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r articleno = "1872";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
1986년 4월 26일, 구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가 발생하였다.
당시 사고 원인은 직원의 부주의에 의한 사고인 것으로 알려졌다. 직원의 실수로 원자로가
정지상태에 이를 정도로 출력을 낮췄는데 이로 인해 재가동이 어렵게 되자, 급하게 출력을 올리는
과정에서 원자로에 무리가 갔고, 원자로의 반응도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핵연료가
순간 파열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냉각수도 원자로의 화학물질과 반응하면서 수소폭발을 일으킨 초대형 원전사고!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았던 직원의 사소한 실수로 인한 원자로 내부 폭발에 의한
방사능 누출사건은 상상을 초월할만큼 큰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누출된 방사성 물질은 우크라이나 및 벨라루스, 러시아 등에 심각한 방사능 오염을 초래하였다.
당시 소방수 31명이 사망하고 체르노빌원자력 발전소 인근 30km 내의 주민 13만 5천여 명이
이주하고 체르노빌 지역을 영구 폐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2006년 우크라이나 정부의 집계로는 초기 방사능 피폭 사망자는 총 56명. 그러나 6년간
발전소 해체작업에 동원된 노동자 5,722명과 이 지역의 민간인 2,510명이 사망하였고,
43만 명이 암 및 기형아 출산 등 각종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참고로 알려진 정확한 사망자 수는 확실치 않다.
1992년에 우크라이나 정부는 당시 사고로 7천여 명이 핵 오염 피해를 입었다고 발표를 하였지만,
체르노빌 주변 수십만 평방미터 내에는 지면의 생물이 사라지고, 각종 동·식물들도
방사능 피해를 입어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방사능에 오염된 동·식물들이 기형적으로 변하는 문제가 동·식물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전 지구적인 문제로서 바로 인류 전체의 문제이다. 방사능 오염은 인간에게만
위험한 것이 아니고 생태계 전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체르노빌은 아직도 많은 양의 방사능이 검출되고 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갑상선 암 등 각종 질병 발생률이 대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 다큐멘터리.
The Battle of Chernobyl.
-Discovery channel- (사고 20년 후인 2006년 5월 공개된 다큐멘터리.)
<나오는 사람들>
(Igor Kostin - 사진작가)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Youri Korneev - 4호기 기계기사)
(Vladimir Grebeniuk - 민방위 대령)
(Yulia Martchenko - 프리피야트 주민)
(Hans Blix - 국제 원자력에너지 기구 회장)
(Nikolai Antochkin - 공군대령)
(Natalia Nadejina - 모스코 제6호 병원 간호사)
(Vassili Nesterenko - 핵물리학자)
(Vladimir Naumov - 툴라 광부)
(Andrei Nassonov - 툴라 광부)
(Vladimir Amelkov - 툴라 광부)
(Nikolai Tarakanov - 육군대령)
(Lev Bocharov - 엔진니어)
(Alexander Fedotov - 바이오 로봇)
(Alla Yaroshinskaya - USSR 최고 소비에트 대행)
(Youri Bandazhevsky - 방사능 오염 지역의 질병을 연구한 의사)
1986년 4월 25일 금요일 아름다운 봄날 밤, 우크라이나의 도시 프리피야트의 43,000명의 거주자들,
그들의 기억에 영원히 새겨질 날. 오늘 저녁, 그 시로부터 3km 떨어진, 매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일하러 가는 블라드미르 리치 레닌 핵발전소(체르노빌 핵발전소) 그곳 4호기의 176명 직원들이
그 무엇이 에너지를 줄일 수 있는지, 핵로의 자체 연료공급 시스템을 시험하고 있었다.
1986년 4월 26일, 오전 1시 23분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실험이 시작됐다. 핵로의 중심부에서
연속적인 폭음이 났다. 프리피야트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동안 발전소의 밑바닥은 떨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폭발하며 1200톤 핵로의 뚜껑이 갑자기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순식간에 방사성을
띠며 증발한 기체의 초강력 흐름이 우라늄과 흑연을 발전소 주위로 수백 미터 넘게 퍼뜨렸다.
이어서 핵분열로 생긴 방사성 물질이 가득한 불기둥이 1000미터 하늘로 뿜어졌다.
“다양한 색을 띠었고 매우 밝았습니다. 오렌지색, 붉은색, 하늘같이 푸른색, 핏빛색, 무지개처럼
그것은 아름다웠다.” (Youri Korneev - 4호기 기계기사)
(Youri Korneev - 4호기 기계기사)
그 저녁동안, 이른 아침. 역사상 가장 심각한 핵사고가 방금 일어났다.
나는 오전 5시쯤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체르노빌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들었습니다.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그 상황에 처음 도착한 소방대원들은 적절한 보호장구도 없이 불과 싸웠다.
그들은 이 이상한 불에 수 톤의 물을 퍼부었다. 그러나 무엇으로도 불을 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치사량에 해당하는 방사선에 노출되었다. 그날 저녁 2명이 죽었다.
다음 몇 개월 안에 28명이 뒤따라 더 죽었다. 그들이 체르노빌의 첫 희생자였다.
아무도 그런 사고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다음 7개월 동안 50만 명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적과 백병전을 벌였다.
체르노빌 사고에서 희생된 노동자들.
찬양받지 못한 무자비한 전투에 목숨을 잃은 이름 없는 수천 명의 지금은 거의 잊혀진
영웅들이 있다. 최악의 사태를 막아낸 것에 대해 이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감사를 전하지 못했다.
두 번째 폭발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히로시마 원자폭탄보다 10배 더 강력하며,
유럽의 절반을 휩쓸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구소련과 서양이 서로 20년 동안 비밀로 지켜왔다.
ttp://www.youtube.com/watch?v=pA0cHd1KXms (동영상)
The Battle of Chernobyl
-Discovery channel- (사고 20년 후인 2006년 5월 공개된 다큐멘터리.)
이 많은 영상은 전엔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기자들이 찍은 것들이며,
그들 또한 핵오염에 노출되었고 몇몇은 이후 목숨을 잃었다.
이 영상들은 숨은 전쟁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며, 전쟁의 결과, 이후 20년 동안 계속하여
재앙의 희생자 수가 늘어가고 있다. 이것은 체르노빌 전투의 실화이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이른 아침쯤에는 하늘로 1,000미터 치솟은 방사성 기둥에 의해
구름은 이미 오염되어 있었다. 이고르 코스틴은 노보스티 통신사의 사진작가였다.
친구와 헬리콥터 조종사가 그날 아침 체르노빌 상공을 날자고 전화를 했을 때,
코스틴이 알고 있던 것은 그날 저녁에 발전소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을 거라는 거다.
그는 떡 벌어진 구멍을 목격한 첫 번째 기자였다.
(Igor Kostin - 사진작가)
“저기, 저 굴뚝”, “가까이 가 보자고!” “저기 위로, 부서진 4호기말야” “더 높이, 저기로! 사진을...”
“저기, 연기가 나오고 있는...”
“우리가 4호기에 가까이 가서 그 주위를 돌때 나는 위험성에 대해 몰랐습니다. 원전 위를 날 때,
헬리콥터 창문을 열었습니다. 그때 내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Igor Kostin - 사진작가)
그가 본 연하고 흐릿한 연기는 폐허로부터 올라왔으며, 실은 매우 높은 방사성을 띠었다.
코스틴은 사고 후 가장 빨리 현장에 갔었던 체르노빌 기자 중 한 명으로 방사선에 심하게 노출되고
생존하였다.
내가 창문을 열었을 때, 난 뭔가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로의 잔해들이 바로 내 밑에 있었습니다. 마치 우주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치 무덤처럼. 진짜 죽음의 침묵. 헬리콥터 소리조차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하나의 블랙홀. 무덤과 죽음 같은 고요. (Igor Kostin - 사진작가)
폭발 후의 체르노빌 원전.
이것이 파괴된 곳을 찍은 첫 번째 사진이다. 내 모든 장비들은 몇 분 후 고장났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밧데리가 나간 걸로 생각했습니다.
난 겨우 10여장 사진만 간신히 찍었습니다. 일단 키예프(우크라이나의 수도)로 돌아왔을 때,
사진들을 현상했고, 어두운 부분은 검게 나왔으며, 색상은 매우 안 좋았습니다.
나는 당시 몰랐으나, 사진들은 방사능에 노출되었던 것입니다. (Igor Kostin - 사진작가)
(Igor Kostin - 사진작가)
꺼진 로의 중심은 잔해의 14미터 아래에 묻혀있고 핵연료를 감싸는 흑연이 우라늄을 태워
녹이고 있었다. 두 핵폭탄을 합한 위력보다 100배나 더 많았다.
1986년 4월 26일 폭발 8시간 후 Moscow - The Kremlin의 고르바쵸프는 상황에 대한
불충분한 정보를 받았다.
“첫 번째 정보는 폭발에 대한 언급 없이, ‘사고’와 ‘불’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폭발이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거짓정보의 결과는 특히 극적입니다.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4월 26일, 프리피야트(Pripyat) 43,000명의 거주자들은 평소대로 생활했다.
그들은 3km 떨어진 재앙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우리가 얻은 정보는 핵로를 포함한 모든 것이 정상적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학술위원 알렉산드로프에게 질문했을 때, 그는 내게 핵로는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붉은 광장에 세워놓을 수도 있다. 그건 사모바르(큰 주전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마치 붉은 광장에 소를 풀어놓은 것과 같다...“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4월 26일, 프리피야트(Pripyat), 그 도시에 루머들이 돌았는데, 당시 저녁에 발전소에 화재와
그 사망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공식적인 발표도 나오지 않았다.
