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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시작
막 1:1-8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막 1:1-8 / [침례 요한의 선포;마3:1-12,눅3:1-18,요1:19-28]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2)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ㄱ) `보라! 내가 이제 내 심부름꾼을 보내어, 내 길을 준비하도록 하겠다'라는 말씀이 있다. (ㄱ. 말3:1) 3) 또 ㄴ) `너희는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가실 길을 광야에 뚫어 놓아라. 거친 사막을 평평하게 다듬어서 우리 하나님이 통과하실 큰길을 닦아 놓아라!'라는 말씀도 있다. (ㄴ. 사40:3) 4) 이 하나님의 사자가 바로 침례 요한이다. 그는 광야에서 살며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침례를 받으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5) 그때 예루살렘과 온 유대 지방 사람들이 요한에게 몰려와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았다. 6-7) 요한은 몸에 낙타털을 걸치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양식삼아 살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내 뒤에 오십니다. 그분은 너무도 위대하여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8) 나는 물로 침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침례를 주실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는 다르게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에 관한 내용 없이 복음서를 기술하며, 마치 장중한 오케스트라의 서곡과도 같이 복음의 시작을 선포합니다.
복음(1) 마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으로 복음서를 기록합니다. 가장 기쁜 소식인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할 때 비로소 복음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지만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 즉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복음이 시작되었듯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로 믿을 때 내 삶 속에서도 복음을 통해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선지자의 예언(2-3) 선지자 이사야는 이 복음을 위해 예비된 사자가 있음을 예언합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고 예언합니다. 이는 마치 왕이 행차를 할 때 그 앞 길을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역사적 사건은 즉흥적이거나 갑작스런 일이 아닌 하나님의 원대하신 구원 계획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언약을 기록하고 있으며, 신약은 그 언약이 성취된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세례 요한(4-8)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물로 세례를 주며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자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메시야를 전파하였습니다. “나보다 더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표현하며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고 전파합니다. 본래 세례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복음을 위하여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였습니다(눅 1장). 광야에서 생활하며 제사장의 세마포 옷 대신 낙타털 옷을 입고 최고의 음식 대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오직 복음을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렸습니다.
적용: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복음 안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새로운 역사를 출발 할 이들을 만나 보십시오.
반식재상[伴食宰相].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무능한 대신을 비꼬아 이르는 말입니다. 밥값도 못하면서 때가 되면 제 몫을 챙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능력도 없으면서 말은 많다는 것입니다. 힘 있고 유능한 동료 곁에 빌붙어 아부나 떨며 눈 밖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한심한 작태를 일삼습니다. 능력이 없으면서 능력 있는 사람에게 빌붙어 자리를 보존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밥값을 제대로 하려면 절치부심 노력해서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분명히 알았고 충실히 감당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자신의 사명은 오직 광야의 소리로만 존재하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 설 교 >
복음의 시작 / 이성희 목사
서론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라는 글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두십시오. 그것은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책 읽는 시간을 따로 떼어두십시오. 그것은 지혜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시간을 따로 떼어두십시오. 그것은 신이 부여한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웃는 시간을 따로 떼어두십시오. 그것은 영혼의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시간을 따로 떼어두십시오. 그것은 이기적이기엔 우리의 하루가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두십시오. 그것은 지상최대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이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의 다짐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해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의 결심이 새롭기를 기대합니다.
신약성경은 선형의 시간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은 일직선과 같이 흘러간다는 개념입니다. 이런 시간개념을 ‘직선적 시간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시작점이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결정적 중간점이고, 그리스도의 재림은 종착점입니다. 성경적 시간관은 분명한 시작과 마지막이 있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순환적 시간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시간은 일정한 변화에 따라 순환한다는 이론입니다. 원자세계나 천체운동은 다 순환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운동을 반복합니다. 하루에 낮과 밤이 교차하는 것이 순환이라고 보며, 사계절의 주기적 순행이 순환이라고 보는 등입니다. 이와 더불어 ‘나선형 시간관’도 있습니다. 시간은 순환하면서 끝을 향해 진행된다는 시간관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시작이 있습니다. 인생은 옛날로 돌아가지 않고 앞으로 계속 진행합니다. 우리 인생은 계속 진행되는데 우리 인생을 시작하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시작이십니다.
잠언 8:22에는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시작인 태초에 나를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머니 뱃속에 생길 그 때가 아니라 태초에 나를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시작은 태초인데 그 때 나를 가지셨고, 하나님은 나를 시작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시작이십니다. 하나님은 새 시간의 주신이시며 새해를 지으신 새해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작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자신이 끝나는 지점이 바로 하나님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작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끝내게 하시며, 우리가 끝나는 시간이 하나님도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영원을 향해 다시 시작하십니다.
시작은 누구나 희망과, 기대와, 승리와, 부푼 가슴으로 맞는 시간입니다. 절망으로 시작하는 일이 있습니까? 절망으로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패배로 시작하는 전쟁이 있습니까? 이런 시작은 없습니다. 시작은 누구에게나 희망이며 승리입니다.
