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구간에 이어서 바로 6구간을 이어갑니다.
고동재를 넘음으로써 이제 완전하게 지리북부에서 지리동부로 들어섰습니다.
덕천(웅석)지맥을 보고 밤머리재를 보며 기산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산청땅이라!
산과 물을 따라 가다보니 산청의 옛 이름 산음을 떠올리며 경호강을 바라보는 느낌도 남다를 것 같습니다.
중국의 산음은 경호강과 회계산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산음은 어떨까요.
왕희지까지 거들먹거리며 살펴보는 맛도 대단할 것 같습니다.
웅석봉도 코앞일 것이니 어서 가봐야죠.
여기서 잠깐!
덕천지맥이라는 새로운 산줄기 개념이 나왔으니 여기서 지맥을 들여다보고 가기로 합니다.
그리고 지맥이면 지맥이지 덕천지맥은 뭐고 웅석지맥은 또 뭡니까?
여기서 지맥은 한자로 枝脈이라 씁니다.
보통명사인 支脈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이 枝脈도 그냥 혼자 있으면 보통명사이지만 물이름이나 산이름과 같이 쓰면 고유명사가 됩니다.
자, 그럼 지맥에 들어가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 지맥을 논하려면 산경표를 알아야 합니다.
산경표(山經表) 1.
고토는 이미 해동도리보 중의 산경표도 필사본(筆寫本)으로 익히 보았다. 과연 백두대간이니 정간이니 정맥이니 하는 산맥과 지맥(支脈)은 일본에서는 구경도 못하던 산지체계였다. 아니 일본은 물론 자신이 신줏단지로 떠받들고 있던 독일을 비롯한 서양지리학에서도 구경조차 못하던 개념이었다. 고토는 조선의 화려한 과거 문화를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실제로 인문지리학이 이 정도일 줄은 상상조차 못했었다.
신기했다. 신비감까지 느껴졌다. 백두대간이라는 산맥에서 산줄기뿐만 아니라 강줄기들도 다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선의 모든 산줄기와 산의 원천은 백두산이었고 그 백두산의 혼은 백두대간이라는 산맥을 따라 조선의 온누리를 다 적시는 것이었다.
조선인들은 산과 강을 둘로 보지 않고 그것들을 하나로 보고 거기에 기대어 살고 있었다. 하나의 산줄기가 다른 산줄기로 가지를 칠 때 그 사이에서는 물이 흐르고 그 산줄기들은 그 물들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반드시 잠기게 됨도 그 산줄기들은 말해 주고 있었다.
이른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다. ‘산자분수령’이 무엇인가? 실제 이 뜻은 ‘自’를 “스스로”가 아닌 “~으로 부터”라고 해석을 하여 “산은 분수령으로부터 온다.”로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독해법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산자분수령이 산경표 안으로 들어오면 해석을 달리한다. 이른바 관용구로 쓴다는 말이다. 즉 하나는 문법에 맞춰 “산은 분수령으로부터 온다.”고 하여 분수령을 고유명사로 파악하는 것 이외에 ‘自’를 “스스로”라는 부사로 해석하여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라는 보통 명사로 분수령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조선인들은 산줄기와 관련하여 후자를 산자분수령의 참뜻으로 새기고 있었다. 즉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못한다는 대자연의 진리. 그 말은 곧 두 산줄기 사이에는 반드시 물줄기가 나오게끔 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산줄기는 이 두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한다는 말이 되고, 그것은 역으로 산줄기는 물줄기를 감싸는 울타리가 된다는 말과도 같다.
고토는 산경표를 제대로 이해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산줄기 산행을 하다보면 삼면봉(三面峰)을 무던히도 많이 만난다. 세 개의 읍 · 면이 만나는 봉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우리가 편의상 붙여 부르는 이름이다. 분수령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어디나 분수령은 널려 있다. 보통명사라는 얘기다.
우리가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을 얘기할 때 쓸데없이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산자분수령은 산자분수령이다.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되므로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줄기는 산줄기를 구획한다는 말이다.
산경표에는 백두대간과 정간, 정맥이 나온다. 산경표는 산줄기에 계급을 주었다는 얘기다. 그렇다. 간(幹)은 줄기이고 맥(脈)은 줄기에서 흘러나간 갈래다. 맥이라는 게 무엇인가? 혈관 즉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산맥이란 산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즉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여러 산줄기들이 가지를 친다. 그 가지 줄기들은 강을 둘러싼 줄기와 그렇지 않은 줄기로 나누었다. 그러니까 강을 둘러싼 줄기를 주맥(主脈)으로 보고 그렇지 않은 줄기를 지맥(支脈)으로 보았다. 주맥은 정간과 정맥이었고 여타 줄기들은 다 지맥이었다. 곧 조선산맥을 중심으로 각 지맥이 작은 산맥으로 나뉘어져 간 것이었다.
고토는 이해했다. 조선인들은 물줄기를 따라 촌락을 형성하며 살았고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양쪽 지방의 풍습과 언어도 달라짐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곧 조선인들은 이미 산과 강을 다 꿰차고 거기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백두산을 숭배하며 백두산신이 천왕이고, 천왕이 국사대천, 천황이라 불리는 단군 아니던가!
두 가지만 없애면 가능할 것이었다. 단군과 백두산이었다. 단군은 역사를 조작하여 신화로 몰아버리면 될 것이다. 더군다나 그건 역사학자들 몫이니 자신과는 우선 무관하다. 그리고 백두산은 철저히 무시하면 될 것이다. 백두산의 의미 있는 봉우리에 일본 이름을 갖다 붙여놓으면 될 것인데 문제는 백두대간이었다. 조선인들의 의식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것이 ‘산은 한 줄기로 이어져 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인데 이걸 지워야 했다. 즉 산맥을 지워야 했다. 아니 지우는 것보다 그걸 토막 내어 잘라 없애고 그 토막에 조선인들이 쓰는 산맥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자. 그냥 갖다 붙이면 다시 이으면 그뿐이니 그걸 구조선의 다른 이름으로 만들어 발표하자. 그래야 조선인들은 당파 싸움 하듯 산맥이 옳으냐 산줄기가 옳으냐 서로 헐뜯고 싸우겠지. 나머지는 일본 정부에서 알아서 하겠고....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160쪽 이하
조선광문회 발간 산경표 해제(서문)
“우리나라의 지지(地誌)를 가만히 살펴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음을 지적하게 된다. 오직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의 산경(山經)만이 그 줄기[幹]와 갈래[派]의 내력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높이 솟아 어느 산을 이루고, 비껴 달리다가 어느 고개에 이르며, 굽이돌아 어느 고을을 둘러싸는지를 상세히 싣지 않은 것이 없기에, 이야말로 산의 조종(祖宗)을 알려 주는 표라 할 만하다. 산경을 바탕[綱]으로 삼고 옆에 이수(里數)를 조목[目]으로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범위와 경계를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니, 원전으로 삼은 산경에 금상첨화일 뿐만 아니라 실로 지리가(地理家)의 나침반(指南)이 될 만하다 하겠다.”고 적고 있다.
거듭 애기하거니와 이 조선광문회는 육당 최남선이 주축이 되어 만든 단체이다. 즉 1910년 일제의 문화 탄압과 고서적 등의 밀반출에 맞서 우리의 문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고전, 역사서 등의 발간을 목적으로 설립한 법인체다.