이 영상에서 번쩍이는 플래시는 필름이 방사능에 노출되어서이다.
거리의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군인들에게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레베뉴크 대령은 상황을 통제하는 임무를 맡고 병력을 이끌었다.
(Vladimir Grebeniuk - 민방위 대령)
(Vladimir Grebeniuk - 민방위 대령)
우리 입에서 금속성 신맛이 느껴졌습니다. 방사선은 맛이 없다고 했습니다.
나중에야 우린 이것이 방사성 요오드 맛임을 알았습니다. (Vladimir Grebeniuk - 민방위 대령)
아이들이 아직까지 공원에 나가 놀고 있을 때 그레베뉴크 대령의 사람들은 도시에서
최초로 방사선을 측정하며 그 날을 보냈다. 이 당시, 방사능은 ‘뢴트겐’ 단위로 측정되었다.
(감마선 측정) 정상적인 대기는 0.000012뢴트겐이었다(12마이크로). 프리피야트는,
이른 오후쯤엔 이미 0.2뢴트겐 이상 측정되었다. 달리 말하면, 평소보다 15,000배 높게...
저녁때는 그 값이 정상치의 600,000배까지 수직 상승했다. (약 7뢴트겐)
Boulevard Lenin 0.2뢴트겐, Boulevard Ukalna 0.5뢴트겐, 그리고 그 날 저녁엔 7뢴트겐.
내 부하들은 의아해하기 시작했다. 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거나 우리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나? 우리는 핵로가 아직도 불타고 있다는 걸 몰랐고 방사선이 아직도 퍼지고 있는
줄도 몰랐다. 이 지도는 비닐로 밀봉해두었는데 왜냐하면 아직까지 방사선이 나와서... (Vladimir Grebeniuk - 민방위 대령)
별다른 피해 없이, 사람은 1년에 2뢴트겐 정도 흡수할 수 있다고 한다. 만약, 400뢴트겐 넘게
피폭되면 인체는 치명적으로 오염된다. 그 첫째 날에 거주자들은 무해한 양의 50배를 넘게
흡수했다. 그런 속도에서는 4일 안에 치사량에 이르게 된다.
그레베뉴크 대령의 부대가 방사능수치를 조사하여 작성한 키예프 시가지의 방사능오염수치를 나타낸 표시.
붉은색은 심각하게 오염된 지역.
뭔 일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그 대령은 순찰을 보내 발전소 아래에서 처음으로 측정하게 했다.
그 값이 이 지도에 기록되어 있다. 2080뢴트겐!
나는 나의 부하들이 염려되었다. 내가 어떻게 그들을 거기로 보낼 수 있겠는가?
(Vladimir Grebeniuk - 민방위 대령)
이런 천문학적인 수치에서 15분이면 인간에게 치사량이 된다. 그 수치는 충격을 주었다.
핵기관에 그 수치는 충격을 주었다. 그런 방사선 수치를 전엔 본적이 없었다.
고르바쵸프는 서둘러 정부위원회를 국가 최고 핵에너지 전문가들로 만들었다. 국제적 명성의
핵전문가인 학술위원 레가소프가 이끌었다. 과학대표단을 이끌고 그는 바로 체르노빌로 향했다.
맨 왼쪽이 레가소프.
우린 그들이 빨리 평가 내리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 첫 며칠 동안에 그들은 아무것도 우리에게 얘기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극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기다리며 회의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정보를 요구했으나,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폭발 후 20시간, 방사선 수치는 계속 올라갔다. 4월 26일 프리피야트(Pripyat), 그때까지 창문과
문들은 밀봉됐고 요오드 정제를 삼키며 방사선 영향에 대응했다. 그런 지시가 아직 없었으나.
4월 27일 프리피야트(Pripyat), 도시에 긴장감이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에게
상황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유리 마첸코는 그 때 5살이었다.
프리피야트에 그녀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 아버지는 발전소에서 일했다.
(Yulia Martchenko - 프리피야트 주민)
제 부모님은 보통 때처럼 그날 나를 탁아소에 데리고 갔습니다. 모든 것이 매우 정상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사고가 있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예방조치도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Yulia Martchenko - 프리피야트 주민)
맨 앞줄 오른쪽에서 4번째 검은 옷을 입은 아줌마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체르비스키.
그녀는 체르노빌 원전폭발 사고 직후 가족과 함께 5월 노동절축제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 후 그녀는 자살했다.
이처럼 사람들은 체르노빌 사고의 심각한 상황을 알지 못했다.
폭발 30시간 후, 4월 27일 프리피야트(Pripyat), 첫 보안조치가 실시되었다. 1,000대가 넘는
버스들이 도착했다. 오후 2시, 도시에 있던 군인들이 완전히 대피해야 한다고 알렸다.
난 유치원에 있던 선생님을 기억해요. 우리에게 요오드 알약을 나눠줬어요.
그때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을 태워 가려고 왔어요. 모두가 정신없이 다녔으나 패닉상태는
아니었어요. 단지 3일 정도 떠난다고 생각했거든요.
(Yulia Martchenko - 프리피야트 주민)
(Yulia Martchenko - 프리피야트 주민)
어떠한 패닉도 피하기 위해 당국은 상황의 심각성을 감췄다.
거주자들에게 2시간을 주고 소지품을 싸서 그들 집 앞에 모이도록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버스에 타라고 했어요. 가져가고 싶은 장난감이 뭔지 완전 잘 기억하고 있었어요.
많은 인형들이 있었고 그것 모두를 가져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단 한 벌의 따뜻한 옷도 가져갈 수 없었어요.
(Yulia Martchenko - 프리피야트 주민)
사람들은 소유했던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했다. 그들 모든 삶을 뒤로 놔두고 말이다.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 늙은 남자는 가지 않으려 했어요. 그는 뒤에 남았어요. 그들은 몇 주 후 그의 시신을 발견했어요.
(Yulia Martchenko - 프리피야트 주민)
사람들은 일어난 모든 일을 정말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거짓말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1941년 독일의 점령을 기억하는데, 그때는 폭탄들이 떨어졌었죠.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노인들은 보이지 않는 적을 믿지 않았으나
설명해줄 시간이 없었습니다. 내 병사들과 나는 단순히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Vladimir Grebeniuk - 민방위 대령)
4월 27일 프리피야트(Pripyat), 3시간 반 안에, 43,000명의 사람들을 슬프지만 평화롭게 대피시켰다.
버스가 유럽의 첫 핵 난민들을 수송했다.
그들은 많은 양의 방사선에 노출되어 혈액 구성이 바뀔 수 있고, 치명적인 암이 생길 수 있다.
재앙 이후 48시간, 유령 도시에 남은 유일한 사람들은 군인들과 과학 대표들로 프리피야트 호텔을
본부로 삼았다. 위험을 모르는 것처럼, 그들은 호텔안에서 먹고, 자고, 일했다.
군인들과 과학 대표들.
이들은 강직한 사람들로,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좀 무책임하고 죽음을 초래할 일을 한다는
걸 믿을 수 없었죠. 그들이 그 상황을 과소평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오래된 기준은 더 이상 쓸모없었습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전에 핵사고가 있었으나,
그 정보는 비밀로 유지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수준의 사고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5월이나 6월까지 핵로를 재사용할 거라는 생각조차 했죠.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4월 26일, 그동안 방사성 입자로 가득찬 구름이 바람을 따라 북쪽으로 날려가고 있었다.
4월 26일과 27일 사이에, 구름들은 러시아 위로 1,000km를 떠다녀, Belorussia를 넘어 발틱까지 갔다
. 4월 28일, 스웨덴까지 닿아 그들의 핵발전소 근처에서 방사선 증가를 감지할 수 있었다.
곧, TV뉴스에서 주민들에게 경고방송을 했다. 체르노빌에서 온 방사성 먼지가 스톡홀름에 비처럼
쏟아졌다. 당국은 전투기 중대를 보내 구름 속의 수치를 읽게 했다.
방사선 수치는 어딘가에서 심각한 사고가 발생했다는 걸 보여줬다.
재앙이 있은 60시간 후, 소련 연방 밖으로는 아직 공식적 발표를 하지 않았다.
스웨덴의 에너지 부처에서 월요일 내게 전화가 올 당시 난 비엔나의 내 사무실에 있었습니다.
스웨덴 동부 Forsemak의 발전소 근처에서 매우 높은 방사선이 측정되었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게 해외에서 왔음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죠. 이것에 대해 알아야 할 게 있느냐고 그녀는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우린 ‘아니오, 없습니다.’라고 말했으나 우리는 이미 연락하였고
다른 이들은 핵발전소에 문제가 없는 폴란드에 연락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또 뭔가 있다면 그리고
무언가 일어날 수 있으니 당연히 러시아에 연락했었습니다. (Hans Blix - 국제 원자력에너지 기구 회장)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폭발? 방사성 구름? 심각한 오염. 우리에게 경고한 측은 스웨덴이었습니다.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그 사고 3일 후, 고르바쵸프가 아직 자료를 모으고 있을 동안, 미국과 유럽은 스파이 위성을
소련 연방으로 돌려 우크라이나 발전소의 잔해들을 찾았다.
