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은 지금부터 나가 죽어라."
1951년 5월 초 인사말이나 서두도 없이 바로 내지르는 국군 6사단장의 거친 연설에 장병들이 어리둥절해할 때 사단장이 이어서 꺼낸 말은 다음의 두 문장이었다.
"사단의 명예를 회복하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올 생각은 마라. 나도 너희와 같이 죽겠다."
앞서 말한것처럼 장도영 사단장은 치욕을 씻을 기회였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이런 말로 연설을 했습니다
전투 상황도 (2연대 대단합니다!)
중공군의 6차 공세로 강원도 홍천과 인제에서 격전이 벌어질 당시 (현리전투)
국군 제 6사단은 경기도 양평 북한강 남쪽 용문산 일대의 방어 책임을 맡고 있었다.
당시 중공군은 도하장비가 부족했으므로 북한강 바로 남쪽 고지에 주저항선 (Main Line of Resistancs : MLR)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전투지역전단(FEBA)을 설정해 적의 도하를 막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중공군의 도하 & 2연대 1,2대대의 포격
하지만 북한강 북쪽 고지들을 적이 장악하고 있는 만큼 강을 따라 주저항선을 설정할 경우
지원부대의 움직임이 노출된느 것이 문제였다.
결국 6사단은 상급 부대 방침에 따라 용문산 일대 고지에 주저항선을 설정하고 7,19연대를 배치했다.
이 경우 북한강 도하를 차단하기 힘든 것이 문제였지만,
북한강 남안에 경계부대인 2연를 배치하는 것으로 포진을 끝냈다.
이때는 경계부대인 2연대가 북한강 남안에서 일정시간 도하를 방해하다 주저항선 남쪽으로 철수하면
제7,19연대가 주저항선에서 결전을 치르것이 통상적 작전이었다.
하지만 실제 작전 방식은 달랐다.
1951년 5월 18일 저녁 중공군 제63군의 도하가 시작되자
북한강 남안의 2연대 예하 1,2대대는 도하 중인 적을 강타했다.
밤새전투를 치른 두 대대는 다음날 주저항선 후방으로 철수하지 않고
북한강에서 남쪽으로 6Km 정도 떨어진 나산과 9Km 정도 떨어진 427고지로 철수해
또다시 후속 방어전을 준비했다.
용문산 전투의 국군 제6사단의 장병들
6사단 2연대 예하 1,2대대가 싸울땐 3대대는
1,2대대가 철수할시 엄호를 위해서 북한강 남쪽으로 6Km 떨어진 353고지에 자리잡고 적을 기다렸다.
1951년 5월 19일 저녁 8시 30분 진지밖에서 잠복하던 3대대 경계분초는 TS-10 야전전화기로
"전방에 적 보병이 까맣게 몰려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밤 10시 353고지의 3대대 방어진지로 적이 쇄도해 왔다.
아군은 각 분대마다 1명이 수류탄을 던지면 바로 그쪽으로 M1소총과 BAR 자동소총을 집중사격했다.
81mm 박격포도 진지 100m 전방까지 고각사격을 실시해 적을 타격했고 후방의 포병들도 적 후속부대를 강타했다.
밴플리트 사령관은 6사단장과 '고함문답'을 주고받은 후 미군들에게 6사단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라고 지시했고
그 때문인지 미군의 화력 지원은 화끈했다.
이날 밤 6사단 2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국군 2개 포병대대와 미군 5개 포병대대가 포탄 3만발을 쏘았다.
중공군은 엄청난 인명손실에도 불구하고 2,3파의 공격을 계속했다.
전형적인 중공군의 인해전술 공격이었다.
적은 거의 사단급 규모의 부대를 동원해 3대대 진지를 공격했다.
결국 백병전까지 벌어지는 악전고투의 상황이 벌어졌지만 장병들은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결의로 뭉쳐있었다.
용문사 전투 후 제 6사단 2연대 1대대 중화기 소대 장병들
중공군은 353고지의 옆과 뒤로도 포위 공격을 가했디만 6사단 2연대 제3대대는 전후좌우를 방어하는 전면방어 방식으로 포진했으므로 방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처럼 353고지의 3대대가 격렬한 방어전을 계속하자 중공군은 상황을 오판했다.
353고지 국군을 주저항선에 포진한 주력부대라고 착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전초(GOP)나 전투전초(COP) 같은 경계부대들은 적의 접근을 최대한 빨리 아군에 경고한 후
본대가 방어 준비를 하는 시간을 잠시 벌어주고 철수하는 것이 전술이 기본이다
하지만 당시 경계부대인 6사단 2연대는 북한강 남쪽진지에서 적 도하를 방해한후
바로 주저항선 후방으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선정한 축차진지로 들어가 결사항전을 했다.
결국 중공군 제63군은 군단 예비대에 해당하는 189사단을 조기에 투입했고
경계부대를 못 당해 사단급규모의 군단예비대를 투입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8000vs500) 일당사십!