‘복음의 시작’은 인류의 희망이며 개인의 승리입니다. 복음이 시작되므로 인간에게 비로소 구원의 소망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복음은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의 시작과 함께 인류에게는 구원의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시작은 인류와 개인에게 희망이며 승리입니다.
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은 복음으로 희망을 가지며, 복음에 기대하며, 복음으로 승리를 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란 주제를 가슴에 품고 복음으로 우리의 새 삶을 시작하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1. 복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가복음 1:1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마가복음뿐만 아니라 모든 복음서의 서론이며 결론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복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복과 기쁨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가능하였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예수님의 복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주셨던 율법과 계명은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죽이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의 시작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비로소 시작된 것입니다.
“시작이라”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성경에 보면 마가복음의 제일 첫 말입니다. 마가복음은 “시작”이란 말로 시작합니다. “시작”이란 말은 헬라어로 ‘아르케’입니다.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알렉산드리아의 디아스포라 학자들이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에는 창세기 1:1의 ‘태초에’란 말을 ‘엔 아르케’라고 쓰고 있습니다. 창세기 1:1과 마가복음 1:1은 같은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1:1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새 역사의 시작, 곧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로 삼고 있습니다.
창세기 1:1과 요한복음 1:1의 “태초에”는 우주를 창조하신 그분께서 인간의 구원역사도 수행해 나가고 계심을 가리키는 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의 사실은 복음의 근본이요, 시작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계획은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세워놓으신 것임을 뜻합니다.
인류의 전 역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시간을 기점으로 하여 주전(BC)과 주후(AD)로 나눕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 한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인류의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43세에 이탈리아 밀라노의 로드비공으로부터 ‘최후의 만찬’을 그려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앙에 앉아계시고 양쪽에 여섯 명씩 제자들이 앉아 있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수님이 손에 은잔을 들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자 다빈치는 자기의 절친한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주면서 잘 된 부분과 잘 못된 부분에 대한 의견을 말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친구가 그림을 보면서 “야, 최대의 걸작품이야. 예수님의 손에 들려져 있는 은잔이 너무 섬세하고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네”라고 하였습니다. 다빈치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것도 시선을 끌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그에게 시선이 끌려야 한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손에 들려진 은잔을 지워버렸다고 합니다. 예수님 외에 어떤 것도 우리 삶의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 어떤 것도 우리 개인과 인류의 시작이 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3:23에는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입니다. 새 언약 시대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복음시대의 새로운 시작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은 모두 예수님께서 복음의 시작임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시작으로 개인의 삶이 시작됩니다. 복음이 아니면 우리에게 새 삶은 없습니다. 베드로는 복음이신 예수님을 만나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는 예수님을 만나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나사렛에서 거룩한 이가 나올 수 없다고 했던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율법이 제일인줄 알고 예수 믿는 사람을 심하게 박해하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므로 새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자신의 외모만 믿고 살던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의 풍조와 쾌락을 좇던 아우구스티누스가 예수님을 만나므로 완전한 새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므로 새로운 삶을 산 사람은 성 프란시스, 루터 그리고 우리나라의 이기풍, 김익두만이 아닙니다. 우리교회의 초대장로인 고찬익이 그랬으며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젊어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멀리 했지만 노후에는 하나님께 돌아와 “인생의 석양녘에 나는 교회 이외에 내 영혼이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이 내 삶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 동안 가장 많은 사람과 방송 인터뷰를 했던 CNN 방송의 래리 킹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터뷰 대상자를 한 사람 고른다면 누구로 정하시겠습니까?”라는 물음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인 킹은 “나는 그분이 정말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는지 묻고 싶군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내게 역사를 정의해 줄 겁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 인류의 역사는 그리스도가 시작과 마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며, 예수님께 대한 물음이 가장 소중한 믿음의 시작입니다.
요한계시록 22:13에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역사의 시작이며 마지막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시작입니다. 복음을 시작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고 복음의 삶을 시작하고 매일 복음으로 살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복음의 시작은 세례요한의 전파에서 비롯됩니다.
마가복음 1:4에는 “세례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선구자인 세례요한의 탄생까지 누가는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아버지는 사가랴였고, 어머니는 엘리사벳이었고,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14에는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알립니다. 15절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합니다. 선구자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미리 전파하였고 그리고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전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보다 앞서 복음에 필요한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증언들입니다. 신약은 오신 메시야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다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증언입니다. 구약의 인물들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수많은 인물과 많은 사건이 구약시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인물과 사건은 복음의 시작은 아닙니다.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연습에 불과했습니다. 요한이 와서 비로소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를 울린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세례요한에게 “네가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이 말은 요한을 메시야로 알고 확인하였다는 말입니다. 20절에는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라고 합니다. 당시인들은 요한을 메시야로 알고 있었지만 요한은 “나는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요한을 메시야로 알았기에 요한은 “보면 모르냐?”, “내가 누구인줄 아느냐?”라는 정도로 말만 잘 했어도 인기가 폭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합니다. 진정한 자기부인은 선구자의 자세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조건입니다.
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한 일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죄를 사하는 회개는 복음의 시작입니다. 죄 사함의 회개 없이는 복음도 구원도 하늘나라도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장 중요한 것을 요한이 선구자로 와서 먼저 전파한 것입니다.