산경표는 ‘산의 조종(祖宗)’ 즉 산의 족보를 보여주는 표다. 이는 우리나라의 모든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흘러내리는 백두대간을 아버지 줄기(幹)로 하여 갈래(派)를 친다는 말이다.
가령 ‘조령(鳥嶺)’을 보면 ‘鷄立嶺 - 鳥嶺 延豐 東二十五里 聞慶 西二十七里 - 伊火峴’으로 표기하여 놓았다.
이는 ‘ 조령은 연풍 동쪽 25리에 있고 문경 서쪽 27리에 있다’고 하여 위치와 구간 간의 거리를 알려준다. 그리고 그 조령은 계립령 ~ 조령 ~ 이화현으로 순(順)으로 진행한다고 하여 백두산으로부터 지리산으로 향하는 산이나 고개의 순서를 보여준다. 그리고 조령 옆에는 ‘主屹山 聞慶治在南一里’라고 하여 ‘주흘산 - 문경치소가 남쪽으로 1리 떨어진 곳에 있다.’라고 하여 군현의 관청이 있는 고을 이름까지 나타낸다.
고로 산경표는 백두산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의 기본 산줄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주요 산이나 고개 사이의 거리, 관청이 있는 주요 지명 그리고 거기서 갈라진 주요 산줄기 등을 산 이름과 고개 이름을 중심으로 표로 일목요연하게 만들어 놓은 우리나라 산의 족보다.
가장 중시하여야 할 것이 바로 해제 즉 서문이다. 무슨 열쇠 내지는 단서가 숨어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산경표는 조선광문회에서 1913년 발간한 산경표 영인본을 말한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 산경표 영인본은 일제 강점기 그리고 4·19와 5·16 그리고 유신 등 어수선한 시대에 묻혀 있다가 1980년 지도쟁이 이우형에 의해서 발견된다. 이하 조석필과 양보경 그리고 현진상의 견해들을 참조하여 추적해 본다.
이 산경표가 발견될 당시 산경표의 편찬자는 조선 영조 때의 여암 신경준(1712~1781)으로 알려졌다. 그럴까? 산경표의 편찬자를 추적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조금 전 본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해제이다. ‘오직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의 산경(山經)만이 그 줄기(幹)와 갈래(派)의 내력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위 해제에서 얘기하는 ‘여지고’는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가리킨다. 여기서 ⓵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신경준이 저술했다는 것과, ⓶누군가 ‘여지고’를 보고 ‘산경표’를 만들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여지고’는 다음에 자세히 보겠다. 그러니 여기서는 위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해제(서문) 중 '여지고’의 ’산경(山經)'이라는 표현에 다소 주의하여야 한다. 좀 어렵다. 즉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의 ‘산천(山川)’이라는 소제목(內題)은 여암 신경준의 또 다른 저작이면서 같은 내용인 ‘산수고’의 ‘산경(山經)’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이다. ‘여지고’의 ‘산천(山川)'은 책의 소제목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적 성격이다. 반면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해제에서 말하는 '여지고의 산경'은 '산의 줄기(幹)와 갈래(派)의 내력'을 기술한 보통명사로 각각 이해하여야 한다.
산경표의 편찬자와 편찬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
옛날 책이 언제 펴냈는가를 파악하는 기준은 지질, 활자, 편집, 제본 방식 등 여러 가지를 보고 추정을 한다. 그렇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책의 내용에서 시대상을 찾아내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조선광문회본에서 여지고는 신경준이 편찬한 것이라고 했다. 반대해석을 하자면 산경표는 신경준이 편저자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찬자(撰者) 미고(未考)”라고 하여 “편찬자를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산경표’의 편자 등을 논의함에 있어서도 몇 가지 미리 전제해 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첫째로 ‘동국문헌비고’는 영조 46년(1770)에 간행되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여지고’는 신경준이 저술했다는 점, 둘째로 현재 전하고 있는 ‘산경표’가 최초의 ‘산경표’로부터 전사(轉寫)를 거듭하는 동안 사본 작성자가 임의로 그 내용을 변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제 ‘산경표’의 내용 중 중요한 사항 몇 가지와 관련 문헌들을 조석필의 분석을 참고하여 좀 더 세밀히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⓵산경표를 처음 발견한 이우형은 문헌비고를 원전으로 본다. 즉 신경준이 문헌비고의 산경표를 집필한 내용을 가지고 누군가가 집필한 것이며 편찬 시기는 순조가 즉위한 1800년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동국문헌비고가 1770년 편찬된 거라고 했으니 30년 정도 더 있다가 나온 책이 산경표라는 것이다.
⓶이에 박용수는 여지편람(輿地便覽)의 산경표를 원전으로 본다. 여지편람? 또 골머리 아프게 책 이름이 하나 더 나온다. 그래 여지편람은 또 뭔가? 지난 번 잠깐 봤었다.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백두대간을 위시하여 15개로 본 것은 해동도리보의 산경표나 여지편람의 산경표 모두 같다. 다만 해동도리보의 그것이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본 반면 여지편람의 그것은 1대간 2정간 12정맥으로 봤다. 즉 여지편람의 신경표는 낙남정맥을 정간으로 본 것이다. 한편 여지편람은 1769년 신경준이 영조의 명을 받들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두 책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책들의 제목이 재미있는 게 건곤(乾坤) 그러니까 ‘하늘과 땅’이라는 제법 주역(周易)의 냄새를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어쨌든 이 여지편람의 1부는 ‘건책(乾冊)’, 2부는 ‘곤책(坤冊)’ 이렇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 해당하는 건책은 ‘산경표’ 그리고 2부에 해당하는 곤책은 ‘거리정리표’라는 속제목이 각 붙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2부인 곤책은 볼 것도 없다. 다만 1책인 산경표만 보면 되는데 박용수는 이 건책이 산경표의 원전이며 당연히 그 편찬 시기는 1769년이라고 하는 것이다.
⓷현진상은 여러 가지를 감안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낸다. 첫째 산경표는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원전으로 하였다. 그리고 증정문헌비고도 보지 못하고 동국문헌비고만 보고 편찬된 것이다. 또한 “ **문헌비고 본문을 보면...”이라는 글에서 신경준이 산경표의 편찬자가 절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하나의 근거를 더 제시하는데, 영조의 묘호(廟號) 즉 임금이 죽은 뒤에 붙이는 이름인 ‘영종’을 제시한다. 즉 이 영종이라는 묘호를 근거로 지명을 살펴보면, 한북정맥 상에 있는 추모현은 원래 사현이었던 것을 영종45년에 개명을 한 것이라는 기록이 산경표에 나온다. 영조45년이면 1769년으로 영조는 1776년 사망하였으므로 최소한 산경표는 1776년 이후에 편찬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1769년 신경준이 편찬하였다고 하는 박용수의 이야기는 우선 설득력이 떨어지게 된다.
⓸학자들 중 산경표 혹은 우리 산줄기에 가장 관대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성신여대 양보경 교수는 역시 재조(在朝) 세력의 학자답게 눈을 일본으로 돌린다.
