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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아무나 하나? ‘사장님’은 아무나 하나?
-엉터리 논술 강사 식별법 (4)-
선생님.
이 단어가 몰락하고 있다. 이는 ‘선생님’이란 단어를 독점한 김대중의 몰락일 수 있다. 말을 뒤집어서 ‘선생님’이란 표현을 김대중이 독점하게 된 계기를 추적하게 된다면, 6.15 이전에 김대중이 가졌던 긍정적인 이미지의 실체를 만날 수 있다.
참여정부가 실직자 대책으로 양산한 게 있다면, ‘공인중개사자격증’이다. 국민 대다수에게 ‘공인중개사 자격증’은 “사장님은 아무나 하나?”를 팍 심어주고, 열풍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다. 부동산 학원에서도 ‘중개사 사장님 친화적 성향의 인격’이 반복 설명되었는데, 결국은 살아남는 것은 중개사 사장님 친화적 성향의 인격이다.
1) 나이가 드신 분들은 ‘건설업계’에 계신 분들이 대부분 살아남는다. 2) 주택지를 대상으로 해서는 아줌마들이 강세를 보인다. 3) 부자 지역을 동네로 해서는 연예인 뺨치게 생긴 꽃미남 꽃미녀들이 강세를 보인다. 4) ‘땅’을 주로 상대하는 기획 부동산 같은 데에서는 ‘타짜’판에서도 살아남을만한 성격이 강세를 보인다.
1997년 이전에는 어디에서나 선생님 권위가 있었다. 선생님 권위가 무너진 지 오랜 시간이 흘러서 기억이 힘드는 분들도 있겠지만, 선생님은 남다르게 쌓여진 내공과 성격의 습득자를 가르킨다.
‘선생님’의 반대말은 ‘학생’이다. 교육공간에서 ‘학생’ 아니면 ‘선생님’만 있다. 제3의 영역은 ‘관리인’인데, 교육공간에서는 공시적으로 ‘사람(?) 취급’받지 못한다. (교직원의 중요성을 깨닫는 바는, 학교나 학원의 내부 사정을 알게 된 이후부터가 된다. 모 사립대학교에 몇 명 뽑는데 수백대 일 경쟁자가 된다는 사실은, 사립대학 교직원의 중요성을 배운 고학력자의 숫자가 얼마나 되나 하는 측면을 반영한다.)
‘학생’의 외형적 성격은 무엇인가? 가장 쉽게 교육주체에 ‘학업료’를 내고서 교육자에게 교육을 받기 위해서 정해진 규율에 복종을 통해서 자아를 발전하는 청(소)년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생’의 외형적 성격은 무엇인가? <먼저 배운 바>에 대하여 지식을 꾸준히 단련하여, 학생이 자라나도록 정신적 후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대학 때에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불이 켜진 인문사회대학 교수님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선생’의 고전적 정의에 맞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십 년 전에도 똑같은 ‘강의노트’인 대학교수를 빈정거려 본 사람이라면, 매학기 새로운 강의노트를 준비하는 대학교수가 얼마나 노력을 해야 가능한 것인지를 상상하지를 못한다. 대개의 한국의 대학교육 비판의 운동가들은, 전대협 때부터 ‘대학도서관’ 지지리도 안 가는 인간들이 도서관 문화를 비판해 왔다.
‘전대협시대’에 대자보 쓰며 대중 정치 교육 하던 사람과, 김윤식교수와 이어령교수 포함 이른바 ‘선생님’계보 중에 왕꼴통들이, 논술 시장에서 충돌하는 현상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문화일보]의 오늘자 지적에서는 논술 선생이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있다면서 질책하는 부분은, 사실상 전대협 시대에 대자보 쓰며 대중 정치교육 하던 가닥에 대한 비판이다.
전대협 시대에 대자보 쓰던 류의 인간들에 대한 비판이, <진보적> 주제를 다루지 말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지 못한다. 가장 단순한 예로, 조인스닷컴 철학 논술이 대학 때에 ‘맑스 레닌주의’의 철학의 성탑을 쌓는 사람이 즐겨 읽는 들뢰즈 전공자 김재인씨다. 유럽 좌파들의 책을 대학 강단에서 교양강의로 풀 때도 투박한 단순화 과정을 거치지만, 대학 교양 강좌 처럼 풀어내는 방식이라면 사실상 ‘진보적 주제’도 독서논술 강좌에 부합한다. 그러나, 전대협 대자보 쓰던 류의 인간들의 감성교육이 ‘초중등논술’에 개입하는 것에는 절대적으로 문제가 있다. 즉, 선생님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전위’라고 깨닫고 행하는 바로 그 ‘80년대식 개-지-랄’의 부활에 대해서, “이건, 아니잖아”하고 외칠 수 없다면, 논술교사 자격이 없다고 봐야 마땅하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이 논술고전이 된 지 오래다. 진보적 주제는 필연적으로 주인으로서 노예에 ‘이리 오너라!’할 수 밖에 없다는 거. 교육 공간에서 대학교수들의 통제술이 ‘선후배’간에 서로간에 인간적으로 대접하게 하면서 각 학생 곳곳에 자신의 통제력이 미치게 하는 방식이었음은 어른들은 다 안다. 그러니, 대학 공간에서 진지를 치고 이마에 ‘꼴통 보수’라고 쓴 교수들을 표나게 공격하며, 공격으로 자신의 진지전의 명분을 쌓는 전대협한총련들이 얼마나 질리게 징그러웠겠는가?