떡 벌어진 구멍에서 퍼져 나오는 연기가 열적 화상을 또렷하게 보여 주었다.
인공위성이 찍은 사진.
28일 월요일 밤, 페트로시안 씨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는데, 소련 원자력에너지위원회의 책임자인
그가 사고에 대해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러시아인들이 세계에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Hans Blix - 국제 원자력에너지 기구 회장)
중앙위원회를 가로질러, 확실히 그것이 절대 필요하다고 바로 결정내렸고 그때부터 우리에게
모든 사실이 보고되었습니다. 나는 KGB를 불렀습니다. 거기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추적하라고
말했고, 과학자들이 나눈 대화를 보고하라고 했습니다. 난 그들에게 모든 정보를 내게
뒤로 보고하라고 말했습니다. 내게 개인적으로.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그 재앙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는데 48시간이 넘게 걸렸다. 프리피아트 43,000명의 거주자들이 '
오염에 노출되는 이틀 동안 위기는 계속 커갔다. 파괴된 핵로의 바닥에서, 12,000톤의 하얀-뜨거운
마그마가 3,000도 넘게 계속 타며, 방사성 기체와 먼지를 대기중으로 계속 보내고 있었다.
유럽 전체는 바람에 좌우되었다.
1986년 4월 28일, 그 재앙의 3일째 날, 앤토치킨 대령과 그의 80대 헬리콥터 비행단을 불과 싸워
화재를 진압토록 모스코에서 보냈다. 그가 도착했을 때 대령은 꺼진 로의 200m 위를 날았다.
Nikolai Antochkin 공군대령과 그의 비행단원.
화재로 인해, 그 높이에서 온도가 120~180도 사이였다. 우리 DP(방사성 계측기)는 500뢴트겐 까지만
읽을 수 있었죠. 바늘이 미친듯 움직였습니다. 계측기 한계를 완전히 넘었습니다.
200m 상공에서도 최소 1,000뢴트겐 일거라 생각합니다. (Nikolai Antochkin - 공군대령)
그 높이에서조차도, 반시간이면 치사량이 될 수 있다. 핵로로부터 뿜어지는 뜨거운 방사성 공기의
독한 흐름은 가까이 접근할 수 없게 했다. 그들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어떤 방도를 마련해야 했다.
(Nikolai Antochkin - 공군대령)
가능하면 재빨리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 다른 작업을 할 수 있게 불을 끄고 핵로를
봉쇄하는 겁니다. 또한 가까이 가서 방사성 먼지가 퍼지는 걸 중단시킬 필요가 있었죠.
그것이 바람에 날려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실제 빠르게 행동해야 했죠. (Nikolai Antochkin - 공군대령)
거대한 발레가 시작되었다. 최고 조종사들이 아프간 전선에서 서둘러 돌아와서 헬리콥터를 몰았고
동승한 군인들은 맨손으로 불속을 향해 80kg의 자루를 던졌다. 그들은 불길을 잡길 바라면서
수 톤의 모래와 붕산으로 핵로를 채워 방사선을 중화시키려 했다.
방사선을 유출을 막기 위해 모래와 붕산으로 핵로를 채우고 있는 모형도.
첫째 날, 110번 출격. 다음 날 300번. 핵로의 바로 위 방사선 수치는 3,500뢴트겐을 넘었는데,
이는 치사량의 거의 9배가 된다. 조종사 일부는 하루에 33번 비행하여 접근했다.
갔을 때마다 매번, 5또는 6뢴트겐씩 피폭되었다. 그들은 꾸물거리면, 더 많이 피폭되었다.
6, 7, 8자루를 던져 넣은 후, 열기 때문에 땀으로 흠뻑 젖었죠. 몇 번 임무를 수행한 후,
내 병사들은 씻고 먹었습니다. 잠시 후, 그들은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Nikolai Antochkin - 공군대령)
그 증세가 시작되고 나서, 방사선 희생자들은 모스코 제6호 병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은 국가의
유일한 시설로 방사선에 대량 피폭 시 나타나는 급성 방사선병과 질환을 전문으로 다루었다.
방사선병의 처음 증세는 구토, 메스꺼움, 설사가 있고 이후 잠재기가 뒤따른다. 나중에서야 죽음을
초래하는 더 많은 증세가 나타난다. 골수 악화와 피부가 먹혀들어가서 뼈까지 끔찍하게 타들어간다.
보통 치사량이 500뢴트겐에 5시간에 걸쳐서 노출되면 죽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데, 체르노빌 사건 당시 소방관들은
1시간에 약 20,000뢴트겐의 방사능 속으로 뛰어들어 대부분 현장에서 죽거나 위 사진과 같이 되었다.
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매우 어렵습니다.
그들은 공항에서 곧바로 왔어요. 그들 거의 모두는 젊었고 잠복기에 도착했어요.
그들은 몸이 괜찮다고 느꼈습니다. 모두 비슷하게 입고, 똑같은 잠옷을 입고 있었죠.
그들은 농담도 했어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우린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 중 27명은 매우 빨리 죽었어요.
그들 모두 어마어마한 양의 방사선에 피폭되었고 생명을 위협하는 화상으로 시달렸어요.
(Natalia Nadejina - 모스코 제6호 병원 간호사)
(Natalia Nadejina - 모스코 제6호 병원 간호사)
15년 동안, 단지 첫 희생자만 당국에 의해 인정받았다.
1986년 5월 1일, 체르노빌 발전소에서 동쪽 30km에 있는 숲은 누렇게 말라갔는데 폭발에 의한
방사성 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재앙 지역은 이미 훨씬 더 멀리 이어졌다. 그 폭발 때문에,
구름에 실린 방사성 입자들이 비와 함께 내렸다.
오염은 “표범무늬“ 형태로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러시아에 영향을 줬다.
방사능 낙진으로 식물이 모두 죽어버린 숲.
그레베뉴크 대령의 부대가 방사능수치를 조사하여 작성한 키예프 시가지의 방사능오염수치를 나타낸 표시.
붉은색은 심각하게 오염된 지역.
1986년 5월 1일에는 바람이 바뀌어, 키에프지역 또한 오염되었는데, 그레베뉴크 대령의 사람들이
읽은 수치로 그린 이 지도에서 볼 수 있다. 심각한 오염지역은 빨간색으로,
방사선 수치가 정상인 지역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그 인구는 여전히 암흑 속에 있다.
단 하나만 있는 이 보고서는 프라우다의 3쪽 아래 하나의 작은 기사로서 그 사고를 경시하고
위험은 지나갔다고 떠든다.
지붕은 동굴 속에 있으며, 거기에서 우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5
월 축제가 진행되기까지, 국가가 그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체르노빌 재앙의 두 번째 양상이었습니다.
(Vladimir Grebeniuk - 민방위 대령)
사고 후 6일째, 정상보다 수천 배 높은 방사선 수치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5월 축제에 참여토록
사람들을 부추겼는데 심각하게 오염된 걸 알면서도 그런 지역들에서조차.
5월 노동절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
나는 내 눈으로 1986년 5월 축제를 봤습니다. 나는 거기에 있었고 나는 그것을 증명합니다.
(Igor Kostin - 사진작가)
그것은 죽음의 행진이었다. 이들은 끔찍한 죽음이었다. 불온하게도, 1986년 5월 축제의 모든
자료화면은 우크라이나 국립기록보관소에서 지금은 사라졌다.
남아 있는 모든 것은 이고르 코스틴의 사진들이다.
맨 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체르비스키.
우크라이나의 첫 서기관인 체르비스키(Cherbitsky) 또한 그의 가족, 손자들과 축제에 갔었습니다.
사실, 이론적으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 같았고, 패닉을 피한 듯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공기에 얼마나 많은 방사능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축제동안 얼마나 많이 오염됐을까? 단 하나의 통계조사도 발표되지 않았다.
체르비스키,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첫 서기관은 뒤에 자살한다.
1986년 5월 2일, 폭발 후 1주일, 대이주가 지속된다. 발전소에서 7km지역의 체르노빌시 거주자들은
이주하게 된다. 발전소 반경 30km 내의 모든 마을사람들 또한 이주한다. 130,000명이 이주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위험할 정도로 이미 오염되었다.
우크라이나와 베로루시아에 이르는 300,000헥타르에 이르는 지역이 갑자기 이주되어 세계로부터
격리되었다. 어마어마한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떠나게 되었고,
그 땅으로부터 전체 문화가 뜯겨 나갔으며, 보이지 않는 적에 의해 며칠 안에 한 세계를 싹쓸었다.
전쟁보다 더 나빴다. 여기서 적을 볼 수 없다. 전쟁에서는 대포, 기관총, 탱크를 보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방사선은 어디에나 있다. 그건 여러분을 바로 통과한다. 그건 우리를 통과해버리고 후에 그 영향을
느끼기 시작한다. 가끔은 몇 년 후. 그것은 끔찍하다. (Igor Kostin - 사진작가)
한편, 방사성 구름은 유럽 위를 계속 떠 다녔다. 바바리아와 이탈리아 북부를 떠돌았다.
방사성 세슘137과 방사성 요오드131이 프랑스 남부와 코르시카에 비처럼 쏟아졌다.
농작물과 환경은심각하게 오염되었다. 프랑스 당국이 그 존재를 부정하는 동안,
그 구름은 영국에 도달했고 그리스로 퍼졌다.
