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Repatriation
- 테사 교수의 진실추적 10년
■ 방송일시 : 1부, 책략 - 2013년 12월 5일(목) 밤 10시
2부, 침묵 - 2013년 12월 6일(금) 밤 10시
■ 연 출 : 고정훈
■ 글·구성 : 유재은
25
년 동안,
9만 3,340명의 재일동포가
북한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부분이 남한 출신 이었던 그들은 왜 북한으로 갔을까?
그리고 그들은 어째서 최종적으로 ‘귀국자’ 10만이라는 숫자가 된 것일까
재일조선인의 북송,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반세기 만에 드러난 진실.
2004년 기밀 해제된 국제적십자위원회의 북송 관련 문건들과
현재 일본과 한국으로 돌아온 탈북 귀국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북송 사업의 실체를 밝힌다
인도주의라는 미명 하에 힘없는 자들에게 행해진
책략과 기만, 그리고 배신의 이야기
호주국립대학교 아시아 역사학자, 테사 모리스스즈키 그 은폐된 이야기의 진실을 추적해본다.
힘 있는 자들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돼온 10만 재일동포들의 비극
재일동포 개개인을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이요한 힘 있는 자들의 책임 회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도주의를 앞세워 또 다른 비극을 초래하는 일이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혹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가?
2부 침묵
“두 곳이 아니라 세 곳으로 흩어진 거죠. 38선 이남의 한국,
그리고 그 후에 이주한 일본, 또 북한 귀국사업으로 건너간 북한.
또 다른 이산가족이죠..”
■ 침묵 그리고 비극
1956년, 평양회담에서 일본적십자가 재일조선인들의 처우 개선과 안전 보장을 위한 구제책으로 ‘대량귀국’을 제의했다. 북한의 반응은 ‘침묵’. 소수의 귀국자를 받아들일 용의만 있었을 뿐.. 대량귀국에 대한 계획도, 뜻도 없는 듯 했는데.... 하지만, 돌연 58년 9월 김일성은 재일조선인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북한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 그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김일성과 당시 소련 대리대사 펠리셴코의 일지에서 북한의 속내가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대량귀국이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치적으로 커다란 이익을 가져올 것‘ 또한 일본과의 관계유지 차원에서 접근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한편, 평화와 자유를 부르짖던 미국은 왜 자유주의국가에서 사회주의국가로의 ‘대량 이주’에 침묵했던 걸까. 인도적인 차원에서 거주지 선택의 자유, 그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일본의 논리와 국제 여론 속에서 미국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침묵으로 동조할 ‘이유’가 따로 있었던 걸까. 이듬해 미국은 일본과의 안전보장 조약을 앞두고 있었는데...
재일동포들을 자국민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한국 정부는 왜 재일동포들의 대량 귀국을 막지 못했던 것일까? 당시 이승만 정부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는 대한민국임을 천명 하면서 단 한명의 재일동포도 북송 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귀국 사업’에 강력히 반발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북으로 가지 말라고 붙잡으면서도, 남으로 돌아오라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각국 정부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인도적 배려는 없었다.”
■ 지상낙원행 편도 티켓
“현대식 고층 아파트 제공에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 서비스가 보장된다고 하는데.
그 매력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 정도로 속았죠.”
계속되는 재일동포들의 궁핍한 생활. 교육의 기회도, 취업의 기회도, 일본 땅을 ‘떠날’ 기회도 쉽게 주어지지 않았던 그 무렵,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는 조총련을 중심으로 북한으로의 귀국을 촉구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캠페인과 선전 활동은 단기간에 전국으로 확산됐다. 신문과 잡지 등 언론에서는 재일동포들을 기다리고 있을 북한에서의 새로운 삶을 화려하게 홍보했다. 누구에게나 무상 주택, 복지, 확실한 수입, 직업, 무엇보다 ‘미래’를 약속해준다고 했다. 뿌리칠 수 없는 달콤한 이야기들... 그렇게 하나 둘 북한으로 떠나가기 시작 하는데..
기회의 땅. 이른바 지상낙원으로 선전되던 북한으로 수 만 명이 건너갔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후에는 어떻게 지냈을까?
“움직이기도 힘들만큼 좁은 집을 봤을 때..
아 뭐라고 해야 할까. 배신당한 것 같은...”