중공군은 새벽 3시부터 3,4차 파상공격을 가해왔고
또다시 백병전까지 벌어지는 혈전이 벌어졌다.
3대대는 점차 고지위로 물러나면서 방어선을 좁히는 식으로 버텼고
결국 1951년 5월 20일 새벽까지 353고지를 향해 감행된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비슷한 시간 427고지에 자리잡고 있던 2연대 2대대도 적의 거센공격을 막아냈다.
국군이 이러한 위험한 승부수를 띄우려 할때 미군 고문관들은 왜 2연대를 철수하지 않냐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국군은 2연대를 철수하지 않았고 국군의 승부수는 대성공이였다.
중공군 제 63군은 국군 6사단 2연대를 상대로 전력을 쏟아부었지만 2연대는 끈질기게 방어하면서 63군을 지치게 만드는데
성공하였고 그 결과 국군은 7,19연대는 쌩쌩한 전력으로 남아있었다.
1951년 5월 20일 새벽 5시 2연대가 방어를 성공적으로 치룬후 7,19연대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중공군 제 63군의 좌우로 돌아가
2연대를 구출하고 중공군을 섬멸하라는 반격명령이었다.
7,19연대는 반격을 개시해 2연대를 68시간만에 구출했다.
중공군 제63군은 국군 6사단 예하 7,19연대의 반격으로 후퇴를 시작했고
국군 6사단은 이에 멈추지 않고 미군 제 24사단에게 전선을 인계한후
1951년 5월 24일 중공군 추격에 나선다.
초산에서와 사창리에서 치욕을 겪은 6사단은 무서울 만큼 빠르게 중공군 제 63군을 추격했고
중공군 63군이 방어진지를 구축하기도 전에 6사단은 예하 부대를 산개해서
2,7연대는 정면을 공격하고 19연대는 북배산을 우외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중공군 제 63군은 대일항전의 이력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팔로군으로 편제되었으며 국공내전에서의
풍부한 경험을 가진 최정예 군이였지만 국군 6사단의 민첩한 기동으로 북배산에 포위되어
전투한번 제대로 치루지 못한채 국군의 포탄에 일방적으로 당해야 했다.
이제 중공군이 후퇴할 수 있는 길은 북쪽의 화천방향 밖에 없었다. 중공군은 포탄을 피해서 화천으로 갔지만
중공군 앞을 막고있던 것은 화천댐의 건설로 생긴 화천호였다. 중공군은 화천호때문에 완벽하게 퇴로가 차단당했고
살기 위해서 화천호에 뛰어드는 수밖에 없었다.
국군 6사단은 이러한 중공군을 가만히 냅두지 않았고 침착하게 포위망을 유지하며 포탄으로 적을 유린하였다.
결국 중공군 제 63군은 국군 6사단에 의하여 궤멸당했고 이는 국군이 중공군에게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용문산 전투 후 중공군 포로
중공군은 1만 7,177명이 사살당했고 2,183명이 포로로 잡혔고 살아 돌아간 병사는 천여명에 불과했다
이는 불과 8천명밖에 되지 않는 국군 6사단이 2만 5천명으로 구성된 중공군 63군을 궤멸시킨 대승이였으며
화천호에 중공군을 수장시켰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호를 파로호로 명명하였다.
비장한 결의로 결사라는 띄를 매고 전투에 임했던 군국 6사단 장병들께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자료는 http://citrain64.blog.me/100128804471과 끝나지 않은 전쟁 6.25전쟁이란 책에서 얻었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ㅠㅠ
화천호 -> 파로호(오랑캐를 부수고 사로 잡은 호수 - By 리승만)
결론은 역시 전장의 꽃 : 포병 만세군요.
현대 포방부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군요.초전에 북한 포병에 패닉상태가 되고 나중에 저토록 재미를 봤으니...
근데 글 말미에 중공군 피해는 구체적인데 6사단의 피해는 언급이 없는 게 좀 아쉽군요.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이랍니다..
적군의 피해에 비해 터무니 없이 적군요.일방적이군요.굳이 언급 안할만 하네요;;
그런데 6사단의 피해도 대부분 2연대에서 나온거죠 2연대 부왘ㅋㅋ
3개 사단 덤벼 오랑캐넘들아
으아니.. 정말 읽고있으면서도 믿기힘드네요.. 피해정도가 으아아.. 일방적인 대승이네
역시....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옛날이나 근-현대나 고지가 중요...
용문산전투가 포위되기만 하면 군자체가 와해되던 국군의 단점(?)을 극복한 건데다가 열악한 보급능력때문에 공세한계가 3일밖에 되지 않는 중공군의 단점도 여지없이 드러난 전투죠. 저때 밴플리트에게 쿠사리를 먹은 장도영이 병사들을 모아놓고 우리국토를 침략한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일장의 연설로 사병들을 고무시켜 포위상황에서도 이전과는 달리 결사적으로 싸웠던게 중공군이 오판하게 만든거랍니다 (저때는 장교가 사병을 탈영못하게 감시하는게 아니라, 패닉에 빠져 도망가려는 장교를 사병들이 잡아(?)와서 싸우게 했다고 하더군요).
