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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 9’으로 본 타자화와 그에 따른 문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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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6. 22. 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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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 9’으로 본 타자화와 그에 따른 문제의 해결방안 (By 신선영)
우리 인간은 거의 다른 것들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인본주의 아래 살아간다. 물론 인본주의는 다행히 갈릴레이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그 위치가 흔들리고 심지어 그것을 지탱하고 있었던 종교도 흔들렸다. 그러나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점에서 인간은 인본주의를 넘어서 같은 종족도 차별하기에 이르렀다. 인종, 국가, 지역,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 주변까지도. 친구들 사이에서 조차 조금 다르다고 다른 존재와 같은 취급을 해버리는 이러한 세상은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앞으로의 내용에서 나는 디스트릭트 9 영화해석을 통해 이런 타자화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리고 적정선을 넘은 타자화에 대한 해결방안은 또한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해 볼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나만의 융합인문학적 사고를 시작해보겠다.
먼저 디스트릭트 9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하겠다.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디스트릭트 9은 어리버리했던 주인공이 외계 생명체 통제팀을 맡고 외계인들을 만나면서 인본주의적 사고를 하며 자기 자신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인본주의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외계 생명체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사실은 조금 작게 보면 우리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더 자세히 파고들어, 인간들 서로에 대한 타자화로 인해 생겨나는 차별과 그에 따른 희생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현재 비일비재한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 성소수자 차별 문제, 더 나아가 정체성에 대한 문제까지 나아갈 수 있다. 이 상황에서 나는 여러 갈래로 나아갈 수 있는 이 문제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갈래를 내식으로 사고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디스트릭트 9에서 주로 내가 주목했던 장면은 바로 영화의 디테일이다.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주인공이 외계인에게 통조림을 던져주는 장면이 바로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이 행동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그 던지는 행위는 인간이 다른 생명체를 자신보다 하위 취급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이 장면에서 타자화가 심리적으로 강하게 작용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서로 죽이고 싸우고 하는 장면들도 타자화 때문에 일어난 충격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심리적으로 쿵 와 닿는 부분은 바로 통조림을 던지는 장면일 것이다. 우리들은 주로 동물들에게 먹이를 줄 때 이런 행동을 취한다. 그런데 전혀 보지 못했던 종족에게까지 그런 것을 한다는 것은 인간을 우월하게 보는 관점이 아닌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현상을 훨씬 더 작게 생각한다면, 우리 주변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우월주의로 인해 일어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우월주의와 우상화가 심해지면 우리는 적정선을 넘는 타자화를 하게 되며,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 고립된다. 그렇다면 이 타자화가 어떻게 생성되는지, 또한 그것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일단 나는 타자화가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해온 바탕, 혹은 신체적인 특성으로 인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먼저 생각이나 경험 같은 경우는 문화, 지역, 대중매체, 사회적 영향 등에 의한 것 같다. 또한 신체적인 특성은 인종이 다른 것 뿐만 아니라, ‘선천적으로 신체가 좀 다르거나, 아니면 사고로 인해 변형된 신체를 지녔다’라는 것 등등이 있을 것이다.
나는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이라는 것까지 연결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더 나아간다면 주로 자신의 신념에 따라 타자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심화되면 자기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아서 타자화를 시키게 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자궁을 벗어나면서 다른 이들, 부모, 혹은 친구, 주변 사람들로 인해 다 타자화가 된다. 라캉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면 거울 단계라고 하여, 타인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타자화하여 자아가 생성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왜 우리는 다 타자에 의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데, ‘왜 굳이 다른 사람들이나 종족을 타자화시킬까’라고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 인간은 의미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커지면 신화나 우상으로 바뀌어 버린다. 한 마디로 자신이 의미부여한 것들을 다 우상화시키는 것이다. 또한 우월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습관은 우리 인간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듯 하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탈신비화다. 신화와 우상의 측면에서 우리는 보편성을 띄는 존재와 특이한 존재들을 나누고 싶어하고, 또 거기서 자기 자신이 우월하게 되기를 바라며 그런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다른 존재들을 차별한다. 이런 것에서 계급, 계층, 지위 같은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타자로 형성되었고 거기에 우월하지도 않으면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은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기도 하다. 주로 그것은 파시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타자화라는 것에 주목하면 왜 히틀러 같은 사람이 유태인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이고 하는지, 혹은 세실로드가 왜 19세기에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파면서 6000만명의 아프리카인들을 죽였는지에 대해 잘 알게 된다. 내가 보기에 이들은 본인들에 대한 우상화와 우월주의 때문에 잔인한 일을 저지른 것 같다.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자기 자신들이 더 잘 살기 위해서, 혹은 자기 자신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고, 교육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 현상들은 지금 동시대 이슈들에서도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데, 내 생각에는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이런 타자화를 너무 심하게 하게 되어서 서로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이 일상화되어버리는 것 같다. 이런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어떤 한 존재로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탈신비화도 되는 것이고 자기 자신도 인정된다. ‘나는 이러한 타자이고 너는 이러한 타자야’라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상대적 차이의 중요성에 대한 기원을 살펴보자.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가 자의적임을 밝혀냈는데, 그는 우리가 어떤 한 단어를 이야기할 때 그것이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으며, 그들의 기능이나 물적 존재성을 내포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어의 소리나 글자, 또는 사진 등으로 기호를 역사화시켰다. 그러므로 단어의 소리인 기표는 그것의 의미인 기의를 충분히 나타내지 못하였고 기의는 또 다른 기표들의 나열로 설명되므로 결국은 어떠한 언어 대상도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에 의해 언어기호의 의미는 오직 차이와 다름으로 전달된다. 이어서 해체주의자 데리다의 ‘글쓰기와 차이’라는 논문에서는 대구를 이루는 단어들이 서로 부정과 긍정, 좋음과 나쁨, 그리고 서로 위계적임을 얘기한다. 이러한 후기 구조주의의 비판적 태도는 지역, 성, 인종, 국가 등이 서로 상대적 차이를 가지며, 이로써 열등한 것들을 전복시키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내 생각은 우리가 상대적인 차이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 활용될 가능성도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역차별 등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시대 미술현장을 보면, 유명한 갤러리나 미술관에서 흑인을 마치 최고인 것처럼 띄워주는 분위기가 일고 있다. 예전부터 흑인이 차별을 받아왔고 그런 것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생기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문제는 이것이 마치 ‘국뽕처럼 되어버리면 안된다’라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최근에 황인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는가? 흑인들은 목소리를 내는데, 그 밑에서 유색인종들에 대한 존중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을 봤을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적당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한 곳에만 꽂혀 있으면, 다른 큰 숲을 보지 못할 수도 있고 그것은 또 다른 절대적 기준이 있는 우월주의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자신의 다양한 행동이나 생각, 혹은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여기서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올바른 도덕이 이어질 수 없으며, 적당한 체계가 바로 설 수 없다. 그러므로 일단 나 자신부터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하며 자기 행동에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스스로가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질 것이다.
참고문헌
, 진휘연 저, 중 “포스트모더니즘, 후기 구조주의, 그리고 아방가르드”, 민음사, 2002, p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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