무도 그를 몰랐단다.
우리는 가끔 신앙 안에서 기적을 바란다. 기적은 하느님의 은총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기에. 예수님 시대에는 기적을 체험할 기회가 많았는데, 오늘날에도 그때처럼 기적이 많다면 하느님을 훨씬 더 잘 믿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께는 희망이 되셨다.
모름지기 선한 이는 선한 것을 발견하고, 그렇지 못한 이는 선한 것에서도 불편함을 느낄 게다. 우리 신앙도 자신의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출발한다. 내가 좀 더 확고한 마음으로, 좀 더 정성스러운 기도로, 좀 더 희생하는 봉사의 자세로 나의 신앙을 이끌면, 하느님의 원대한 은총은 그에 적절히 어울리게 저절로 주어지리라. 그러기에 우리의 참된 구원을 위해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미사 역시, 우리는 습관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되돌아보자.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바람에 날리는 갈대마냥 사는 우리 아픔을 동여매 주신다. 깜박이는 등불처럼 가없이 사는 우리에게 빛 밝히는 등경의 기름을 가득 채워 주신다. 우리는 포기할지언정 그분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가끔 우리가 정처 없는 삶을 살지라도, 그분은 희망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희망만은 두시기에, 우리도 시선을 그분께만 두어야 할게다. 우리의 마지막 눈물을 닦아 주실 분이시기에. 그분 말고는 어디에다 희망의 그 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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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복음에서 두드러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모두 고쳐 주셨다.’는 표현입니다.
공관 복음서 가운데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묘사할 때, 이 표현을 두드러지게 자주 씁니다(4,23; 8,16; 9,35; 10,1; 12,15 참조).
오늘 복음에도 이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필요한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분께 예외가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께는 소외된 사람도 잊힌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마태오 복음서가 인용한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그분께서는, 그 갈대가 다시 온전해지고 연기 나는 심지에 다시 불이 타오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희망을 둡시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잊지 맙시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 닥치더라도, 여러 이유로 우리가 죄에 떨어지더라도, 그분을 따르는 믿음만은 버리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께 잊힌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믿음으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모두 반드시 구원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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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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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이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에 복음사가는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올바름을 선포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 선포는
다툼도 외침도 없이 이루어진다고 묘사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내가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지고 온 것이 기쁜 소식인데
왜 받아들이지 않느냐고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선포는
사람들이 듣지 못한다고까지 표현됩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선포를 알아듣고
그에게 희망을 걸게 됩니다.
물론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회개를 말씀하시면서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십니다.
하지만 말로 하는 선포보다는
치유나 나쁜 영을 쫓아내시는 것으로
하느님 나라를 직접 보여주십니다.
말로 하신다고 해도
조용 조용한 대화를 통해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지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것만 전적으로 옳다고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말씀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느님을 전한다고 하면서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좋고
나에게는 하느님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들도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과
싸우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자신의 신앙 방식이나
자신의 신심만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인데
왜 하지 않느냐고
왜 받아들이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자신에게는 그 방식이 맞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 안타까움이
사랑이나 걱정에서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강요의 모습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다르다는 것을
한 번 쯤은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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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때로 우리가 벼랑 끝에 몰려 있는 느낌일 때도!
오늘 개인적으로 참 감개무량한 날입니다.
노인들만 수두룩한 이 시골에 꽃 같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여름 신앙학교를 시작하는 날이기에 그렇습니다.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는 형제들의 얼굴에는 다들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제가 이곳 피정 센터에 도착했을 때, 막 펜데믹이 시작되었습니다.
집합 금지 명령으로 인해 잡혀있던 모든 피정 계획이 100퍼센트 취소되었습니다.
참으로 막막했었습니다.
공동체에 월급받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매월 나오는 기본 전기세는 엄청나고, 통장 잔고는 바닥이고, 다른 피정 센터나 수련원들은 줄줄이 문을 닫았습니다.
윗선에서는 진지하게 폐업과 매각까지 고민했습니다.
다행히 주님께서 저희에게 크신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기도와 고민 중에 방법을 알려주시더군요. 딱 한 말씀 던져주셨습니다.
“애야, 피정이나 수련회를 꼭 큰 규모로만 할 필요가 있겠느냐?”
저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하며 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개인 및 소규모 피정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딱 한 명 오셨습니다.
