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92
3월10일[사순 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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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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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XPJwNbby5MM
[광주대교구 장민준 가브리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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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관심은 심판이나 단죄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용서와 자비, 구원과 영생에 맞춰져 있습니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예수님 말씀이 오늘따라 왜 이리 눈물겹고 은혜롭게 다가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인생길 돌아보면 어찌 그리 굽이굽이 수치스러운 죄와 타락과 방황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이런 나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엄청나게 큰 보속과 무시무시한 처벌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런 제 생각은 사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있던 하느님 상은 피도 눈물도 없는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 우세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우상숭배 앞에 크게 진노하시며 벌주시는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이 그리도 두려웠습니다. 정해진 율법 조항에 의거해서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나 악행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시는 징벌의 하느님 얼굴을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딴 판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공생활 기간 내내 입에 달고 다니신 말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
뜻밖에도 이 땅에 강림하신 메시아는 심판자나 처벌자의 모습이 아니라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때로 더없이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여행길의 절친한 동반자로, 끝도 없이 기다리고 용서하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심판하실 권한을 주신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심판의 권한은 전혀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오로지 용서와 자비, 희생과 사랑의 실천을 통한 인류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결코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앞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그분을 향해 기쁜 얼굴로 다가서는 이들에게는 모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 끝끝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며 그분의 가르침을 멀리 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빛을 등진 사람들은 스스로를 단죄와 심판의 도마 위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단죄가 아니라 구원’ 때문이라는 사실,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요. 오늘도 제 삶 안에 길게 드리워진 짙은 죄의 뿌리를 슬픈 얼굴로 바라봅니다. 밥 먹듯이 지어온 숱한 죄와 과오 속에 살아온 제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금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빛 같을지라도 죄질이나 죄 값은 뒷전이신 예수님, 오직 우리들의 해방, 구원, 영원한 생명에만 관심이 지극하신 자비의 예수님 때문에 오늘 다시 한 번 힘차게 일어서야겠습니다.
아무리 우리 죄가 크다 할지라도 결국 우리는 모두 구원될 것입니다. 우리 죄가 크지만 하느님 자비는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단죄하고 속박하지 않는 한 결국 우리는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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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MBjz-Gq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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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 신약으로의 도약: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의 필연성 이해>
인간은 집과 같습니다. 집은 그 주인에 의해 정체성이 결정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느님이 되려는 무엇을 주인으로 삼고 삽니다. 문제는 그런 주인을 모셔 놓고 살다 보니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구해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모든 만들어진 것의 반드시 만든 자의 목적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계명’입니다. 자동차가 핸들과 거꾸로 움직이면 큰일입니다. 고쳐질 수 없다면 폐기 처분 되는 게 당연합니다. 인간이 창조 된 게 맞는다면 왜 인간을 만들어 놓고 지옥 보내느냐고 말해봐야 소용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인간 답도록 당신 창조 목적인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잘 됩니까?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그도 십계명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왜 믿어야만 하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장대에 들어 올린 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들어 올려져야 하고 당신을 믿는 이들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책에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한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평생 모은 것을 일시에 날려버릴 아들에게는 물려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높고 험준한 산 꼭대기에서 기다리고 두 아들이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열 개의 비석을 찾아서 그 길로 올라오라고 합니다. 첫째 아들은 두세 개의 비석을 지난 뒤 지쳐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형은 아버지가 자신들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동생은 비석에 새긴 글씨가 옅어지는 것을 눈치챕니다. 아버지는 자신들을 위해 비석을 새기며 지쳐갔던 것입니다. 이 말에 형도 여덟 번째 비석까지는 갔지만, 결국 편한 길을 택합니다. 동생도 형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비석에 새겨진 글씨가 검붉게 된 것을 발견합니다. 아버지가 자신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려고 피까지 흘리셨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를 의심한 것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올라 아버지를 만납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형은 불구덩이 속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누구든 무언가를 만들 때 그 안에 땀과 피를 섞습니다. 손흥민 선수도 아무리 축구를 좋아해도 아버지의 고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위치까지 오를 수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자녀에게 힘을 주려 하는데 자신은 편히 쉬며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부모의 뜻은 항상 부모가 자기를 위해 흘리는 피에 대한 ‘감사’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따르지만, 마음 안에서는 여전히 ‘내가 이렇게 많이 봉헌했는데 주님이 주시는 것은 고작….’ 이라고 불평했습니다. 이때 성체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나’가 내 안의 불평 불만인 ‘나’를 죽이기 위해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의 수난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할까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영적으로 몹시 지쳐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기도실에 들어갔는데 어느 축일을 위해 들여온 성상을 보았습니다. 상처투성이인 그리스도를 표현한 성상이었습니다. 성녀는 깊은 감동에 사로잡혔습니다. 자신 때문에 그런 상처를 받으신 것에 비해 주님께 아주 조금밖에 보답해 드리지 못한 것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그분 앞에 엎드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성녀는 다시는 주님을 거스르지 않도록 힘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 9,1 참조)
