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나훈아는 큰 가수였다. KBS-2TV에서는 추석연휴가 시작되는 9월 30일 저녁 8시 30분부터 11시까지 2시간 반 동안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를 방송했다. 15년 만에 텔레비전에 출연한 가수 나훈아가 특별출연한 무대였다.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가 방송되던 그날 밤, 나는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평소 밤 10시쯤이면 잠자리에 들곤 했는데 그날 밤에는 특집방송의 흥분이 가시지 않아 늦게 잠들었던 것이다.
나는 나훈아의 노래를 좋아했다.
특히 그의 히트곡 ‘사랑’과 ‘영영’은 내가 노래방에 가면 으레 부르던 노래였다. 나훈아는 참 대단한 가수다.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가 방송되던 그날 밤, 나훈아는 혼자서 무려 30여 곡의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도 나훈아는 시작할 때나 끝날 때나 변함이 없었다. 지칠 줄을 몰랐다.
원래 이 프로그램은 9월 23일에 녹화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몸살이 나지 않았다니 얼마나 튼튼한 체력인가?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는 코로나19로 시달리는 국민을 위로하고자 8개월 전부터 기획한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나훈아는 무료로 출연했고, KBS는 처음으로 관객 없이 공연했던 언택트 프로그램이었다.
원래 큰 홀에서 공연할 계획이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그게 불가능해지자 전 세계에서 관객 1,000명을 온라인에 초대하여 언택트 공연을 시도했단다. 우리나라 방송 사상 초유의 경험이다.
코로나19 때문에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버린 국민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공연이었고,
국민의 심신을 달래준 멋진 프로그램이었다. 찬란한 퍼포먼스와 무희들의 춤, 화려한 군무, 백코러스는 시청자들에게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날 밤의 실시간 시청률은 무려 70.87%(SBS 6.4%, tvN 4,8%, KBS1 4.16%, TV조선 3.19%, MBC 3.16%, MBN 1.9%)였다고 한다.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2010년부터는 시청률이 50%를 넘는 프로그램이 거의 없었다고 하니,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의 실시간 시청률은 앞으로 좀처럼 깨어지기 어려운 기록이 될 것 같다.
가수 나훈아의 본명은 최홍기. 1947년 부산 출생이다. 집 나이로 74세다.코로나19에 감염된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동갑이다. 그의 사생활은 별로 자랑스럽지 않지만 노래에 대한 그의 신념과 철학과 열정은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다, 서라벌예술고등학교 때 가수로 데뷔했지만 그는 노래에 죽고 노래에 사는 타고난 노래꾼이다.
나훈아는 작사, 작곡, 노래 등 3박자를 다 갖춘 싱어송라이터다. 70대 중반인 지금도 신곡을 만들어 부를 정도다. 나훈아는 공연 중간 중간에 슬쩍슬쩍 하고 싶은 말을 끼워 넣어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코로나19와 싸우는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 종사자들을 영웅이라고 칭찬하며 격려하기도 했다.
야당 정치인들도 감히 하지 못한 이야기를 그가 들려주었다.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는 3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추석연휴 첫날이어서 그런지 1부는 고향, 2부는 사랑, 3부는 인생으로 꾸며졌다. 1부가 시작되기 전 배를 타고 나타난 나훈아는 ‘고향으로 가는 배’를 불러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70대 가수 나훈아는 ‘대한민국 국민은 세계 1등 국민이다. 긍지를 가져도 된다. 우리 국민은 분명히 코로나19를 이겨낼 수 있다.’고 온 국민에게 용기와 힘을 실어 주었다. 나훈아는 이번에 ‘테스 兄’이라는 신곡을 불렀다. 하늘나라에 간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질문하는 식의 ‘테스 형’이란 노랫말에는 그의 인생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1.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그저 와 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 형, 소크라테스 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 겠소? 모르겠소, 테스 형.
2.
울 아버지 산소에 제비꽃이 피었다. 들국화도 수줍어 샛노랗게 웃는다. 그 저 피는 꽃들이 예쁘기는 하여도 자주 오지 못하는 날 꾸짖는 것만 같다. 아! 테스 형, 아프다. 세상이 눈물 많은 나에게. 아! 테스 형, 소크라테스 형. 세월은 또 왜 저래? 먼저 가 본 저 세상 어떤가요? 테스 형.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가요?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나훈아는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세월은 왜 이래? 사랑은 왜 이래?” 물어봤더니 테스 형도 모른다고 하더라며 능청을 떨었다. 하늘나라에 간 소크라테스와 의형제를 맺은 모양이다. 앞으로는 공자와 예수, 석가모니, 마호메트 같은 성인들과도 의형제를 맺고 또 다른 노래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칠순의 가수 나훈아는 노랫말을 지으려면 생각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지은 노랫말은 모두가 우리의 생활이 담겨진 시들이다. 유명한 시인들에게 자기 시를 읊어보라고 하면 술술 외우는 시인이 그리 흔치 않다. 그런데 가수들은 제 노래를 다 외워서 노래를 부른다. 나훈아는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에서 모든 노래를 모두 외워서 불렀다. 얼마나 대단한가?
가요계의 황제 나훈아는 지금까지 200여 장의 앨범을 출반했고, 2,800여 곡을 발표했는데, 그 중 나훈아 스스로 작사‧작곡하여 부른 노래가 800여 곡이나 된다. 어쩌면 이것도 세계기록인지도 모를 일이다.
가수 나훈아는 손수 기타를 치면서 팝송 몇 곡을 영어로 멋지게 불렀다. 나훈아가 저 노래의 영어가사를 외우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나훈아가 가요계의 황제 대접을 받게 되기까지 지독한 연습벌레였다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김종인 씨는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요리사로 인기를 끌고 있는 백종원 씨를 야당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면 어떻겠느냐고 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공연을 보았다면 또 나훈아를 야당 차기 대통령 후보로 들먹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54년째 노래를 부른다는 나훈아는 소신과 철학이 뚜렷한 예인(藝人)이었다. 그는 또 이런 말도 남겼다. 세월에 끌려다니지 말고 모가지를 비틀어 세월을 끌고 가라고 충고를 했다.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공연시간은 시청자 모두가 가수생활 54년 동안에 터득한 인생철학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1970년대 우리나라 가요계는 남진과 나훈아의 경쟁시대였다. 목포 출신 남진과 부산 출신 나훈아는 마치 대통령 꿈을 꾸던 목포 출신 김대중과 부산 출신 김영삼처럼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멋진 라이벌이었다. 가수 남진은 지금까지 가끔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노래를 불렀지만, 나훈아는 15년 동안이나 텔레비전에 출연하지 않다가 이번에 대형 프로그램으로 얼굴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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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는 배를 타고 서곡으로 ‘고향으로 가는 배’를 노래하며 공연장으로 들어오더니 3부가 끝날 무렵에는 ‘사내답게 살다가 사내답게 갈 거야’를 부르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보름달에 태극기가 선명하게 새겨진 보물을 안고 차오르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감동적인 마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는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무 관중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