체르노빌의 방사선 수치는 계속 올라갔다. 6,000t의 모래와 붕산으로 그 구멍을 채워갔다.
그러나 이 거대한 마개 밑에는 하얀-뜨거운 마그마가 계속 하얗게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1986년 5월 5일, 그 재앙 후 10일, 고르바쵸프는 개인적으로 한스 블릭을 초대해서 강력한 국제
원자력에너지 기구의 회장이 그 자리를 찾아갔다. 그는 체르노빌을 방문한 첫 전문가 그리고 첫 서양인이었다.
(Hans Blix - 국제 원자력에너지 기구 회장)
저 공기로부터 보니, 손상된 부분에서 아직 약간의 연기가 보였다. 그것들은 2차폭발 위험에 대해
매우 많은 얘기를 해주고 있다. (Hans Blix - 국제 원자력에너지 기구 회장)
나는 우리가 모스코에 있을 때를 기억하는데, 내 전문가 중 하나와 친척인 친구가 실제로 있었는데,
전화로 둘째 핵로 또한 폭발할지 모른다는 루머가 있다고 말했다. (Hans Blix - 국제 원자력에너지 기구 회장)
그 핵로의 바닥에서 195t의 핵연료가 아직 타면서 모래를 서서히 녹이고 믿을 수 없는 열을 내고
있었다. 그 마개의 표면 위에서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구멍에서 마개를 뽑았을 때 온도가 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폭발을 일으킬 수 있으니
우린 두려웠습니다. 그것은 무서웠죠. 과학자들이 측정하러 왔습니다. 그들은 매우 우려했습니다.
그들은 임계온도에 다다를지 모른다고 두려워했고, 그럼 2차폭발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끔찍한 비극입니다. (Nikolai Antochkin - 공군대령)
핵로 중심부 아래의 시멘트 슬라브는 과열되고 있었고 균열의 위험이 있었다.
그 마그마는 그 틈으로 새어 들어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 재앙의 처음 몇 시간 동안 소방관들이 퍼부은 물이 그 슬라브 밑에 고여 있었다. 방사성 마그마
가 그 물과 닿게 되면 2차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 첫 번째보다 훨씬 더 주변을 폐허로 만드는 것이다.
국가 최고 전문가들은 행동에 돌입했다. 바실리 네스데렌코는 그 한 명이다.
당시 그는 소련 연방의 대륙간 핵미사일을 개선시키고 있었다.
(Vassili Nesterenko - 핵물리학자)
만약 열이 시멘트 슬라브에 균열을 가하면 그 1400kg의 우라늄과 흑연 혼합물은 물과 부딪혀
새로운 폭발을 일으키게 됩니다. (Vassili Nesterenko - 핵물리학자)
뒤이은 연쇄반응은 거대한 핵폭탄과 비교할만한 폭발을 유발시킬 수 있다.
우리의 전문가들은 가능성을 연구했고 그건 3에서 5메가톤 위력의 폭발이라 결론을 내렸습니다.
체르노빌에서 320km에 있는 민스키는 완전히 파괴되고 유럽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Vassili Nesterenko - 핵물리학자)
우린 그 과정을 멈춰야 했습니다. 계속되면, 거대한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거대한 핵 재앙.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이 2차폭발은 끔찍한 충격파를 동반하고 엄청난 방사능을 일으켜 수 시간에 수천 명의 생명을
앗아가게 된다.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아 정말 다행입니다. 기차들과 천 대가 넘는 차들로 민스키,
고멜과 키예프에서는 주민들이 이주준비가 되었습니다. (Vassili Nesterenko - 핵물리학자)
상황은 위태로웠다. 모스코에서 국가위원회가 두 가지 비상조치를 선언했다.
첫째, 소방관부대를 보내 핵로 아래의 물을 빼내도록 한다. 그들은 이후 국가 영웅으로 선포되지만
그들의 남은 삶은 방사선병으로 고통받게 된다.
둘째, 틈을 좀 더 효과적으로 막고 완전히 온도를 하강시킨다.
이틀 동안 앤토치킨 대령의 병사들은 2400t의 납을 핵로로 떨어뜨리게 된다.
납을 안으로 떨어뜨리기 시작했을 때 온도가 즉각 내려갔습니다. 그것은 잘 흡수되어 녹으면서
구멍을 밀봉했고 따라서 방사선이 적게 나왔습니다. (Nikolai Antochkin - 공군대령)
그러나 이 납들의 일부는 불길에 부딪쳐 녹으면서 대기중으로 기화했다. 20년 후,
그 자취를 체르노빌의 병든 아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이것은 매우 비난받는 일이지만, 그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고 더 나은 해결책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군인, 시민, 관리들 또는 그 외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돌보지 않고 작업했습니다.
나는 이 첫 무대에 참여했고, 난 여러분들에게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영웅적 행위였습니다. (Nikolai Antochkin - 공군대령)
Nikolai Antochkin 공군대령과 대원들.
이 작전 동안, 600명의 조종사가 방사선에 치명적으로 오염되었다. 그들 모두 죽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단지 며칠을 벌게 했다. 비록 덮어 버렸지만 불은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
헬리콥터 비행은 그 문제를 풀지 못했다. 그들은 더 접근해서 그 균열로 내려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떻게?
1986년 5월 11일 발전소 안에서, 2차폭발의 임박한 위협은 아직 다가오고 있었고 그 임시변통
조치는 계속되었다. 발전소 청사진이 공개되었는데, 두꺼운 시멘트벽에 굴을 뚫고 케이블과
파이프로 “활성영역”에 접근토록 했다. Kurtchatov 위원회의 기술자 대표들은 그 미로에 뛰어들었다.
그건 힘든 일이었다. 터널 부분부분들이 폭발로 무너졌었다. 그들은 소형 가스용접기로 4호기
핵로의 외부벽을 뚫어 방사선측정기와 온도계를 찔러 넣고 카메라를 뒤따르게 했다.
그 결과는 끔찍했다. 방사선 수치는 천문학적이었고 그들의 가장 큰 두려움이 확인되었다.
그 하얀-뜨거운 마그마가 시멘트 슬라브에 균열을 가게 했고 물웅덩이로 새어나오게 했다.
그것은 훨씬 더 깊이 빠져나가려고 위협하고 있었다.
5에서 10%의 폭발 위험이 있었습니다. 핵로 아래의 물을 빼내고 그러나 어떤 일이 절대적으로
되어야 했습니다. 핵로 밑에 무언가 밀어 넣어야 했습니다. 마그마가 새어 내려가는 것을 막으려면
무언가가 빠져드는 마그마를 막아야 했습니다.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아무것도 더 깊이 새어드는 그 마그마를 멈출 수 없다. 모래로 뒤덮인 토양으로. 그리고
핵로 아래에 거대하게 이어지는 대수층이 놓여있고 그것이 국가 전체에 물을 공급하고 있었다.
우리가 가장 걱정하는 것이 전체 덩어리가 내려 앉아 지하수에 닿아 프리피야트 강을 오염시키고
그리고 드니프리(Dniepre), 키에프, 흑해... 우린 절대적으로 해결책이 필요했다!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새로운 작전이 고려되었다... 그러나 더 많은 인명손실이 수반된다. 1986년 5월 12일, 처음 폭발 후
17일 러시아 툴라광산, 체르노빌에서 1000km 떨어진 툴라 광부에게 크레믈린의 채광업
상급 공무원이 방문했다.
그는 체르노빌 사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모스코 분지 지역의 광부들이 필요하다고
말하더군요. 우리에게 24시간을 주고 소지품을 챙기게 했습니다. 다음 날, 우리는 바로 그 광장에서
버스로 모스코 공항까지 수송되었죠. 5월 13일, 우리 동료들은 이미 체르노빌에서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Vladimir Naumov - 툴라 광부)
1986년 체르노빌 원전이 폭발한지 8일이 지난 후 노동자들이 핵발전소에서 자신들을 밖으로 실어 나를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수습팀은 훈련도 받지 않고 허술하게 얼굴만 가린 채 체르노빌 원전에 투입되었다.
방사능 수치가 너무 높아서 버스운전사들은 발전소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위험한
일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아파 드러누웠지만 연락이 잘 안되어 그 지역 병원들도
자신들이 방사능 오염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의 임무는 유일하게 가능한 경로인 ‘지하’로 핵로에 접근하기. 우리의 임무는 이것이었습니다.
150m 터널을 파기. 3호기에서 4호기로, 30m 길이의 터널. 그리고 30m 길이에 30m 넓이 공간을
하나 파고, 핵로를 냉각시킬 냉각장치를 설치하는 것입니다. (Vladimir Naumov - 툴라 광부)
방사선 피폭을 제한하기 위해서, 타고 있는 핵로 아래에 닿기 전까지 12m 밑으로 내려가서 팠다.
거기서 그들은 공간을 하나 짓는데 2m 높이에 30m 넓이였고,
액체질소로 된 복잡한 냉각장치를 설치하려고 했다.
동무들, 우리 목표는 매일 13m씩 터널을 전진시키는 것입니다. (방송)
한 달 동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온 10,000명의 광부들이 터널로 내려 보내졌다.
그들은 20세에서 30세였다. 터널 안쪽에는 환기장치가 없었고 온도는 50도에 육박했으며 방사선은
시간당 최소 1뢴트겐이었다.