"일본 정가당문고(靜嘉堂文庫)에 전하고 있는 같은 제목의 ‘여지편람’은 전혀 다른 내용의 6책으로 된 조선 지도책"임을 밝히면서, ①내용은 다르나 이름이 같은 책이 있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영조가 ‘동국문헌비고’의 편찬 과정을 설명하면서 ‘여지편람’의 범례가 중국의 ‘문헌통고’와 비슷하다'고 언급하였으나, ②장서각본 ‘여지편람’은 (산경표와) ‘도리표’道里表(정리표)로서 ‘문헌통고’와는 체제가 다른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장서각본 ‘여지편람’을 영조가 신경준에게 감수를 맡겼던 책으로 추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좀 더 신중히 검토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산경표에는 19세기 초에 변화된 지명이 기재되어 있고 또한 ‘문헌비고’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저자를 신경준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산경표가 신경준이 편찬한 ‘산수고’와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양보경 교수의 얘기는 결국 산경표는 신경준이 편찬한 게 아니지만 여지고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얘기다.
이상으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서문과 산경표의 편찬자와 편찬시기 및 원전에 관한 대표적인 견해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보면 이우형, 현진상, 양보경의 견해가 비교적 서로 비슷한데 비해 박용수는 시기를 좀 이르게 본다.
정리하자면 필사본 산경표는 여러 권 있을 수 있다. 그러한 필사본 산경표 중 기술한 바와 같이 주목 받고 있는 두 가지 본이 규장각 소장의 ‘해동도리보’ 중의 산경표와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소장한 여지편람 중의 산경표다.
그리고 그 ‘산경표’는 영조 46년(1770)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중 신경준이 집필한 ‘여지고’의 ‘산천’을 보고, 순조 즉위년(1800) 경에 누군가 만든 것이며, 편자는 알 수 없지만 신경준은 확실하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에 덧붙여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서 즉 여지고나 산경표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공인한 책이었다는 것이다.
- 졸저 전게서 413쪽 이하
산줄기에는 계급이 있다.
그리고 산경표는 적당히 유교적 성향을 띠고 있다.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책이 다 그렇지 않겠는가! 산경표는 백두산과 백두대간을 아버지 줄기로 하여 정간, 정맥을 두었다. 그리고 산경표에서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사실 지맥(支脈)이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대간이나 정맥의 하위 개념도 암시해 주었다. 이는 성호의 지봉유설이나 이중환의 택리지 그리고 각 실록과 지리지에 무수히 나오는 개념이다.
요약하면 대간 - 정맥(간)만 두고 이들로부터 가지 치는 줄기는 지맥(支脈)이라고 하여 그 개념 정립은 후대로 미루어 두었던 것이다. 주의할 것은 선조들이 설정한 개념은 일단 지맥(支脈)이었고 이는 보통명사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산줄기 산행에서 쓰는 지맥은 지맥(枝脈)이라 하여 대한산경표를 따를 때 여기에 강(江) 이름이나 천(川) 이름을 붙여 고유명사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강을 산과 달리 보지 않았기 때문에 산줄기를 볼 때 항상 강과 연결하여 생각했다. 그러니까 가지 줄기들을 강을 둘러싼 줄기와 그렇지 않은 줄기로 나누었다. 즉 강을 둘러싼 줄기를 주맥으로 보고 그렇지 않은 줄기를 지맥으로 본 것이다. 주맥은 정간과 정맥이었고 여타 줄기들은 다 지맥이었다. 곧 조선산맥 즉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각 지맥이 작은 산맥으로 나뉘어져 간 것이었다.
그렇게 한 것이 백두대간을 비롯한 1정간 13정맥으로 모두 15개의 산줄기였다. 산경표는 그 산줄기마다 이름을 붙여주었다. 우리나라 산의 조종인 백두산에서 흘러내리는 줄기에는 그 위상에 걸맞게 ‘대(大)’자를 넣어 대간이라 했다. 물론 이름은 산 이름인 백두산과 지리산의 옛 이름인 두류산의 첫 글자를 따서 백두대간이라 했다.
그리고 모든 줄기들이 강을 따라 가다가 바다와 만나는 곳에서 맥을 다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강을 중심으로 이름을 붙이거나 그 줄기가 지나는 지방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산줄기 이름을 강에서 따온 것은 노년기 산지의 애매한 줄기의 이어짐을 역으로 물 흐름에서 찾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실제 산경표를 보면 산줄기들이 강을 따라 가다가 바다와 만나는 곳에서 맥을 다 하는 것은 장백정간, 낙동정맥, 한남정맥 그리고 낙남정맥 등에 불과하다.
어쨌든 대원칙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여야 함이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맞는 것이다. 산경표는 그렇게 이름 지은 13정맥이 청천강을 기준으로 한 청북정맥과 청남정맥, 한강을 에워싸는 한남과 한북정맥, 금강을 두른 금남과 금북정맥, 낙동강 좌우의 낙동과 낙남정맥,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임진북예성남정맥과 해서정맥, 호남정맥, 한남금북정맥, 금남호남정맥 등이다. 몇 번 얘기했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 백두대간
백두산에서 비롯해 지리산에 이르는 이 땅의 동서를 양분하는 기본 산줄기다. 여기서 장백정간과 13정맥 등 모든 줄기들이 갈라진다.
주요산은 백두산, 두류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이다. 북한과는 달리 남한은 산다운 산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총 길이는 약1608km, 향로봉까지의 남한 쪽이 도상거리로 671.5km고 향로봉부터의 북한 쪽이 936.5km다. 높이는 100m에서 2750m까지, 남한만 치자면 1915m까지다.
○ 장백정간
함경도 두류산2309m에서 두만강 하구의 서수라곶산으로 뻗은 산줄기이다. 만탑산2205m, 궤상봉2333m, 관모봉2541m, 백사봉1139m, 송진산1146m 등이 여기 있다. 지금은 관모봉으로 알려져 있는 장백산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장백산은 백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일대는 수치로 보아 알 수 있듯이 2000미터 이상의 산이 즐비해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이 줄기를 "조선의 알프스"라고 불렀다. 영국인이 일본의 야리기다케를 오르고는 일본알프스라 부른 걸 본떠서 붙인 이름이다. 서양 본뜨기에 목을 맨 일본인들의 짓일 따름이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우리도 이를 따라 하니 일본인들 욕할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알프스는 억새와 전혀 관계가 없을 텐데 천황산, 신불산, 재약산 있는 억새 천국을 영남알프스라 부르지 않나, 관공서가 나서서 충북알프스를 만들고 이에 질세라 전라도에서는 호남알프스를 만든 예가 그것들이다.
○ 낙남정맥
북쪽으로 줄곧 낙동강을 받드는 낙남정맥은 남부해안지방의 분계선으로 생활문화와 식생, 특이한 기후구를 형성시키는 중요한 산줄기이다. 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하여 남하하다 옥산614m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곡산543m, 여항산744m, 무학산763m, 구룡산434m, 대암산655m을 거쳐 낙동강 하구를 지키는 분산(盆山)에서 끝난다. 지금은 분성산이라고 한다.
'강 둘러싸기 원칙'을 따른다면 동쪽의 신어산630m, 그 낙맥(落脈)인 백두산353m까지 가야할 것이다. 이에 원칙에 충실하려면 낙동강 하구의 봉화산278m 쪽이 맞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는데 이는 현대적 해석일 뿐이라는 반론이 강하다.