민수기에서 뱀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만’이었습니다. 십계명이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믿음의 부족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들 안에 있는 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뱀을 보내시고 그 치유 방법으로는 또 다른 뱀이 장대에 달리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묵상함으로써 우리에게 오시는 은총의 선물은 우리 안에 자아라는 뱀에 물린 죄의 독이 눈물로 빠져나와 치유되는 열매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사무라이가 되고 싶은 천민 아이도 기둥에 들어있는 어머니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어머니의 꿈을 이뤄드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믿음이 아니면 누구도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믿는다면 그 수난 때문에 항상 ‘감사’의 감정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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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짧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 있습니다. “Life is not about waiting to pass the storm. It i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 참 멋진 말입니다. 인생은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폭풍우에서라도 춤추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는 지점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전환점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전환점입니다. 바오로는 이제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전환점(turning point)'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전환점의 사례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은 아담입니다.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던 아담은 뱀으로 변한 사탄을 만났습니다. 하느님과 같아지고 싶었던 교만한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금지했던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에서 ‘죄’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죄가 있는 곳에는 은총도 함께 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늘 전환점을 마련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땅에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십니다. 양을 치던 모세는 이제 새로운 사명을 얻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탈출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마지막 재앙이 ‘파스카’입니다. 이집트의 모든 맏배가 죽는 재앙을 내리시는데 집 앞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맏배는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파스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파스카란 ‘넘어간다. 건너가다, 지나간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파스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 파스카를 예수님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파스카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른다면 우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신약의 파스카입니다.
저의 삶에도 몇 번의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1986년 1월 저는 군에 입대했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는데 인사 담당 장교가 저를 불렀습니다. 제가 신학생인 것을 알았고, 인사 담당 장교의 아들도 신학생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성당 군종병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제 앞에는 꽃길만 펼쳐질 것 같았습니다. 성당에서 근무하니 매일 기도할 수 있고, 미사에 빠질 염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동료들은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고 하는 강원도로 갔는데 저는 경기도 용인으로 갔습니다. 꽃길만 같았던 성당 생활은 3개월 만에 끝났습니다. 잔디밭에 영양제를 주라고 했는데 대충 주었습니다. 성당 의자를 닦으라고 했는데 대충 닦았습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신부님께서 용산으로 출장 가면서 제게 부대로 들어가서 지내라고 했는데 제가 그것을 어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성당 군종병 생활을 마치고 인사처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부끄럽고, 속이 상한 일이었지만 돌아보면 제게는 참 잘된 일이었습니다. 저는 정신을 차리고, 남은 군 생활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사순 제4주일은 ‘장미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 선포됩니다. 페르시아 왕 키루스는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칙령을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페르시아 왕 키루스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키루스를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도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루 내 삶에 있었던 전환점을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순간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셨음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지금 지치고 힘든 이웃에게 삶의 ‘전환점’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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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14-21: 하느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려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다.
오늘은 기쁨의 장미주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독서와 복음을 보면 어렵고 힘든 결실을 촉구하고 있다. 오늘의 주제는 심판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빛으로써 세상에 보내 주셨다. 이 빛을 피해 숨는 것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역대기 하권에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이유를 백성들이 예언자들의 권고를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 하느님의 비탄에 찬 간절한 호소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약속의 하느님께서는 키루스의 해방칙령을 통해 한 가닥 희망을 보여주신다. 이것으로 바빌론 유배가 끝난다. 이 마지막 키루스의 해방칙령이 오늘을 기쁨의 주일이라고 하는 것 같다.
