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이어지는 한여름이다.
비가 잠시 그쳤다고 해서 더위가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지는 빗물을 머금은 채 거대한 찜통이 되고, 공기는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짙은 습기로 가득하다.
실내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순간, 뜨거운 열기와 습도가 온몸을 감싸며 숨을 턱 막히게 한다.
예전 여름은 이렇지 않았다.
그늘에만 들어가도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함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의 여름은 점점 아열대 기후를 닮아가고 있다.
해마다 길어지는 폭염과 높아지는 습도를 몸으로 느끼며 문득, 지나간 여름이 그리워진다.
이런 계절에 산을 오른다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흐르는데 산길을 오르면 체온은 금세 치솟고, 숨은 더욱 거칠어진다.
그래서 요즘은 더위를 피해 새벽 어둠을 뚫고 산행을 시작한다.
햇볕만 피할 수 있어도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거리가 멀어 평소에 산행하기 힘든 전라남도 영암의 월출산을 제헌절 연휴를 맞아 1박2일 일정으로 계획을 잡았다가 장마로 인해 비 예보가 있어 포기를 하고 오늘 찾은 곳은 월악산국립공원 금수산이다.
금수산은 사계절 아름다운 산이지만, 장마철에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특히 비가 많이 내린 뒤에는 숨어 있던 계곡과 폭포들이 비로소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도 새벽부터 하늘은 안개와 운무가 뒤섞여 산을 감싸고 있었다.
희뿌연 풍경은 마치 신선이 사는 세상으로 들어가는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산길을 따라 가장 먼저 만난 곳은 금수산의 숨은 비경인 용담폭포였다.
평소에는 물줄기가 가늘어 폭포라는 이름이 조금은 무색할 정도지만, 오늘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최근 내린 많은 비 덕분에 폭포는 거대한 물기둥으로 변해 힘차게 계곡을 쏟아내고 있었다.
폭포 아래 가까이 다가서면 보이는 부분만으로는 그 규모를 모두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전망대에 올라 전체를 바라보는 순간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다섯 단으로 이어지는 폭포가 한눈에 펼쳐지고, 하얀 물줄기는 굉음을 내며 계곡을 뒤흔든다.
물이 바위를 때리며 만들어내는 거대한 물보라와 시원한 물소리는 무더위마저 잠시 잊게 만든다.
자연이 만들어낸 거대한 교향곡 앞에서 사람은 그저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느끼게 된다.
용담폭포를 뒤로하고 망덕봉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면서 자연은 또 다른 시험을 내놓는다.
급경사가 이어지고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습도를 가득 머금은 공기는 쉽게 폐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몇 걸음 오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이마에서는 땀이 빗물처럼 흘러내리고, 옷은 금세 흠뻑 젖었다.
평소 같으면 참고 오를 수 있었을 길이었지만, 오늘은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할 수 없었다.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고 호흡은 거칠어졌다.
결국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산에서는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안전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과감히 계획을 수정했다.
망덕봉까지의 욕심을 내려놓고 오래전부터 다시 만나고 싶었던 독수리바위를 오늘의 목적지로 정했다.
새벽의 운무는 산을 온통 감싸고 있었다.
안개인지 운무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희뿌연 풍경 속에서 산은 자신의 모습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감추기를 반복하는 모습은 마치 자연이 보여주는 한 편의 공연 같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운무가 천천히 걷히기 시작했다.
마치 커튼이 열리듯 하얀 안개 사이로 거대한 바위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독수리바위였다.
웅크리고 앉아 하늘을 응시하는 거대한 독수리의 형상을 닮은 바위는 보는 순간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
10여 년 전 이곳을 처음 지났을 때는 등산로 아래에서 멀리 바라보기만 했었다.
'언젠가는 저 바위에 꼭 가보고 싶다.'라는 작은 소망을 품었는데, 오늘 그 오랜 바람을 이루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자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 앞에 섰다.
감동은 예전보다 훨씬 더 크게 다가왔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라도 거대한 바위의 규모와 웅장함을 그대로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준비해 간 드론을 띄웠다.
하늘 높이 올라간 드론이 바라본 독수리바위는 내가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깎아지른 절벽과 웅장한 암릉, 주변의 능선과 계곡이 한 폭의 산수화처럼 펼쳐졌다.
지상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금수산의 아름다움이 하늘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드론을 배우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기술은 단순히 새로운 장비를 다루는 것을 넘어, 자연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을 선물해 주었다.
바위를 배경으로 다양한 구도로 사진을 남기고, 바위 위에 올라 영상도 촬영했다.
그 순간순간이 오래도록 기억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문득 나 자신의 변화도 느껴진다.
예전에는 험한 암릉과 긴 종주를 즐기며 어려운 코스를 마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힘든 산행일수록 더 큰 성취감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체력이 조금씩 예전 같지 않음을 인정하게 된다.
고난도의 산행은 점점 부담으로 다가오고, 무리하기보다는 자연을 오래 바라보고, 한 걸음 한 걸음을 천천히 음미하는 산행이 더 좋아졌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욕심을 조금 내려놓는 대신 자연을 더 깊이 바라볼 줄 아는 여유를 얻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오늘 비록 계획했던 정상까지는 가지 못했다.
하지만 장마가 선물한 웅장한 용담폭포를 만났고,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왔던 독수리바위를 가까이에서 마주했다.
그리고 운무가 걷히며 드러난 금수산의 장엄한 풍경은 어떤 정상의 인증사진보다 더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정상을 밟는 것만이 산행의 전부는 아니다.
자연이 허락하는 만큼 걷고, 자신의 몸이 허락하는 만큼 오르며, 그날 만난 풍경 하나를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산행의 의미가 아닐까.
오늘 금수산은 다시 한번 내게 소중한 깨달음을 선물했다.
욕심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더 큰 풍경이 보이고, 천천히 걸을 때 자연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