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100]『김택근의 묵언』이라는 책
최근 헐레벌떡 산 책이 『김택근의 묵언』(김택근 지음, 도서출판 동아시아 2024년 11월 21일 펴냄, 328쪽, 19800원)이라는 신간이다. 책을 손에 쥐고, 일단 묵언默言에 대해 생각해봤다. 묵언이란 무엇일까? ‘침묵할 묵黙’이니 사전적 의미의 ‘말없음표’일까? ‘말없는 말’이 형용모순일까? 아니다. 말없음 속의 말(불어不語)이 비수匕首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할 말, 못할 말들이 천지에 횡행하는 세상이다. 못할 말 중에 가장 질 나쁜 말이 막말이고 거짓말이 아니던가. 막말과 거짓말은 몽니를 낳는다. 글도 배움도 마찬가지이다. 곡학아세曲學阿世가 마치 오래된 진리인 듯하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명색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잉크밥’을 오래 먹은 기자 출신의 문사文士가 인쇄매체를 통해 죽비를 날렸다. 그의 칼럼 수필 등 70여편은 죽비에 다름아니다. 참으로 도저到底하다. 어떤 내공이 이처럼 도저할 수 있을까. 침묵을 깨트리고 곱씹은 성찰을 통해 토해내는 그의 글은 ‘자자字字이 관점觀點이요, 구구句句이 비점批點’이다. 제대로 된 말과 글은 ‘바로 요거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기에 출판사 편집자가 <필사노트>를 별책부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정치인들이나 현 시국에 대한 매서운 질타, 예리한 시각, 명료明瞭한 논리가 있는가 하면, 낮은 사람들을 위한 진혼곡같은 서정抒情과 하염없는 눈물도 천상 시인답게 편편에 가득하다. 종교, 특히 불교에 대한 깊은 조예와 이해도 엿보인다(선지식 성철스님과 용성스님 평전도 썼다). 단문으로도 산뜻한 수식어들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갈수록 천박해지는 세태世態를 꿰뚫어보는 혜안도 넘친다. 그리고 그는 절대로 흥분하지 않는다. 침잠한 상태에서 정갈한 그 무엇을 건져낸다. 더이상 상찬할 필요는 없다.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그가 칠십년 동안(전북 신태인산 1954년생) 온몸으로 갈고 닦은 깊은 내공이 있어서이다. 말하는 것마다 판판이 어록語錄인 사람도 있으나, 쓰는 글마다 줄줄줄 명문名文인 사람도 있으니, 이 책의 저자가 그렇지 않을까. 서여기인書如其人. 언문일치言文一致이어서 더더욱 좋다.
네 분(평전작가 김삼웅, ‘아버지의 해방일지’ 작가 정지아,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강원국, 그의 문학스승 시인 신대철)의 추천사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을 터이나, 저자의 프롤로그 <물기어린 시대를 건너며>를 읽으면 328쪽 77편의 글을 모조리 읽지 않고도 못견딜 '조갈증'에 시달릴 것이다. 김삼웅은 “세사世事를 보는 눈이 밝아지고, 메마른 서정에 갈증을 풀어주는 맑은 샘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잔잔한 울림은 오래오래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원국의 추천사는 아름답기도 하다. "부럽게 훔쳐보고 감미롭게 전율했다"며 필사筆寫하기를 강추하고 있다. 나도 그렇게 이틀밤을 보냈다. 그리고 저자가 고마웠다. 아무리 세상이 혼탁해도 어딘가에는 이렇게 ‘눈 밝은 사람’ ‘가슴 따뜻한 사람’이 있다는 걸, 가슴 조이고 겨우겨우 살아사는 가난하지만 마음만큼은 부자인 사람들을 한 마디 글과 말로 위로해주는 사람이 ‘못된 인간’들보다 몇 천 배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땅히 그래야 세상이 돌아가지 반대의 경우는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5부로 멋지게 아우른 글쓴이의 챕터 글제목만이라도 적어놓고 싶은 까닭이다.
1부 <네 죽음을 기억하라>의 20편, 2부 <이름도 병이 든다>의 14편, 3부 <말이 모든 것을 말한다>의 19편, 4부의 <그러므로 나는 당신입니다>의 19편, 5부의 <김대중의 마지막 눈물>의 6편이 그것이다.
부기1: 글쓴이는 한때 유명한 편집기자였다. 취재기자는 원고지 10장으로 승부를 보지만, 편집기자는 헤드라인(제목) 10여자로 승부를 보는 언어조탁사이다. 정치9단이라던 양김시대가 있었다. 87년 역사적인 대선에 양김은 물러서지 않았다. 당시 화제가 된 사자성어 <동상이몽 東上異夢 >은 그의 작품이었다. ‘동교동과 상교동은 각각 꿈이 다르다’는 신조어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화제가 됐다. 파격적인 편집과 화끈한 르포기사 등으로 경향신문의 섹션 <매거진 X>가 지가紙價를 올릴 정도였을 때, 진두지휘한 기자가 글쓴이였다.
부기2: 졸저 『어머니』의 추천사에서 그는 “그의 글을 읽으니 국밥 한 그릇 잘 얻어먹은 기분이다. 뱃속이 따뜻해진다”며 “눈 오는 날 국밥집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고 썼다. 고마운 30년의 인연이다. 엊그제 아내가 사는 용인에 47cm 폭설이 내리던 날, 선배하고 한 잔 하지 못하고 고향에 곧바로 내려온 게 못내 아쉽다. 그의 묵언을 듣는다.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