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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금양정사 (錦陽精舍)
현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건축주 : 황준량(黃俊良, 1517~1563)
건축시기 : 1500년대 중반
소유자(관리자) : 평해황씨 검교공파(황재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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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봉 중턱의 금양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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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에서 북쪽 소백산의 주봉 비로봉 가는 길로 가다보면 읍을 막 벗어날 즈음에 갈림길이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마을을 표시하는 바위에 장생이마을이라고 새겨져 있다. 넓지 않은 포장길 좌우로 가옥이 있고, 금방 시원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시냇물 소리를 따라 오른쪽으로 가면 금선정이 있고, 그 왼편 서쪽으로 나직한 산이 있다. 그 산 아래 밭 사이로 작은 길이 있고 그 입구에는 ‘욱양단소(郁陽壇所)’라는 팻말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산길을 몇 구비 돌아 중턱에 오르면 소담한 연못을 저 아래에 두고 금양정사가 들어 앉아 있다.
산 남쪽에 기대어 실팍하게 자리를 잡아 저 산 아래 먼지 세상의 소식은 아예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어지간한 비바람도 타지 않을 듯하고, 하늘에서 내리 쬐는 햇살만 그저 가득 받아 놓았다. 서책을 앞에 놓고 고인의 가르침을 천천히 헤아리거나 조용히 사색하며 옛 성현들의 말씀을 깊이 음미하기에 좋은 자리다. 거기에 속세에서 돌아앉은 고적함은 여름날이면 매미 소리 장단에 잠깐 졸음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아 여유를 더해준다.
이곳은 금계(錦溪)의 주인인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이 늘그막에 학문수양도 하고 후학도 가르치고자 냇물을 안고 돌아 흐르는 이 산 언덕에 터를 골랐다. 마을이 멀지 않으나 한적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글 읽고 소요하기에 좋은 자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해 입신양명의 길이 열렸지만 청빈한 선비의 삶이었다. 그래서 공부에 몰두할 아담한 집을 평생 동안 꿈꾸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황준량 사후에 그 꿈이 이루어졌으니 금선대 위의 금선정과 산 속의 금양정사가 바로 그곳이다.
이황과 유운룡이 각각 지은 글을 보면 황준량은 천신만고 끝에 정자 건축을 시작해 완공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성주 목사 직을 그만두고 귀향을 결심한 배경에는 정자 완성과도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이황은 당시 풍기 군수 조완벽(趙完璧)에게 부탁해 이 정자에 대해 면역의 혜택을 주고 아울러 이곳을 후학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이황 스승의 교시를 이어받은 후임 풍기 군수 유운룡은 “이 정자를 황폐하게 만든다면 이는 수령은 물론 온 고을 사군자(士君子)들의 수치이다.”라고 전제한 뒤 이황 선생의 기문과 군수 조완벽의 결정문을 지역의 향사당(鄕射堂) 벽에 걸어 영구히 따를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오늘날의 금양정사는 영조 때의 건물이다. 병자호란 때 원래의 건물이 화재로 무너져 없어지고 집터만 방치된 지 60년이 흐르자, 이를 안타까이 생각한 황준량의 손자 황성(黃垶)이 중건하였던 까닭이다.
이제, 여전히 마을에서 살짝 돌아앉은 금양정사는 황씨 문중 사람이 이를 관리하고 매년 3월 조상에게 제사를 올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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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황준량(黃俊良) (1517(중종 12) ~ 1563(명종 18))
본관 : 평해 (平海)
자 : 중거 (仲擧)
출신지 : 풍기(豊基)
분묘지 : 풍기(豐基) 내곡(內谷)
입사경로 : 문과(1543년)
외관직 : 성주 훈도(星州訓導), 신녕 현감(新寧縣監), 단양 군수(丹陽郡守), 성주 목사(星州牧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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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文名)을 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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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 황준량은 1517년(중종 12) 풍기 지역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서부터 자질이 남달라서 일찍부터 문자를 해독하고 말을 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기이한 아이(奇童)라 불려졌다. 18세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응시하여 책문(策文)을 지었는데, 시험감독이 그 책문을 보고 감탄하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자자해지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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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관으로서 민생과 교육에 힘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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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량은 중앙의 벼슬보다 신녕 현감(新寧縣監), 단양 군수(丹陽郡守) 성주 목사(星州牧使) 등 외직을 통해 지방의 교육을 부흥시키고 민생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업적을 많이 남김으로써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35세인 1551년(명종 6) 신녕 현감에 부임한 황준량은 백성의 진휼에 힘썼고 전임관의 부채를 절약과 긴축으로 보충하고, 부채문권(負債文券)은 태워버림으로써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주력한 것은 학교(學校)의 부흥이었고, 백학서원(白鶴書院)의 창설은 학교 부흥에 대한 그의 의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백학서원을 보고 느낀 감회를 시를 통해서 표현하였다.