청진항에 도착하자 한눈에도 남루해 보이는 사람들이 손 흔들고 있었는데... 찰나의 ‘환영’ 이었던 걸까. 재일동포들은 또 다시 가난과 차별에 고개 숙여야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왔다는 이유 등으로 제2국민 취급을 받았고, 노력한 만큼의 보상이 따르지 않았다. 일상화된 굶주림. 무엇보다 되돌아갈 배편이 없다는 것이 절망적이었다.
지인들을 북으로 보내며 귀국 사업에 적극 참여했던 이의 후회, 죄책감. 가족을 북에 두고 떠나온 이의 슬픔. 거짓으로 10만 귀국행렬을 선동한 자들에 대한 배신감. 의지에 상관없이 이미 너무도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억울함, 진실을 파헤치는 이의 결연함이 뒤섞인 목소리를 한국과 일본으로 어렵게 다시 돌아온 재일동포들을 만나 들어보기로 한다.
■ 침묵 그리고 잊혀진 사람들
“북송이 시작되고 나서, (조총련은) 북한의 현실을 알게 됐으면서도
계속 보냈단 말이에요. 보내기만 했단 말이에요.”
-
북한에서 보내온 편지 검열을 피해 우표 뒤에 전한 진심
‘오지 마세요’
어떻게 25년 동안 이 비극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일까? 북송 사업이 본격화되기 전부터 북한, 일본, 미국, 그리고 한국 정부는 귀국 선전 잡지와 책에서 재일동포들의 시선을 끌던 지상낙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1차 귀국선이 떠난 이후 북송된 재일동포들로부터 전해지는 ‘암울한 현실’ 또한 그들은 알고 있었다. 침묵 그리고 비극. 이 비극의 책임을 묻기 위해 한 명의 범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 곳엔 여러 명의 ‘파트너들’이 있었다. 지금은 북송선은 운행되지 않지만.... 아직 북송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1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유괴한 사건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어요.“
- 조총련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고정미씨
힘 있는 자들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돼온 10만 재일동포들의 비극.
재일동포 개개인을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이용한 힘 있는 자들의 책임 회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도주의를 앞세워 또 다른 비극을 초래하는 일이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혹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가?
북송Repatriation
- 테사 교수의 진실추적 10년
1부 책략
■ 테사 모리스 교수의 추적
호주국립대학교 태평양 아시아 역사 전문가, 테사 교수는 재일한인에 대해 조사하던 중 흥미로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1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갑자기 북한으로 건너갔는데, 냉전시대에 자유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국가로의 전례 없는 대량 이주라는 점, 또 귀국자의 98%가 남한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테사 교수는 2004년, 30년 만에 기밀 해제된 국제적십자 문건을 통해 북송의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 10년 간의 추적 끝에 밝혀진 북송의 전모, 도대체 북송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일본의 북송 프로젝트
당시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동포는 60만 명. 일본 내 최대 소수민족을 형성하고 있던 재일한인은 규모만큼이나 일본에게 큰 고민거리였다. 외무성 극비문서에서는 안전 보장 문제, 생활 보호비 지원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 등 사회 혼란의 원인으로 재일조선인을 지목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 그들을 되돌려 보내는 것이다. 한국이든 북한이든 ‘상관없다’고 했다.
국제적십자사 문서고에서 발견한 서한들을 보면 이른바 북송 이야기로 알려진 재일동포 귀국 사업이 58년이 아닌 55년부터 시작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외무성 요직에 있던 이노우에 마스타로 라는 인물이 퇴직 후 곧바로 일본적십자사 외사부장에 취임했다. 일본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는 ‘인물’이 귀국사업의 핵심 조직인 일본적십자로의 취임. 우연일까? 전략적 선택이었다면 그의 임무란 무엇이었을까? 1955년 일본의 북송 프로젝트는 이노우에의 취임과 함께 조금씩 그 윤곽을 드러내게 되는데..
1959년 2월 13일. 일본 정부는 인도적인 입장에서 희망자를 북조선으로 돌려보낸다는 내용의 ‘재일조선인 북송 사업 추진’을 공식화했다. 그런데 일본은 왜 대부분이 남한 출신이었던 재일조선인들을 북한으로 귀국 시키려 했던 걸까?
■ 재일동포들 ‘갈 곳을 잃다’
“어머니는 충청남도, 아버지는 경상남도”
“어머니 고향은 경상남도 창원 아버지는 경상남도 통영”
이상하게도 북한으로 건너간 재일조선인의 대부분은 남한 출신이었다. 그렇다면 왜 고향인 남한이 아닌 북한으로 갔을까? 북한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걸까?