복음에서는 모든 인간의 삶에 대한 심판의 주제가 전개되고 있다. 그 심판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심으로써 드러난다. 인간이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삶 속에 살 때, 구원의 삶을 사는 것이며, 그 반대로 그 사랑의 선물에 대해 문을 닫을 때는 자신 안에만 있게 되기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먼 사람이 되고, 구원에서 멀리 있는 사람이 되고 만다. 주위의 모든 것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빛나는 때, 어둠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다. 어둠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나를 심판으로 이끄는 것이다. 높이 들리심이란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높이 들리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도 그 사랑을 살아감으로써 높이 들릴 수 있다. 우리가 새로 태어나는 것은 오직 사랑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새로 남이란 오로지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조건에서 가능한 것이며, 예수님의 그 사랑을 살아감으로써 우리도 높이 들릴 수 있다. 예수께서 수난이 가까웠을 때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하신 것은 당신 사랑의 힘을 확인시켜 줄 뿐 아니라,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 앞에서 높이 들리신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제 우리의 선택이 중요하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통해 계시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6-18). 어떤 면에서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느님의 사랑이 심판을 부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이고,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죽음을 담보로 우리 인간의 구원을 택하셨다. 인간에 대한 심판은 바로 이 사랑의 위대함에서 오는 것이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빛을 거절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생명까지도 거부하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 심판의 선포는 바로 인간 자신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빛을 외면할 때는 자기 자신이 시각장애인이 된 것에 대해 그 빛을 탓할 수는 없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19-20절). 우리의 행실이 드러날까 봐 빛을 멀리하는 것, 심판을 피하려고 빛을 멀리하는 것 그 자체가 더 무서운 심판이 된다. 빛을 멀리한다는 것은 어둠에 파묻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단죄받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1요한 4,16 참조)을 믿지 않을뿐더러, 그의 아집과 오만불손한 자만으로부터 그를 구원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보다는 해방의 행복한 결과에 주안점을 두고 기쁨으로 초대한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에페 2,4-6) 이처럼 부활의 신비를 미리 보여주는 것은 사순절을 통해 우리가 가야 할 목표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삶의 방향이 하느님의 빛을 더욱 가까이하는 삶이 되어 높이 들리신 주님과 함께 우리도 부활과 더불어 변화될 수 있는 삶을 바치기로 하고, 또한 이 사순시기가 우리가 높이 들리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의 시기로 되어야 한다.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영광, 구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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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사순 제4주일에 강조되는 주제는 ‘기쁨’입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입당송) 예수님의 수난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이 시점에, 도대체 교회는 무엇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일까요?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기쁜 순간 가운데 하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확인하였을 때가 아닐까 합니다. 하물며 내가 ‘하느님 사랑의 대상’임을 확인한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이 있을까요? 제1독서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외면에도 변함없이 성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유배하던 유다인들을 해방하여 준 페르시아 임금의 칙령이 사실은 하느님의 조처였음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한결같고 성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은 복음에도 잘 드러납니다. 광야에서 생활하며 되풀이하던 이스라엘의 반역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뱀’을 보내시지만, 결국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시려고 구리 뱀을 들어 올리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여기에서 관심을 끄는 내용은 “-해야 한다”라는 표현입니다. 누군가를 대신하여 배상하거나 속죄하는 것은 사랑할 때 나오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니까 그를 대신해서라도 배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어 올려지셔야 한다’라는 표현은 사랑하기 때문에 생겨난 주님의 희생을 의미하고, 그렇게 십자가는 사랑이 완성되는 자리가 됩니다.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3)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분을 ‘올려다보며’ 그 사랑을 기억하고, 그렇게 날마다 ‘위’로부터 그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 그것만이 우리를 살게 하는 참다운 삶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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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4-18)
1) 이 말씀에서 첫 번째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를 안 믿어도 하느님만 잘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께서 정하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또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6)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구세주’로), 또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2) 두 번째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즉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우리 대신에 속죄 제물로 바치셨고, 그 덕분에 우리는 해방과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고통과 죽음만 보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부활과 생명을 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부활과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부활과 생명이 없다면 십자가는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최종 목적지가 부활과 생명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 없는 생활이 될 뿐입니다.
