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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묵상글 ( 연중 제16주일. - 부화뇌동은 No! 화이부동은 Yes!.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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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부화뇌동은 No! 화이부동은 Yes!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연중 제16주일은 진정한 양과 목자의 관계를 얘기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목자는 ‘우리의 정의’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둘째 독서에서 목자는 ‘우리의 평화’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종합하면 주님은 ‘우리의 정의와 평화’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정의이고 평화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성찰은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니, 나는 주님을 나의 정의와 평화의 목자로 모시는 착한 양인가?
세상의 정의 평화 투사를 나의 정의와 평화의 목자로 생각지는 않는가?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쫓지 않고 나의 정의와 평화를 주장하지는 않는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착한 양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길잃은 양들입니다.
사실 양들의 인도자들이어야 할 수도자 성직자들이라고 하는 저희가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르지 않고 정치가들을 열렬히 추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길잃은 양들인 경우가 많아 참 안타깝습니다.
옛날 ‘어머니 부대’라는 극성 여성들이 있었고,
요즘은 ‘개 딸’이라는 극성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인 둘의 공통점은 복음이나 보편성 같은 것을 따르지 않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정치가를 무조건적으로 따른다는 것인데
어떤 때 저희 일부 수도자들과 일부 신자들이 이러합니다.
주님의 정의를 가지고 여도 야도 모두 비판하고 예언해야 하는데
비판과 예언은커녕 부화뇌동(附和雷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의가 주님의 정의를 따르는지 잘 식별해야 하는데
우리가 주님 정의를 따르는지 세상 정의를 따르는지 어떻게 알 수 있냐 하면
우리의 정의가 주님의 평화를 이룩하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정의는 물론 불의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며칠 전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불의와는 갈라서야 하지만 화이부동(和而不同)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부화뇌동은 말고 화이부동은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인데
우리는 종종 부화뇌동하거나 독불장군처럼 자기 정의만 주장하여
화이부동할 줄 모르고 주님처럼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참 목자이신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르는 양들인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그러니까 성직자는 성직자의 자리에서
가정의 부모나 단체의 장들은 가정과 각 단체에서 이제,
주님을 대신하여 양들을 주님의 정의와 평화로 인도하는 목자가 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목자 의식입니다.
나도 목자라는 의식 말입니다.
나는 주님의 양이기도 하지만 양들의 목자이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양들에 대한 연민의 사랑입니다.
주님처럼 목자가 없는 양들에 대한 연민이 필요합니다.
양들을 그저 잡아먹고 팔아먹고 부려 먹으려고만 들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그들이 내 맘에 들기를 바라기보다
그들의 고통이 내 눈에 먼저 들어와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출 소녀가 있습니다.
나쁜 놈들은 그들을 꾀어 성 노리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래서 어떻게든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그럴 수 없는 집안 사정이라면 그들을 내 집이나 다른 쉼터로 인도하겠지요.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르는 착한 양들입니까?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대신 실현하는 선한 목자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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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자기계발서를 보면,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아마 이렇게 힘차게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에 당당하게 사는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생각보다 무례한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 좋은 것만 하려고 하고, 자기 싫은 것은 죽어도 싫다면서 하지 않지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기 생각만 밀고 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할까요?”
당당하지만 무례하지 않아야 합니다. 당당함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상처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당당함에 자기 욕심과 이기심이 담겨 있다면 이것은 지극히 무례한 것으로 사람들과 함께하기 힘들어집니다. 저 역시 이런 무례한 사람과는 함께하고 싶지 않아서, 거리감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소심하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우리를 소중하게 창조하신 것만을 보더라도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을 따라오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지켜주는 사람이 없으면 계속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당당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단, 여기에 조건이 붙습니다. 무례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춰서 당당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사랑해야 할 때, 움츠러들지 않고 또 숨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당당함만을 드러내는 사람은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기 힘듭니다. 자기만 사랑하고 있기에, 하느님 앞에서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나서 숨었던 것처럼, 하느님 앞에 숨으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당당하면서도 무례하지 않은,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을 배워서 세상에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진정으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 안에서만이 하느님 나라의 커다란 희망이 있기에 그 희망을 바라보면서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참 목자로 다가오십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유다인과 이민족 사이에 놓여 있던 분열과 적개심의 장벽을 허물어뜨려 하나로 만드신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이렇게 큰 힘을 가지고 계신 주님과 함께하기에 우리는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간직하기에 또한 무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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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나는 그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막스 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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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마르코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는 “예수님, 그분은 누구이신가?”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 전례>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곧 예수님은 양떼를 돌보는 “진정한 목자”임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이 “참된 목자”의 상이 곧 메시아의 표상임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당시의 제도권 지도자들(왕들, 사제들)이 하느님의 양떼인 백성들을 보살피지 않고 오히려 죽이고 흩어버리고 헤매게 하였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양떼들을 보살필 ‘진정한 목자’를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목자가 다윗의 후손에서 날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그분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실 “우리의 정의”(예레 23,6)이신 주님으로 “참된 목자”인 ‘메시아’로 예고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참된 목자”는 단지 양떼를 흩어지지 않게 하고 헤매지 않게 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흩어진 양떼를 인도하고, 헤매는 양떼를 보호하는 분, 양떼를 하나 되게 하고, 평화를 주시는 분”으로, 곧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로 제시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에페 2,14-15)
이토록 예수님께서 우리 사이의 갈라진 장벽을 허물고, 우리를 새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에페 2,14-16)시키시고 평화를 이루신 “착한 목자”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일이 오늘 우리가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할 일입니다. 서로를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는 일’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배려하는 모습”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측은히 여기는 모습”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은 파견 받은 사도들이 돌아와 보고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지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시편작가가 들려주는 진동을 듣습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 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호세아서>에서 울려오는 진동을 듣습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참조)
그렇습니다.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외딴 곳까지 먼저 달려 온 군중을 보시고(마르 6,32 참조)는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마르 6,34). 그래서 환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길 잃은 양들을 먼저 돌보는 “목자”로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애틋한 사랑의 발로로 타인의 상황에 마음 아파함이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를 그냥 둘 수 없는, 차마 못 견디는 마음입니다. 사랑 때문에 안달이 나고 몸살이 나서 사랑을 건네주지 않고는 차마 못 베기는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안달이 난 바로 그분’을 만납니다.
그토록 “가엾은 마음이 드신” 그분께서는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셨습니다.”(마르 6,3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것이 진리임을 아셨습니다. 그들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 외엔 결코 그 어떤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분이 바로 “참된 목자”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목자가 되려면, 먼저 ‘진리’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우리는 진리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은 양들을 측은히 여기는 애틋한 마음이요, 참된 진리를 가르치기 이전에 먼저 참된 진리가 되여야 할 일입니다. 그리기에,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양식을 얻는 양이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그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오, 주님!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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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가엾은 마음으로 챙기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많은 분이 휴가를 즐깁니다. 휴가를 통해 쉬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쉬는 방법과 우리의 쉬는 스타일은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쉬지만, 우리는 사람도 많고 시끄러운 곳으로 휴가를 떠납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으로 갑니다. 길도 막히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휴가를 다녀와서는 더 피곤해합니다. 그렇다면 그 휴식은 바람직한 쉼이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쁘고 건강한 휴식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지니고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사람들을 만나고 마귀를 쫓아내며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 앞에 모여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자랑삼아 보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아침에 계획한 것을 열심히 살고 저녁에 삶을 되돌아보며 하루의 시간을 예수님께 보고하는 것은 저녁기도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고 하셨습니다.