우린 어떤 보호장비도 없이 일했습니다. 광부들은 마스크를 사용할 수 없었는데 몇 분 만에 필터가
축축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두가 그것을 바로 벗고 안 쓰고 일을 계속했으며
셔츠 역시 벗어버렸습니다. 뚜껑 열린 병의 물을 마셨고, 그건 정말 나빴는데,
방사성 입자들이 몸에 바로 섭취되기 때문이었습니다. (Vladimir Naumov - 툴라 광부)
우리 동료 중 하나는 모래 알갱이를 삼켰는데 그건 방사능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각자 뭘 숨으로 들여 마시고 섭취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Andrei Nassonov - 툴라 광부)
가장 힘든 건 산소부족이었고 믿을 수 없는 열이었습니다. 뜨거웠고, 뜨거웠고, 뜨거웠습니다.
그리고 정말 빨리 일해야 했습니다. 미친 듯한 속도로. 더 빨리 그리고 더 빨리. 그게 제일 힘들었습니다. Go, go, go...
(Vladimir Amelkov - 툴라 광부)
광부 30명의 병력은 3시간 마다 교체했다. 하루 24시간. 한 달 그리고 4일, 그들은 150m 터널을
팠는데 광갱 하나에 평소 3달 걸리는 일이었다.
가장 위험한 장소는 지하가 아니었습니다. 핵로 바로 아래는 방사선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감에 따라 더욱 빠르게 달려야 했습니다. (Vladimir Amelkov - 툴라 광부)
터널 입구의 방사능은 300배 더 높았습니다. 단 한 명의 광부도 노출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한 번도 그들이 직면한 진짜 위험을 알리지 않았다.
누군가는 가서 그걸 해야만 했습니다. 우리 혹은 다른 누군가가.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해야 했을까? 판단하기에 너무 늦었습니다.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Vladimir Naumov - 툴라 광부)
광부들은 그들의 임무를 달성했고 그러나 냉각장치는 그 로 밑에 결코 설치하지 못했다.
결국 지하공간은 그 구조물을 굳히기 위해 시멘트로 채워졌다.
공식적으로 각 광부들은 30에서 60뢴트겐을 받았으나 생존자들은 그들이 그 양의 5배나 더
받았다고 한다. 이 사람들의 1/4은 40이 되기 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2500명의 생명을
잃었는데 어떠한 공식적인 통계도 나오지 않았다.
광부들이 핵로 아래를 아직 파고 있을 때, 한스 블릭은 소련 당국과 모스코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Moscow, International Press Center). IAEA를 대신하여 말씀드리면, 비극적 사고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생명의 손실과 발생한 그 피해. 사고 후 분석을 위해 비엔나로 가기로 소련 당국과
이제 합의했습니다.
(Hans Blix - 국제 원자력에너지 기구 회장)
전 세계에서 온 500명 기자들 앞에서, 국제회의가 비엔나에서 열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곳에서 소련은 재앙에 대한 그들의 모든 자료를 공유하기로 했다.
회견의 가장 중요한 영향은 소련인들이 이들을 믿을 수 있다고 느낀 것입니다.
그들이 단 한 마디도 믿을 수 없는 정부는, 사고와 재앙은 숨겨졌습니다.
그것들을 알려주지 않았기에 그들이 듣는 모든 것은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는 걱정만 하게 했습니다.
충분히 나빴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신뢰할만하다고 느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글래스노스트(고르바쵸프의 개방정책)의 승리였죠. (Hans Blix - 국제 원자력에너지 기구 회장)
소련정부는 서방과 협력하는데 전적으로 동의했다. 글래스노스트라 알려진 개방시대로의 역사적인
변화이다. 쓰라리게 필요했던 고르바쵸프의 정치적인 승리. 체르노빌에서 그 불은 이제
억제되었으나 수많은 고준위 방사성 파편들이 떨어져 방사성 원소들을 노출시켰다.
극도로 긴급하게 부서진 구조를 덮고 그 지역을 정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1986년 5월 14일, 그 재앙 후 18일, 고르바쵸프는 마침내 소련 사람들에게 연설을 했다.
전 국가가 동원되었습니다. 관료적 절차 없이. 우리가 필요한 모든 걸 누군가 가졌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였죠. 형식적 절차 없이. 이후 비용에 대해 우려하고 있습니다.
우린 필요한 무엇이든 했으며, 그것은 최전방의 상황이었습니다.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콜라이 타라카노프 대령을 보내 육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1년 안에 10만 명의 군인과 장교들이 체르노빌을 통과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비군이었습니다.
그들 시의 최고 기관에 의해 소환되었고 최전방으로 보내졌습니다. (Nikolai Tarakanov - 육군대령)
(Nikolai Tarakanov - 육군대령)
군 요원들과 시민들, 장교들 혹은 일반 병사들, 그들 모두는 체르노빌 전투를 위한 “
청산인(liquidators)"이다. 그들의 임무는 대청소. 방사능 제거하기.
첫째 날은 걱정했습니다. 마스크를 항상 쓰고 다녔죠. 그 다음부터 그것에 대해 잊었습니다.
빨리 익숙해질 겁니다. 집처럼 편안합니다. 농담도 나누며, 모두 행복합니다. 파는 보드카는 없습니다.
모스코에서 말하기를 체르노빌의 청산인들에게.... 공짜로 보드카를 나눠 준데여. 식후마다 150g을
나눠 준다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아내는 무슨 일이냐며 놀라더군요. (군인들)
이고르 코스틴은 5명의 종군기자들 중 한 명으로 크레믈린에 의해 전투를 취재하도록 허가받았다.
모든 것을 비밀로 하는 국가에서 처음으로 말이다. 그 동료 중 3명은 지금은 죽었다.
(Igor Kostin - 사진작가)
거기엔 직함이 없었습니다. 각료들도, 장군이나 병사들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난 장군인데, 내 명령을 수행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들이 정직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이같이 불렀습니다. “체르노빌 사고의 청산”
“the liquidation of the Chernobyl accident" (Igor Kostin - 사진작가)
행동에 돌입했습니다. 100,000명의 병력이 400,000명의 시민들과 같이, 노동자, 엔지니어, 간호사,
의사 그리고 과학자들 그들은 소련연방 각지에서 체르노빌을 거쳐갔다.
소련은 최후의 중대한 전투를 계속했다.
50만 명의 사람들. 체르노빌의 병력들은 나폴레옹의 것보다 컸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대는
오염되었습니다.
(Nikolai Tarakanov - 육군대령)
하늘로부터, 헬리콥터는 “burba"라는 끈적이는 액체를 수톤 떨어뜨렸다. 방사성 먼지들을 땅으로
달라붙게 하는 응고제 혼합물. 그 동안에, 청산자 여단은 그 지역을 청소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어디든 덮고 있는 방사성 먼지 막을 집집마다 제거했다.
특별한 사냥반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들은 소총을 들고 전원지역과 숲을 순찰하며
고양이와 개를 죽였습니다.
(Igor Kostin - 사진작가)
모든 동물들을 사살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심한 오염지역을 돌아다닐 때,
방사능으로 털이 흠뻑 쩔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청산자들을 오염시킬 수 있다.
“한 사람이 이 집에 살고 있다. 부수지 마라...” (집에 쓰여진 글)
그 지역의 마지막 마을에 아직 남아있던 사람들이 이주되었다. 그 집들은 하나하나 철거되어
묻혔다. 밤에 트럭, 기계들과 사람들이 방사성 먼지들로 덮였다.
우린 5번 혹은 6번 샤워했습니다. 서로를 도왔습니다. 마장갑과 가급적 가장 거친 비누를 사용했죠.
문질러 씻었습니다. 새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먹었습니다.
우린 거기에서 정말 잘 먹었습니다. 왜냐하면 이혼화시키는 방사선과 싸우기 위해 체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죠. 이온화시키는 방사선은 몸에서 약한 부분을 찾아냅니다.
거기로 침투하여 사람을 쓰러뜨립니다. (Igor Kostin - 사진작가)
1986년 7월, 4호기 공업지역. 발전소 둘레로, 거대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일주일에
7일씩 진행되었다. 30만 세제곱미터의 오염된 흙은 커다란 구덩이에 불도저로 밀어넣었고
시멘트로 덮었다.
이곳은 4호 핵로의 근처로, 그 지역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가 수행된 지역입니다. (Igor Kostin - 사진작가)
폭발 8주 후, 청산인들은 문제의 핵심과 씨름했다. 오랜 동안 유독 폐기물들을 중화시키고 더 이상
퍼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꺼진 핵로 전체를 격리시켜야 한다. 레프 볼차코프는 엔지니어 중
한 명으로 4호기를 완전히 덮는 그 거대한 건축물을 디자인 했다. 콘크리트와 철로 된 하나의
“석관”, 170m의 길이와 66m의 높이.
그것은 하나의 특별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아무도 이전에 이런 방사능 지역에서 그런 건축물을 지은
적이 없습니다. 한 번에 단 몇 분만 일할 수 있습니다. 전엔 결코 행한 적이 없습니다. (Lev Bocharov - 엔진니어)
(Lev Bocharov - 엔진니어)
이는 거대한 도전이었다. 한 번에 단 몇 분 혹은 몇 초만 일할 수 있는 곳에,
엄청난 건축물을 어떻게 지을까? 이 순전히 새로운 상황은 청산인들의 임기응변이 더 많이 필요했다
. 또 더 많은 생명을 위험에 빠뜨렸다.