낙동강 하구둑이 쌓이기 전까지는 분성산과 신어산에 기대 있는 고을 김해 앞을 흐르는 서낙동강으로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박성태의 신산경표는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규장각도서 ‘여지편람’의 산경표에는 낙남정간이라고 나와 있다. 그리고 이미 얘기했지만 택리지는 이 낙남정맥을 몰랐었다.
○ 청북정맥
청북정맥은 청남정맥과 함께 주의하여야 할 점이 있다. 이 두 정맥은 대간의 마대산 ~ 웅어수산2017m이 겹침줄기로 이름이 없는 무명구간으로 남아 있고 실제 정맥은 웅어수산에서 갈린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 웅어수산에서 청천강이 발원하여 이 강의 북쪽으로 흐르는 산줄기가 청북정맥이며 남쪽으로 흐르는 줄기는 당연히 청남정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북정맥은 이 웅어수산에서 청남정맥과 헤어지고 압록강 하구의 미곶산에서 끝난다. 산경표는 낭림산2184m에서 비롯한다고 하는데 이는 마대산과 웅어수산 사이에 있다. 고려시대 천리장성이 쌓였던 산줄기로 대암산1565m, 동림산1165m, 단풍덕산1154m, 비래봉1470m, 천마산1169m, 은창산931m, 법흥산160m 등이 주요 산이다.
○ 청남정맥
청천강과 대동강을 가르는 정맥이다. 웅어수산에서 서남진하여 대동강 어귀 광량진에서 잠긴다. 주요 산으로는 무동봉1762m, 묘향산1909m, 용문산1180m, 오석산565m 등이 있다
여기서 보듯 청남, 청북 정맥은 청천강과는 아무 상관없는 산줄기인데 이름만 빌려준 꼴이다.
○ 해서정맥
해서정맥과 임진북예성남정맥도 위 청북정맥, 청남정맥과 마찬가지로 겹침줄기를 가지고 있다. 두류산에서 화개산까지의 겹침줄기 구간이 그것이다. 따라서 해서정맥은 대동강과 임진 · 예성강 사이로 뻗은 정맥으로 화개산에서 시작하여 장산곶에서 맥을 다하게 된다. 주요 산은 가사산1361m, 동백년산1246m, 고달산866m, 대각산1277m, 언진산1120m, 멸악산816m, 불타산608m이다.
"산경표"는 고달산 아래 개연산까지가 백두대간이고 거기서 해서정맥과 임진북예성남정맥이 갈려 나간다고 하는데 개연산은 오늘날 지도에는 이름이 없고 대신 화개산1041m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정맥은 중부지방과 북부지방을 가르는 선이다. 그래서 식생과 농사가 이 선을 경계로 하게 된다.
○ 임진북예성남정맥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로 뻗은 정맥이다. 위에서 얘기한 대로 화개산에서 시작하여 진봉산에서 끝난다. 화개산 아래의 주요 산은 입암산1107m, 명지덕[산]911m, 율목산691m, 고주애산754m, 수룡산717m, 천마산762m 등이다.
○ 한북정맥
북쪽으로 임진강 남쪽으로 한강의 분수령이 된다. 백봉에서 시작한 한북정맥은 백암산1,110m, 법수령을 지나 휴전선 가까운 오성산1,062m, 철책 넘어 대성산으로 이어진다. 포천 백운산904m, 운악산936m, 서울 도봉 · 삼각산837m, 고봉산208m 등을 지나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 지점인 교하의 장명산102m에서 끝난다.
그런데 이 한북정맥은 당연히 한강이 바다와 만나는 합수점에서 끝나야 함에도 억지로 도성이 있는 한양 부근으로 끌어들이다 보니 산자분수령에 어긋나는 모양이 되었다. 논란이 많은 대목이다.
○ 낙동정맥
낙동강 동쪽 울타리를 이루는 산줄기다. 대간의 매봉[산]에서 시작하여 몰운대에서 끝난다. 주요 산은 통고산1067m, 백암산1004m, 주왕산721m, 단석산829m, 가지산1240m, 취서산1092m, 금정산802m 등이다. 경상도가 동쪽과 남쪽이 바다와 닿아있으면서도 내륙문화권으로 된 것은 이 낙동정맥과 낙남정맥 때문이다.
○ 한남금북정맥
한강과 금강을 나누는 분수령이다. 속리산 천왕봉1,508m에서 시작하여 말티고개, 선도산547m, 상당산성, 좌구산657m, 보현산481m을 지나 칠현산516m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이 갈라지면서 한남금북정맥은 끝이 난다.
○ 한남정맥
한강 유역과 경기 서해안 지역을 가른다.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 북쪽 2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칠장산492m에서 시작된다. 백운산, 보개산, 수원 광교산582m, 군포 수리산395m을 넘으며 김포평야의 낮은 등성이와 들판을 누비다 계양산395m, 가현산215m을 지나 강화도 앞 문수산성에서 끝맺는다.
○ 금북정맥
금강의 북쪽 울타리이다. 한남정맥과 헤어진 후, 칠현산516m, 안성 서운산, 천안 흑성산519m, 아산 광덕산699m, 청양 일월산560m, 예산 수덕산495m을 지난다. 산줄기는 예산 가야산678m에서 멈칫거리다 성왕산252m, 백화산284m 등을 거쳐 태안반도로 들어 반도의 끝 안흥진에서 끝을 맺는다
○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겹침부분이다. 대간의 영취산에서 시작하여 입봉637m 2킬로미터 남쪽 모래재 부근까진데 ‘산경표’에서는 이 종점을 주줄산으로 나와 있으나 주줄산은 지금의 운장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무명봉이다. 이 무명봉을 바로 옆에 있는 조약치에 착안하여 조약봉으로 부르자는 주장이 있다.
○ 금남정맥
금강의 남쪽 울타리를 이루는 산줄기다. 금남호남정맥 부분을 벗어나면 북쪽으로 머리를 튼다. 이후 운장산을 지나 왕사봉718m으로 향한다. 산경표는 다음 이어짐이 대둔산878m, 계룡산845m, 조룡대라고 하는데 이는 조선 말기에 유행한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아 '차기 수도'의 진산 계룡산을 넣기 위한 혹은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를 넣기 위한 고육책으로 보여 진다. 논란이 있는 줄기이다.
○ 호남정맥
섬진강을 싸고도는 산줄기다. 일명 조약봉에서 남으로 향해 사자산666m에서 동북향, 광양 백운산1218m에서 끝난다. 주요 산은 내장산763m, 금성산성573m, 무등산1187m, 천은산602m, 화악산614m, 조계산884m 등이다. 이 정맥의 남북주향은 조선시대 전라좌도와 우도의 경계이고 동북주향은 해양문화권과 내륙문화권을 가른다.