친절히 봉사했더니 다음에는 두 명이 오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세 명, 네 명. 네 명까지만 가능하니, 여기 네 명, 저기 네 명, 저 건너편에 네 명...
그 어려운 펜데믹 기간에도 피정 센터는 잘 돌아갔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 자비와 은총 덕분이라고 확신합니다.
때로 주님께서 한쪽 문을 닫으시지만, 찬찬히 사방을 둘러보면 슬그머니 다른 문 하나를 열어주신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언제나 너그럽고 인자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릇된 길을 간다 할지라도 항상 인내하십니다.
때로 우리가 벼랑 끝에 몰려 있는 느낌일 때도 그분께서는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고
보살펴주심을 굳게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토록 우리에게 큰 인내와 자비를 베푸시는데, 우리는 이웃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회심과 새 생활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주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면서, 그 인내와 자비를 가까운 이웃들에게도 실천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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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하느님께서 택하신 종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신다. 바리사이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의 손을 다른 손처럼 건강하게 해 주신 것을 보고 어떻게 예수님을 없앨까 모의를 했다고 한다. 이것을 아신 예수께서는 다른 곳으로 물러가셨다. 그것은 그들의 모의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고쳐주시며 악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이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므로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신다.
이어서 이사 42,1-4의 말씀을 이루신다. 그들 안에 있는 부러진 갈대나 연기 나는 심지와 같은 연약한 모습이라도 파멸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뜻이다. 그들이 언제나 당신께로 회개할 수 있도록 끈기 있게 참아주신다. 예수께서는 밀과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도록 하라고 하신 분이다. 우리 자신도 그렇게 참아주시는 분이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이사 42,3).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온유함을 뜻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참아주실 수 있는가? 이는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참아주셨듯이, 그분의 구원업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이사야는 이것을 “그는 정의를 승리로 이끌리라.”(이사 42,3)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이 그의 이름을 신뢰하게 되리라.”(이사 42,4)라고 한다.
“정의를 승리로 이끌리라.”(이사 42,3)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다 이루시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심판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때는 터무니없고 모순되는 논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그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섭리는 믿지 않는 이들을 심판하는 데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므로 “다른 민족들이 그의 이름을 신뢰하게 되리라.”(이사 42,4)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18절)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분은 당신을 사랑하시는 분의 뜻에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언제나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라는 선언을 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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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옳은 말만 하는데 재수 없는 사람
제가 말로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바로 극도의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 용기를 드리려 해도, “당신이 나처럼 죽음 직전에 있나요?”,
“당신이 나처럼 가난하나요?”, “당신이 나처럼 자녀를 잃어 보셨나요?”라고 말할 것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때조차 “그래도 용기를 내셔야죠!”라고 말한다면 저는 그분들에게 재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말은 ‘끌어 올리는 말’이 있고 ‘밀어 올리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끌어 올리려고 하는 말은 재수 없고, 밀어 올리려고 하는 말은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듀크 신학대학교에서 만난 앤지와 퍼시라는 커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해 말하다가
퍼시가 앤지에게 대학교 때부터 좋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앤지가 퍼시에게 “그러면 당신의 이웃은 누구야?”라고 되물었습니다.
그 후 몇 주간 퍼시에게서 앤지의 질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앤지와 퍼시는 아파트를 떠나 리치몬드 처치 힐 중심가에 있는 오래된 도심지로 이사했습니다.
처치 힐은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쇠퇴한 소위 할렘가였고 흑인들만 거주했으며 많은 이들이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하는 삶을 사는 그야말로
비참한 곳이었습니다.
퍼시와 앤지는 먼저 어린이들에게 다가갔습니다.
퍼시는 농구공을 들고 아이들에게 농구를 시작했고 아이들과 어른들의 이름을 외웠습니다.