1986년 8월, 체르노빌 4호기의 첫 폭발 후 이제 12주가 더 지났다. 죽음의 오염을 멈추기 위해,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지역의 방사선은 매우 높아 원격 조정 기계가 보내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장비들을 작업 위치로 가져가야 했다. 작업자들은 방사선을 치사량으로
받지 않을 단 몇 분만 머무를 수 있다. 매초마다, 그들의 생존을 위협한다.
여기 장갑차가 하나 있습니다. 원시적으로 보이지만, 우리 자신을 위해 만들어 냈습니다.
운전석 전체를 납으로 덧댔습니다. 우리 군인들을 방사선으로부터 최대한 보호할 수 있도록.
(Nikolai Tarakanov - 육군대령)
구조물의 각 금속조각들은 미리 만들어졌으며 간혹 수백 킬로미터 멀리에서 조립할 장소로 하나씩
옮겨졌다. 하나의 거대한 퍼즐, 150t에 70m 길이의 빔. 45m 높이의 지지대.
저것이 DEMAC 4000입니다. 이 크레인의 크기를 보십시오. 우린 그곳에서 매우 오래 일할 수 없었고
실수조차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작은 계산착오라도 그 모두를 함께 끼워 맞출 수 없게 합니다. (Lev Bocharov - 엔진니어)
이 극단적인 조건에서 작업이 진행됐다. 10만 세제곱미터의 시멘트가 그 구조물을 짓는데 사용된다.
그러나 작업을 방해하는 새로운 문제가 발견됐다.
발전소 지붕이 매우 심하게 오염된 흑연 조각들로 덮여 있었다.
1986년 9월, 3호로의 지붕, 저기 떨어져 있는 조각을 봐, 저것이 문제야, 500뢴트겐. 그리고
저기 있는 건, 1000뢴트겐이고. 가자고. 충분해. 우린 여기서 나가야 해. 자, 나가자!
이 흑연 조각들은 우라늄 봉을 감쌌던 것들이다. 폭발하는 동안 핵로로부터 날려 나왔던 것이다.
조각 하나가 한 시간 안에 사람을 죽이기에 충분한 방사선을 낸다.
공사를 계속하기 전에 필히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저것은 방사선이 굉장히 높습니다. 손으로 제거할 수 없습니다. 로봇을 사용해야 합니다.
지붕위로 로봇을 보내 그 치명적인 파편들을 지붕 끝으로 밀어 60m 아래로 떨어뜨려 또 다른
로봇들이 그것을 모아 땅에 묻도록 했다. 그러나 며칠 뒤, 주변 방사선이 이 기계에 마저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로봇의 전자회로가 견딜 수 없었다. 회로가 미쳐 날뛰다가 고장나버렸다.
그 중 하나는 터져 버렸다.
로봇을 끄집어냈습니까?
지붕에서 로봇기계는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사람들로 교체해야 했다. 러시아 군인들,
이 경우 “바이오 로봇”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려졌다.
1986년 9월 17일, 3호기 지붕 아래. 이들 젊은 예비군 부대는 처음으로 3번째 핵로의 지붕 위로 가도
록 준비했다. 그들은 20세에서 30세 사이였으며, 체르노빌의 가장 위험한 죽음의 전투에 소집된
예비군들이었다. 어떤 인간도 이처럼 강한 방사선 지역에서 일한 적이 없었다.
니콜라이 타라카노프 대령은 이 작전을 지휘했는데, 모든 세부사항을 직접 감독했으며...
손으로 기워 만든 납옷에 이르기까지 모든 군인은 공격 전 밤늦게까지 준비했다.
그들의 앞면, 등위, 부츠 그것들을 납으로 감쌌습니다. 헬멧, 베타선 차단을 위한 마스크 그리고
특별히 만든 앞치마. 손을 보호하는 이중막. 이 모든 복장은 26에서 30kg이 나갔습니다. (Nikolai Tarakanov - 육군대령)
종합검진을 받았나?
예.
문제없나? 좋아. 그럼 모든 게 준비됐다.
동무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건... 이틀 전 내가 장교와 지붕에 올라갔었는데, 하나는 확실하다.
무서워할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줄 수 있다.
분명히, 어떤 이들은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비군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야 했습니다. 나를 위해, 어떤 질문도 없습니다. 나를 위해 누가 그걸 하겠습니까?
누가 이 엄청난 재앙을 정리하고 전세계에 방출되는 방사선을 막으러 가겠습니까?
누군가는 해야 합니다. (Alexander Fedotov - 바이오 로봇)
(Alexander Fedotov - 바이오 로봇)
지옥의 두 주 반, 그러나 지옥은 각 군인에게 2-3분간만 지속되었습니다. 혹은 수치가 매우 높을 땐
단 40초간만. 우린 작업시간을 주의깊게 계산했습니다. 가능하면 많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요.
(Nikolai Tarakanov - 육군대령)
사이렌 소리가 나면, 8명 한 조의 군인들이 장교를 따라 지붕위로 뛰어갔다. 그들의 임무는
간단하다. 가능하면 재빨리 방사성 잔해들을 삽으로 떠서 지붕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정확히 해, 정확히 해.
좋아!
타라코프 대령의 계산에 의하면, 방사선 수치는 시간당 7000뢴트겐으로 추정되어 바이오 로봇에게
45초간만 지붕 위에 있을 수 있었고 이는 한 삽 가득 두어 번 작업하기에만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개미 같았습니다. 몇몇이 작업을 끝내자마자 다른 이들이 곧바로 교대했습니다. 모두가
그들의 일을 했고, 아무리 작은 양이어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렇게 우리가 함께
방사선과 싸울 수가 있었습니다.
(Alexander Fedotov - 바이오 로봇)
10일 동안, 새로운 바이오 로봇 무리가 매 10분간씩 지붕에 올라갔다. 군조직의 인사과에 따르면,
3,500명이 그 청소에 참여했다. 이고르 코스틴과 콘스탄틴 페도토프 같은 사람은 5번 지붕위에 올라갔다.
1,500뢴트겐이 되는 조각들을 집어들었습니다. 일을 하고 난 후 우리 손은 아프고 쑤셨으며 주먹을
쥘 수가 없게 됐습니다. (Alexander Fedotov - 바이오 로봇)
내가 처음 지붕에 올라갔을 때, 그곳에서 신비한 감정으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치 다른 행성 위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게 방사성 폐기물로 덮여 있었습니다. 내 손은 떨렸습니다.
내가 있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필름 위의 방사선 흔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카메라를 잡고 있었고 방사선은 바닥에서
이렇게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Igor Kostin - 사진작가)
눈은 다쳤고 입에서 금속 맛이 났습니다. 이것들이 느낄 수 있는 두 가지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 번
느끼면, 정상보다 많이 피폭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Alexander Fedotov - 바이오 로봇)
이(teeth)에서 느낄 수 없습니다. 입은 이런 납맛으로 가득 찹니다. 이렇게 되지만,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습니다. 20년이 지난 오늘날마저, 입에서 그 납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Igor Kostin - 사진작가)
그들 수천 명이 발견하는 이 특이한 맛은 보이지 않는 적의 공격을 뜻한다. 바이오 로봇들이 발전소
지붕에서 그들의 생명을 희생했기 때문에 30km지역에 걸친 정화작업은 지속되었다. 하루 24시간,
비가 오든 날이 개든.
정상적으로 한 사람이 한 시간 작업을 하는 곳, 여기 체르노빌에 60명이 모였습니다. (Lev Bocharov - 엔진니어)
우리가 지붕에서 뛰어 내려왔을 때, 드라큘라에게 혈액을 빨린 것처럼 느꼈습니다. 우린 힘이 빠져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 코피를 흘렸습니다. 소방관이 바로 거기 있었습니다.
누군가 코피를 흘리기 시작하면, 그들을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쓰러지면 집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는 젊고 건장했습니다. 건강이 망가졌고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내 기록에 우리가 20.5뢴트겐을 받았다고 적었습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그 수치는 실제 양보다 몇 배 적었습니다.
(Alexander Fedotov - 바이오 로봇)
베테란 코소프!
네.
일에 감사한다. 보상으로, 각 군인은 군에서 청산인 증명서를 받았고,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100루블(오늘날 100달러(U.S.)와 같은 액수!)의 보너스를 받았다. 그리고 훌륭한 장교가 되기를.
그들은 그들의 목숨을 걸었다. 그러나 지붕위의 방사선 수치는 35%만 감소했다.
이들 모두가 지붕으로 보내졌을 때, 아무도 정확한 실제 방사선 수치를 몰랐습니다.
시간당 10,000~12,000뢴트겐 정도였다는 걸 오늘날 알 수 있습니다. 그 방사선 수치에,
절대 사람들을 보내면 안 됩니다! (Vassili Nesterenko - 핵물리학자)
1986년 10월 말, 폭발 6개월 후, 그 지역은 정화됐고 석관 작업은 완료됐다. 50만 명의 군인과
시민들이 그 작전에 참여했다.
나는 위원회에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그런 방사선 수치에 맞섰으며, 모든 흑연들을 청소하였고,
그런 영웅적인 일을 완수했다고. 군인들은 깃발을 건다든지 하는 상징적인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Nikolai Tarakanov - 육군대령)
국기를 내거는 것은 파시즘이 붉은 군대를 점령했을 때 라익스타그(the Reichstag - 독일의회)에
국기를 거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들에게, 그 기는 방사능에 대한 승리의 상징이었습니다. (Igor Kostin - 사진작가)
청산인들의 각 팀은 그들 방식대로 임무종료를 축하했다. 보차로프와 그의 사람들은 그 석관의
꼭대기에 올라가 마지막 금속 조각에 그들의 이름을 새겼다.