3) 세 번째로 강조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마태 18,14)
어떤 특정 민족이나 특정인을 구원의 대상으로 미리 정해놓으신 것도 아니고, 사람들 사이에 어떤 차별이나 구분을 만들어 놓으신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기를 바라셔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래서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과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9-21)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얻으려고 자기 인생을 모두 쏟아 붓다가 허무하게 끝나버립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빛’은 구원을 주시는 당신을 가리키고, ‘어둠’은 구원의 길과는 반대쪽에 있는 ‘멸망’을 뜻합니다. ‘진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뜻합니다. <‘구원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는 것은 진리를 외면하고, 지혜가 아닌 어리석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사는 것은 어둠을 사랑하는 것이고, ‘구원의 좁은 문’을 버리고 ‘멸망의 넓은 문’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악한 일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그 사람들은, “부귀영화, 출세, 성공을 얻는 것도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이 길도 대단히 좁은 문이다.”라고 반박할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자기들끼리 경쟁하느라고 그렇게 되는 것이지, 무슨 가치가 있거나 거룩하고 훌륭한 일이어서 좁은 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5.17) <이 말에서 ‘지나가다.’는 ‘허무하게 사라지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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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재수 토마스 신부님]
<무엇을 찾을 것인가?>
이마에 재를 받고 새로운 다짐을 하며 시작한 사순시기도 반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각자에게 한 다짐이나 약속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자신들을 향한 결심이었습니다. 이 다짐을 잘 이행하고 계신 분들도 많겠지만, 작심삼일에 그친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결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처음 지녔던 원의(原意)입니다. 우리가 늘 부족함을 느끼고 있고 그렇기에 하느님의 도우심, 즉 은총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 역시 은총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번 사순시기에 지니고 있는 주 관심사는 무엇이고, 또 어떤 것을 찾아 얻고자 하십니까? 우리 죄 때문에 당하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자주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보속할 것을 결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순시기에는 교회의 전반적인 전례 분위기가 기쁨보다는 약간은 무거운 분위기가 주를 이루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기를 지내며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기쁨과 평화이고 안정과 행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참사랑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회개는 무엇에서 시작해야 합니까? 하느님을 떠났었고, 잊었었고, 무시했던 마음과 행동들에서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고, 하느님의 마음을 되찾고 돌아서는 것이 회개의 출발점이고 목표점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을 오늘 복음 말씀, ‘복음서 속의 소복음서’라고 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17절은 이렇게 들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크신 하느님의 마음이고 하느님의 사랑입니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또한 자신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소중한 작품들임을 일깨워 주시기 위해 오셨고, 우리 모두가 그 사랑으로 하나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자신 안에 사랑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언제나 행복하며 밝은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사순시기에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어둠이 아니라 빛이며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고, 슬픔이 아니라 참 행복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감으로써 우리가 잃었던 기쁨과 평화, 참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되찾고 그것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은총의 시기가 여러분 모두에게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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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용태 마태오 신부님]
<‘심판’과 ‘구원’>
“밥 안 먹어요!” 어려서 심통을 부릴 때 툭하면 부모님께 했던 말이다. 내가 밥을 안 먹으면 속상해 하실 부모님의 마음을 볼모로 잡은 같잖은 협박이었다. 그리고 그 협박의 결과는 대부분 부모님의 상심과 나의 배고픔으로 끝나곤 했다.
어떤 때는 심통을 심하게 부리느라 하루 종일 굶기도 했는데 한밤중에 배고파 잠 못 이루면서 부모님만 원망했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 철없던 시절의 일이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참 미련한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밥 안 먹어봤자 결국은 나만 손해 보는 일 아닌가! 더구나 그렇게 자초한 손해를 부모님 탓으로 돌리는 어리석음이라니! 아무 잘못도 없는 부모님은 그로 인해 또 얼마나 상심하고 자책하셨을까!
