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
박남수
나는 떠난다. 청동(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雷聲)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새의 암장>(1970)-
해설
[개관정리]
◆ 성격 : 주지적, 남성적, 역동적, 시각적, 의지적
◆ 표현 : 파열음(ㅊ,ㅌ,ㅍ)의 사용으로 감정과 어조의 긴장 및 격앙을 효과적으로 표현함.
형태에 의한 적절한 통제
의인법, 도치법, 은유법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나는 떠난다 →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순간(나:종소리의 의인화)
* 청동의 표면 → 종의 거죽
* 진폭의 새 →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상태(청각적)를 날아가는 새의 몸짓(시각)으로
표현함. 종소리를 '새'로 표현함은 '자유'의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함.
* 광막한 하나의 울음 → 거침없는 아우성. 아득히 멀리 거침없이 울려퍼지는 울음
* 하나의 소리 → 의미를 띤 외침(자유의 외침)
* 인종은 끝이 났는가 → 억압과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물음의 형식이나,
담담한 심정을 표현한 것임)
* 청동의 벽 =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 → 자유를 구속당한 어둠과 절망의 역사
* '역사' → 시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시어.
* 푸름, 웃음, 악기 → 소망, 행복, 평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음
들, 꽃, 천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이고도 이상적인 모습
* 먹구름 → 폭력, 억압, 횡포, 절망의 삶과 역사를 끼치는 세력
* 하늘의 꼭지 → 천상의 끝(횡포에 저항하는 정도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
* 뇌성 → 먹구름을 참지 못해 나오는 소리(자유를 구가하는 우람한 외침)
*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 곱고 부드러운 소리로 울려 퍼짐.
◆ 주제 ⇒ 자유의 확산과 자유를 추구하는 정신
◆ 종소리의 심상 :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의 이미지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종소리의 시작
◆ 2연 : 종소리의 떠남(1연의 동기)
◆ 3연 : 종소리의 변신(1)
◆ 4연 : 종소리의 변신(2)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종소리'라는 소재를 형상화하면서 종소리의 참 의미를 노래하고 있다. 종소리를 단순히 청각적으로 감각하지 않고 그것의 참모습을 그려 보려는 태도와 기발한 착상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종은 물론 동종(銅鐘)이다. 표면의 울림과 함께 퍼져 나가는 소리의 진동을 '진폭의 새'로 표상한 것은 탁월한 착상이다.
혹자는 역사에 의미를 두어 갇힌 역사의 암울한 감방을 뚫고 광대 무변의 허공으로 퍼져 가는 모습을 자유의 날갯짓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렇게 시대상을 고려하지 않아도 이 시는 충분한 시적 감동을 준다.
즉 동종을 오래 묵은 고고 미술품으로 상정해도 좋다는 말이다. 오랜 세월 동안 울리지 못하고 소장되어 있었던 종이라면, 그 종은 역사에 감금되어 있었고, 그는 어두운 감방 속에서 한 번도 울지 못했을 것이다. 종은 울고 싶어 울어야만 종이다. 그 하 많은 세월을 인종 속에서 기다려 왔다. 종이 울리는 순간, 그는 인종의 역사에서 해방된다. 종소리는 바람을 타고 싱싱한 소리를 내며 즐거운 비상을 한다. 때로 뇌성처럼 커다란 소리, 힘있는 소리가 되기도 하여 흩어진다. 흩어지는 소리를 가루의 음향이 된다는 공감각적 표현은 주지시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한편, 이 시의 이미지는 수직과 확산의 성격을 가진다. 종소리가 상승하다 드디어 터지는 것에서 그런 면을 볼 수 있다. 오랜 인종에서 해방된 종소리의 자유를 표현하는 데 이 이미지는 대단히 효과적이다.
이 시는 박남수의 후기 대표작으로 관념의 표상으로만 인식하기 쉬운 '종'을 세련된 감각과 심상의 조형(造形)으로 형상화하여 자유를 향한 비상(飛翔)과 확신을 노래하고 있다.