왜 외딴곳을 선택하셨을까요? 동안에 열심히 할 일을 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주님의 일이었는지, 내 일이었는지를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혹 하느님의 일은 접어두고 인간적인 일에 매달린 것은 아닌지 내적으로 반성하고 채울 시간을 가져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일에 치이면 마지못해, 억지로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일은 신성한 노동이 아니라 부역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휴식을 잘해야 합니다.
어느 수도원의 두 수사가 원장으로부터 들에 나가 밀을 거두어들이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두 수사는 낫으로 밀을 베어 단으로 묶어나갔습니다. 한 수사는 시간마다 쉬곤 하는데, 반해 한 수사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었을 때 보니 쉬면서 일한 수사가 쉬지 않고 일한 수사보다 훨씬 더 많은 밀을 베어 놓았습니다. 열심히 일한 수사는 어떻게 그런 결과를 가져왔을까? 궁금해했는데 쉬면서 일을 한 수사가 말했습니다. “저는 틈틈이 쉴 때마다 제 낫을 갈았습니다.” 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일에 파묻혀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불분명할 때, 가족과 잘 지내고 있는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잘 모시고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회복하는 시간이 휴식입니다.
쉼을 잘못하면 안 쉰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음식을 잡수실 겨를조차 없이 바쁘시더라도 한적한 곳을 찾으셨고 이른 아침에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때때로 한적한 곳을 찾아야 합니다. 성체조배는 바로 훌륭한 휴식입니다. 자주 성체 앞으로 오십시오. 피정이나 성지순례도 꼭 필요한 휴식입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한적한 곳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연 피정, 월 피정을 해야 합니다. 피정이란 말 그대로 시끄러운 곳을 피해 고요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교회법으로, 수도회 규칙으로 정해놓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깊은 만남을 통해 자기 소명 의식을 새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대개는 침묵 피정을 합니다. 동안에 말을 많이 하고 살았으니까 침묵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내적 성장의 토대를 다지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 청주교구 신부 수가 200명입니다. 신부 전체가 모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 피정을 할 때는 특별히 주교님의 허락을 받은 분 외에는 모두 참석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부님이 건의 했습니다. 침묵을 해제해 달라! 일 년에 한 번 전체가 모이는데 동안의 삶을 서로 나누며 선후배 간의 끈끈한 정도 쌓고 친교의 장을 만드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느냐?
그래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침묵이냐? 해제냐?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절대다수의 신부님께서 침묵을 선택하셨습니다. 한번은 부산교구 정명조 주교님께서 피정 지도를 하셨는데 첫 시간에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피정은 “절대 침묵 피정”입니다. 절대 침묵이란, 내가 침묵을 지키는 것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문 여닫는 소리, 발걸음 소리까지도…왜 그렇게 침묵을 강조하셨겠습니까? 세상이 시끄러우면 시끄러울수록 그만큼 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주님의 뜻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란하고 들뜬 마음으로는 결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고요함 속에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거울에 비추어진 내 속을 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이 몇 일간 시간을 내서 피정하기란 힘듭니다. 그러나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 말씀은 좋은 휴양지에 가서 먹고 마시고 즐기라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휴가를 내서 성지순례를 하시는 분이 계시고, 어떤 분들은 가족과 더불어 요양원이나 복지시설에 가 봉사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들은 중환자실에서 똥, 오줌을 받아내고 식사 수발도 하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배우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일깨웁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들의 휴가는 참으로 하느님 안에서의 휴식입니다.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휴가를 내서 성경 연수에 참석하시는 분도 있고, 피정하며 주님 안에서 쉬기도 합니다.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어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정에서 실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른 아침, 일상을 시작하기 전 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 시간, 침묵의 시간을 꼭 챙겨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예수 성심 상이나 성모님 상 앞에서 하루를 살피고 부족함을 채울 수 있도록 자기를 봉헌하면서 주님과 더불어 시작하고 주님과 함께 마치면 얼만 좋겠습니까? 세상이 각박해지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쉼이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쉰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높은 곳에, 귀한 곳에, 천상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찾아가기도 하셨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분께 능력이 있고 힘이 있으며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휴식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보다 먼저 그 휴식 장소로 와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파김치가 되어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데 군중에게 떠밀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충분히 짜증이 날 만한데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 같아 오히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은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과 자비심으로 가득 차, 귀찮고 짜증이 날 법한 상황에서도 꾸준한 사랑의 길을 가십니다.
과연 우리 주변에 사람이 모이고 있는가? 사람들이 나를 피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미리 가서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처럼 주님의 뜻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를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세상 것엔 바쁘고, 주님 것엔 관심이 없으면서도 주님의 복을 청하는 모습이라면 부끄럽습니다. 오늘만큼은 외딴곳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꼭 챙기시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요즘 너무 더우셨죠?
이럴 때는 차가운 바다를 다시금 생각합니다 : 썰렁해!
이럴 때는 가장 뜨거운 바다는 피하시길 바랍니다 : 열바다
그래서 가슴설레는 바다가 그립습니다 :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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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02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역사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입니다. 어느덧 22년이 지났습니다. 한국은 폴란드와 포르투갈을 이기고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올랐습니다. 기세를 몰아 한국은 이탈리아를 연장까지 가는 혈투 끝에 2:1로 이기고 8강으로 올랐습니다. 감독인, 히딩크는 ‘I am still hungry!’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한국은 스페인과 승부차기 끝에 4강으로 올랐습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용광로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붉은 악마’가 되었고, 붉은 셔츠를 입었습니다. 당시에 모든 사람이 힘차게 외쳤던 구호와 박수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구호와 “짝짝 짜자작”으로 이어지는 박수였습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구호가 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구호입니다.