그런데 어려서나 할 법한 철없고 미련한 이 행동을 나이를 먹어서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다름 아닌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어리석음이다. 밥 안 먹겠다고 부모님께 심통을 부리듯이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며 빛이 아닌 어둠 속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고는 어둠 속에서의 춥고 배고프고 막막한 처지를 하느님 탓으로 돌리며 하느님을 원망하며 살아가는 거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느님의 ‘심판’은 하느님이 나에게 가하시는 형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해’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자초하여 스스로에게 가하는 형벌인 셈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요한 3,17-20)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옥형벌’이란 것도 ‘지옥에 떨어지기 싫어하는 죄인을 하느님이 억지로 떠미는 것’이 아니라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악인들이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지옥을 만들어 놓고는 스스로 기어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구원이란 다른 게 아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랑은 고통도 희생도 없는 달콤한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 위로 들어 올려진 처절한 사랑이다. 하지만 그 사랑이 진정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음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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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이명호 베드로 신부님]
<고통과 죽음 한가운데 피어난 생명의 꽃>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성경에서 이 구절만큼 우리의 가슴에 큰 감동을 주는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식이 십자가상에서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주셨다’ 고 하는데, 그것도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당신 자식을 ‘내주시는’ 그런 부모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나 있는 아들을 적진에 보내어 죽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당신의 아들을 팔아서 우리를 사셨던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참! 감동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서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다.’라고 하는데,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또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그분이 왜 죽어야만 하는가? 이런 의문은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의문과 이치와 맥을 같이 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과 죽음으로 우리가 삶에서 겪는 고통과 죽음을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고 느끼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들이 고통당하는데 나 몰라라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아마도 부모의 마음이 더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고통을 당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고통당하시는 하느님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신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통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고통을 완전성의 결핍이나 상처로만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알지만 느끼지는 않으신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버지가 아니요, 남남입니다. 무정한 하느님이요, 아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십자가의 아들 예수님을 보시고 극도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버림받고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을 겪으십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고통을 모르거나 고통을 함께하지 않고서는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
고생으로 일그러진 부모의 얼굴에서 사랑을 깨달을 때, 자식의 마음은 부모에게로 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등식에서 벗어날 때, 십자가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고통이 사랑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온갖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 후에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 한가운데 피어난 생명의 꽃임을 깨닫는 은총을 간구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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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부모는 자녀에게 늘 최고의 선물을 주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녀가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쏟아붓지만, 자녀가 사랑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서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왜 자녀는 그 사랑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느 정신과 의사가 쓴 책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경제적 안정, 신체적 건강, 좋은 관계를 가진 부모’라고 이야기합니다. 자녀에게 주는 선물이 부모 자신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 충분히 공감 갑니다.
부모가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면 자녀가 부모의 노후를 걱정하느라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부모가 혼자 병원 다니고 자기 관리를 할 수 있는 신체적으로 건강한 상태이면 그만큼 부모 간호하는 데 드는 힘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부모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자녀에게 의존하게 않게 되지요. 실제로 부모에게 자녀가 유일한 ‘베스트 프렌드’가 된다면, 자녀에게 부모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을 멈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지요. 진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니코데모는 바리사이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 늘 거룩한 모습으로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의 규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려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찾아가 마침내 밤을 몰아내는 빛을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진짜 사랑을 알 수 있었고 이로써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았던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입으로만 말씀하시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그러나 먼저 주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우리 역시 실천해 나갈 때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으며, 참 기쁨에 이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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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모두 사랑이다>
요한 3,14-21 (니코데오와 이야기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모두 사랑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사랑이 오시다
품는 이에게 스미어
사랑으로 만들기 위하여
오시니 사랑이다
사랑이 되다
기꺼이 오시는 사랑을
오롯이 품기 위하여
되니 사랑이다
사랑이 가다
품는 이에게 스미어
늘 사랑이기 위하여
가니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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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성경은“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라고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아들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 아드님에 대한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제의색은 장미색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기도와 희생과 보속, 극기의 삶을 잘 살아오셨습니다. 지칠 만하지요. 그렇지만 한고비를 넘겼으니 좀 더 노력하라는 기쁨의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의지가 약해 실천하지 못하였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기쁨을 희망하며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은혜의 때입니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미 새와 아기 새가 있었습니다. 어미 새는 아기 새가 귀여워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아기 새가 자라서 어른이 되어도 어미 새는 계속 먹이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미 새는 늙었습니다. 늙은 어미 새는 이제 더 이상 아기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다 주지 않자, 어른이 된 아기 새는 어미 새의 머리를 콕콕 쪼았습니다. 배고프다고 화를 내면서 콕콕 머리를 쪼았습니다.”