조금씩 처치 힐 사람들은 그를 친구로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백인들처럼 그들을 범죄자로 보지 않고 이웃으로 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네 아이들은 퍼시의 뒤를 따라왔고, 퍼시와 앤지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고 비디오 게임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은 15명이나 퍼시의 귀가를 기다리며 문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은 퍼시와 앤지가 자신들의 숙제를 도와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퍼시와 앤지는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는 것이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믿고 집을 개방하여 아이들이 원할 땐 언제든지 그 집에 올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아이들에게 파티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지역 주민들은 퍼시와 앤지를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백인 커플이 자신들의 동네에 들어와서 아이들에게 헛된 꿈을 심어주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 아이의 엄마는 퍼시를 자신들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사복경찰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러나 퍼시와 앤지는 굽히지 않고 자원봉사자까지 구해 더 많은 아이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2002년 CHAT이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CHAT은 상주직원 45명과 자원봉사자 수백 명, 운영예산 25억 원의 기관으로 성장했고 지난 13년 동안 아이들 공부방을 시작으로 처치 힐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참조: ‘유쾌함의 기술’, 앤서니 T. 디베네뎃, 유튜브 ‘책한민국’]
앤지와 퍼시는 소위 사회적 ‘루저’(Looser)가 되어버린 동네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고 있던 백인사회에 속해있으며 그들에게 설교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신들도 우리 백인들의 도시처럼 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세요.”
그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재수 없어!”
퍼시와 앤지 커플은 말은 자신의 위치에 따라 용기를 줄 수도, 재수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높은 위치에서 마치 밧줄을 내려주며 잡고 올라오라고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아래로 내려가 자신의 등을 밟고 올라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위에서 하는 말은 재수 없고, 밑에서 하는 말은 힘과 희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부류의 말씀이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없애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그들의 박해에 대해 “감히 하늘의 왕에게 이런 대접을?” 하며 분개하지 않으셨습니다.
숨고 숨어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박해받는 분이 되셨습니다.
분명 올바름을 선포하셨지만, 그 말씀은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말이 아닌, 사람들을 떠받쳐 올려주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말씀은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저는 말을 많이 하므로 재수 없는 잔소리만 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핍박을 받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어떤 분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패치 아담스’(1998)는 의대의 엄격한 규율을 깨고 환자들의 눈높이를 맞춰 그들에게 웃음을 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결국 자신의 이상에 꼭 맞는 병원을 설립한 헌터 아담스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아이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하지 않고 웃음을 주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여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나의 말이 잔소리가 되지 않고 누군가에게 힘이 되려면 내 목소리가 그들의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들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그들보다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말에 힘은 그 내용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위치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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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한다면 끝까지 희망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14-21)”
1) 신앙인의 희망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희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하여 이미 들은 것입니다.
이 복음은 여러분에게 다다라 여러분이 그 진리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듣고 깨달은 날부터, 온 세상에서 그러하듯이 여러분에게서도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습니다(콜로 1,3-6).”
‘희망’은 믿음과 사랑의 ‘근거’이기도 하고, 믿음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이기도 합니다.
<희망이 없으면 믿음을 가질 이유가 없게 되고,
사랑을 실천할 힘도 잃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희망의 관계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6-8)”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기를 바라는 희망과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 믿음은 하나입니다.
믿으니까 희망하고, 희망하니까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올바른 판결’이라는 말은,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모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청하는 그것을 청하는 그대로 다 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7-8.11)”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청하지 않으면 받지 못하고,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다.”입니다.
주시는데도 받지 않으면 못 받는 것입니다.
<외면하거나 관심이 없거나 거부하면 그렇게 됩니다.>
2)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지금 청하는 이것이 정말로 좋은 것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모른다고 해도 고민하지 말고, 기도하기를 망설이지도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주변에서 “그런 기도는 기복신앙이다.” 라고 핀잔을 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눅 들거나 열등감에 빠질 이유는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간절하게 바라는 그것이, 또 그것을 간청하는 나의 기도가, 수준이 조금 떨어진다고 남들이 비웃는다고 해도, 주님께서는 나의 간절한 심정을 알아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거창한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나에게는 아주 큰 일이 있고, 그것을 주님께 간절하게 빌고 있는데, 기복신앙 같은 모습이 조금 섞인다고 해도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께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우리는 ‘다른 사람의’ 믿음과 희망을 존중해야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보기에는 부러진 갈대처럼 구제불능으로 보이는 사람이라도, 다시 살아나서 성인 성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눈에는 박해자 사울이
부러진 갈대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 박해자가 나중에 위대한 사도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예외가 되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합니다.