어린 시절 저의 기억에 깊이 새겨졌던 구호가 있습니다.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 불’이라는 구호입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모두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학교 담벼락에도, 동네의 담벼락에도 ‘국민소득 1,000불과 수출 100억 불’이라는 구호가 신동우 화백의 그림과 함께 그려졌습니다. 당시 정부는 1980년대에 그 목표를 이루겠다고 했는데 빨리빨리의 대한민국은 4년 앞당긴 1977년에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2023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33,475달러입니다. 수출은 1,118억 달러입니다. 소득은 33배가 넘게 증가했고, 수출은 11배가 넘게 증가했습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구호가 있습니다.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입니다. 구호는 목표가 되었고, 목표는 우리에게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한국교회에도 구호가 있었습니다. 1984년 한국교회는 창립 2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한국교회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주례로 103위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200주년 준비의 하나로 ‘사목회의’를 개최했습니다. 103위 시성식을 기점으로 한국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10년마다 신자 수가 100만 명씩 증가했습니다. 1980년대에 100만 명이던 신자는 2020년에는 500만 명을 넘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가 늘어났습니다. 본당은 넘쳐나는 신자로 분가해야 했습니다. 서울과 광주에만 있던 신학교도 늘어나는 신학생을 다 받지 못해서 늘어났습니다. 수원, 인천, 대전, 부산, 대구에 새롭게 신학교가 생겼습니다. 한국교회가 창립 200주년을 준비하면서 내세운 구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빛을‘이라는 구호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의 도움 없이 하느님을 받아들였던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많은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이 땅에 하느님 사랑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하느님 사랑의 빛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1989년에 한국교회는 44차 ‘성체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03위 시성식은 우리만의 행사였다면 성체대회는 가톨릭교회의 공적인 행사입니다. 변방에 있던 한국교회는 성체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당당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신학생이었던 저는 ‘괌’에서 온 순례단의 안내를 맡았습니다. 브라질의 주교님이고, 세계적인 해방 신학자인 ‘돔 헬더 까마라’ 주교님의 강의를 직접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가난한 사람을 돕자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성자(聖者)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내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조직을 만들자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도 좋지만,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주는 것은 더 좋은 것입니다. 44차 세계 성체대회의 구호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은 ‘공감’에서 시작됩니다. 공감은 연민이 되고, 연민은 조건 없는 나눔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공감과 연민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공감과 연민이 희생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공감과 연민이 함께 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더는 슬픔과 울부짖음이 없는 세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재물과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한없는 연민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영적으로 충만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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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여름 하면 생각나는 것. 그중에서 방학, 휴가라는 말이 빠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휴가를 주십니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어라.’라고 말씀하시지요.
제자들은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음식을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제자들이 피곤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단지 몸이 피곤해서 쉬라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쉰다는 것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정리한다는 의미도 있고, 지금까지 해 오던 것을 천천히 돌아볼 시간을 가진다는 의미도 지닙니다.
그러니 제자들 또한 피곤한 몸과 마음을 쉬게 하고 동시에 지금까지의 일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을 것입니다.
이제 여름이고 휴가철이 다가옵니다. 휴가 계획들 다들 세우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휴가를 통해 피로를 풀었으면 좋겠습니다.
몸이 쉬는 것도 좋은데 영혼도 좀 쉬어야 합니다. 몸이 쉬는 것은 잘 아는데 영혼이 쉬는 것은 사실 우리가 잘 모릅니다.
몸이 쉬는 것은 종류가 다양합니다. 좋아하는 음식이나 운동, 혹은 휴가지에 가서 시간을 즐겁게 지내는 것, 또는 못 잔 잠을 실컷 자는 것, 음악을 들으면서 편히 쉬는 것, 이러한 것들은 몸이 쉬는 것입니다.
영혼이 쉬는 것은 다릅니다. 몸이 쉴 때도 영혼은 계속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고민이나, 수많은 생각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은 못 쉬게 합니다. 계속 고민하게 하고, 계속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가끔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지금은 좀 쉬자, 지금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으니까, 고민도 생각도 그만하고 좀 쉬자. 라고 말입니다.
그러고는 그 시간을 기도로 채울 수 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때 기도가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새로운 힘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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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격이 인격이다.
‘언격’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언격’이란 언어에도 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즉 말에도 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언격’이 무엇을 말하는 줄 쉽게 알아채실 것입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겉모습은 비슷합니다. 그런데 서로의 언격은 너무 다릅니다. 한 사람은 사용하는 언어가 너무 저속합니다. 속에서 입으로 나오는 언어를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언격이 떨어지는 그 사람의 말은 늘 귀를 의심하게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의 언격은 매우 높습니다. 그의 언어는 부드럽고 상냥하며 솔바람처럼 귀를 스칠 때마다 시원함을 선물합니다.
이때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언격은 인격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격이 충분치 않으면 언격은 인격에서 출발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충분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격은 어느 정도일까요? 자신의 언격을 봐주세요. 그럼, 인격이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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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주일. 키엣 대주교님.
영육 간의 조화로운 삶
하늘은 때로는 맑고, 때로는 비가 오기도 합니다. 일하고 활동할 수 있는 낮과, 휴식과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밤이 있습니다. 사람은 더불어 사는 생활도 필요하지만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합니다.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활동과 휴식은 영육 간의 균형을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활동과 휴식, 이 두 가지는 주님의 제자로서 빠뜨릴 수 없는 일상생활입니다.
인간은 육체적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또 자신과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합니다.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하고,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더 높은 직위에 오르기 위해 공부를 하고 노력합니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피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책임이며 이러한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영적인 삶 역시 우리가 돌봐주워야만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삶의 발전을 위해서는 바로 주님 곁에서, 주님의 손길 안에서 보살핌을 받아야 합니다. 힘든 사람들과의 활동을 끝낸 후 잠시만이라도 주님 곁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외적인 활동을 도와줍니다.
도덕적 영혼의 발전 없이 물질적 발전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물질의 노예에서 벗어나 고귀한 영혼을 가질 수 있도록 휴식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돌아 볼 수 있도록, 잘못된 길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다른 어떤 활동보다 선교활동은 기도가 더욱 필요합니다.
선교는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 곁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거룩한 하느님의 일을, 주인이신 그분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결과도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도 없이 행하는 선교는 하느님의 일이 나 자신의 일이 되어 교만과 자만에 빠져 선교가 아닌 자선활동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어느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주도하시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주인이신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도구로서 임하고 있음을 알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 겸손함을 알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활동과 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지금 외적 활동만 중시하며 기도를 잊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봐야 합니다.
지난 활동을 돌아보고 새로운 활동의 지표를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활동이 앞면이라면 기도는 그 이면입니다. 활동과 기도의 양면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인간은 발전할 수 있습니다. 영육 간의 조화가 이루어 질 때 비로소 인간의 활동은 가치 있고 반석 위에 세운 것처럼 견고해질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하루 종일 밥을 안 먹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어떤 느낌입니까? 하루 일과가 끝난 후 기도를 안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습니까?
2. 선교를 하기 전에 어떤 기도를 합니까?
3. 기도와 활동,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까? 만일 나의 삶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4. 하루 일과를 끝낸 후 가족 모두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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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착한 목자 파스카 예수님 영성 살기
“정의, 평화, 연민”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오늘 7월21일 연중 제16주일 화답송 후렴 시편은 늘 들어도 위로와 힘이 됩니다. 말마디를 바꾸어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할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걱정할 것 없어라.” 바꿔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자 빛이신 주님을, 희망이자 기쁨이신 주님을 잊어 뿌리없이 표류하는 삶이요 어둠 속에 방황하는 혼란한 삶입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신 착한 목자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런 착한목자 주님을 잊고 살기에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김수환 추기경의 묘비명이기도 합니다. 아주 예전 어느 분이 돌아간 아내의 묘비명을 청하기에 주저없이 이 시편 성구를 추천한 적도 생각납니다. 이어지는 시편 가사도 마음에 평화와 위안을 줍니다.