그러나 산경표라는 책에 근거한 이 백두대간시스템에는 몇 가지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첫째, 정간과 정맥의 위상 정립이다. 정간은 정맥과 차별화할 필요성이 없는데도 정맥의 상위개념인 것처럼 되어있는 바, 이를 같은 급으로 끌어내려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둘째는 13정맥 중 한남금북과 금남호남의 겹침 줄기를 독립된 정맥으로 볼 것인가 중복부분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다. 이름은 없지만 같은 모양의 ①백두대간과 해서 및 임진북예성남정맥 사이 부분, ②백두대간에서 청남북정맥이 갈리는 부분까지를 어떻게 취급할까도 문제다.
셋째, 잘못된 산줄기 방향을 바로잡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정맥이름의 대부분이 강에서 유래한 점에서 보듯 정맥은 강을 에워싼 산줄기다. 그래서 거의 강 하구에서 끝맺고 있는데 한북정맥과 금남 정맥은 이 원칙을 무시한다. 한북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오두산으로 가야할 것이 그 남쪽의 장명산으로 뻗었고 금남은 옥구로 향하지 않고 금강 중류의 부여 조룡대에서 마쳤다. 슬기롭게 풀어야 할 대목이다.
이 문제들은 뒤에 신산경표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기로 한다.
- 졸저 전게서 477쪽 이하
박성태 신산경표를 만들다.
뒤에 보겠지만 이 산경표가 우리 생활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컸다. 환경문제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찾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산경표를 제작한 시대와 지금은 많이 변했다. 하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하물며 2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 말해야 뭐하겠는가.
사실 산경표가 갖는 한계는 시대적인 상황에 비춰볼 때 편찬 당시에 이미 존재했다. 신경준이 쓴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 ‘산천총설1’의 우리나라 12종산의 제1산을 보면 백두산에 앞서 삼각산이 나와 있다. 또한 ‘산수고’의 ‘산경’에도 제1산은 ‘삼각산’이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당연히 code 1 즉 임금이 있는 도성 한양의 진산이 먼저 나와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겠는가. 당시 정치, 문화 등 모든 걸 장악하고 있던 유학의 영향이다.
그러니 한북정맥은 한강이 서해와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마쳐야 함에도 삼각산을 지나야 했기에 부득이 장명산에서 끝나는 것으로 매조지 했다. 그렇게 본다면 금북정맥의 끝이 계룡산을 지나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를 지나 부여로 가는 것도 이해가 간다.
어쨌든 이는 현대식 지리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더욱이 대동여지도의 정맥 줄기와도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다. 즉 해서정맥의 끝이 장산곶으로 가는 게 아니고 대동강 남쪽으로 가야하는 것이나 금북정맥의 끝이 군산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 호남정맥의 끝이 바다와 섬진강의 합수점으로 가야 하는 것 등이 그 예다.
물론 대동여지도 같은 고지도에 나오는 지명을 지금 지도에 대입하여 하나하나 꿰맞추는 데는 사실 무리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일단 그때의 그 상황과 지금의 상황을 지도 제작 취지에 맞춰 최대한 근접하게 작업을 하여 새로운 산경도를 그린다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박성태 선생은 이렇게 산경표라는 지리서를 오늘날의 현실에 맞게 재해석한다. 산줄기 주행의 오류를 시정하고 겹침줄기 문제점을 해소한다. 그러고는 나아가 그 하위개념인 기맥과 지맥을 확립하고는 거기에 걸맞은 이름을 부여하기에 이른다. 이는 세인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 통일된 산줄기 이름을 부르게 할 수 있게끔 한 것이다. 필자는 선생의 이 작업은 실로 위대한 것이어서 우리나라 산줄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고 본다.
“그래? 그 정도야? 그런데 신산경표는 나름대로 비판을 받기도 하는 것 같던데?”
“누구나 어느 정도의 비판은 받는 거 아니겠냐. 자기 견해랑 맞지 않는다면 말이야. 하지만 우리나라 산줄기 문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up-grade 시킨 것만큼은 확실해. 물론 불경스럽게도 신성한 경전(?)인 산경표를 건드렸다는 주장은 경청할 만 하지. 특히 신백두대간을 만들어 백두대간을 건드렸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 불만의 목소리가 크지. 그리고 단시간 내에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혼자 일일이 작업을 하다 보니 독단으로 흘렀다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어.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과(過)보다 공(功)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해”
“하나하나 살펴줘. 무슨 얘긴지 모르겠어.”
신산경표의 특장(特長)
①산줄기 주행의 오류 시정
우선 가정(假定)이 필요하다. 이하 산경표와 신산경표에 나오는 지명들은 현재의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나오는 그것들과 최대한 일치하게끔 표기된 것이라 인정하기로 한다. 산경표는 원칙적으로 지형적 원리에 따라 선을 그으면서 10대강을 구획하는 산줄기를 ‘큰 산줄기’로 삼았고 신산경표 역시 이 원칙을 따랐음은 물론이다.
즉 정맥은 10대강을 구획하여야 한다. 한편 산경표가 위에서 본 것과 같이 당시의 유교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정맥의 주행이 도읍지 혹은 도성을 지나는 형식으로 그어졌다. 신산경표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그 하구로 주행하게끔 유도한 것이다. 이로써 가령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은 한강 하구로 가게 되었고, 호서정맥과 금강정맥은 금강 하구로, 호남정맥은 섬진강 하구로 그리고 낙동정맥과 낙남정맥 등은 낙동강으로 가게 되었다.
이는 북한 쪽의 관북정맥이나 해서정맥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맞춰 그 이름에도 변화를 주어 금남정맥은 금강하구로 주행을 하므로 산경표와 구분하기 위하여 금강정맥으로, 금북정맥의 경우에는 호서정맥 등으로 그 이름도 현실에 맞게 변화를 줬다.
여기서 주의하여야 할 것은 산경표에서 보이지 않던 이름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호서정맥이니 관북정맥, 관서정맥, 금강정맥 등이 그것이다. 이 이름을 바꾸고 정맥의 주행을 이동시키는 것들이 산경표 신도(?)들의 노여움을 사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②겹침줄기 문제의 해소
사실 신산경표의 최대 특장(特長)이라고 한다면 기술한 바와 같이 모든 정맥들의 끝을 10대강의 하구로 진행케 한 것이다. 이것은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부합한 것임은 틀림없다. 그에 더하여 한남금북정맥이나 무명으로 있던 겹침줄기들의 문제도 해소하면서 그에 따라 명칭도 확정한 것에 있다 할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아까 얘기한 바와 같이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친 청북정맥과 청남정맥의 겹침줄기와 해서정맥과 임진북예성남정맥의 겹침줄기 그리고 남쪽의 한남금북정맥과 금남호남정맥 등 4개의 산줄기가 문제의 그것들이다. 우선 좌측의 지도를 보면 10대강인 청천강이 백두대간에서 바로 발원하는 물줄기가 아니고 백두대간 상의 소마대령 분기점에서 서쪽으로 약 56.7km 진행한 곳에 위치한 웅어수산2019m에서 가지를 친 청북청맥과 청남정맥의 분기점에서 발원하는 강이고, 예성강 역시 바로 백두대간에서 발원하는 강이 아닌 백두대간이 남진하여 약643.1km 지점에서 만나는 두류산1323m에서 서진하는 줄기가 87.1km지점에 이르러 양지봉 분기점을 만나서 두 갈레로 갈라지게 되는 이 골짜기에서 발원하는 강이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청천강이나 예성강은 백두대간에서 발원하는 10대강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산경표에서는 이를 한남금북정맥이나 금남호남정맥 같이 독립된 정맥 이름을 부여함이 없이 그냥 무명(無名) 즉 이름이 없는 줄기로 남겨두었다고 신산경표는 추정하고 있다.