노무현 정부가 아직도 뭘 그렇게 잘했는지 자기들만 깨끗하다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이리 오너라’하면서 ‘개혁 대상(노예)’는 쓴맛을 아직도 봐야 한다고 하는데, 정말로 문제가 있다. 전위들 자체가 ‘권력’ 추구에서 기원되었다. NL PD CA등 그 역사는 결국은 학생 좌익 운동가들이 ‘내 똥이 더 굵어’ 하는 바에 다름이 아니다. 그 권력은 고상한 권력이 아니라, ‘여인천하’에서 ‘뭬야’ ‘무엇이라’하는 권력 투쟁과 사실상 더 닮아 있다.
이 땅에 초중등생들을 러시아 농민 처럼 어리버리로 놓고, (80년대 후반의 대학 저학년들을 재갈 물리고 100만 학도 타령 마음대로 떠벌일 때 바로 그 방식대로, 초중등생 재갈 물리고) 자신들의 바탕은 단 한번도 반성되지 않고 자신들의 대충 대충 하는 가닥의 계몽성이 영원히 세상을 조각하고 통치할 것이라는 가닥은, ‘대가리에 똥만 든 새끼들이 개혁 한다고 멀쩡한 사람들 못 살게 군다’는 대학가의 이면 문화로 존재했다.
이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민족해방파의 용어 ‘자주’는 ‘자지’란 말로 더 많이 놀림되었고, 아무런 책 한 구절 읽지도 않고서 창의적 상상력으로 찢어갈기는 대자보들로 남을 계몽하려는 가닥은 ‘대가리에 똥만 든 새끼들’이란 말로서 비판된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전국 어디에서나 공통적인 사실이다.
대학 때 맑스 레닌주의의 이론의 성탑을 쌓았던 이들은 어지간하면, 모든 방면에 모든 독서에 달통해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80년대 전대협에 초보적인 이론을 습득하는 어리버리 떨거지 전위가닥들은 아직도 책 한구절 안 읽고 남들을 가르칠려 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아니, 그들은 과거에도 책을 읽었고 지금도 책을 읽었다. 운동권 교재만 읽고서 남을 알리려 하는 가닥의 변함없는 연장선일 뿐이다. 도무지, 좌파적 아젠다를 말하려는 거 알겠는데, 인터넷 게시판 노빠들의 이론적 논거 수준과 전혀 다를 바 없는데 선생님을 해보겠다는 가닥은, 책만 본 독서가 중개사자격증 따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문학이 안 팔린다. 이는 문화 지형에서 ‘선생님’으로서 존경을 받는 지식인이 더 이상 ‘문인’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전방위적으로 유식한 스타일이 된다.
이문열이 자기가 무너지면 문단이 망한다는 말을 하는데, 한마디로 ‘젓까라마이싱’이다. 이문열은 이미 좌파에 있는 연줄로 겨우 좌파 비판권을 얻는 수준이다. 이문열은 옥주현과 이효리가 노래는 안 부르고 쑈프로에만 나오는 것처럼, 정치판에 기웃 거려서 밥벌이를 하는 측면이다.
모르긴 모르되 ‘한다 하는 지식인들’. 평생 책만 본 지식인들. 전부가 독서 논술 시장에 뛰어들 것이다. 냉정한 말로, 진보적 주제를 옹호하는 책도 썼고, 국문학계 서열 넘버 1, 2, 3, 4, 5...... 등을 비판하는 책도 썼던 바다를 건너다는, 한나라당이 집권 한다 해도 지식인 문제에서는 좌파 지식인들의 최고 권력자인 ‘백낙청교수’와 ‘강내희교수’등 소수 정도만 문제 삼는 선에서 싱겁게 끝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한국 문단사’에서 문인들끼리 알게 모르게 소수들끼리 통신 하는 그 방법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미 먹히고 있다. 김윤식교수의 ‘독서논술 시장’진입과 이어령 교수의 ‘독서논술 시장’진입은, 앞으로 한다 하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진입할 것임을 예고한다.
