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6: 13-16
하갈이
하나님의 대한 인식, 곧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분의 사역에 대한 인식이 어떤 사람은 매우 더디고, 어떤 사람은 즉각적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즉각적인 체험가운데서도 그 인식이 더디지만, 또 다른 사람은 둘러 둘러서 다른 사람의 경험만을 듣고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고 그분의 뜻을 수종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은 하갈의 경우와 아브라함의 경우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본문 13절은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입니다.
1) 상반절은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입니다.
모세는 하갈이 사자에게 충고를 들은 후에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복종되어 자신을 기도에 굴복시켰기 때문에 마음의 변화가 있었다기보다는 여기서는 입으로 고백하는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전에는 거칠고 다루기 힘든 성질을 지니고 있었던 하갈이 이제는 결론에 가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기 시작한다는 의견을 갖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고 현현시키시기 때문에 ‘감찰하시는 하나님’ 이라고 불려지고 있다고 어떤 자들의 상상하는 것에 대하여는 억지 해석이라고 여깁니다. 그보다도 우리는 하갈이 전에는 자기 자신이 덧없이 사막을 우연히 방황하며 다니는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인간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있다고 여겨지는 자는 반드시 그분이 보고 계시는 것처럼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2)하반절은“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입니다
(1)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① 어떤 자들은 이 말을 ‘내가 어떻게 환상을 보았는고’ 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그 표현은 우리가 묘사하는 것과 정말로 같습니다. 더욱이 그 문장의 모호성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해석을 제기시키고 있습니다.
② 히브리인들 중에 어떤 자들은 하갈이 그 사자의 나타남에 놀랐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오직 아브람의 집에서만 뵈올 수가 있는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가혹한 해석입니다.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유대인들의 야심이 그들을 헛된 장난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들은 모든 연구를 자기들의 종족에 대한 자랑에만 집중해서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그들의 연구는 헛된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③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 구절을 ‘내가 내 이상을 보았는가?’ 라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말하자면 그처럼 늦게까지도 그 이상을 보는 동안에 우리는 봉사였다는 말입니다. 이 해석자들에 의하면 하갈의 이상은 이중적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자는 오류 투성 입니다. 즉 그녀는 그 사자에게서 하늘 나라의 것에 대하여는 전혀 깨달은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그 이상의 신적 성질을 감지한 것으로 인하여 감동을 받은 후에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④ 어떤 자들에게는 거기에 부정적인 대답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그녀가 그 사자가 떠난 것을 보지 못했다는 식으로 말한 것처럼 간주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사자가 갑자기 사라진 사실에서 그녀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사자였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2) 또한 이 문장의 두 번째 부분에 관해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① 제롬은 그것을 ‘내게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몽롱한 이상으로 지적하여 그 말이 은유적인 것으로 되어야 당연한 것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도 뒤에서는 사람들을 분명히 알아볼 수가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았다고 표현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개적으로 그리고 명확하게 자신을 그들에게 나타내시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견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② 다른 사람은 모세가 다른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았다는 사실을 그분의 진노에 대한 표현으로서 간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분이 우리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후한 마음을 가지고 계실 때는 그분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여 빛나고 계신 사실이 묘사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 의하면 그 말의 의미는 ‘내가 이제야 패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더 이상 하나님의 채찍이나 응징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진노하고 계심을 알았구나’ 라는 뜻입니다. 하갈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힘입어서 그렇게 방황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 의하여 심지어는 사막에서도 돌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부분적으로는 일리 있는 해석이지만 전체에서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3) 하갈은 여기서 자신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전에는 그토록 봉사였던 자신이 지금까지도 자기의 눈이 너무 서서히 그리고 너무 느리게 띄어져서 하나님을 알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의 무감각한 죄를 장소와 시간적인 상황으로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증거들로 말미암아 자신이 여호와의 돌보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아직 봉사가 되어 있는 그녀는 하나님이 자신을 그 앞에 나타내 보이셨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마치 눈을 꼭 감고 그분을 지나쳐 버리는 것처럼 그분의 섭리를 멸시하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하갈은 천사가 나타났을 때에 더 빨리 깨우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장소에 대한 고려도 대단히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언제나 아브람의 집에서 그녀와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셨는데 그분이 지금은 그녀를 도망자로 몰고 다니시며 심지어는 사막에까지 도망쳐 나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임재를 무시해 버린 것은 그녀의 편에서 가장 기초적인 배은망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이 자기를 살펴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도 거기에 응답하여 눈을 들어 그분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더욱 더 치욕적인 무시가 있습니다. 즉, 방랑자가 되어 추방된 신세로 자신의 의곡된 성질에 대하여 정당한 벌을 치루고 있지만 지금까지 여호와의 돌보심을 받고 있는 그녀는 아직도 그분의 임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녀의 자책이 지향하는 요점을 보게 됩니다. ‘강제로 하는 것 외에는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그리고 그분을 존경하지도 않았다. 전에도 황송하게 저를 굽어 살펴주셨고 지금도 죄악들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 사막에서도 저를 굽어 살펴주시니 내가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무감각했던 내 자신을 곧 깨달았어야 했을텐데 지금까지 여호와께서 먼저 나를 굽어 살피시지 않으셨으면 나는 영영 하늘을 우러러 보며 주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자책하는 요지를 보게 됩니다.
2. 본문 14절은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어 (예크라)라는 말을 불확실하게 취하고 있는 자들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 말은 히브리 언어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명확하게 밝혀내기 위해서는 그 말을 수동태로 고쳐서 ‘그 샘이 ...... 불려졌다’는 식으로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평범한 명명을 하갈과 관련하여 기원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갈은 단순하게 한가지 고백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장차 오는 시대에도 입증되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간증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지듯 전해지기를 원하여 그 우물에다 그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참으로 용이한 사실을 추론하게 됩니다.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지 못하는 자들은 결국 채찍으로 복종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거칠고 반항적이며 끝내는 자기 멍에까지 뿌리치고 나온 하갈이 지금 고통을 당하여 그 자신의 완악함이 파괴될 때 전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채찍만으로 올바른 제도에 들어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 철저하게 입증시켜 주는 하늘나라의 이상이 부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은 비단 그녀 뿐에게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징계하시면서도 성령으로 우리를 겸허하게 복종하는 상태로 데려가신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말하기를 그 샘의 이름이 이중적인 호의를 증거하는 표로 명명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이스마엘이 죽음에서 다시 소생했다는 사실과 그의 어머니 하갈에게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연결되어 있는 일들을 어리석게도 절단하고 있습니다. 하갈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또는 생명의 창조자이신 분에 의하여 은총으로 돌봄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녀는 증거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15-16절은
“⑮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⑯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이었더라” 입니다.
하갈은 아브람으로부터 그녀의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연의 질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름을 지어 줌으로 인하여 아버지들이 자식들에 대하여 갖고 있는 권세를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갈이 집에 돌아왔을 때 그때까지 일어난 일들을 아브람에게 다 말해 주었다는 사실을 쉽사리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자신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감사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사자의 명령대로 명명했습니다. 그리고 하갈의 비참상을 들으신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즉각적이든 점진적이든 간에 우리의 믿음은 계속 자라가야 하고 꽃피우고 열매를 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