큰 사랑을 받았으면 큰 사랑을 줄 줄 알아야 하는데, 받는 데만 익숙해졌지, 사랑을 줄 줄 몰랐습니다.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다고 했거늘 그 사랑을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아니 깨우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저 누리기만 했습니다. 사랑은 잘 주고 잘 받아야 합니다. 주어진 고기에 묶이지 않도록 고기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하면서도 성경을 잘 읽지 않는다면,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요, 영혼의 호흡,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 말하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손이요, 발이라고 하면서도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기보다 내 이익을 더 챙기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은총을 달라고 매달린다면 아기 새와 다르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하면서도 제 실속을 위해 정신없이 삽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행하기보다 내 뜻을 들어달라고 하소연하고는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내 원의대로 해주지 않으신다고 투덜댑니다. 영락없이 어미 새의 머리를 쪼는 아기 새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금방 하느님께 불평하고 저항했으며 결국 하느님께서 보낸 뱀에 물렸지만, 하느님의 처방에 따라 믿음을 갖고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아났습니다.(민수 21,6-9)
믿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쳐다보라’면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순명이라고 합니다. 순명은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것이고, 그러나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그대로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위한 가장 큰 사랑을 보여주신 그 사랑을 살게 되면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쳐다봐서 산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고통의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 숨겨있는 그분의 사랑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영원히 살게 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5)
성 콘라도는 “십자가는 나의 교과서 입니다. 나는 거기에서 겸손과 양순함을 배웁니다. 또한 언제라도 십자가를 쳐다보면 즉시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줍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도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십자가는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위한 사랑의 십자가를! 자동차에 십자가를 매달고 손가락에 묵주반지를 끼고 위로받으려 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일깨우십시오.
기도해야 한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 미사참례를 하고 그분의 손발이 되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아는 차원을 넘어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이는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몸소 씨를 뿌리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확실히 믿고 그분의 말씀을 새기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꼭 행하시길 바랍니다. 믿음에 따르는 행동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심판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8)라고 말합니다.
“외아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분을 보내신 이유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심판의 이유이자 내용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영원히 살 방법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결국 죽음에 이릅니다. 구리 뱀을 보지 않은 사람이 죽었고, 소돔이 멸망할 때 구원에 부름을 받은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 했는데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창세 19,26) 결국 높이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은총을 주어도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곧 심판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만날 때마다 부활의 생기를 찾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가장 위대한 선물이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그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인류에게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놓음으로써 완성되고 드러난 사랑 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실패 안에서 사랑을 봅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그것은 그분이 이 세상의 원리라는 유혹에 빠진 것이 될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이 미사를 통해 사랑의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고달프고 힘들 때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위로를 얻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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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의 행복은 선택이자 은총이다
-회개하자, 감사하자, 믿자-
“지상 천국의 삶”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는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이사66, 10-11참조)
입당송 이사야서 말씀이 우리를 한껏 고무합니다.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하십시오,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사순시기 절제와 금욕, 극기의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어둡고 우울하고 심각하게 지내는 시기가 아니라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즐겁고 기쁘게 지내는 것이 합당하며 주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장미색 기쁨으로 즐겁게 지내라 오늘 사순 제4주일은 장미주일이자 일명 “래타레(Laetare:즐거워하여라) 주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늦깎기로 40세에 서품되어 75세이르기까지, 두배로 성실히 살겠다 다짐하며 사제서품후 만35년동안 거의 날마다 강론을 써왔어도 첩첩산중 산을 넘듯 늘 처음처럼 힘듭니다. 강론 걱정 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고, 강론꿈꾸다 일어난 적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어떤때는 이렇게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붓고 이정도 강론뿐이 안되나 하는 좌절감에 불암산에 오른적도 있습니다. 때로는 강론의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일기쓰듯 쓰고 싶다는 생각에 그렇게 쓰기도 합니다.