왜냐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출판 문화 문명은 선진국 급으로 쌓아놨다. 그런데, 어리버리 떨거지들이 책을 지지리도 안 보는 정치 중심적 논거로 개입하면, 출판 문화 문명 파이 전체가 줄어든다.
공인중개사 자격증 고시 학원이 빛을 발했으면, 독서지도사 교육 기관도 빛을 발하는 거 누가 말리나? 그러나, 이제는 명확하게 생각해야 한다.
7차 교육 과정의 근본 철학이 ‘독서’이다. 김제동이 느낌표에서 책 책 책! 소리 하면서 도서관 짓는 거. 그것은 80년대 세대가 후세대에 남기기 위한 길고 긴 펀더멘탈을 짓는 것이겠다. 김용옥의 주장대로 문명의 깊이가 더하게 하는 데에는, 정말로 일조일석에 되지 않을 분명한 바탕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선생님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사장님도 아무나 하지 못한다. 이명박 사장님이 김경준과 증권작전 개입을 했다는 미국 동포신문이 인터넷에 엄청나게 돌고 있다. 이명박 사장님의 길은 전부가 ‘김경준 게이트’같은 비슷한 면모가 개입되어 있다. 이러한 일이 있다면 선생님 성격이라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겠다.
결국, 독서논술 시장은 ‘은퇴 대학교수’와 ‘제도권 학계’의 꽉 막힘을 탈피하려는 교수와 제도권 법과 원칙대로 ‘교수’들의 연합이 이끌고, 젊은 교육자들이 그러한 뜻을 확장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까놓고 말해서, 문학비평과 사회비평 가지고 먹고 살던 그 자원들이, 독서 논술 시장 안 가면 어디 가겠는가?
독서논술 교재가 ‘진보적 아젠다’와 ‘보수적 아젠다’를 모두 다르며 공평한 중립적 시각을 가지지 않게 된다면, 결국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된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처럼 김성칠의 연구실에서 문장표현 하나 하나에 빨간줄 좍좍 그으며, 북반부가 역사학이 더 높다는 식의 학문 파괴 행위에 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독서논술 교재가 ‘보수주제’를 ‘수구꼴통’이라고 찍어대면서 더 이상의 사유를 멈추게 한다면, ‘리틀 노사모 양육 프로그램’이지 선진국민 만들기 프로그램이 아니다. 막말로, 책을 지지리도 안보는 전대협 대자보 꾼 꼴통 수준으로서, 가차없이 빨간줄로 제껴 지는 이 땅의 문명이 너무 아쉽다. 레닌의 책에 현상학자는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가볍게 매도되었지만, 훗설 전공 박사학위자들은 얼마나 운동권들이 운동이름의 야만을 엄청나게 저지르는지 너무 잘 알 것이다.
80년대 중후반에서 대학을 장악했던 사람들이 93년 무렵에서 거의 다 쫓겨 나갔다는 사실은 객관적인 팩트다.
일제 시대 ‘문단사’의 걸출한 ‘문인’들에 해당될만한 분들은, ‘지식인’이란 이름으로 완전히 바뀌어진채 과거에 ‘문학시장’을 보았지만 지금은 ‘논술시장’을 바라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대는 출판문화운동으로 이념적으로 시작했어도, 지금은 선진국민 만들기 위한 독서문화운동으로서의 중립주의적인 것이다.
엉터리 논술 교사는 자신의 이야기 만을 말한다. 리트머스 시험지로서 엔엘파 ‘자주성’과 ‘주체성’이란 잣대에 맞는가 안 맞는가, 386 시대에 대학을 다녀본 분들은 사교육논술에 다니는 자녀에게 그러한 질문 거리를 던져 줘 보자. 엔엘파 자주성 주체성을 답하는 자들은 논술교사 자격이 없다고 봐야 적절하다. 본인은 솔직히 주체사상을 창조했다는 황장엽씨의 철학도, 그렇게 수준이 높다고 여기지 않는다. 사회적 생명론은 농촌 정서일 뿐이며, 계몽주의적 잣대는 ‘당성’에 가까웠거나 그랬던 과거 파먹기에 다름 아니다. 엔엘파 자주성과 주체성은 본질적으로 통합 논술의 바탕과 거리가 멀다. 자기 주관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정보라는 객관대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요약하는가에 기초되는 자기 생각 훈련이다. 그냥 자기 생각 훈련이 아니라, 정보 습득과 요약 훈련에 기초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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