우리 군은 6.25를 기점으로 고질적인 모랄빵을 뒤집었군요.정신교육의 위력이란...
글을 읽고 마지막 사진을 보니 가슴이 뭉클하군요. 저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었겠죠.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읽느라 수고하셨슴다
경험많은 중공군을 상대로 대단한 성과를 거뒀군요. 역시 정신력의 힘이 대단하네요..
정말...가슴이 뭉클하다고 밖에..ㅠ..ㅠ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 김정일 찬양하는 인간들은..참...ㅡㅡ
하지만 당시 김일성의 조선인민군 휘하에 인민군 수뇌부들 상당수가 항일무장투쟁세력이었단것만은 잊지않아주셨으면 ㅜ.ㅜ
그러므로 김일성 개객기
그 항일무장투쟁하던 장교단 모조리 숙청크리...김원봉, 방호산, 무정...싸그리 숙청ㄷㄷ;;김일성 개객기야~~~!!(진짜 개객끼임 애비놈이나 아들놈이나 손자놈이나)거기다 그 항일무장투쟁이란것도 죽어~라 일본놈들하고만 싸운것도 아니고...팔로군계열에 속해서 모택동이가 말했듯이 우리의 전력의 10%는 일본군, 30%는 국부군, 60%는 우리세력확장의 앞잡이성격을 띈경우가 많았으니 진정한 의미의 항일 투쟁이라고는;;;(물론 숙청된 인사들이야 화려한 항일 전과를 증명하지만...)
당시한국군 수뇌부들 대부분이 친일인사였단게..그래서 그런 모랄빵이 가능했는지도..
22미군들이 병사들은 사기가 높고 용감하나 훈련이 부족하고,장교들은 모랄빵이라고 기록돼 있다더군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박정희가 일으킨 5.16때, 처음에는 박정희의 추대를 받아서 국가재건회의 최고 의장에까지 올랐다가 나중에는 박정희한테 숙청당했죠.
중공군의 피해가 컸던건 공격하다가 탄약과 식량을 모두 소진한 상태에서 재보급을 받지 못하고 패주하는 와중에 일방적으로 당했기 때문이죠. 미군의 제공권때문에 중공군은 개인이 소지한 탄약과 식량만으로 싸워야 했으므로 3일이상 공세를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즉, 3일이내에 국군을 공격해서 보급물자를 뺏던지 후퇴해서 재보급을 받아야 했는데, 2연대의 선전으로 전황을 오판하는 바람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은거죠.
저때는 사병이나 장교들 모두 젊다보니 경험이 부족한데다가 북한이나 중공군에 비하면 장교단이 사병을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크다보니, 평시에는 그런대로 싸우다가도 포위되거나 하면 패닉에 빠져 금방 와해되는 경향이 많았죠. 지금생각해보면 저때의 정신무장이라는게 지금보면 별게 아니죠. 따지고보면 6사단이 직전에 겪었던 사창리전투나 현리전투와 용문산전투의 결과가 판이하게 다른 이유는 별게 아니죠.
유재흥이 작전지휘후 포위망밖의 군단본부로 비행기를 타고 복귀한건 일상적인 업무라고 생각하겠지만, 위기시에 사병을 버려두고 장교단이 먼저 도망가던걸 겪어오던 사병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뻔하죠.
현리전투때의 유재흥과 용문산전투때의 장도영의 차이는 작전을 잘짜고 병사를 잘 지휘하는 것보다는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에서 차이가 있었고, 이런 어찌보면 사소한 차이가 승패를 바꾼 계기가 된거죠.
풀군단 하나로 적군 12개 군단 길막으로 막고 있었던 거임 ㄷㄷㄷㄷ
우와 진짜 대단하다
[청원] 다른 부대에 대한 것도 올려주세요.
어느부대에 대해서 알고 싶으시나요? 고갱님 이번주로 작성해서 올리겠나이다
소위 메이커 사단이 오래되고 유명하지 않나요? 청성도 메이커 사단이고요. 백골이나 노도사단등이 가장 궁금하네요. ^^
메이커 사단이라고 해서 다 무시무시한 전과를 세우게 아니라서 문제죠;; 소위 말하는 메이커 사단이 1,2,3,5,6,7,8, 수도경비사령부인데 이들 중에서 1,6,8 사단을 제외한 사단이 모두 전쟁 기간중 해체와 재창설이라는 불명예가 있습니다;; 노도가 2사단 백골이 3사단인데 개전초기때 서부전선에서 박살나는 바람에;; 전쟁후반에 가서 힘좀 쓰게 되죠;;
헐... 뭔가 무시무시해 보이는데 개전 초기 박살이라니... 환상이 무너지네요. 그냥 작성 하고 싶으신 사단이나 부대를 올려 주시면 감사히 보겠습니다. ^^
글 올리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