이런 불합리한 점을 신산경표는 청천강 쪽은 더 긴 쪽인 청북정맥 쪽으로 붙여 그 끝은 압록강 하구로 가게 하면서 그 이름은 기존의 청북정맥과 구분하기 위하여 그 지역의 이름을 따서 관서정맥으로, 짧은 쪽인 청남정맥은 대동강 하구로 향하게 하고 그 이름은 청천정맥으로 변화를 꾀했다.
여기서 몇 개의 문제점이 발견된다. 우선 관서정맥의 경우 이 이름은 타당한 것이어서 만약 청북정맥을 고수하려 했다면 그 줄기의 끝은 청천강 북쪽으로 향해야 했을 것이다. 문제는 청천정맥에 있다. 청천정맥은 청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음에도 대동강으로 향했다. 이 줄기는 청천강을 싸고 있는 줄기이므로 당연히 청천강 남쪽으로 가야했고 그 이름은 당연히 지금같이 청천정맥으로 했으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설이지만 신산경표의 이 청천정맥은 대동강으로 갔으므로 아예 대동정맥으로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필자의 이 주장은 해서정맥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즉 해서정맥은 대동강 남쪽으로 가면서 이름을 아예 대동정맥으로 고쳐야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한다면 예성정맥은 예성강 하구로, 한북정맥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으로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신산경표는 위 청천강 줄기와 마찬가지로 정리했다. 즉 두류산에서 갈라지는 줄기는 더 긴 쪽인 해서정맥에 그 겹침줄기 두류산~양지봉 분기점을 포함시켰다. 그러고는 그 줄기의 끝을 기존의 장산곶에서 대동강 하구로 향하게 하면서 다만 그 이름만은 해서정맥으로 그대로 두었다. 그러고 양지봉 분기점에서 남진하는 임진북예성남 정맥은 그 이름만 예성정맥으로 단순화하는 변화를 주었던 것이다.
이런 작업은 남쪽의 한남금북정맥이나 금남호남정맥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즉 위와 같은 절차를 거쳐 한남금북정맥은 금북정맥에 포함시키되 그 정맥의 끝을 금강으로 가게하고는 그 이름을 호서정맥으로 명명했다. 같은 방법으로 금남호남정맥의 경우에는 더 긴 쪽인 호남정맥에 편입시키고, 금남정맥은 그 끝을 역시 금강 하구로 주행을 변경시키면서 이름도 금강정맥으로 바꾸어 남한의 1대간 9정맥을 1대간 7정맥으로 변경 시키는 작업이 완성되었고 이것이 실제 신산경표의 핵심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리고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이 원리들이 고스란히 그 하위 개념인 기맥이나 지맥에도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③기맥(岐脈), 지맥(枝脈)의 정립
기맥이라는 용어는 실제 조석필 선생이 '태백산맥은 없다'에서 제안한 개념이었다. 그것을 선생이 적극 수용하여 신산경표에서 12기맥을 그 이름과 함께 제시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산경표는 남한의 산줄기를 1대간 7정맥 6기맥 157지맥(최근에 162지맥으로 수정)으로 산줄기를 그었다. 이는 그만큼 우리나라의 산줄기 범위를 확장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기맥이나 지맥도 강의 세력에 따라 구분이 되었다. 겹침줄기가 있는 경우에는 그 줄기의 끝이 반도를 향하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상위등급의 강을 따르는 줄기를 본줄기로 하였다. 그리고 동일등급에서는 긴산줄기를 본줄기로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신산경표 32쪽).
④신백두대간의 설정
모두(冒頭)의 지리산 구간에서 밝힌 바 있다. 하물며 지맥이나 정맥도 합수점인 물을 만나 그 맥이 다하게 되는데 백두대간의 끝이 바다가 아닌 지리산 천왕봉이라는 데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리고 백두대간의 끝을 돌려 노량으로 진행하게 한다. 즉 영신봉 ~ 천왕봉 구간을 영신봉 ~ 노량 구간으로 돌린 것이다. 산경표 교도들의 신산경표에 대한 저항이 극심하게 이는 부분이 바로 여기다. 이미 자세하게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산경표의 치적은 통일이나 민간 차원 혹은 남북한 정부 차원에서의 교류 및 통일된 산줄기 논의에 대비하기 위하여 북한 쪽의 산줄기도 같은 방식으로 모두 정비하였다는 점에 있다 할 것이다.
이는 사실 우리나라 지리학자들이 그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운 지질학 용어나 거들먹거리고 있을 때 실제 우리나라 지형을 연구하여 선을 긋고 이름까지 지어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은 사실 대단한 역작이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신산경표가 모든 면에서 완벽하여 책 그대로 타당한 것인가? 즉 혹시 박성태 선생이 우려한 주줄기 문제, 산줄기의 주행 문제 그리고 이름 문제 등은 다 타당하여 맹목적으로 그대로 수용해도 괜찮은 것인가?
이에 대하여 산경표가 강을 중심으로 산줄기를 파악하였기 때문에 이는 정맥 이하의 산줄기도 고스란히 타당하여 산자분수령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유력한 주장이 있다. 이는 산줄기의 이름도 신산경표와는 달리 산경표의 취지에 맞춰 ‘강’이나 ‘천’ 이름을 따야한다는 이론이다. 대한산경표의 입장으로 ‘산으로’ 박흥섭이 정리한 개념이다. 타당한 주장으로 산자분수령의 취지에 부합한 새로운 책으로 세상에 태어나길 기대한다.
어쨌든 조석필 선생은 이전에 "산경표가 지리 인식의 원리를 충분히 제시해 주었고 우리는 그것만이라도 배워왔으면 족하다."고 하였다. 우리가 산경표를 더욱 깊게 연구하여 그 근본 취지를 제대로 배워야 하는 이유다.
- 졸저 전게서 503쪽
위 신산경표의 발간은 실로 우리나라 산줄기사山經史에 있어서 일대혁명이라 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산경표에서 대간과 정맥을 배운 산꾼들은 제 이름을 가진 기맥과 지맥으로 뛰어들었고 지맥만을 전문적으로 다니는 산악회도 결성이 됐습니다.
그러고는 기맥에 이어 162개 전지맥을 완주한 이들도 속속 완주자 명단에 그 이름을 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산경표의 지맥을 걷는 이들은 그야말로 산에 관한 한 '베테랑'이라는 타이틀을 꿰차게 되었다는 얘기도 되고 뭇산꾼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얘기도 됩니다.
그 당시 유행하던 말 그대로 '로망'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편에서는 신산경표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면서도 비판하는 목소리도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산경표가 산경표의 기본 정신인 '산자분수령'에 온전하게 충실하지 못하다는 얘기였습니다.
즉 기맥이나 지맥 등의 산줄기가 맥을 다하는 곳이 박성태 선생 스스로 밝히신 대로 그 산줄기와 관련한 두 물줄기의 합수점으로 가는 게 아니라 그저 산줄기가 가장 긴 방향으로 진행하여 물에 잠긴다는 것을 지적하는 얘기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無에서 有를 창조한 신산경표는 그 탄생 과정이 어려웠지만 이미 신산경표로 학습효과를 본 이들의 작업은 신산경표의 작업만큼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그 결과물의 대한산경표입니다.