꼭 한달 남은 4월10일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국내 여야의 상황이 흡사 생사가 달린 듯 격렬한 내전상태를 방불케 합니다. 새삼 가톨릭교회의 은총의 3월 사순시기가 어지럽고 혼란한 나라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감사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참으로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라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모두 회개와 은총의 3월 사순시기 힘껏 기도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3월 사순시기, 서사가 사라진 몰역사의 시대, 국어(나라 말)을, 국사(나라 역사)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문신”이란 소설집을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박경리문학상 수상, 집필부터 탈고까지 25년, 거장 83세 윤흥길 필생의 역작, ‘언제나 큰 문제에 대해 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남은 생애 다시 이런 작품은 쓰지 못할 것이다.’”- 표지글 그대로 목숨을 걸고 혼신의 힘을 다해 쓴 치열한 작품입니다.
또 하나 이미 오래전 품절된 <김점선 10cm 예술>을 수도형제의 도움으로 간신히 구입해 읽고 있습니다. “천사의 집(Angel Home)은 상품판매를 주목적으로 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천사의 마음으로 신뢰, 믿음, 희망, 소망을 나누는 곳입니다.”라는 발송처의 소개도 이채로웠습니다. 이어지는 책의 표지글과 박완서의 소개글도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의 조르바 김점선, 그의 인생은 예술이다. 그는 온몸으로 그림을 한다. 그리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다....나는 그 여자처럼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자를 본적이 없다. 아무도 그 여자를 길들이지 못한다. 그 여자는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으니까.”
화가이자 작가인 참 자유인 김점선은 이미 15년전 2009년 타계했습니다. 작년 광복절이후 계속되는 저의 만세육창 기도와 행복기도 앞부분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
이어 행복기도 일명 예닮기도 앞부분입니다. 그동안 참 많이도 나눴던 지금도 즐겨 외우는 자작 기도문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쁘고 즐겁게 지상 천국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구원의 행복은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바로 -“회개하자, 감사하자, 믿자”-의 구체적 실천이 지상 천국의 하늘나라 삶을 살게 합니다.
첫째, “회개하자!”입니다.
회개가 답입니다. 사순시기 3월은 무엇보다 회개와 정화의 시기입니다. 부단한 회개의 선택, 회개의 은총입니다. 인간 무지의 병에 대한 근원적 치유도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제1독서 이스라엘 백성의 유배에 이르기까지 과정의 그 마음 상태가 악순환의 반복처럼 인간의 치부를 보여줍니다.
배신하고, 부정하게 만들고, 조롱하고, 무시하고, 비웃고...참으로 구제불능 상태의 백성들이고 이어지는 주님의 심판입니다. 주님의 심판이라지만 자업자득 스스로 초래한 심판이요 이래서 회개입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느님은 때가 되자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여 회개한 백성들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
둘째, “감사하자!”입니다.
감사의 선택, 감사의 은총입니다. 바오로 사도로부터 배우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회개에 이어 감사의 자발적 선택, 감사의 훈련, 감사의 습관화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게 합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렀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나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바로 이 구원에 대한 자발적 감사의 응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부단한 감사의 삶이 구원의 기쁨을, 구원의 행복을 살게 합니다.
셋째. “믿자!”입니다.
불신이 아닌 믿음을, 어둠이 아닌 빛을, 거짓이 아닌 진리를 선택, 훈련,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믿음의 선택과 결단을 강조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복음의 핵심진리를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심판도 구원도 선택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을 때 빛보다는 어둠을, 진리보다는 악을 사랑하게 되니 바로 이것이 어리석게 스스로 자초한 심판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 주님을 믿으십시오. 참으로 위대하고 결정적 구원의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니 주님은 우리 삶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길이요 빛이요 힘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을 때 생명의 빛, 진리의 빛, 희망의 빛 속에 길을 잃지 않고 온전한 참삶을, 성화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 이런 주님이 없다면 어떻게 이 험난하고 어둡고 삭막한 광야여정 살아낼 수 있을는지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회개의 삶, 감사의 삶, 믿음의 삶을 통해 주님과 일치된, 기쁘고 즐거운 구원의 행복을, 지상 천국의 하늘 나라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사랑의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길, 저의 빛, 저의 힘,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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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구원과 심판>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오늘 사순 제4주일은 죄지은 인간이 어떻게 될까?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인간을 구원하실까? 단죄하실까?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죄지은 인간을 구하러 오신 걸까? 단죄하러 오신 걸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들은 하느님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인가? 단죄하시는 하느님인가? 하느님이 사랑이시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하느님 사전에 단죄란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사랑의 하느님 안에서 지옥이란 없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질문에 대한 사순 제4주일의 답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구원을 바라시고, 그래서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사순 제4주일은 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판과 단죄와 지옥은 실제로 없는 것입니까? 우리 교회는 이런 것들이 없다고 가르칩니까? 아니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분명 심판과 단죄와 지옥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아무리 바라셔도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바로 단죄받는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우리 교회도 가르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구원자라는 믿음과 심판자라는 믿음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심판자라고 믿는 사람은 그 믿음대로 심판받습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마지막 사람은 하느님을 모진 심판자로 믿었고, 그는 자기의 믿음 대로 심판받았다고 주님은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우리가 믿기만 하면 됩니까?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믿기만 하면 됩니까? 믿기만 하고 정말 아무것 안 해도 되는 겁니까?