“파아란 풀밭에 이몸 뉘어주시고,
고이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 주시니,
내 영혼 싱싱하게 생기 돋아라.”
참 감사하게도 착한 목자 주님은 우리를 생명의 잔치, 이 거룩한 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은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해 미사잔치 참석하고 있는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생명의 미사잔치를 선택한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연중 제16주일은 제29회 농민주일이기도 합니다. 농민주일하니 착한목자 예수님의 요한복음에서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한국천주교회는 1995년 추계정기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농민주일을 맞이할 때 마다 생각나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는 참 멋진 고백입니다.
어떤 직업보다도 농업에 종사하는 농부들은 하느님을 가장 닮은 분들임을 깨닫습니다. 농사의 80%는 하느님께 달렸다 고백하는 농부들을 보면 하느님을 닮은 수도승같다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오늘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인 박현동 아빠스의 담화문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농민주일은 농민을 위한 날이자 농민들의 열정과 노력의 결과를 소비하는 도시 생활인을 위한 날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회복하고 생태적 회개의 삶을 살아가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갑시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마침 어제 수도원에 피정 온 청년들이 청했던 강의 제목입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삶을 위해 평생 노력해야 함을 참 많이 강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은 삶’은 바로 우리 삶을 평가하는 잣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삶의 영원한 모델이 바로 착한 목자 예수님이요, 오늘은 착한목자 영성에 대해 세 측면에 걸쳐 나눕니다.
첫째, 정의입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은 정의로운 분입니다. 구약에서 특히 강조된 정의와 공정입니다. 시편이 노래하는 하느님은 공정과 정의의 주님입니다. “주님께서는 정의를 실천하시고 억눌린 이들에게 공정을 베푸신다”(시편103,6), “그분은 정의와 공정을 사랑하시는 분, 주님의 자애가 땅에 가득하다”(시편33,5), “빛처럼 정의를 떠오르게 하시며, 대낮처럼 공정을 밝히신다”(시편37,6), “그가 당신의 백성을 정의로,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통치하게 하소서”(시편72,2). “행복하여라. 공정을 지키는 이들,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ㅅ;편106,3), 끝없이 이어지는 강조되는 정의와 공정의 삶입니다.
정의와 공정, 오늘 우리 사회를 비춰주는 거울같은 말마디입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 정의와 공정이 무너짐에서 시작됨을 봅니다. 힘없는 백성이 하느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지도자들에게 바라는바 정의와 공정이었고, 이는 만민이 지켜야 하는 도리요 실행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현자들은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잠언21,3)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사야 예언자는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흘림이 웬말이고,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말이냐?”(이사5.7) 탄식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서 역시 일치합니다. 미래의 임금 메시아를 통해 공정과 정의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바로 오늘이 바로 그날이요 그분은 우리 착한 목자 예수님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바로 주님의 우리의 정의라고 명명되는 분이 바로 착한 목자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이런 공정과 정의가 없는 사랑과 평화는 얼마나 공허하겠는지요! 애당초 불가능한 가짜 사랑, 가짜 평화일 것입니다.
둘째, 평화입니다.
“주님은 우리는 정의”에 이어 “주님은 우리의 평화”입니다. 정의와 평화는 한 세트입니다. 그래서 교구마다 ‘정의평화위원회’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분이 우리의 착한 목자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산상설교중 참행복에 관한 다음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랄 불릴 것이다.”(마태5,9)
전쟁과 평화입니다. 평화를 원하는데 역설적으로 계속되는 전쟁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영적전쟁을 수행하는 우리 믿는 이들, 특히 수도자들은 주님의 전사, 평화의 전사라 할 수 있습니다. 후대 예수님의 제자들은 착한목자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의 참 평화이심을 깊이 깨달았고 우리는 바오로의 고백을 통해 배웁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셨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싱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평화이신 주님은 우리 모두 착한 목자 주님을 닮은 평화와 화해, 일치의 새인간으로, 참으로 자유로운 새인간으로 창조하셨고,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감격스럽게 깨닫는 진리입니다.
셋째, 연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계시되는 착한 목자 예수님은 연민의 사랑을 지니신 분입니다. 불교용어로 대자대비하신 착한목자 예수님입니다. 힘겹게 복음 선포 활동을 하다 돌아와 보고를 받으신 주님은 지친 사도들에게 휴식을 명하십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외딴곳에서 가서 좀 쉬어라.”
참으로 착한 목자 주님의 배려하는 연민의 사랑이 빛납니다. 쉬지 못하는 활동 중독의 활동주의도 병입니다. 지친 심신의 힐링의 치유와 충전을 위해 때로 외딴곳에서 쉼터에서의 휴식은 필수요 외딴곳에서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 보다 더 좋은 힐링은 없습니다.
영육의 휴식의 쉼터가 되고, 주님의 생명수로 갈증을 해소하는 샘터가 되며, 주님의 진리 말씀을 배우는 배움터가 되는 미사전례보다 더 좋은 힐링의 안식처는 없을 것입니다. 연민의 사랑은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외딴곳에 도착했을 때 기다린 것은 쉼터가 아니라 일터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먼저 와서 예수님 일행을 기다리고 있으니 참 반갑지 않은 손님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는 빛났습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면모가 약연하니 쉼이 아니라 가엾은 군중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심각한 상태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착한목자 예수님이 계십니다. 가엾이 여기는, 불쌍히 여기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연민의 사랑이요 착한목자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목자없는 군중을 만나서 우선하신 일이 무지를 깨우치는 말씀 공부였음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미사의 말씀전례에 이은 성찬전례를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무지를 깨우치는 진리 말씀 공부가 얼마나 본질적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만악의, 만병의 근원이 탐욕, 교만, 질투, 분노,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알아가는 말씀공부를 통해 비로소 치유되는 무지의 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보시시에 참 좋은 삶을 원하십니까? 착한 목자 예수님의 영성을 배워 닮으십시오. 평생공부입니다. 정의를 실천하는 삶, 평화를 실천하는 삶, 연민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착한 목자 주님을 닮는 지름길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5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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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외딴곳에서 사람잔치가 열립니다>
사람 없는
외딴곳에서
사람잔치가
열립니다
사람에 치어
사람 멀리
지금 잠시
한걸음 물러서
언젠가 다시
사람들 품으로
기쁘게 스밀
따스한 힘 돋울
쉼이 간절한
사람들이
애써 찾은
외딴곳에서
사람이 그리워
더욱 사람 가까이
한걸음에 내달린
사람들이
먼저 다다라
반갑게 맞이하고
사람이 그리운
사람들을
정성껏 품으시는
참사람과
참사람을
그대로 닮아
참사람이려는
제자들이
갈림 없이
어우러지는
눈물겹게 정겨운
사람잔치가
사람 없어 오히려
사람 가득한
어딘가
외딴곳에서
흐드러지게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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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 16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많은 군중들을 보시며 가엾이 여기는 자비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것처럼 목자가 갖는 가장 큰 덕목은 바로 타인의 고통을 보고 가엾이 여기고 함께하는 자비의 마음입니다.
