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31 - 6. 6 가나인사아트센터 (T.02-736-1020, 인사동)
전통미와 현대미의 성공적인 마리아쥬를 기대하며
채림 개인전
작가는 정교하고 화려한 보석공예와 우리 전통예술의 대표적인 분야 가운데 옻칠과 자개를 결합하는 나전칠기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본격적인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그녀의 선택은 전통예술을 탐구하되 서두르지 않으며, 전통의 현대화 작업에 자신이 오랫동안 해온 보석디자인 작업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글 :하계훈(미술평론가)
숲속 바람의 노래, 900×450mm, 목판에 옻칠, 실버925, 자개, 2017
절대군주시대에 설립된 왕립미술원과 왕립미술학교 등의 기관들도 작가들에게 창작의 규범을 강제하였고, 이러한 규범의 수용 여부에 따라 살롱(Le Salon)전과 같은 공모전에 출품할 기회가 주어지는지 여부가 결정되었다. 이러한 제도는 유명한 1863년 낙선자전람회(Salon des Refuses)와 무심사 전시회인 앙데팡당전(Salon des Artistes Independant) 등에 의해 전환기를 맞으며 점진적으로 진화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살펴보면 우리 미술계에서도 이러한 규범주의적 미술 생태계가 최근까지 주도적으로 작가들의 창작세계를 형성하였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작가 채림은 원래 보석 디자인 영역에서 활동하던 작가다.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하기 이전에 불문학 학사 및 석사과정을 통해 예술적 창작의 자양분이 될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출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경력이 오늘날 작가의 작품에서 읽혀지는 숙성된 주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와 같은 타블로 형태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채림은 이탈리아, 일본 등 의상과 보석 디자인 전문 교육기관에서 훈련받은뒤, 보석디자이너로서 오랫동안 활동해왔다. 그녀의 주얼리 작품은 Wearable Art라는 당시에는 생소한 영역으로 보석 디자인 작품들을 예술품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이러한 채림의 이력은 작가에게 국제적인 시각에서 예술을 사유하는 능력을 부여하였고 그 결과로 국제 앙드레 말로 협회상,일본 미키모토상, 홍콩 씨그니티상등을 비롯한 많은 상을 수상하였지만,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작가가 주얼리디자인으로 조형 훈련을 받으면서도 우리나라의 전통과 미감에 대해 꾸준하게 관심을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숲속을 거닐며, 2760×2030mm, TOTAL: 13ps, 목판에 옻칠, 실버 925, 자개, 2016
채림의 최근 작품은 이러한 국제적 경험 위에 자신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전통 예술에서 포착되는 미감을 융합하는 것에서 착안되었다. 작가는 정교하고 화려한 보석공예와 우리 전통예술의 대표적인 분야 가운데 옻칠과 자개를 결합하는 나전칠기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본격적인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오늘날 급속하게 현대화(또는 서구화)되는 우리의 생활환경이 전통에 대한 관심을 점차 감소시키고 있지만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세울 수 있는 토대가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낸 것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이야기한 것처럼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은 이러한 논리를 든든하게 뒷받침해준다.
그녀의 선택은 전통예술을 탐구하되 서두르지 않으며, 전통의 현대화 작업에 자신이 오랫동안 해온 보석디자인 작업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무려 40여회의 옻칠과 연마로 바탕 화면을 마련하는 작업에서 작가는 밑칠이 마르면 다시 그 표면을 연마하고 칠을 더하는 과정에서, 자연과 교감하고 느리게 호흡하고 기다림으로써 아름다운 표면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 표면 위에 아교로 자개를 붙이는 전통적 방식이 아닌 장신구를 제작할 때 보석을 잡아주는 프롱 세팅 작업에 의해 보석의 자리에 자개가 얹혀진다. 꽂는 침까지 모두 실버 925로 만들어진 테두리틀들은 한국 전통 문양의 자개를 옻칠위에 아름답게 수놓아주고 있다.
이러한 결합은 전통과 현대의 결합이며 동양과 서양의 결합이기도 하고 금속과 전복 껍데기라는 서로 다른 물질의 결합이면서 이제까지 보지 못한 jamais-vu의 새로운 표현으로 탄생된다.
우리 전통 미술사에서 금속과 칠기의 결합은 드물긴 하지만 국보 140호 나전단화금수문(螺鈿團花禽獸文) 거울에서 볼 수 있는 평탈(平脫) 기법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금속은 옻칠면 위에 자개 대신 오려붙여지고 다시 그 위에 옻칠이 가해지는 방식으로서 회화적 평면의 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채림의 작품에서 자개를 잡고 있는 금속은 옻칠면에 부착되는 것이 아니라 화면에서 떨어져 수직으로 나무처럼 심어지는 방식으로 적용된다.
이러한 작품은 평면이면서 부조적 입체성을 갖기도 하며, 바탕을 이루는 옻칠과 부유하듯 표면으로부터 떠있는 자개의 이미지들이 조명 효과에 의해서 오묘한 빛의 스펙트럼을 펼치기도 하며 그림자를 옻칠면 위에 투사하기도 한다.
미류나무, 루가노 근처, 400×580mm, 410×600mm, 목판에 옻칠, 실버 925, 2017
작가는 자신의 이러한 작품기법을 ‘빛과 그림자 효과’나 Mirror lake처럼 호수 위에 산의 이미지가 투영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렇게 제작된 작품들을 하나의 독창적인 유닛으로 설정하고 상하좌우로 확장시킴으로써 거대한 설치작업으로 발전하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일부 작품에서는 병풍이나 서양의 두 폭 혹은 세 폭 제단화와 같은 형식의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옻칠면의 맑은 색채와 광택을 배경으로 반짝거리는 자개와 은의 빛나는 조합은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게 우아한 입체 화면을 구성하게 된다.
세밀하고 반복적인 노동의 결과물로서 어렵게 태어난 작품들을 통해, 작가는 현대인들의 눈을 사로잡지 못해 온 전통의 아름다움을 옻칠과 나전 그리고 보석디자인의 기법으로 되살리며 아름답게 융합시켜오고 있다.
어려운 길이지만 부디 채림 작가가 이런 작업들을 통해 우리의 전통예술이 현대인의 생활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숨쉬고, 더 나아가 나라 밖에서의 관람자들에게도 우리의 미감을 전하는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다 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