“옷깃에 노리개를 차고 당에 올라 모두 어진 이를 바라니, 벽을 비추는 은 갈고리에 붓이 사다리 같네. 옛 골짜기에 황무지를 개간하여 강론할 자리를 마련하고, 미친 물결을 둘러막아 아름다운 못을 만드네. 존심(存心)의 요체는 시(詩) 석 자이고, 주경(主敬)을 담당하는 스승은 예(禮) 한편이라. 읊으며 돌아가니 춘흥에 저절로 서로 이끌리는 구나.”
41세인 1557년(명종 12) 황준량은 단양 군수가 되었는데, 당시 단양은 남아 있는 집이 없을 정도로 곤궁한 상황이었다. 그는 이러한 폐단을 목격하고 「단양진폐소(丹陽陳幣疏)」를 올려서 백성의 폐해가 되는 원인을 조목별로 올려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단양은 10년간 면세가 되는 특혜를 입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떠돌던 백성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단양향교(丹陽鄕校)를 중수하고 우탁(禹倬)을 배향하여 지방 내의 학풍을 일신하고자 노력하였다.
44세인 1560년(명종 15)에는 성주 목사가 되었는데, 역시 학교의 부흥에 전력을 다하였다. 전임 목사인 노경린(盧慶麟, 1516~1568)이 세운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증수하여 규모를 더욱 넓혔으며, 오건(吳健, 1521~1574)을 성주의 교관(敎官)으로 삼아 제자들을 모아 교육을 주관하고 감독하게 하였고, 매월 한 번씩 회강하여 글을 외우고 의문이 나는 곳은 토론하도록 하여 근면의 여부에 따라 상벌을 주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성주 동쪽에 공곡서당(孔谷書堂)·팔거현(八莒縣)에 녹봉정사(鹿峯精舍)를 세웠고, 그 결과 교화가 사방에 이르고 각자의 자질에 따라 성취한 자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황준량은 벼슬살이에 뜻이 없어 노년에 돌아가기 위해 죽령(竹嶺)의 아래에 있는 금계(錦溪)에 금양정사(錦陽精舍)를 짓고는 책을 보관하고 도를 강론하는 장소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어지기도 전에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꿈꾸던 금계에서의 노년의 삶을 시로 표현하였다.
“휘어 꺾여 맑은 산골 물을 따르고, 얽히고 돌아 끊어진 다리를 건너네. 언 구름이 돌구멍에서 피어나고 찬 눈이 소나무 끝에 쌓이네. 자리를 편 듯 바위 모양이 예스럽고 병풍을 두른 듯 산이 높네. 봄이면 한 초가집에서 돌아가서 고기 잡고 나무하면서 늙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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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이 바라본 황준량의 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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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은 황준량의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다고 평가한다. 물건이 생기면 모친을 봉양하거나 자매에게 나누어 줄 정도였지만 정작 본인은 장사를 지내는 날 상복이나 관하나 변변한 것이 없을 만큼 청빈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황은 그가 아름다운 산수를 지날 때 그냥 지나치지 못하여 풍경을 보며 배회하고, 시를 읊느라 밤이 되도록 집에 가는 것을 잊을 정도로 감수성이 풍부하고 속세에 미련이 없는 소박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 |
첫댓글 내 어릴 적 신문 들고 오는 형이 있었제요. 집이 산 속이다 보니 그 형이 반가웠니더. 그 형을 보고 싶구먼요. 그 때 본 신문이 동아일보였구요. 당시 동아일보 지국장은 18회 김하리님의 선친이셨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