우리 석관은 신전(Pantheom)이다. 하나의 무덤(tomb). 하나의 묘(mausoleum)... 우리의 두 번째 묘!
그로부터 우린 핵발전소 건설을 멈췄습니다. (Lev Bocharov - 엔진니어)
쓰라린 승리. 그 국가는 결코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180억 루블(약 20조원)을 썼습니다. 그때에, 1루블은 1달러의 가치였습니다. 180억!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잠시 사려깊게 살펴보면, 석유 가격이 붕괴됐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제를 상상할 수 있고
페레스트로이카가 맞섰습니다.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1986년 11월 22일, 첫 눈이 체르노빌 위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당국은, 이것은 석관이 밀폐되었음을
증명한다. 적어도 30년, 또 그들은 예상한다. 청산인들은 집으로 갔다. 핵로 1, 2 그리고 3호는 예비용
으로 가동되고 있다. 체르노빌의 첫 전투는 USSR의 끝을 예고한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오랜 동안,
20년 후에도 끝나지 않은 전쟁의 시작을 나타낸다.
2005년 11월 프리피야트, 20년 후, 프리피야트는 완전히 유령마을이다. 이고르 코스틴과 함께한
율리아는 그녀와 가족이 함께 살던 아파트가 보고 싶었다. 이주하던 파멸적인 날까지 살았던.
그들이 들었던 것과 반대로 거주자들은 한 명도 결코 버려진 건물로 살러 되돌아 올 수 없었다.
이고르 코스틴 뿐만 아니라, 그 방문은 고통스런 기억을 자극했다. 방사선에 치명적으로 피폭됐는데
그 전투를 제압하기 위해 치른 7개월 동안 말이다. 그 뒤, 매년 2달 넘게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10만 명의 핵난민들은 10만 명의 체르노빌 전투의 베테랑으로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에 긴장을
풀지 않았었다. 체르노빌로 간 모든 사람들은 그들 몸에 흡수된 방사선으로 아직까지 고통받고
있다. 그 사고에 뒤따른 몇 개월간 청산인들은 병원으로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소련 곳곳의 병원으로. 20년 후, 아직 살아남은 이들은 제6호 병원에 번번히 계속 다니고 있다.
그들은 모두 희생자들로 전문가들은 이후 “체르노빌 증후군”이라 불렀다.
우린 모두 많은 증상을 갖고 있습니다. 심장, 위장, 간, 콩팥, 신경계. 몸 전체는 근본적으로 탈이
났습니다. 방사선이 일으킨 신진대사 변화와 그리고 화학적 피폭으로. (Vladimir Naumov - 툴라 광부)
청산인들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기진맥진해져서 정상적인 생활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20년 후, 많은 생존자들은 장애를 입고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당국은 그들의 곤경을
무시하는 것 같다. 그들의 복지자금을 삭감해가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베테랑들은 아직 살아있는데, 천천히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시를 썼습니다.
(생존자들)
슬픔이 나를 채웠다.
향수와 비통
관자놀이의 총알처럼
아무것도 멈출 수 없다.
어머니는 신에게 남모르게 기도한다.
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이들은 30대도 안 되어 핵과 싸우도록 보내졌다. 오늘날 생존자들은 50세도 안 되었으나,
어르신들처럼 힘겹게 산다. 군에 따르면, 500,000명의 체르노빌 청산인들 중 2만 명은 이미 죽었고
200,000명은 공식적인 장애자가 됐다.
얼마나 살아야 할지 무슨 질병으로 죽게 될지 모릅니다. 자녀를 하나라도 가진다면 자녀에게 무슨
영향이 갈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고 보이지 않는 적이 벌레처럼 몸 안에서
먹어치우고 있단 걸 압니다. 우리에게 전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조금씩 조금씩 이 세계에서 우리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Nikolai Antochkin - 공군대령)
20년 동안 아직까지, 단지 59명 사망자만 공식적 체르노빌 재앙 결과로 보고 있다.
(그럼 비공식적 사망자는 허상이었나?) 그 지역 130,000명 난민들에 대한 단 하나의 조사도 없었다.
500,000명 청산인들의 상태에 대한 단 하나의 통계도 없다. 체르노빌 주위와 오염된 지역에 계속
살고 있는 인구에 대한 수치도 없다. 이들이 피폭된 방사선의 실제 양을 그들에게 결코 밝히지 않았다.
최고 소비에트 대행은 체르노빌의 실제 결과의 조직적인 은폐를 발견했는데
1991년 소비에트 제국이 사라질 때였다.
(Alla Yaroshinskaya - USSR 최고 소비에트 대행)
나라에서 무정부상태의 이점으로 그녀는 최고기밀 문서 사본을 손에 넣었다. 중앙위원회로
올린 600페이지 보고서로 체르노빌 전쟁이 맹렬할 때 쓰여졌다.
내가 이 문서들을 읽었을 때, 모든 것이 다르게 일어났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당지도자가 한 거짓말이 얼마나 큰 것인지 겨우 깨닫게 됐죠. 1986년 5월 12일 명시한 법령
제12호, 10,198명 사람들이 입원했다. “345명은 방사선 이온화 병변을 보였다.”
동시에 그들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좋다. 심각한 것은 전혀 없다고 해왔으나,
난 거짓의 규모를 이해했다. (Alla Yaroshinskaya - USSR 최고 소비에트 대행)
알라에 따르면, 다른 절은 당국이 표준을 독단적으로 바꿔 인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사선 양을 5배 늘렸다고 밝혔다.
표준을 올렸을 때, 갑자기 사람들은 기적처럼 낳았다. 그들을 병원에서 퇴원시켜 집으로 보냈다.
그건 범죄였다.
(Alla Yaroshinskaya - USSR 최고 소비에트 대행)
숫자를 다루는 그 경향이 소비에트만 유일한 것이 아니었다. 1986년 늦은 8월, 비엔나 - IAEA 본부는
체르노빌을 평가하는 첫 국제회담이 비공개로 열렸다. 한스 블릭이 주재하였고,
기자도 관람자도 그 원형회장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련 대표들은 레가소프가 이끌었는데
체르노빌 전투 동안에 그는 정부위원을 맡고 있었다.
우리가 그를 IAEA에 보낼 보고서를 준비하도록 맡겼을 때 모든 것을 보고할 의무를 부과했었다.
그들 모두를 충격에 빠뜨릴 매우 자세한 보고서를 가지고 도착했다.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가소프는 3시간 동안 말했다. 그의 보고서는 다가오는 10년간, 체르노빌에 의한 암으로
약 40,000명의 죽음이 예상된다고 결론지었다. 서방세계는 이 추정치를 받아들이길 완전히
거절하면서 진실한 동·서 협약의 자극이 되었다.
이들 이론적 계산은 히로시마 모델에 기초를 두었다. 매우 많은 방사선에 피폭되었을 경우,
히로시마에서와 같이 장기적으로 영향을 주며, 그래서 혹은 그래서 많이 그로인해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배 증가시키면 사망자는 10배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것이 그 계산이었습니다.
이것은 정확하지 않아, 내가 생각하기에, 경험적이지 않아.. (Hans Blix - 국제 원자력에너지 기구 회장)
거기서 또 그 수치는 놀랍도록 유연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40,000이 아니라, 오히려 4,000이있을
법한 죽음이라고 얘기했다. 거의 20년 후인 2005년 구월에 이 수치는 그 재앙의 공식적인 희생자
수로 되었다. 소비에트 투명정책에 가장 충실한 대항 세력은 심지어 부정하기까지 했던 프랑스였고,
방사성 구름이 그들 나라 위로 지나갔었다.
프랑스 위로 아무것도 관측되지 않았습니까?
아니오. 그 방향으로 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시계 반대방향으로 불고 있습니다.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공중보건에 절대 위험이 없습니다. (프랑스 보건부장관 P.P.교수)
20년 후 프랑스와 특히 코시카에서 같은 성격의 갑상선암 사례들과 체르노빌 주변과 같은 가혹함이
보고되고 있다.
체르노빌 핵로에서 나온 가장 위험한 원소는 세슘이나 플루토늄이 아니었고, 거짓말이었습니다.
1986년의 거짓말, 난 그렇게 부릅니다. 방사선처럼 퍼져나간 거짓말 하나가 나라 전체와 전 세계를
거칩니다. (Alla Yaroshinskaya - USSR 최고 소비에트 대행)
1988년 4월 27일, 그 재앙의 두 번째 추모제. 전체 진실을 발표하기 위해 너무 많은 일을 하였던
레가소프 그의 삶을 끝내기로 결정한다.
레가소프.
오늘날, 제도화된 거짓말의 완벽한 은유처럼 폭발시 핵로에서 방출된 방사성 입자들은 토양을 계속
오염시킨다. 그 재앙 후 20년, 체르노빌 지역은 여전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다.
5년 안에, 방사성 핵종이 오염된 땅 속으로 5cm 가라앉습니다. 그렇게 20년 후, 그들은 땅 속으로
20cm 내려가죠. 그들은 모든 식물을 계속 오염시킵니다. 그것을 치우기 위해 토양 20cm를
제거해야 하고 매몰 장소의 땅 속에 밀폐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이는 너무나 큰일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Nikolai Tarakanov - 육군대령)
오늘날, 8백만 명의 사람들이 오염지역인 우크라이나, 러시아와 특히 벨로러시아에 살고 있다.