배반자 유다가 바로 그 사람인데, 최후의 만찬 시점에서 그는 이미 부러진 갈대였고 연기 나는 심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그를 회개시키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만일에 그가 마지막 순간에라도 회개하고 돌아섰다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죄를 모두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떠나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유다 자신이 스스로 믿음과 희망을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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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는 바리사이들의 모습과, 그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메시아로서 당신의 사명을 다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비교하여 봄으로써, 권력을 품은 사람과 사랑을 품은 사람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깨닫게 됩니다.
권력을 품은 사람은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 되기를 바라고, 자기가 가진 힘으로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려고 듭니다. 그러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요? 그저 ‘그런 사람도 있나보다’하고 인정하고 ‘어쩔 수 없나보다’하며 순순히 물러설까요? 절대 그러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든 그 사람이 자기에게 굴복하게 만들 것이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봐도 제 뜻대로 안되는건 자기 눈 앞에서, 아예 세상에서 제거해 버리려고 들 것입니다. 그게 힘을 가진 이가 누리는 ‘당연한 권리’라고 착각하기 때문이지요.
반면 사랑을 품은 사람은 모두가 참으로 행복하기를 바라고, 자기가 가진 힘과 능력으로 모든 이를 살리려고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인용하신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참된 종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뜻을 이루는 일보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 주장과 소신을 드러내기보다 하느님 뜻에 부합되는 정의와 공정, 즉 ‘참된 올바름’을 선포하지요. 또한 자기 몫을 더 챙기거나 자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다투지도 않고,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세상의 법칙에 따라 자기 주장이 맞다는 걸 내세우기 위해 큰 소리 치는 일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죄의 길을 벗어나 올바른 길로 돌아서게 하시어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온전히 실현되기를 바라며,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는’ 인내와 자비를 ‘연기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 위로와 사랑을 실천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부정과 불의가 만연한 이 세상에도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될 수 있다는 참된 희망을 마음에 품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마음에 사랑을 품은 하느님의 참된 종이십니다. 우리 각자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부러진 갈대처럼 실망과 절망으로 꺽인 채 주저앉은 우리를 주님께서 여러 사람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통해 위로해 주시고 일으켜 주셨습니다. 또한 연기나는 심지처럼 믿음이 약해지고 사랑의 불꽃이 꺼져버린 우리 마음에, 당신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시는 다양한 표징을 통해 믿음을 더해주시고 열정이 다시 타오르게 해 주셨습니다. 그랬기에 부족하고 약한 내가 거칠고 험한 이 세상에서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겠지요. 이처럼 크고 깊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 누리며 살아온 우리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이자 소명이 하나 있습니다. 나 자신이 ‘하느님의 참된 종’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큰 사랑과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절망과 슬픔에 마음이 꺾여 신음하는 이웃을 찾아가 위로하는 것입니다. 삶의 희망과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형제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마더 테레사) 하느님 나라는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마음 속에 구원에 대한 희망을 품고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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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
마태오 복음사가는 주님께서 바리사이들의 반대를 받으시면서도 복음을 선포하며
아픈 이들을 치유하시는 주님에 대해서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를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1-3)
마태오 복음사가는 주님께서 예언서의 예언대로 ‘주님의 종’이신 메시아이심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는 ‘수난받는 주님의 종’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미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50,5-7), 넷째 노래 (52,13-53,1-12)에서
수난 받은 메시아에 대해서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조차 왜 메시아가 수난 받는지에 대해서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주님을 반대하고 주님께서는 아버지로 받은
소명을 조용하게 이행하십니다.
복음사가는 이 대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이르셨다.”(마태 12, 14-16)
마태오는 이미 주님께서 고통과 수난의 메시아이심을 알고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며
받대 받는 메시아이심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미카 예언자는 불의를 저지르는 이스라엘 악행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선택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악행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한다.”(미카 2,1-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악행에 대해서 응징하십니다.
“보라, 내가 이 족속을 거슬러 재앙을 내리려고 하니, 너희는 거기에서
목을 빼내지 못하고, 으스대며 걷지도 못하리라. 재앙의 때이기 때문이다.”(미카 2,3)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아들을 함부로 하는 이들 손에게
내어 놓으십니다.