진정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진정 믿는다면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완전히 맡깁니다. 그래서 빛이신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굴이랄까 굴다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굴은 어둡고 위험합니다.
문제는 그 굴을 통과해야 신세계가 열린다는 겁니다.
희망은 굴 저편에 그 굴을 먼저 통과한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 굴을 통과해 당신에게 오라고 손짓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이 나를 사랑하는 분이고 그래서 믿을만한 분이라면 통과하겠지요? 나를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는 어머니가 바로 그분이라면 통과하겠지요?
오늘 복음의 주님은 당신이 바로 그분이라고 가르치시고 오늘 독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주님 사랑을 믿지 못하고 그 가르침도 믿지 못한다면 주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빛이신 그분보다 어둠인 세상을 더 사랑한다면 그 경우 주님은 더더욱 어쩔 수 없습니다.
주님 사랑에 대한 불신과 주님 사랑을 사랑하지 않음이 우리의 비 구원이고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단죄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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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요한3,16)
<장미주일!>
사순 제4주일인 오늘은 '장미주일'입니다. 사순시기 중간에 자리 잡고 있는 장미주일은 '기쁨과 은총'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다시 시작함'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기쁨과 은총, 곧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기쁨과 은총이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본질'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세례성사를 통해 모든 죄를 용서받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다시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들은 이 구원의 말씀을 굳게 믿으면서,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1독서(2역대 36,14-16.19-23)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종종 믿음을 간직하지 못하고 '배반의 길'을 걸어갑니다. '불순종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 자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기쁨이며 은총이라는 사실을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페2,4-10)의 말씀을 통해 다시금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에페 2,4-5)
'약속(믿음)과 배반과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와 되살아남(부활)', 이것이 '믿는 이들의 삶의 연속'입니다. 이 연속적이고 반본적인 삶을 통해서 우리는 조금씩 완덕을 향해,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갑니다.
기쁨과 은총의 주일인 장미주일을 맞이하여 지금의 나의 모습을 점검해 보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힘차게 부활을 향해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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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z8IwbkFnVx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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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7)
우리들 사이에
봄꽃이
선명하게
피어납니다.
사랑이
성장할 때마다
선명해지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평화와 기쁨이
있지만
심판은
평화가
없습니다.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인
구원입니다.
참된 사랑을
하느님에게서
찾습니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이
되십니다.
모순덩어리인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구원의 대상은
다름아닌
행복을 놓치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를
살게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어리석어
부끄러움을
모르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진정한 삶을
가르쳐주십니다.
구원은
저 너머의
세상이 아니라
빛과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의 삶이
사랑의
구원이며
영원한
삶입니다.
사랑이
믿음이 되고
사랑이
빛이 됩니다.
사랑의 빛은
힘겨루기를
하지 않습니다.
기다려주시고
바라보시는
믿음에서
사랑의 빛은
더욱 빛납니다.
어둠에 묶여있던
우리를
죽음에 갇혀있던
우리를
구원으로
풀어주시며
하느님의 기쁨과
하느님의 사랑으로
활짝 열어주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러줄 수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게되고
하느님을
보게되는
이 엄청난
기쁨을
우리는
사랑의 신비이며
구원의 신비라
부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구원은
끝이 없습니다.
하느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의 삶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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