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화유산이 살아있는 목포를 가다'숨보기방' 멤버들의 목포 나들이
24.11.16 14:57l최종 업데이트 24.11.17 10:19l 오문수(oms114kr)
지난 12일, 여수시 국동 작은도서관에서 글쓰기 공부하는 멤버 8명이 목포 여행에 나섰다. 멤버의 명칭은 '숨보기방'이다. '숨보기'는 '숨어있는 보석을 찾아내기'라는 말의 줄임말이다.
세상 사람 모두는 각자가 가진 재능과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특히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자신만의 역사가 있다. 어떤 이는 "내 얘기를 글로 쓰면 소설 한 권은 족히 될 것이여!"라고 말한다. 회원들 모두 50이 넘었으니 소설 한 권은 나올 만한 나이다. 도서관에 모인 이들은 글쓰기 공부를 하며 자신들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글로 엮어 SNS를 통해 세상 사람과 소통한다.
▲목포항에서 요트를 타고 목포시가지를 둘러보는 일행들 ⓒ 오문수관련사진보기
오전 8시 반, 여수를 떠난 회원들의 목적지는 목포다. 목포에 대한 글을 쓰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았다. '목'이라는 의미는 어디서 왔을까? '목'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큰길에서 좁은 길로 들어가는 어귀 즉, 길의 중요한 통로가 되는 어귀'라는 뜻이다. 대표적인 것이 '길목'이다.
따라서 목포는 영산강과 바다가 만나는 '길목'에 위치한 포구라는 의미다. 15세기 이전까지는 나주 땅 영산포 인근을 '길목'으로 인식해 그 일대를 목포라 칭했다. 시간이 흐른 1439년 오늘날의 목포 땅에 수군 기지인 '목포진'이 설치되면서부터 현재의 목포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멋진 요트를 타고 목포의 상징인 유달산과 고하도, 삼학도를 유람하다
목포에 도착한 일행의 첫 번째 스케쥴은 요트를 타고 목포의 상징을 돌아보기다. 목포를 여러 번 방문했지만 해상에서 바라보는 목포 시가지 모습은 달랐다. 유달산을 배경으로 산뜻한 건물과 거리들. 마치 유럽의 어느 항구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목포시가지 모습을 미니어처로 재현한 모습. 당시 목포가 얼마나 번성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 오문수관련사진보기
▲일제강점기 목포시가지 모습으로 목포 오거리는 목포 상업의 중심지였다. 오거리는 조선인마을, 일본인마을, 목포항으로 이어지는 다섯 길이 교차하는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오거리 주변에는 식당, 주점, 잡화점, 여관, 사진관 등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 오문수관련사진보기
목포 해상의 상징이 삼학도와 고하도라면 육상의 상징은 유달산이다. 유달산은 세 개의 봉우리와 기암괴석 때문에 '호남의 개골산'이라고도 불린다. 근데 '고하도'의 유래를 알고 나면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
'고하도(高下島)' 뜻을 보면 '높은 산 아래에 있는 섬'이라는 뜻이니 '유달산'이 높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쩌면 좋을까? 유달산 높이가 해발 228m에 불과하니. 어쨌든 목포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지명은 유달산, 고하도, 삼학도다.
근대도시로의 변화를 꿈꾸며 자주적으로 개항한 목포
유달산 아래 150호 남짓한 몇 개 자그마한 촌락이었던 목포가 근대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계기는 1897년 '칙령개항' 때부터이다.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간섭을 배제하고 1897년 10월 1일 고종이 칙령으로 목포 개항을 선언했다.
