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날개 장식’에 담긴, 신라의 실리 외교
4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신라는 그리 대단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랬던 신라는 5세기 이후 거대한 왕릉을 만들고 영역을 확장하는 등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 사람들은 신라가 후에 가야,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꺾고 한반도의 패자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 신라는 주변국의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 국가의 안위를 지켜냈고, 일일신우일신이란 표현처럼 성장을 거듭해 최후의 승자가 됐다.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학계에선 변화무쌍한 외교력을 신라의 ‘최종병기’로 평가한다. 신라가 벌인 탁월한 외교력의 실체는 무엇일까.
고구려 ‘조우관’, 신라 지배층에서 인기
황남대총 남분(왕 무덤)에서 출토된 5세기 금제 관식(보물 제630호)으로 일명 조우관(鳥羽冠·새 날개 모양 관). 조우관은 원래 고구려인들이 선호했는데 신라로 건너오면서 지배층에서 위세를 상징하는 물품이 됐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4세기 후반 신라는 좀 더 큰 세상을 향해 힘찬 날갯짓을 시작했다.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북중국의 패자 전진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사신 위두는 전진 왕 부견 앞에서 “해동의 사정이 예전과 달라졌다”며 자국의 성장 사실을 당당히 알렸지만 실제 그의 말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그 시기의 신라는 아직 강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강국들과 외교관계를 맺어 나라를 지키려 했다. 특히 국경을 접한 고구려의 지원은 긴요했다. 신라는 신속(臣屬) 관계라는 굴욕을 감수하면서 고구려에 의지하기로 했다. 기대는 적중했다. 400년에 이르러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의 공격으로 위기를 맞은 신라를 고구려가 구원한 것이다. 광개토왕이 파견한 5만 군사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경주를 에워싸고 공격을 벌이던 세 나라 연합군은 고구려군과 대적하자마자 패퇴해 거의 궤멸하다시피 했다.
이후 고구려군은 반세기가량 경주에 주둔했고 그렇게 신라는 걱정거리를 더는 듯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고구려의 내정간섭이 심해져 급기야 왕을 시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신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해야 했다. 433년 백제와 혼인동맹을 맺은 후 고구려와 과감히 절연했다.
당시의 사정은 유물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4세기 후반 신라 고분 속에 조금씩 묻히던 고구려계 문물은 5세기 전반에 이르러 수량이 급증한다. 그 시기의 왕과 왕비의 무덤인 황남대총에서는 전쟁에서 쓰였음직한 각종 철제 무기와 마구, 고구려에서 수입한 귀금속 장신구와 제기가 다량 출토되었다. 특히 고구려인들이 선호하던 조우관(鳥羽冠·새 날개 모양의 관)은 당시 신라 지배층 사이에서 자신들의 위세를 상징하는 물품으로 여겨져 크게 유행했다.
백제식 허리띠장식 신라서 다수 나와
경북 상주청리고분에서 나온 6세기 백제 양식의 청동제 허리띠 부속구는 신라가 선진적 문물과 제도를 백제로부터 수용한 것을 보여준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고구려라는 올가미에서 벗어난 신라는 백제, 가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에 따라 한반도 중남부에는 한동안 평화의 기운이 감돌았고 고구려의 단발적 위협에 공동보조를 취했다. 475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해 한성이 함락되었을 때 신라가 군사 1만을 파견해 돕자 백제는 나제동맹의 위력을 실감했다.
무령왕대에 이르러 백제는 갱위강국을 표방하며 한강 유역 수복 의지를 다졌고 그것은 성왕대에도 이어졌다. 성왕은 단독으로 한강 유역 수복이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신라의 도움을 얻기로 하고 비밀협정을 맺었다. 전쟁에서 이기면 한강 하류는 백제가, 상류는 신라가 차지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백제가 가지기로 한 한강 하류까지 차지해버렸다. 진흥왕은 실리를 위해 동맹을 파기했고 이어진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백제를 패망의 위기로 내몰았다.
나제동맹 이래 신라는 한 세기가량 백제를 매개로 중국과 교섭하였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선진적 문물과 제도를 적극 수용해 국가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평화를 구가하던 시기에도 신라는 늘 한강 유역 진출을 위한 칼을 갈고 있었지만 백제는 그 야심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무렵의 두 나라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이 간간이 발굴되고 있다. 백제 유적에서는 신라산 유물이 간혹 출토되지만 신라 유적에서는 백제 스타일의 허리띠장식이 다수 출토되고 있어 백제문화가 신라에 일방적으로 전해진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7세기 신라 휩쓴 당나라 문화
경주 용강동 석실분에서 나온 문관상 토용은 서역계 인물의 생김새를 띠고 있어 신라가 당나라 문화를 깊이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더 큰 꿈을 꿨다. 그것은 바로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이루는 일이었다. 신라 정치를 주도하던 김춘추는 당의 힘을 빌리기로 하고 바다를 건넜다. 그는 당태종 이세민을 만난 자리에서 당나라 복식을 사용하고 싶다고 요청했고 이세민은 흔쾌히 허락했다. 김춘추가 귀국한 649년 신라는 당나라식으로 복식을 고쳤다. 실제 그 무렵의 신라 유적에선 당나라풍 유물이 쏟아진다. 특히 경주에서 발굴된 토용(土俑·흙으로 만든 허수아비)은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
1986년 6월, 용강동 석실분에서 무덤 주인공의 유해를 안치하는 데 쓰인 석제 베개, 어깨받침, 발받침 등이 발견된 데 이어 여러 점의 채색된 토용과 청동제 십이지신상 등이 연이어 드러났다. 남녀 토용 모두 당나라풍 옷을 입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이듬해 5월, 황성동 석실분에서도 자그마한 토용이 출토됐다. 남자상은 용강동 토용과 마찬가지로 당나라풍의 옷을 입고 있었으나 여인상은 전통적인 옷을 입고 있어 대조를 보였다.
토용은 원래 중국에서 순장 대용품으로 만들어지던 것이지만 신라에서는 순장이 금지된 지 150여 년이 지난 후 당 문화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복식을 바꾼다는 것은 단순히 의복 디자인을 바꾸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전통을 버리고 새로운 문화를 전폭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신호탄과 다름없다.
이처럼 신라는 변화무쌍한 외교력을 통해 생존했고 또 끝내 승리를 거머쥐었다. 자국에 이익이 된다면 오랜 우방과 과감히 절연했고 구원이 있는 적과의 동맹 앞에서도 결코 머뭇거리지 않았다. 신라가 삼한일통을 이룬 것은 명분보다는 국익을 최우선 가치로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신라 유적 곳곳에서 발굴된 다양한 계보의 외래 유물은 그 옛날 신라의 고민과 실천을 생생히 보여주는 듯하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