참 목자이신 주님의 자비로운 마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학식이나 지식이 아니라 지혜롭고 자비스런 행동입니다. 자비로움은 모든 악을 끊어 버리는 정신적 경향을 말하며 친절과 관용, 내적 기쁨을 누리도록 영혼을 준비시킵니다.
자비심은 이웃의 불행에 대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연민입니다. 남에게 베푸는 자선 또한 자비에서 비롯됩니다. 자비는 연민과 용서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연민은 고통과 관계하며 자비는 과오와 관계됩니다. 연민은 증오를 멈추게 해주는 미덕입니다. 연민이 최종적으로 이르는 곳은 자비입니다.
보다 일차적인 충동, 더욱 정감적이고 자연스럽고 즉각적으로 나오는 충동은 연민입니다. 자비는 그에 비해서 숙고가 필요합니다. 연민은 성찰을 전제하지 않는데 대해서 자비는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하찮은 잘못만을 용서하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며 용서할 만한 것만을 용서하는 자비는 자비가 아닙니다. 자비로운 마음을 지닌 용서란 증오를 멈추고 복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비는 용서의 미덕이며 용서의 비결이며 용서의 원리입니다. 자비는 잘못이 아니라 원한을, 기억이 아니라 분노를, 싸움이 아니라 증오를 폐기시킵니다.
자비는 사랑이 불가능 할 때 사랑을 대신 해 주거나 아직 사랑에 이르지 못했을 때 사랑이 가능하도록 준비해주는 것입니다. 자비의 가르침은 사랑할 수 없거든 적어도 증오를 멈추라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이 용서받는 사람보다도 하느님 자비를 더 깊이 체험합니다.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마음이 드러나는 자리는 세상의 고통 받는 이들, 가난한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 가운데 한 마음 한 뜻으로 함께 하며 그들의 마음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비는 또한 회개의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의 유언에서 회개생활의 시작을 자비를 베푸는 구체적인 행위로 묘사합니다.
“주님이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 내가 죄중에 있었기에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자비는 참된 신앙을 알아보게 하는 기준이며 회개의 첫 걸음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자비는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자비의 체험이 있을 때 우리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참된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목자 주님을 바라보며 일상안에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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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거룩한 성체에 순종한 스위스의 산
스위스-1873년
아르트-골다우(Arth-Goldau)와 슈비쯔( Schwyz)를 잇고 있는 스위스의 철도열차 길의 양쪽으로, 로스(Ross) 산이 있었고 그 산 중턱에는 목초지가 있었다. 그 곳에는 수많은 암석더미가 깔려 있는데, 이 암석더미가 오래 전인 1806년 9월 2일 저녁 무렵에 이 아름다운 골다우 마을과 457명의 주민들을 매장시켜 버렸던 일이 있었다. 로스산 위에서 흘러내린 바위들이 들판과 목초지, 그리고 농가의 지붕과 가축우리를 유린하듯이 휩쓸면서 협곡으로 굴러 떨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며 신음했고 전지역은 엄청난 공포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리기(Rigi) 지역 맞은편에 우뚝 솟은 로스산이 아직 잠잠해지지 않았으며 어느 날엔가 또 다시 산사태가 일어나서 새로운 재난을 입힐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1873년 겨울 로스산이 발치께에 놓여 있던 슈타이넨(Steinen) 마을의 뒷쪽 산 중턱에서 지면이 서서히 무너져내리기 시작하였다. 마치 마을의 냇물처럼 이 비옥한 땅을 흙더미로 매장시킬 듯이 무너져 내릴 때 이 마을은 죽음의 공포가 극도로 고조되어 있었다.
인간이 어떠한 대비책을 강구하더라도 그러한 자연의 재앙을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신앙심이 깊은 주민들은 오직 하느님께 그들의 믿음을 다하여 모든 것을 의탁했다. 그래서 당시 슈타이넨 마을의 아넨(Annen) 신부는 기도하고 있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기원행렬을 하면서 본당이 있는 마을을 지나 특히 위험했던 지역에 가서 로스산을 향해 성체를 모신 성광을 들고 십자 성호블 그었다.
그러자 산이 얌전히 순종하여 더 이상 산사태가 나지 않고 잠잠해졌던 것이다.
그 때 이후로 흙은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 요동하던 산은 이제 잠잠하게 멈추었다. 공포에 사로잡혔던 주민들은 안심한 채 다시 그들의 일터로 나갔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의 고향과 가족들이 더 이상 어떠한 산사태로 인해 위협받지 않을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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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주일.
■ 쉬는 삶의 여유도 값진 은총 / 굿뉴스 게시판
박윤식 [big-llight] 2024-07-20 ㅣNo.174361
‘그때에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이가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선교 후 제자들은 각자 수행한 것을 보고한다.
저마다의 기적 체험 이야기였을 게다. 병자가 낫고, 마귀 들린 이가 멀쩡해지며, 절망에 잠긴 이가 나름 꿈을 가지게 되었다나. 보고를 듣고 나신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에서 좀 쉬잔다. 이에 제자들은 아마도 의아했을 게다. 바쁘더라도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 ‘기적의 능력’을 또 드러내고 싶은데도 말이다. 어쩌면 그들은 피곤하지 않았으리라. 그만큼 그들은 신이 났을 게다. 많은 이들이 몰려드는 판이니까. 사실 휴식은 낭비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쉰다면,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다. 남들은 다들 일하는데 어디 쉬어서야! 쉽게 이런 생각에 젖기에.
그러니 바쁠 수밖에.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사는 인간 사회는 때로는 생산 능률의 효용성을 최고의 가치로 둔다.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다 보면, 복음의 가치도 물질적 척도로 평가되곤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인간 속성을 잘 아셨다. 복음이 세상 속에서 내는 효과를 직접 느끼고 싶어 한다는 점 말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전한 복음은 보상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들은 가난한 이가 부를 얻고, 병든 이가 치유되고, 불의한 재판의 결과가 공정하게 바뀌기를 기대한 그대로 드러남에 보람을 느꼈던 것 같다. 그 보고 속에 그들만의 흥이 잔뜩 묻어있다. 이것이 자만을 불러올 수도. 그래서 스스로 돌아보면 되새기라는 취지에서 쉬어라 하셨으리라.