이 점에서 1875년 강화도조약에 의거해 강제로 개항했던 부산, 원산, 인천의 타율적인 '조약개방'과는 성격을 달리했다. 개항 과정에서 보인 자주적 분위기는 목포의 도시 건설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조선 정부는 일본인의 토지 소유와 매립을 최대한 규제해 일본인의 영향력 확산을 견제하고 조선인이 중심에 설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힘이 약해진 조선으로서는 엄청난 힘으로 불어닥치는 외세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1909년 체포된 의병들이 목포의 일본국 헌병대에 끌려와 친일파 전라감사의 훈시를 듣고 있는 사진으로 뒤에일장기가 걸린 일본영사관 건물이 보인다. ⓒ 오문수관련사진보기
▲'국도1.2호선 기점' 비석목포가 국도1.2호선 기점지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국도1.2호선 기점' 표지석 모습 ⓒ 오문수관련사진보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수탈의 목적하에 근대도시 건설에 나섰다. 1911년에는 목포-서울-신의주로 이어지는 국도 1호선이 개통되었고, 1914년에는 목포-부산으로 이어지는 국도 2호선과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목포에서 전국으로 이어지는 교통망이 구축되었다.
1920년대 이후에는 도시 계획이 본격화되고 항만 및 부대설비 등이 갖추어지면서 근대 항구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목포가 근대도시로 발전하자 일본인들도 목포에 대거 이주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는 인구가 6만을 넘어 전국 6대 도시로 발전했다.
근대문화유산 1관과 2관을 돌아보는 동안 길 양쪽에는 많은 일본식 건물과 1960년대에 보았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회원들의 입에서 "아~!" 하는 탄식이 나왔다. 일본인들의 조선수탈의 상징인 일본영사관, 동양척식주식회사, 오거리문화센터, 눈에 익은 만화방, 세탁소 등등.
▲근대문화유산이 살아있는 목포시가지 모습 ⓒ 오문수관련사진보기
▲일제강점기 시절 식민지 경영의 수탈 창구 역할을 한 동양척식주식회사 모습. '척식(拓殖)' 이란 '넓히고 불린다' 하는 뜻으로 수탈을 의미한다 ⓒ 오문수관련사진보기
조선을 수탈의 대상으로 여겼던 일본영사관은 일본인 보호와 일본 상인들의 이권을 보호하며 목포항을 통해 전남의 쌀과 다양한 수산물을 일본으로 반출했다. 이에 반발한 목포 사람들은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도 하고 소작쟁의 등을 통해 일본에 저항하기도 했다. 수탈 대상이 되었던 조선인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이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란 노래가 되어 한국인의 애창곡이 되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 님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근대문화유산 현장을 돌아본 일행의 마지막 목적지는 고하도다. 고하도는 역사의 섬이자 아픔의 섬이다.
1597년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취임한 이순신 장군은 9월 16일 남은 12척의 전선을 수습하여 명량(울돌목) 해전에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승리를 쟁취했다.
명량해전 승리 후 작전상 고하도로 후퇴한 이순신 장군은 107일 동안 조선수군을 재건했다. 제장명 교수의 '백의종군'에 기록된 내용이다.
▲고하도에 있는 모충각 모습. 명량해전 승리 후 1597년 10월 29일 고하도로 작전상 후퇴한 이순신 장군은 107일 동안 이곳에 머물며 조선수군을 재건했다. ⓒ 오문수관련사진보기
"이순신은 이 고하도에서 명량대첩 후 약 1천명 수준이던 수군을 2천명 수준으로 증강시켰고 순전히 조선수군의 힘으로 40척의 군선을 건조하여 53척의 막강 선단으로 증선하였고, 인근 바다를 지나는 어선들을 대상으로 해로통행첩을 발행하여 군량미를 비축하였다."
바삐 서둘렀지만 저무는 해를 잡아둘 수는 없었다. 주민에게 물어 세월호를 안치해 둔 현장에 도착했지만 관람 시간이 넘었다는 이유로 접근이 불가하단다. 녹이 잔뜩 슬어 칙칙해진 얼굴로 바닷가에 누워있는 세월호를 바라보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하루종일 여러곳을 돌아보느라 관람허용 시간이 넘어 도착해 세월호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세월호가 안치된 현장 입구에서 조형물을 바라보는 일행 모습 ⓒ 오문수관련사진보기
입구에 마련된 부스에서 사진을 찍고 돌아서려는 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며 불현듯 내 발길을 잡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태원 참사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뉴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