주지적 계열에 속하는 이 작품은 표현 형식면에서도 시인의 지성적 통제가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전 4연이 모두 4행씩인 질서 있는 구성과 함께 각 연의 종결 방법이 동일하다. 즉, 1·2연과 3·4연을 각각 부사형과 서술 종결 어미로 끝맺고 있어 주지주의 시인으로 변모한 그의 후기 시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청동의 벽'인 종의 몸체를 '칠흑의 감방'으로, 울리지 않는 상태의 종소리를 어두운 감옥에 가두어 놓은 '억압'으로 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울려 나오는 종소리를 '푸름'·'웃음'·'악기'·'뇌성'등으로 변신하며 퍼져 나가는 '자유'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하여 종소리는 '청동의 표면'에서 떠난 한 마리 '진폭의 새가' 된 다음, 마침내 '광막한 울음'을 우는 거대한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간의 삶과 꿈, 그리고 역사를 잉태하고 무한한 자유의 공간으로 퍼져 나는 것이다.
[작가소개]
박남수[ 朴南秀 ]
<요약> 감각과 인식의 적절한 조화로 언어의 자각에 관심을 기울이며, 사물이 지닌 미적 질감을 넘어 그 존재의 이원성을 탐색하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출생 – 사망 : 1918. 5. 3. ~ 1994년
출생지 : 국내 평안남도 평양
데뷔 : 1933. 희곡 「기생촌」이 조선문단에 당선
1918년 5월 3일 평남 평양 태생. 평양숭인상업학교를 거쳐 일본주오대학(中央大學)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한국척산은행 평양지점장으로 근무하다가 1951년 월남하였으며, 1973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33년 희곡 「기생촌」이 『조선문단』에 당선되었으며, 1939년 김종한의 권유로 『문장』지에 투고하여 「심야」, 「마을」, 「주막」, 「초롱불」, 「밤길」, 「거리」 등이 정지용에 의해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등단하였다. 『문학예술』 편집위원, 『사상계』 상임편집위원을 지냈으며, 박목월‧조지훈‧장만영‧유치환 등과 함께 한국시인협회를 창립하였다. 1957년에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초롱불』(1940), 『갈매기 소묘』(1958), 『신의 쓰레기』(1964), 『새의 암장』(1970), 『사슴의 관』(1981) 등이 있고, 시선집으로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1991) 등이 있다. 박남수는 언어 표현의 암시성을 중시하는 시인이다. 그는 언어와 형태미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아울러 언어에 형이상학적 깊이도 부여하였다. 그의 시적 경향은 첫 시집부터 다섯번째 시집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흐름을 보여주는데, 암시적인 이미지로 사물의 존재에 대한 관념을 함축시키는 힘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일관되게 의도한 것은 결국 ‘존재’의 문제로, 그 양면성-밝음과 어둠, 상승과 하락 등-의 본질 탐색이었다.
구성의 강렬성 및 사물의 섬세한 표현에 뛰어난 그는 ‘새의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시에서 새는 자아의 생명 탐구를 상징하는 존재론적 반영으로, 그의 철학이자 미학이 되고 있다. 감각과 인식의 적절한 조화로 언어의 자각에 관심을 기울이며, 사물이 지닌 미적 질감을 넘어 그 존재의 이원성을 탐색하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학력사항>
평양숭인상업학교
일본 주오대학교 - 법학 학사
<경력사항>
한국척산은행 평양지점장
문학예술 편집위원
사상계 상임편집위원
한국시인협회를 창립
<수상내역>
1933년 작품명 '기생촌' - 희곡 「기생촌」이 조선문단에 당선
1957년 아세아자유문학상
<작품목록>
초롱불, 갈매기 소묘, 신의 쓰레기, 새의 암장, 사슴의 관, 서쪽, 그 실은 동쪽
박남수 전집 1‧2
[네이버 지식백과] 박남수 [朴南秀]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출처] 아침 이미지(박남수)|작성자 옥토끼
첫댓글 가루 가루 음향이 된다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휴일을 맞아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