가끔 일들이 그저 그렇게 흘러가면, 보람과 함께 만족한다. 그렇지만 이런 우리 인생은 왜 이렇게 가엾고 측은하게 보일까? 경제적인 이유는 물론, 모든 것을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에서 바라보기 때문일 수도. 그래서 감당하기 너무 벅찬 시련을 겪을 때, 예수님을 찾자. 올바르고 착하게 살려 하다 지치고 정의롭고 좋은 일 하다 실망했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할 때 그분 찾아 나서자. 일만 하다 보면 책임감 때문에 쉴 시간 가지지 못하는 때가 너무 많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영혼마저 잊고는 일상마저 소홀해지기도. 과중한 업무는 불평불만으로 이어지고, 결국 내적인 공허감에 빠지기 십상이다. 바로 이때가 주님 안에서 휴식을 취할 시간일 게다. 쉬는 것과 노는 건 다르다. 주일에 성당에서 차분히 미사보고 조용히 기도하는 것, 때때로 피정 가 일상의 일 접고 주님 안에 머무는 것이 쉼이다. 이렇게 영적인 힘을 얻어야만 일상도 기쁠 수밖에. 이렇게 세속적 기대감이 커질수록 복음이 지닌 내면의 가치는 사라질 수도.
예수님께서 유언으로 맡기신 복음 선포는 능률과 효용성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 평화와 자유의 길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안에 ‘쉼’을 통해 그것을 깨닫도록 때때로 이르신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이렇게 그 바쁜 와중에도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좀 가잔다. 바쁜 일상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영혼을 찾고자 휴식을 주고자 하셨다. 평상의 여유를 되찾으라는 거다. 이런 여유는 은총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 설정도 못 한 채 바쁘게만 산다면, 우리자신도 좀 돌아보자. 그분께서 주시니까, 진정한 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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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주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죄인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여전히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악의 지배를 받는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그들도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신다는 것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는 그들이 얼마나 하느님에게서 빗나간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온 삶을 다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최고의 가르침은 십자가였습니다.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기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는 어떤 구분도 차별도 예외가 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 신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당신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 가르쳐 주신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는 제1독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큰 죄를 저질렀어도, 여러분이 잠시 믿음을 잃어버리더라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신비는 여전히 여러분에게 모두 유효합니다.
특별히 오늘 하루는 부족한 저와, 교회의 모든 사제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사제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신비를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선포하는 목자들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내가 입을 열면 말씀이 주어져 복음의 신비를 담대히 알릴 수 있도록 나를 위해서도 간구해 주십시오.”(에페 6,19)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십시오.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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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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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얼마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를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냈으며
병을 고쳐 주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합니다.
고생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휴식을 권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외딴 곳으로 가십니다.
휴식을 위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조금 떨어지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쫓아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십니다.
두 모습
휴식을 취하러 외딴 곳으로 가는 것과
사람들을 맞이하는 예수님의 두 모습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필요
인간의 모습을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이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일에 지친 제자들에게
휴식이 필요했으며
그래서 제자들에게는 휴식을 주려고 하십니다.
한편 목자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목자로서 가르침을 주십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계시며
그것에 맞게 채워주시려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느끼신
가엾은 마음에서 시작되었음을
오늘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우리의 필요를 알고
그것에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또한 우리의 부족한 모습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숨김 없이 하느님께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부족한 모습이
우리의 탓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인간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한 후에 휴식이 필요하며
모든 것을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기에
우리를 이끌어 주실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가엾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이제 나 스스로의 나 자신을 향한 가엾은 마음도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가엾은 마음은 좋게 생각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그렇게 보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많은 경우
나 자신을 그렇게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보아 주지 못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어려움은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그 눈길을 닮아
우리 각자도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랑으로 충만한 오늘 하루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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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위기는 기회입니다!
이백명 삼백명은 아니지만, 육칠십명 아이들을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여름 신앙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젊은 형제들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프로그램 진행하랴, 물놀이 따라다니랴, 동선 체크하랴, 정신이 없습니다.
저는 주방 근무라 새벽 6시에 홀로 미사를 봉헌합니다.
특별한 체험입니다.
아무 탈 없이 신앙학교가 잘 진행되었으면, 하는 지향으로 초스피드로, 그러나 정성껏 미사를 봉헌합니다.
미사 끝나자마자 주방으로 달려가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침 끝나면 점심 준비, 점심 끝나면 시장, 그리고 저녁...단 한 순간도 자리에 편히 앉아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강철 체력을 주신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요즘입니다.
정말이지 다들 몸은 피곤하지만 신명나는 하루 하루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펼쳐나갔던 초기 교회 공동체의 모습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신명나게 전개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은 세상 사람들을 크게 매료시켰습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군중들로 인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쉴 틈도 없었으며,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피로는 누적되었고, 수면부족으로 인해 건강까지 염려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걱정되었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 31)
밀물처럼 밀려드는 고객들, 양떼들로 인해 힘겨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기중천, 의기양양했던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모습, 그런 모습과는 너무 비교되는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청소년과 청년들, 급격한 고령화 현상, 동력을 상실한 공동체의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하는 안타까움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초기 교회 공동체가 그토록 군중들을 매료시킨 비결이 무엇인지 유심히 관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운영 노하우를 배워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우리 교회로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요즘 교회의 위기라고 합니다만, ‘위기는 기회’라는 말도 있습니다.
위기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다시 한번 일어서라고, 다시 한번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라고, 그래서 철저하게도 쇄신되고 거듭나라고 주신 은총의 기회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조금 더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이들, 교회로부터 매력과 흥미를 잃어버린 이들이 눈을 번쩍 뜨고 되돌아올 수 있도록, 더 많은 행복거리들 찾아봐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파에 시달려 지치고 힘겨워하는 양들에게 기쁨과 희망, 열정과 첫 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에너지 충전소가 되도록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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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오늘의 전례는 지난주의 선교 사명의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목자와 양 떼라는 상징적 표현들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레미아 예언자는 당시의 왕들과 지도자들이 목자들이라고 하기에는 부당하다고 비난한 후, 이스라엘 백성을 귀양살이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에게 당신 마음에 맞는 목자들을 주심으로써 돌보아 주시리라는 것을 예언한다(예레 23,3-4 참조). 그리고 마지막 날 이상적인 왕이며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에게 성덕과 정의를 펼쳐 보이시리라고 예고한다. 그분은 정통 왕손, 야훼, 우리를 되살려주시는 이로 불릴 것이라고 한다.
복음에서는 사도들이 선교활동의 결과를 예수께 보고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좀 쉬자고 하신다(31절). 군중들이 많이 밀려들었기 때문에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지만, 군중들은 이미 알고 앞질러 그곳으로 갔기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33-34절).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의 모습은 양 떼가 흩어지는 것을 보살필 뿐 아니라, 양 떼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기적의 빵으로서 양육시키고자 애쓰시는 그런 목자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런 의미에서 이상적인 목자이시다. 왜냐하면 첫째로 목자는 자기의 양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있을 만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힘보다는 사랑과 헌신과 부드러움으로 나타나는 예수님이시다(요한 10,11-12 참조).