성자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러 순하게
순명과 수난의 길을 걸으십니다.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는 주님께서는 마태오가 표현하듯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19절)라는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그러나 삶에 지친 백성들은 그분을 알아보며 그분에게 희망을 겁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도 예언했던 종말의 진정한 목자
길 잃은 양들을 돌보며 자신의 생명을 바치시는
목자가 되십니다.
과거에 실망과 아픔을 주었던 북부 이스라엘의 왕들,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지게 했던 남부 유다의 왕들과는 다른
조용히 구원을 펴시는 '주님의 종'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들의 메시아가 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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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한결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삶
<2024.7.20> 아침을 여는 묵상 (렘 34:8~22절)
❝한결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삶❞
❚ 사람과 사람 간의 약속도 어겨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과 약속한 것은 생명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합니다.
✔ 어떠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까?
➲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나님만을 온전히 바라보아야 합니다(8~11절).
모세 율법에 의하면 동족이 자신의 노예가 되어 6년을 섬기면 제 7년 되는 해에 해방시켜 주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 말기 유다 백성들은 이를 전혀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리미야의 예언대로 이루어지자 노예 해방 언약 준수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드기야는 백성들과 언약에 맺고, 그런 노예들을 풀어 주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11절).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벨론 군대가 잠시 물러나는 사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친 줄로 알고 다시금 그 마음이 완악해져 해방시켰던 노예를 잡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드기야를 비롯한 유다 백성들이 동족 노예를 해방시킨 것이 마지 못해 억지로 행한 일이었음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처사는 기름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이 없다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고, 인생의 문제를 막아 낼 수 없는 위기를 만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찾고, 은혜를 구하면 살길이 열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려움 가운데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자를 결국 복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에서도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에 참된 지혜임을 깨닫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이행하여야 합니다(12~16절).
노예 해방 언약을 변개한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경고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애굽 땅을 종들의 집’(13절)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래 신분이 종들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종 되었던 그들이 구원된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동족들을 종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6년간 섬기게 하고 7년째에는 놓아 주어야 하는 언약을 선조들과 맺었으나, 유다 백성은 그 언약을 지키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14절). 그런데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 언약에 순종하는 듯 각기 이웃들 즉, 같은 민족 히브리 사람을 종으로 삼았던 사람들마다 종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계약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엄중히 체결하였습니다(15절). 그런데 그들은 금세 마음이 바꿔서 풀어 주었던 종들을 다시 끌어다가 종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계약 파기를 그분의 이름을 더럽힌 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16절).
중요한 약속을 깜빡 잊어버려서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약속도 어겨서는 안 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과 약속한 것에 대해서는 생명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도 죄인 되었던 우리 자신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독생자까지 보내어 십자가에서 희생시키시기까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킬 수 있는 약속을 어겼을 때 감당할 수 없는 환난이 찾아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보호자이시며 인도자가 되셨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심판을 받았으니 이보다 더한 저주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삶 가운데 감당하지 못할 위기가 찾아올 때 혹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잘 이행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어떠한 유혹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기억하여야 합니다(17~22절).
하나님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동족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을 실행하지 아니한 것에 대해 크게 진노하셔서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17절)고 말씀하시면서 세계 여러 나가 가운데 흩으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맺을 때 그 언약을 성실히 지킬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짐승을 둘로 쪼갠 후 그 쪼개진 짐승 사이로 언약의 당사자가 지나면서 하나님께 맹세했습니다. 이것은 변개할 수 없는 약속입니다. 계약 당사자들이 약속을 어기면 그 제물처럼 죽어도 좋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계약을 깨뜨린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이제 그 제물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하실 것입니다(18~20절). 결국 하나님이 예루살렘에서 잠시 물러갔던 바벨론 군대에게 명령을 내려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와서 예루살렘을 불사르고 파괴하고 유다 성읍들을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로 만드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21~22절).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거룩과 충성의 다짐을 신실하게 이행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고 형통케 하시려고 약속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복이 될 언약을 어김으로써 저주와 멸망에 이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릴 때 하나님의 관심 밖에서 멀어지는 삶이 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마귀가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었던 다윗처럼 우리 자신 역시도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그 은혜 안에 거하기를 힘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떠한 유혹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기억하며, 환난의 때에 우리를 건져 주시며 영화롭게 해 주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어떠한 처지에서도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그 은혜 안에 거하므로 하나님 앞에 거룩과 충성의 다짐을 신실하게 이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34:8~2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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