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선한 일을 위하여 고난 받으신 주님
베드로전서3:18-22
최근 의대정원 2,000명을 늘리는 문제로 의사들과 정부가 큰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의사들과 정부는 각자의 입장을 갖고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만
문제는 그 와중에 환자들만 손해를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의료대란이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두리가 카톡을 하면서 ‘엄마 아빠도 건강 잘 챙겨. 아프면 갈 곳도 없고
치료할 곳도 없대. 한, 두 달 동안은 아프지 말도록 해’
아프지 말아야겠다고 해서 안 아프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요즘에 가장 좋은 방책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한, 두 달 동안은 아프지도 마시고 사고도 나지 마시고 건강하게 안전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쓰고 의대생들은 휴학계를 내고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투쟁이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합당하다고 여겨야 합니다.
국민들이 인정하지 않는 투쟁은 정당성을 확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번 투쟁은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국민들의 눈에는 밥그릇을 더 챙기려는 싸움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지금도 의사정도면 잘 사는 상류층이 대부분인데
얼마나 더 잘 살려고 저렇게 할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이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도 밥그릇을 더 챙기려고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어서는 절대 안 되는 줄 압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보여야 할 모습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고난 받는 아시아의 흩어진 성도들을 위한 베드로 사도의 첫 번째 권면의 말씀입니다.
이 권면에서 사도는 성도들의 삶을 3장 8절과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러한 삶을 13절에서는 한 마디로 ‘열심히 선을 행하는 삶’이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해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해하고 고난을 가하면 그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14절)
선을 행함에도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라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그것이 예수님을 본 받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는 것보다 더 훌륭한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보다 더 아름답고 더 고귀한 삶은 없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열심히 선을 행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선을 행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를 해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고난을 받으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고난 받는다고 그 삶을 포기하거나 중단하지 마시고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의를 위하여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죄는 그리스도 자신의 죄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성정이 같으시고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사셨지만 죄는 없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당시에 가장 악한 죄인이 당했던 십자가형에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사도 베드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대속의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는 말씀처럼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죄인입니다.
아울러 죄에는 대가, 삯이 있는데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가 죄의 대가로 죽음을 당합니다.
그 죽음은 육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영혼의 죽음까지도 포함하고 있는데요,
영혼의 죽음을 성경은 지옥에 가서 고통당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모두가 죄인이요 모두가 죄의 삯으로 죽음을 당하고
모두가 영혼의 죽음인 지옥에 가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이것을 사랑의 하나님이 그냥 두고 보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작정하시는데 그 방법이 죄인인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인간이 죄를 범하면 짐승이 대신하여 죽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가 빚을 지고 갚을 길이 없을 때 다른 사람이 빚을 갚아주면 그 사람은 빚에서 자유 할 수가 있습니다.
군대에서 부대가 잘못하면 부대원 전체에게 벌을 주기도 합니다만
때로는 지도자를 문책함으로 부대원의 잘못을 용서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이런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인간이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죽음은 한 번의 죽음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했습니다.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한 번으로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짐승이 대신한 죽음은 한 번으로 끝날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이 죽어야 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번에, 한 번 죽음으로서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도록 보내신 분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당하시고 죽으신 분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어야 죄에서 사함 받고 죄의 삯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선중에 선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것입니다.
18절에 나오는 그 다음 말씀을 보면,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했습니다.
여기에서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불의한 자는 모든 죄인 된 인간을 말합니다.
대신한다는 말은 대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의인이 죄인을 대속할 수 있지 죄인이 죄인을 대속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도 죄가 있는 마당에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인간을 대신할 자로 자신의 독생자 하나밖에 없는 아들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인간 중에서는 의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7, 8절)
의인을 위하여 죽거나 선인을 위하여 죽는 것도 사실 쉽지 않다고 하면
죄인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정말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죄인 된 자기 아들, 탕자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가장 선하시고 의로우신 주님께서 죽으신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고귀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이 진리를 믿으신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도 믿을 수 있기 바랍니다.
가장 악하고 더러운 죄인 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죽으실 정도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이 말을 쉽게 바꿔 표현하면 우리가 어떻게 부족하고 어떻게 연약한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하더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랑으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까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 속에 있을지라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지켜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선한 일은 의인으로서 죄인을 대속하신 일입니다.
셋째는,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18절 말씀을 계속 보시면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은 나의 공로도 아니고 나의 능력도 아니고 나의 선행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그 분만이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나의 죄를 사하셨고 나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을 통해서만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영생의 축복을 받습니다.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2:9-10)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이름이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신학적으로 가장 논쟁이 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19절에 나오는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보통은 이 옥을 지옥으로 생각하고 주님께서 영으로 지옥에 가서
노아의 홍수 때 죽은 영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말로 이해를 합니다.
이 내용은 세계 기독교인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도 나온다고 합니다.
사도신경에 이 고백이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이 고백은 신학적으로 가장 논쟁이 되는 고백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래서 짧은 시간에 다루기가 어렵습니다만 한 가지 이 고백이 주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옥에 있는 영들을 이미 죽은 자들이라고 설명을 하고
노아의 홍수에 죽은 자들을 지금까지 믿지 않고 죽은 자를 대표한다고 설명을 하는데요,
이 설명대로 지옥에 있는 자들이나 이미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된다고 하더라고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유일한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선하신 일은 인간을 구원하는,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육신을 가진 생명도 귀하거늘 영원한 구원을 얻는 생명은 얼마나 더 귀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선한 일을 하신 주님은 안타깝게도 고난을 당하시고 핍박을 받으시고 수치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이 선한 일을 이루시기에 주저하지 않으시고 낙망하지 않으시고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셨다.’ 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다 이루었다.
엄청난 고난과 역경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다 이루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뒤를 따라 가면서 어떻게든지 선한 일을 이루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선한 일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인 줄 믿습니다.
지옥에 갈 자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일인 줄 믿습니다.
이 선한 일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다가 고난이 오고 역경이 닥치고 어려움이 오면 그 때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이 일을 먼저 당하셨기에 우리에게 감당할 힘과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사순절은 바로 이 고난의 주님을 바라보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고 힘을 얻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절기입니다.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24.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