대한산경표는 기맥이나 지맥의 구분을 없애고 정맥 이하의 산줄기들을 모두 지맥으로 일원화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맥의 끝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을 하여 ①온전하게 합수점으로 가게끔 그었으며, ② 두 물줄기와 관련한 합수점은 아니지만 한 지맥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물줄기라면 관련성을 인정해 주자는 취지로 그 산줄기도 살려서 지맥으로 인정하였으며, ③ 바다나 큰 호수 같은 곳으로 잠기는 지맥급의 산줄기가 있다면 이것도 대한산경표의 취지에 맞게 지맥으로 인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신산경표와 마찬가지로 30km 이상으로 하되 신산경표와는 달리 '강의 유역' 개념은 무시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니 대한산경표는 신산경표를 비판한 게 아니라 신산경표의 토대 위에서 '산자분수령'의 정신을 충실하게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사회과학의 발전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신산경표와 대한산경표의 차이점은 제17구간인 오미마을 ~ 난동마을 구간을 할 때 예를 들어가며 들여다 보기로 합니다.
자, 그럼 구간을 이어갑니다.
지도 #1
2018. 3. 31. 10:15
5구간의 끝이자 6구간의 시작인 수철리 마을회관 앞입니다.
회관 앞을 지나 바로 좌틀하여 마을을 빠져나가면,
시멘트 농로를 따라 걷게 됩니다.
촌로께서 밭갈이를 하시다가 한 마디를 건네십니다.
뭐라도 먹고 다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산은 혼자 다니는 게 아니라고 하시는군요.
당신께서는 곰도 만나고 멧선생도 만나곤 하였으니 지리산에서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동네 부근의 개가 더 무섭다고 응수(?)를 하니 파안대소 하시는군요.
건강하시라 말씀드리고 자리를 뜹니다.
이 수철리에서는 확실하게 필봉산과 왕산이 조망되는군요.
여기서 둘레길은 잠시 밭두렁을 타고 진행해야 합니다.
갑자기 길이 없어지는 것 같으니 둘레꾼들은 잠시 당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산꾼들이라면 그럴 필요는 없죠.
앞을 길게 그리고 멀리 보면 표지띠도 휘날리는 게 보일 수 있고 만약 그게 안 보인다면 사람 다닌 흔적 같은 게 바로 앞길을 따라서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 길을 따라 눈길을 주면 다 보이게 돼 있습니다.
가운데 깊게 파인 곳.
쌍재입니다.
그 좌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멀리 왕등습지 부근이 보이며 바로 앞의 756.3봉이 거대하게 다가옵니다.
언덕을 내려가니 지막마을로 들어섭니다.
우측으로 오르면 소위 지막계곡으로 여름에는 발디딜 틈조차 없는 유원지겠군요.
그 유원지는 향양천을 따라 조성되었을 것 같습니다.
10:26
지막2교 다리 앞에서 좌틀합니다.
756.3봉.
왕산에서 쌍재로 내려오는 줄기 모습.
그러고는 고동재와 산불감시탑이 있었던 641.4봉 그리고 쌍재 전경입니다.
10:34
도로를 따라 지막마을 표지석이 있는 입구로 나옵니다.
지도 #1의 '가'의 곳으로 여기서 59번 도로를 만납니다.
이 59번 도로는 지맥꾼들에게는 반가운 길입니다.
밤머리재로 오르는 길이기 때문이죠.
밤머리재를 지나 천왕봉으로 가는 삼장면과 시천면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둘레길과는 남명 조식의 산천재가 있는 덕산에서 한 차례 더 만날 것입니다.
둘레길 개통 당시의 루트는 지막 마을 표지석 맞은편 길을 따라 신촌교를 지나 평촌마을로 들어갔을 겁니다.
그런데 59번 도로 ~ 평촌마을 부근의 약2.3km 구간에 항노화 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2019년 4월까지는 부득이 둘레길을 우회하여 진행하여야 하는군요.
그 안내 팻말입니다.
시키는 대로 항양교를 건너 우틀하여 59번 도로를 따라 갑니다.
뒤로 필봉산858.2m이 보이는군요.
어쩌면 저 필봉산이 산청 사람들에게는 왕산보다 더 의미 있을 산 같아 보입니다.
덕천지맥과 우측 끝이 왕등습지.
아주 재미있는 암자입니다.
아니 암자이기 보다는 사주팔자를 봐주는 점집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도로 양 옆으로는 인간의 길흉화복에 관한 온갖 글귀를 다 적어놓은 팻말을 걸어놓고는 궁금하면 들어오라는 겁니다.
암자 이름 또한 '성공사'이니 기복신앙에 투철한 곳 같습니다.
공사장 가리개 뒤로 기산 줄기와 우측 가라앉은 곳이 밤머리재.
지도 #2
10:59
평촌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우틀합니다.
좌측으로 보니 중앙으로 용두봉342.2m이 조망되고 그 우측으로는 와룡산416.7m과 상여봉508.9m입니다.
와룡산은 상여봉에 묻혀서 그 윤곽만 볼 수 있군요.
해동선원이라.....
예전 폐교된 초등학교 자리에 절이 들어섰습니다.
이순신장군, 세종대왕 그리고 이승복 어린이까지....
예전 동상이 아직 건재하군요.
평촌교를 건너 우틀하여,
고개를 넘어,
공사현장을 들어선 다음,
저수조 앞에서 좌틀합니다.
이 정도에서 원래의 둘레길에 합류합니다.
공단이 조성된 다음 둘레길이 어떻게 바뀌게 될 지 모르겠지만 이 부근에서 합류가 될 것은 확실시 되어 보입니다.
그런데 공단으로 들어서게 되면 이 우횟길이 확포장 될 것 같아 보이니,
함양오씨 가족묘는 이장해야 하거나,
고마운 대장마을 주민도 토지 수용에 따른 이주 대택을 마련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금서천 건너 한국항공우주와 오뚜기 공장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고,
둘레길은 마을을 빠져나오는데 이쯤되면 공사장의 소음소리보다는,
대전 · 통영 고속도로의 차량의 질주하는 소리가 더 시끄러워집니다.
고속도로 뒤로 산청의 진산 꽃봉산237.5m이 손짓하고, 그 꽃봉산 뒤로 둔철산823.4m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청읍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입니다.
대장마을을 돌아봅니다.
대장교를 건너면,
금서천이,
경호강에 합류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제껏 엄천으로 주행을 하던 물줄기도 남강을 만난 다음 산청으로 들어오게 되면 잠시 경호강으로 그 이름을 바꿉니다.
예전 중국을 그렇게도 숭상(?)하다 못해 모화慕華까지 한 조상들 덕입니다.
하동의 악양이 중국 호남성의 그곳을 빼다 박았다고 억지로 치부를 하였다면, 이 산청은 중국 절강성 소흥현의 산음과 비견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정말 산청은 장난이 아닙니다.
