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05
4) 월터 휘트먼(1819 – 1890)
***1800년 대의 프랑스어와 영어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유럽인은 자신이 지식인 척 하려면 프랑스어를 알아야 했다. 폴란드와 러시아에서는 서구문화 도입 바람이 불면서 유럽 쪽을 눈을 돌렸다. 언어는 으레 프랑스어이고, 공부하러 가는 곳은 파리였다. 말하자면 이때는 프랑스어가 패권을 가진 언어였다.
18세기 말에 출판시장을 장악한 책은 프랑스어로 된 서적이었다. 프랑스어가 패권을 가진 이유로는 프랑스 인구가 영국 인구의 3배였다. (프랑스 어로 출판하면 더 많이 팔릴 수 있다.) 프랑스어가 패권을 가진 이유로 루이 14세의 프랑스 어 정비를 꼽는다. 명료하지 않으면 프랑스어가 아니다 할 만큼 탁월한 논리성을 가졌다.
18세기의 러시아에서 유럽 언어를 공부한다면 으레 프랑스어이고, 유학을 가면 파리였다.
프랑스어에 대하여 영어의 평가는 어떠하였을까. 영어는 프랑스어 이외의 잡다한 유럽 언어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패권어인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영역을 조금씩 조금씩 잠식해나갔다. 영국이 식민지를 넓히고, 해외 이주민이 많아지는 것과 같은 걸음을 걸었다. 영어는 미국 대륙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면ㅅ너 세력확장을 이루어냈다.
오늘의 표준 영어는 1400년 대의 런던 방언에서 출발하였다. 런던에 관청이 몰리다보니 공문서들이 런던 언어로 발송하였다. 성서 번역이 영어로 이루어지면서 영어는 영국민에게 일상용어로 자리잡는다. 18세기에는 이런 영어를 집대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퀸스 영어 – 표준 영어 – 옥스퍼드 영어로 만들어 왔고, 오늘은 BBC 영어로 통일하였다.
19세기는 각 나라가 자기의 언어를 사용하는 추세였다.(이전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통치영역을 나누었지만, 이제는 지리, 언어가 조건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국가 개념에 민족 개념이 나타난다.)
영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넓다. 상류층과 일반 대중이 사용하는 영어에도 말투나 억양에 차이가 나타났다. 언어의 차이는 적대감을 유발함으로 사회발전과 국가 통치에 걸림이 되었다.
1801년부터 국민 교육을 통해서 언어 교육을 시행했다. 이로서 언어통합과 국민통합을 이루려 하였다. 학교 교육에서도 영어 교육을 더욱 강화했다.
미국이 완전히 영어 사용 국가가 되면서(미국의 국가 정책이 미국화이고, 미국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이 영어 사용이다;) 영어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완전히 국제어가 되었다.
문학의 입장에서 보면
영어와는 달리 영국 문학은 18세기 초부터 유럽 대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클루소’는 1719년에 첫 발간을 했고, 곧 유럽의 여러나라에서 다투어 번역했다. 1726년에 쓰여진 ‘갈리버 여행기’는 영국서 출판과 거의 동시에 프랑스 번역판이 풀판되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영국의 제도(명예혁명으로 확립한 입헌 군주국)를 부러워 하면서도 영국인은 거칠은 야만인이라고 낮추어 보았다.
1815년에 나폴레옹이 완전히 몰락하자 프랑스인은 영국을 고맙게 생각했다. 특히 왕당파는 친영국화 하였다. 언어의 억양도 영국을 닮아갔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의 러시아에서도 친프랑스에서 친영국으로 바뀌어 갔다. 그 만큼 영어의 세력이 확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