두 번째는 양 떼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함께 느껴 그들과 하나가 되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빵의 기적을 통하여 그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마르 6,37 이하 참조). 이 빵의 기적에서 사도들의 태도는 바로 교회 안에서 우리의 봉사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장하고 강해지도록 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봉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양 떼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한 종으로 느낄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마태 20,25-28 참조).
세 번째로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홀로 있는 것과 휴식의 필요성을 실천하시는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이루실 수 있었고 또 필요한 빛과 지혜를 얻기 위하여 침묵과 기도를 위한 휴식을 필요로 하셨다(마르 6,45-47 참조).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봉사자로 일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말씀의 충실한 해석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대화할 시간과 공간을 가져야 한다. 즉 기도와 묵상이 없는 봉사활동은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화해시켜 한 몸을 이루게 하셨다고 한다(에페 2,14-16 참조).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해 이루신 화해의 의미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서로 대립하는 두 민족으로부터 “하나”(에페 2,14), “새 인간”(에페 2,15), “한 몸”(에페 2,16)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목자들은 먼저 자신이 사랑 안에서 성장하고 또한 그들이 맡은 신자들이 사랑 안에서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증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목자들이든 신자들이든 모두가 다 같이 서로 노력하는 여기에 우리 교회의 미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우리를 그분께 맡겨드려야 한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8).
오늘 복음의 내용은 설교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자들을 제외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목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에 따라 행동해야 하고, 또 신자들은 사랑으로 충실히 목자의 소리에 응답하여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들과 한데 어우러져 그들과 하나가 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군중들의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 우리가 비록 여럿이지만, 다양성을 표현하고 있지만, 하느님 안에, 주님의 이름 안에 진정한 하나,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우리가 되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을 올바로 알아듣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이 우리 안에 항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표징이 되어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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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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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피정>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0-34).”
1)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신 이야기를 보면, 활동을 마친 제자들이 ‘기뻐하며’ 돌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루카 10,17), 열두 사도의 경우에도 그렇게 ‘기뻐하면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이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박해도 받았을 것이고, 여러 가지 고통도 겪었을 것이고...
그래서 정신적으로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겠지만,
육체적으로는 체력이 모두 소진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돌아와서 보니, 예수님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일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쁘게 일하시는 것을 보면서 사도들은 자기들만 쉴 수는 없었을 것이고, 쉬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도와드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쉬면서 힘을 재충전할 수 있도록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라고 지시하십니다.
<예수님은 일만 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즉 신앙인들을 혹사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휴식이 필요할 때에는 쉬라고 명령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도 사도들과 함께 가셨기 때문에,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는, “우리 함께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외딴곳’은 사람들이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사도들의 휴식을 위해서,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등의 ‘일’을 잠시 멈추셨습니다.
<사람들을 ‘버리고’ 가신 것은 아닙니다.>
2) 예수님께서 잠시 ‘일’을 멈추신 것에 대해서,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당신도 쉴 수가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과 지금의 상황은 모순되지 않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5,16-18).”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아버지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니 나도 쉴 수가 없다.
안식일이라고 해도...”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단 한 순간도 중단되지 않는다.
안식일에도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보살피고
보호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신다.
그러니 나도 안식일을 ‘초월해서’ 일할 수밖에 없다.”>
이 말씀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하시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지, “나는 휴식이 필요 없다.”가 아닙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는 휴식이 필요 없겠지만,
사람이신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잘 때가 되면 자야 하고, 먹을 때가 되면 먹어야 하고, 일하다가 지치면 쉬어야 하고...>
3)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쉬는 일”을 우리 교회는 ‘피정’이라고 부릅니다.
피정은 잠시 ‘일’을 멈추고 쉬는 ‘휴식 시간’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새 기운을 얻는 ‘재충전 시간’입니다.
그 새 힘은 하던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력의 한계가 있고,
힘을 재충전하지 않으면 지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쉬지 않고 일하다가 너무 지쳐서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까지 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잘 달리는 자동차도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에 들러서 기름을 넣어야 합니다.
잠시 주유소에 들르는 것은 달리는 것을 중단하는 일이 아니라, 더 잘 달리기 위해서 힘을 충전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전례나 기도에는 피정의 성격도 들어 있습니다.
좋은 예가 ‘주일미사’입니다.
한 주간 동안 인간 세상에서 힘들게 살다가 주일에 성당에서 미사참례를 하는 것은, 일을 멈추고 피정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미사를 통해서 새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 힘은 다음 한 주간을 잘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살아갈 힘을 재충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일을 안 지키는 사람은 그 힘을 받지 못해서, 점점 힘을 잃다가 결국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4) 예수님과 제자들이 ‘외딴곳’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제자들도 쉴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조금 관점을 바꿔서 그 상황을 바라보면,
몰려든 군중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라는 예수님 말씀대로 ‘참된 안식’을 얻으려고 예수님에게 온 사람들이고,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면서 ‘참된 안식’을 주실 때, 사도들도 그 가르침을 함께
들으면서 새 힘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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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의 전반적인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군중들이 얼마나 큰 열정과 간절함으로 예수님을 따랐는지, 그리고 그런 군중들을 예수님께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바라보셨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분이 사랑의 기적을 일으키시도록 그 때와 분위기가 무르익는 모습이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도입부분을 보면 예수님은 원래 제자들과 함께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려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맡기셨던 ‘하느님 나라’ 선포의 사명을 무사히 수행하고 온 제자들이 힘들고 지친 몸을 좀 쉬게 하시려고, 그리고 제자들이 자기가 한 일들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신앙의 관점으로 찬찬히 돌아봄으로써 그들의 믿음이 더 깊어지도록 ‘심화’할 시간을 가지시려고 하신 것이지요. 하지만 그게 참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분께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은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이끄는 참된 목자로서 지니신 마음가짐을 보여주시는데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며, 셋째는 그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배려하는 마음을 살펴봅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 중심적이기에 자기가 힘들거나 피곤하면 다른 이의 입장이나 상황을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 자신보다 다른 이들을 먼저 생각하시는 분이지요. 제자들을 배려하시는 모습을 봐도 그렇습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고 오느라 지치고 힘든 건 사실이지만, 그들이 없던 순간에도 당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군중들을 홀로 맞이하시느라 예수님이 더 지치고 피곤하셨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도 제자들이 휴식을 취하여 지친 몸을 좀 회복할 수 있도록, ‘외딴 곳으로 가서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신경쓰여서 쭈뼛거리며 자리를 뜨지 못했고,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배를 타고 나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외딴 곳에서 쉬게 하시려는 데에는 다른 의도도 숨어 있었습니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조용하고 차분하게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무르면서, 그분의 시선으로 자기들이 한 일을 돌아보게 만들려고 하신 겁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이 필요하지요. 