지리산 북서쪽에서 흘러온 이 물 뒤로 용두봉과 444.6봉 그리고 그 우측으로 와룡산과 상여봉이 에워싸고 있고,
경호1교 뒤의 옥산의 옛 환아정 자리는 주위 풍광과 어우러져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시가 저절로 나올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음풍농월이라는 말이 고대로 어울리는 곳입니다.
저 꽃봉산에 올라 내려다보는 강과 둘러보는 지리산이나 둔철산 그리고 와룡산의 맛은 또 어떨까요?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될 것 같지 않으니 올라가봐야겠습니다.
..................
경호강 천변을 걸어 경호강 1교로 오릅니다.
길 건너 들레길 산청센터가 있으나 그냥 통과.
다리를 건너면서 웅석봉을 보고,
좌측으로 환아정이 있던 산청초교와 그 뒤의 용두봉을 봅니다.
남강 구간 중 산청 지역을 특히 경호강이라고 부른다. 그 경호강 1교를 건너면서 금서면을 떠나 산청읍으로 들어서게 된다. 경호강과 회계산이 어울러져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이곳을 옛 선인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 같다.
사실은 예전에 이곳에는 ‘환아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지금의 산청초교 본관 자리가 바로 그곳이다. 밀양의 영남루, 진주 촉석루와 더불어 영남 3대 누각으로 알려진 정자였다. 산청의 옛이름 산음은 중국 절강성 소흥현 산음(상해 바로 아래의 紹興市)의 빼어난 산수와 비견된다고 하여 거기서 따온 이름이다. 그 중국 산음의 대표적인 인물로 문학가이자 서예가인 왕희지(307~365)가 있으니 그와 관련된 일화가 없을 리 없다. ‘백아환자白鵝換字’라는 고사 즉 ‘유난히 거위를 좋아했던 왕희지가 흰 거위白鵝를 얻기 위해 ’도덕경‘을 자신의 필체字로 써서 그 둘을 바꿨다換.'는 유명한 고사에서 따와 정자를 지으면서 창건 당시 뛰어난 선비였던 권반權攀이 ‘환아정換鵝亭’이라 이름 지었고 그 현판의 글씨는 당대 최고의 명필 한석봉이 썼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소실됐고 다시 복원된 것이 한국전쟁 때 또 소실되었으나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들어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이곳을 지나면서 시를 지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남주헌(1769~1821)은 함양군수 재직시 1803. 3. 산청현감 정유순鄭有淳, 진주 목사 이낙수 등과 함께 지리산을 산행하였다. 지리산에 가는 도중 산음에 들르면서 이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주변을 이렇게 그렸다.
“정자 아래로 강물이 흘렀고, 강가에 절벽이 임해 있었으며, 예쁜 꽃과 길쭉한 대나무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곳의 옛 지명은 산음山陰이다. 그래서 산은 회계산會稽山이라 일컫고 물은 경호강鏡湖江이라 이름하며, 왕일소王逸少(필자 주 앙희지)의 고사를 본떠 환아정을 지은 것이다. 여기는 내가 여러 차례 본 곳이다.”
그렇게 둘러보고는 산음을 떠나면서 시 한 수를 읊는다.
稽産鏡水繞空臺 회계산과 경호강이 빈 누대를 감싼 자리
癸丑春年上巳會 계축년(353년)의 봄날이 상기일과 겸해 돌아왔네
그러면서,
籠鵝已去沙鷗至 거위 안고 떠나가니 갈매기만 날아오고
道士難逢洞客來 도사 상봉 어려우니 동객만 찾아오네.
경호강은 위에서 봤다. 그렇다면 위 시에서 얘기하는 회계산은 어딜까? 대동여지도와 조선지도에도 있는 바, 현재 지도에는 회계산의 위치가 불분명하다. 위 옛날 지도에 의하면 회계산은 ‘동산’의 북동쪽 정곡 마을 좌측에 있다. ‘비변사인방안지도’와 광여도에 의하면 ‘관문으로부터 5리 거리’라고 되어있다. 그걸 경우 ‘동산’이 현재 산청의 진산인 꽃봉산237.5m이라고 하니 회계산은 지금의 와룡산416.7m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전 그러니까 1489년 4월 봄이 무르익은 계절에 탁영 김일손도 지리산 유람을 떠나면서 이곳을 지났다. 그는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기문記文을 보니, 북쪽으로 맑은 강을 대하니, 유유하게 흘러가는 물에 대한 소회가 있었다. 그래서 잠시 비스듬히 누워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다. 아! 어진 마을을 택하여 거처하는 것이 지혜요. 나무 위에 깃들여 험악한 물을 피하는 것이 총명함이로구나. 고을 이름이 산음이고 정자 이름이 환아換鵝니, 아마도 이 고을에 회계산會稽山의 산수를 연모하는 사람이 있었나 보다. 우리들이 어찌 이곳에서 동진東晉의 풍류를 영원히 이을 수 있겠는가.”라고 소회를 밝혔다.
그림 같습니다.
우측 문필봉.
그리고 좌측 기산.
기산 줄기 뒤로 웅석봉 줄기.
다리를 건너 로타리에서 우틀합니다.
래프팅 운영업소들....
경호강은 래프팅 천국 맞죠?
플라이 낚시를 즐기는 이들도 있고.....
브래드 피트의 '흐르는 강물처럼'도 떠오르고.....
웅석봉1099.9m.
꽃봉산을 보고......
웅석봉이 있는 덕천지맥 줄기.............
12:20
꽃봉산 오르는 길 옆에 있는 비석.
오랜만에 보는 문구입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유신헌법의 잔재.
그 경력이 있던 분위 비석이군요.
강재범이라는 분인데 그분이 이 내리교 가설을 할 때 도움을 주셨군요.
불망비입니다.
그 옆으로는 정자도 있고......
내리교를 건넙니다.
고속도로 좌측의 기산과 우측의 문필봉.
꽃봉산.....
내리교 다리를 건너면 길은 두 갈레로 갈립니다.
A코스 내리교 ~ 지성(1.1km) ~ 지곡사지(1.7km) ~ 선녀탕(1km) ~ 바람재(2.6km) ~ 성심원(1.9km)의 8.3km 구간과
B코스 내리교 ~ 내리한밭(1.6km) ~ 바람재(2.6km) ~ 성심원(1.9km)의 6.1km의 구간이 그것입니다.
A코스는 산으로 올라 선녀탕을 경유하는 코스인 반면 B코스는 경호강을 따라 거의 천변을 걷는 코스입니다.
산청에서 얘기하는 회계산을 가보기 위해 잠시 천변으로 나섭니다.
산청에서는 하수종말처리장 옆의 213.2봉이 회계산이라고 하니,
12:35
하수종말처리장을 보고,
그저 밋밋한 회계산을 찾아보는데 전화벨이 울립니다.
노모께서 빨리 올라오라는 엄명입니다.
오늘 운리까지 진행하여 단속사지를 꼭 보고 올라가려고 했는데.....
노인네를 설득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우니....
바로 뒤로 돌아섭니다.
산청읍으로 돌아가 버스 시간표를 보니 2시 15분 버스가 있군요.
짬뽕 한 그릇에 소주를 반주로 하산식을 하고 근처 목욕탕으로 가 땀을 닦고 옷을 깨끗하게 갈아 입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