20년 동안, 그들은 방사성 음식을 주식으로 해오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들을 오염시켜왔다.
이 문제가 비엔나 회담에서 구소련 대표들에 의해 제기됐으나 조직적으로 무시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1152명의 아이들이 갑상선암으로 1986년과 2002년 사이에 민스키의
특수화된 센터에서 수술받았다.
다른 도시는 어느 정도일까? 전체적인 통계는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의사 유리 반다제프스키는 재앙 후 줄곧 오염된 지역의 인구에서 질병을 연구해왔다.
그의 발견을 1996년 발표했을 때, 그는 바로 비난받았다. 체포되어 공식적으로 “부패” 선고를 받고,
이후 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2005년 11월, 그는 아직까지 가택연금 상태다.
(Youri Bandazhevsky - 방사능 오염 지역의 질병을 연구한 의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세요. 임신중에 세슘에 어미가 오염되었을 때 말입니다. 가족 하나에,
얼마나 많은 기형이 있는지 봐요. 언청이, 눈이 없거나, 기형 두개골. 이 배아들은 고멜(Gomel)
지역의 오염된 잔디만 먹인 햄스터의 배아들이다. 그 결과, 전체 새끼들이, 세슘이 오염된 먹이를
먹었던 동물들에서 생기는 배아 기형이 얼마나 많은지 소름끼쳤습니다.
2주 동안에 기형을 소름끼치게 많이 얻었습니다. 보통, “괴물”을 만나면 묘사합니다.
넌 분명히 비슷해. 성 피트버그에 있는 쿤스트카메라 박물관(the Great`s Kunstkamera Museum)의 피터.
솔직히 말해서, 내가 원하는 만큼 많은 “괴물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Youri Bandazhevsky - 방사능 오염 지역의 질병을 연구한 의사)
체르노빌에서 기인한 유전자병형에 대한 공식적인 연구는 없어왔다. 그 재앙에 뒤따라 발생한
수천의 유산과 낙태에도 불구하고. 방사선 영향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이 수백 명 있는 듯하다.
이 아이들 중 보는 기형은 반다제프스키의 햄스터와 비슷하다. 벨로러시아에서 300,000명 아이들이
현재 고통받고 있는데 오염의 결과이다. 국제 녹십자와 같은 NGOs는 고르바쵸프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1991년 정부로부터 왕따당한 이후, 체르노빌 희생자를 치료하고 지원하기 위해
열었다. 그들은 또한 치료법 캠프를 조직하여 오염지역의 새 세대들에게 방사능과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고 여기처럼, 그들 음식의 오염을 검사한다.
이것이 지나가려면 몇 년이나 걸릴까요? 800년? 800년. 두 번째 예수가 태어날 때까지?
그의 부활까지? 예, 체르노빌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역할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우린 계속 찾아야 하고 지나치지 말아야 합니다. (not skimp on means.) 국제협력을 강화해야 하며,
국제 과학센터를 만들어서 더 안전한 에너지원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필수사안입니다.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누구든, 내 친구나 내 적이나 그런 재앙을 겪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체르노빌에서 우리가 했던 걸
아무도 겪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인류이며 아무도 그것을 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Nikolai Antochkin - 공군대령)
그 지역의 중심에서, 핵발전소에서 10km, 그리고 숲에 숨겨진 체르노빌 2 지역
(The Zone Chernobyl 2)이 있다. 20년 전에 이 거대한 군사 레이다에 아무도 접근할 수 없었다.
모스코의 숨겨진 눈으로 미국 미사일 추적을 위한 것이다. 폭발 후 그 임무를...
체르노빌 2 지역의 거대 군사 레이다 시설.
체르노빌 원전 폭발로 방사능에 오염되어 폐기된 군장비들.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고, 핵무기는 더욱 더 끔찍합니다. 체르노빌은 핵로 단 하나에서
일어난 사고였으나 제한된 사고, 그 결과는 아직 우리와 함께 합니다. 폭탄이 둘 터졌었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거기에서 또 그 결과는 오늘날 아직까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Nikolai Antochkin - 공군대령)
체르노빌은 사람의 손에 놓인 핵에너지의 실체를 보여줬습니다.
가장 강력한 미사일을 계산해낼 수 있습니다. ‘the SS-18'은 체르노빌 100배 위력을 가졌습니다.
‘the SS-18'은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탄두들인데, 우린 그걸 2,700기나 보유했었습니다.
이들은 미국에 대항한 미사일들이었습니다. 2,700기! 그 파괴력을 상상해 보세요..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SS-18.
고르바쵸프의 말은 아마 맞을 것입니다. 체르노빌은 대규모 방사능이 통제를 잃었을 때의 실례였다
는 이런 의미로, 사람들은 더 신랄하게 핵무기를 멀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Hans Blix - 국제 원자력에너지 기구 회장)
체르노빌 사고 후 1년 반, 고르바쵸프는 500에서 5,000km에 이르는 모든 핵탄두를 폐기했다.
10년 후, the Total Nuclear Test Ban Treaty가 전 세계에 비준되었는데, 인도를 제외한 전 세계가.
체르노빌은 세계 최대 핵 경쟁자들에게 군비축소의 시작이었다.
체르노빌은 모두에게 깨닫게 했습니다. 소련과 미국과 양쪽 모두. 우리 나라들이 깔고 앉은 핵화산의
중대함을 완전 이해했습니다. 우리 두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전 세계가! (Mikhael Gorbachev -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아직 20년이 됐지만, 체르노빌 재앙과 그 교훈은 기억으로부터 희미해지는 것 같다. 그 동안,
늙어가고 있는 4호기 핵로의 석관 아래에 죽음의 그 독은 여전히 남아 있다. 2001년 이후,
3개의 체르노빌 핵로가 완전히 멈췄다. 그러나 폭발 후 20년, 석관의 맨 아래에서 방사선량계가 눈금
을 넘어버린다. 방사선이 고준위로, 즉 발전소 주변은 아직도 정상의 100배나 오염되어 있다.
구조물은 비와 부식으로 약해지고 있다. 건설 이후, 3,000명의 청산인들이 그것을 지켜봐왔다.
피해방지를 위해 노력하면서.
30년 유지되도록 이 석관을 지었다. 폭발 후 30년을 생각하며, 새로운 석관을 지을 수 있는데,
고준위 방사선에 맞서지 않고 말입니다. 20년이 지나왔으나 아직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체하는 건 시급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더 이상 돈이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Lev Bocharov - 엔진니어)
새로운 석관은 이미 진행중이다. 그러나 그 건설은 계획한지 이미 10년이 지났다. 108m 높이의
구조물은 첫 석관을 몽땅 덮는 것을 의미한다. 비용이 든다. 10억 달러(1조원 이상). 한스 블릭이
이끄는 국제기금이 설립되었다.
그 위에 새로운 석관을 놓지 못했습니다. 이미 수년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건설되면,
나중에 폐연료 덩어리들을 제거할 수가 있다. 아직까지 거기에 있는 용융된 연료들을...
(Hans Blix - 국제 원자력에너지 기구 회장)
폭발 후 20년, 핵로의 중심에서 냉각된 마그마, 14m 아래에서 아직까지 끔찍한 위협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후 안전성을 보장 못한 채 다가올 수년을 그렇게 남아있을 것이다.
그 석관이 결코 무너지지 않기를 신께 기도합니다. 그것은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입니다.
그 안쪽에 100kg의 플루토늄이 있기 때문입니다. 1마이크로 그램(0.000001g)이 인간에게 치사량이
됩니다. 1억 명을 해칠 수 있는 양의 플루토늄이라는 의미이다. 플루토늄의 반감기, 달리 말하면
절반의 플루토늄이 사라지기(핵분열로 다른 물질로 바뀜)까지 걸리는 시간은 245,000년(종류에 따라)이다.
그러니 우리가 영원히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는 살아갈 수 없는 지역들이 있다. (Vassili Nesterenko - 핵물리학자)
이런 끔찍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체르노빌로 촉발된 핵해체는 오늘날 분명 문제로 되고 있다.
화석연료와 온난화의 해결책으로 핵이 시민을 위해 개발되면 이 풍경은 그 결과가 선택사항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지대한 주의가 요구된다. 그리고 실제 있을 위험에 대한 투명한 정보가.
체르노빌은 또한 우리에게 방사능과 그 피할 수 없는 위험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면 어떤 핵 대재앙
위험도 미래 후손들이 피하도록 해야 함을 상기시켜준다.
출처 : The Battle of Chernobyl.
A film by Thomas Johnson
Produced By Play Film For Discovery Networks International
Discovery Channel - 사고 20년 후인 2006년 5월에 방영된 다큐멘터리.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전경.
폐허로 변해버린 체르노빌.
1986년 대재앙 이후 버려진 체르노빌 항구 소공원의 레닌 동상.
체르노빌은 아직도 방사능 수치가 높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목숨을 잃은 어린이들.
체르노빌 원전사고 발생 후 모두 왼쪽 팔 부분이 없이 기형으로 태어난 아이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갑상선암에 걸린 사람들. ⓒGerd Ludwig
기형 해바라기.
기형 송아지.
기형 개구리.
유전자 이상으로 거대해진 물고기.
유전자 이상으로 커진 지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