바쁘게 일에만 쫓기다보면, 눈에 보이는 결과에만 신경쓰다보면 그 일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 일 안에서 하느님이 어떻게 섭리하시며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끄시는지를 돌아보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리기에, 때때로 따로 시간을 내어 세상과 잠시 거리를 두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깊이 머물러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다른 이를 안쓰럽게 바라보시며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을 살펴 봅니다.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당신이 미리 봐두셨던 곳으로 가신 예수님은 그곳에서 크게 당황하시게 됩니다. 사람들 없는 ‘외딴 곳’일 줄 알았던 그곳이 수많은 군중들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에 수 킬로미터를 달려서는 그분 일행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십니다.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겨웠으면, 어떻게 살아야할지가 얼마나 막막했으면, 만사 다 제쳐두고 당신을 만나기 위해 그 먼 거리를 달려왔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지신 겁니다. 그런 그들을 그곳에 버려둔 채 당신이 맘 먹었던 일을 하시려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그들을 위해 당신의 계획을 바꾸십니다. 당신을 향한 믿음과 열정 그리고 간절함을 지니고 그들이 당신을 찾아온 지금이야말로 그들을 참된 구원의 길로 이끌 ‘때’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목자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그들을 앞장서서 이끌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며, 그들을 보살피고 보호하는 존재, 그들이 세상의 여러 변수나 위험에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하느님 뜻에 맞는 올바른 길을 걷도록 인도하는 존재, 그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며 이 세상에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시는 존재,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이 약속하신 ‘참된 목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운전할 때 자기가 가야 할 목적지가 어디이며 어떻게 생겼는지를 정확히 알고, 그 방향과 대략적인 동선을 알면 엉뚱한 길에 빠지는 일 없이 최대한 빠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 나라’가 정확히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실현되는지, 그리고 그 나라에서 참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들을 해야하는지를 알면, 유혹에 빠져 엉뚱한 곳을 헤매는 일 없이 안전하게 그곳에 다다를 수 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군중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십니다. 그분이 가르치신 건 고통과 시련을 피할 수 있는 특별한 대비책도 아니고, 죄를 안짓고 살 수 있는 대단한 방책도 아닙니다. 우리가 항상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할 ‘사랑’이라는 원칙과 방향성, 그리고 머리로 아는 하느님 뜻을 실천에 옮겨야 하는 이유와 중요성 그런 것들을 알려주셨겠지요. 그것이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구원의 진리’이며 그 진리가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고기를 잡아주시어 배고픔을 일시적으로 해결해주시는 것보다, 우리에게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시어 우리 스스로 배고픔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욕망 안에 갇히지 않고 하느님과 그분 뜻을 찾고자 하는 영적인 갈망을 마음에 품기를 바라십니다. 당신이 곧 사람들 앞에서 일으키실 ‘빵의 기적’이 그저 놀라운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사람들을 참된 믿음으로 이끄는 구원의 표징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계획을 바꾸시게 하고, 가엾은 마음을 품게 만드신 군중들의 노력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품고 최선을 다해 그분께 달려가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삶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얼마나 간절히 주님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요? 내 삶의 자리에서 그분을 만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들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요? 구원을 위한 노력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성당 다니기 왜 이리 힘드냐고, 신앙생활이 왜 이리 무미건조하고 재미 없느냐고 불평 불만만 늘어놓고 있지는 않은지요? 세례만 받으면, 주일미사만 참례하면 내가 해야 할 ‘신앙생활’이 끝나는 것으로 아시는 분들이 많지만, ‘세례’는 시작일 뿐이고 주일미사 참례는 ‘최소’ 의무일 뿐입니다. 주님께 듣고 배워야 할 것들도 많고, 주님과 함께 바꿔나가야 할 것들도 많지요. 어렵고 힘들지만 ‘참된 목자’이신 주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힘을 주시고 이끌어 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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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연중 제16주일.
복과 화의 선택에서 지혜로운 삶
<2024.7.21> 아침을 여는 묵상 (렘 35:1~19절)
❝복과 화의 선택에서 지혜로운 삶❞
❚ 어떻게 하면 화를 당하지 않고 복을 누리를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깨닫는 삶이어야 합니다.
✔ 무엇에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까?
➲ 인정받는가? 거절당하는가?에서 지혜로워야 합니다(1~11절).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 김 때에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레갑 사람들을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한 방으로 데리고 가서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는 명령을 주십니다(1~2절). 이는 조상 요나답의 교훈을 철저히 순종한 레갑 족속의 모범적인 모습을 칭찬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레갑 자손들에게 내린 요나답의 교훈과 명령은 ‘포도주를 절대 마시지 말라’는 것이고,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라’는 것과 ‘평생 동안 장막에서 살아’ 가라는 것입니다(6~7절). 레갑 자손들은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요다납이 명령한 모든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후손들에게 그대로 신앙의 전통으로, 믿음의 유산으로 물려준 것입니다.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노라...’(10절b).
쾌락과 이기적인 욕망이 사회와 개인 모두의 주인 노릇을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할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세속화되어 경건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 세상에 물들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임을 안다면 우리는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늘 경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삶(약 4:4)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세상에서도 참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는 참된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뿐만 아니라 세상으로부터도 인정받는 복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순종하는가? 불순종하는가?에서 지혜로워야 합니다(12~16절).
하나님은 레갑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그들의 모습에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하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을 책망하십니다(13절). 그 후 유다 백성의 죄에 대한 구체적인 고소가 이어지는데, 유다 백성은 끊임없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순종하지 않고 있습니다(14절). 또한 유다 백성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고 끊임없이 보내며’ 그분의 명령을 전하고 상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불순종으로 일관했습니다(15절). 무엇보다 유다 백성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거부하며 그분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16절). 레갑 사람들의 충성스러운 순종은 유다 백성이 범한 불순종의 심각성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레갑의 후손들을 모델로 삼으신 것은 그들이 순종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유다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 불순종에 있음을 깨우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의 연륜이나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실천하여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고, 실제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백성 됨을 일상의 삶에서 증명해 보이는 삶을 통하여 복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돌이키는가? 무감각하는가?에서 지혜로워야 합니다(17~19절).
하나님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주민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을 해도 듣지 않고,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포하신 모든 재앙을 내리실 것(17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레갑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 선언되는 이유에 대해서 ‘...명령을 순종하여... 모든 규율을 지키며... 행하였기...’(18절) 때문입니다. 이는 유다 백성에게서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명령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 가운데서 나를 섬길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19절,새번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셨을 뿐 아니라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을 때 얼마나 무서운 재난과 고통이 임하게 될 것인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비록 땅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지만, 영원한 본향을 향해 순례하는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사는 성도라는 정체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실천하는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 가진 채 끝까지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징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반면 레갑 족속처럼 세속에서 자기 자신을 지켜 경건한 삶을 살아가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의 태도를 갖고 살아갈 때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임 또한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레갑의 후손이 될 것인가, 유다의 자손이 될 것인가? 양자택일에서 지혜로운 선택을 통해 복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요나답과 같이 신앙의 원칙을 정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믿음의 견고함을 지켜내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모하고 그 친절하신 팔에 안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35:1~1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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