재일동포들은 가난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국적이 상실되자 사회적 권리를 박탈당하면서 생활이 더더욱 어려워졌다. 뒤이어 일본 정부가 재일조선인에 대한 생활 보호비 지원금을 대폭 삭감하자 그야말로 생존의 위기에 처했다. ‘탈출구’가 간절했다. 하지만 고향인 남한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전쟁이 휩쓸고 간 터전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한국 정부가 재일 동포들을 잠재적 불순분자로 여기며 귀국을 받아주지 않았다. 전쟁 난민에, 국제 난민까지 돼버린 재일동포들. 어디로 가야 하나
이러한 가운데.. 단 하나의 이유. ‘생존’을 위해 북송을 희망하는 이들이 있었다. 오무라 수용소에 억류돼있던 97명과 북한에 보내달라고 천막 농성을 벌이던 47명. 극소수였다. 당시 남한이 아닌 북한으로 가야겠다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고, 귀국 운동의 조짐조차 감지되지 않을 때였다. 그런데 어째서 소수였던 북송 희망자가 최종 귀국자 수가 10만 명이 되었을까?
■ 국제적십자사, 어떻게 귀국사업에 발을 들여놓게 됐을까
[스위스 제네바, 국제적십자사]
“일본 정부는 조선인 수만 명을 배제함으로써,
안전 보장 문제와 예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고 싶어 한다.”
“인도적 배려는 없다”
국제적십자위원회 특별 사절단이 작성한 보고서 中
북송 문제를 둘러싸고 외교 전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북한과 일본의 은밀한 북송 프로젝트 추진에 남한 정부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선 가운데 기밀 문건에 따르면 국제적십자는 귀국 사업을 정치적 사안이라 판단하고, 개입을 꺼려하고 있었는데... 1956년 12월 12일. 국제적십자사는 재일한인의 송환 사업에 참여할 용의가 있음을 밝혀왔다. 어떻게 국제적십자사가 스스로 정치적 문제라고 판단 내린 ‘귀국 사업’에 개입하게 된 것일까?
인도주의에 헌신하는 조직인 국제적십자의 개입. 그것은 일본 정부의 히든카드였다. 북송이 한국 정부의 분노를 살 것을 계산하여 사업의 주체가 국제적십자로 비춰질 수 있도록 사업 대행과 정치적 중개자 역할 수행을 요청한 것이다. 물론 일본이 국제적십자에게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결코 외면해서 안 될 사안이라는 명분을 끊임없이 만들어 보여주면서....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국제적십자. 가장 비정치적인 조직이지만 그렇기에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는 용이했던 것이다. 일본은 재일조선인들을 사실상 내쫓기 위해 점점 더 집요하게 국제적십자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강력히 반발하고 나선 한국 정부.
‘대량 귀국’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던 북한 정부.
귀국 움직임이 없던 재일조선인들.
이 장벽들을 극복하기 위한 일본 정부의 책략 카드들...
‘국제적십자, 생활 보호비 삭감,,’
귀국 사업,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첫댓글 그때 중국조선족도 북한에 갔어요!
우리집도 갈려다가
엄마가 임신중이여서 북한행을 포기했다고해요!
그때 당시엔 북한이 좋은마음으로
해외의 동포들을 불러줬다고 생각해요.....
어쩌다 좋은일이 나쁜일로 되버렸지만
그때 당시엔 고마운 일이였어요.
조국을 떠나 산단다는것
그 자체가 부평초 같은 인생입니다.
돌아갈 조국이 있다는건 행복한 일이였죠!
재일동포 북송이 시작되자 한국의 이승만 정부는 재일동포 북송 저지팀을 밀파하기위해. 일본어에 능통한 경찰특공대 60여명을 조직하여, 부평의 경찰학교에서 밀봉교육을 시켜서 부산의 수영만에서 10척의 소형 전마선에 분승시켜 일본으로 밀항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수척의 전마선은 현해탄에 수장되었다 하며, 밀항에 성공한 특공대는 임무를 수행하던중 재일동포의 밀고로 일본경시청에 체포되어 오사까 수용소에서 2년간의 수용생활을 마치고 추방당해 귀국하였고. 한국정부는 그들 또는 유가족들에게 2012년 약 1억몇천만원 정도의 위로금을 경찰청에서 지급했다고 하는. 공개되지 않은 슬픈 한국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