오케스트라 공연을 가보면 주자들이 먼저 자신의 자리에 등장해서 조율을 합니다. 각자 자신의 악기를 조율하는데 시끄러운 소리를 냅니다.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먼저 화음이 되지 않는 각자의 소리를 한 번 내어봐야 합니다. 조율이 끝나게 되면 지휘자가 등장합니다. 지휘자가 등단해야 연주는 시작됩니다. 지휘자가 없이는 연주는 시작되지 않습니다. 야구경기를 가보면 시작하게 전에 선수들이 몸을 풉니다. 공을 서로 던지고 받기도 하고, 방망이를 휘둘러보기도 하고 땅에 굴러오는 볼을 받아 던지는 수비 연습도 합니다. 그러나 선수들이 등장했다고 해도 경기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애국가가 끝나고 투수가 첫 볼을 던지는 순간 경기는 시작됩니다. 세례요한이 등장해도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시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복음이 시작됩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임신했으면 뱃속에서 아기의 삶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아기의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입니다. 생일은 뱃속에서 아기가 생긴 날이 아닙니다. 어머니 뱃속에서의 삶은 아기의 삶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아기의 삶이 아니라 어머니의 삶입니다. 내 삶의 시작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태어난 날을 생일이라고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복음을 태동시켰습니다. 말하자면 복음을 임신한 것입니다. 둘째 사람 예수님은 복음의 시작입니다. 복음이 비로소 태어난 것입니다. 태동이 아니라 태어날 때에 복음의 진가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날이 참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나므로 영적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을 가던 길에서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나므로 영적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후 386년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를 만나므로 완전한 새로운 영적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예수님을 만나므로 새로운 삶이 가능했습니다. 개인에게 복음이 시작되므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나이팅게일이 30살이 되던 날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내 나이 서른 살이 되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다. 주님, 저도 오늘부터 당신의 부르심에 따라 살겠습니다. 유치했던 생각은 버리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겠습니다.”나이팅게일이 30세 되던 때 자신의 내면에서 복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0:37에는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한 내용의 한 부분입니다. 요한은 복음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시작된 복음은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이후 오늘날까지 복음이 살아 역사합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회개해야 복음을 믿게 되는 이 등식은 복음의 시작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죄를 지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복음을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 미국의 사업가이며 열정적인 선교활동을 한 스탠리 탬은 은 생산으로 사업에 성공한 부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복음 때문에 사업에 성공했다고 믿으므로 공장 정문에 ‘그리스도가 해답이다’(Christ is the answer)라는 글을 회사 간판보다 더 크게 써서 달아놓았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상담을 청하게 되면 “가정과 사업의 문제는 영혼의 문제입니다”라고 조언하였다고 합니다. 회개와 복음이 그의 사업을 성공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창세기 1:1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창조는 계속됩니다. 복음도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끝나지 않고 지속되면서 개인의 마음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결 론
베트남이 통일된 다음 ‘보트피플’이란 난민들이 많았습니다. 베트남이 공산화된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을 떠나는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밤중에 몰래 탈출하려고 배를 타고 밤새 노를 저었습니다. 아침에 해가 뜰 무렵 자신들의 위치를 알았을 때 그들은 경악했습니다. 배는 항구를 떠나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맴돌고 있었습니다. 배를 묶어 놓은 닻줄을 끊지 않아 열심히 노를 저었지만 항구를 떠나지 못하고 제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시작은 이전의 율법과 단절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시작은 우리의 삶에 어떤 것일까요? 복음의 시작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놓을까요? 복음의 시작은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게 합니다. 새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옛사람을 벗어야 합니다. 옛 생활에 묶여진 우리 자신을 단절해야 새로운 생활에 연결할 수 있습니다. 아기가 탄생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아기가 숨을 쉴 수 있도록 울음을 터트리게 하고 그리고 어머니와 연결된 탯줄을 끊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새롭게 탄생하기 위해서는 먼저 새로운 세상과 호흡해야 합니다. 그리고 옛 세계와 단절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속에 복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6에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은 복음을 시작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회개하여 구원을 이루고 영생을 얻게 하신 이가 마지막 날까지 우리 안에서 그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의 시작으로 구원받은 감격과 감사로 영생의 삶을 누리는 귀한 한 해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복음의 시작 / 이명식 목사
마가복음 1:1-13
본서의 저자는 요한 마가로서, 히브리 이름은 요한이고, 라틴어 이름은 마가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생전에 예수님을 따라 다니지도 아니했고 사도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출신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헬라 교육을 받은 유능한 청년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신앙심이 깊은 여인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신앙적 영향을 받고 자란 그는 진리를 사랑하고 복음 역사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연약하여 어려운 현실 문제에 부딪히면 도망을 잘 갔습니다(막14:51,52, 행13:13). 그러나 그는 사도 베드로의 복음 증거를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변화되어 생동감 있는 마가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벧전5:31). 그는 베드로의 동역자 뿐만 아니라 후에 바울의 동역자로 복음 역사에 귀한 일군이 되었습니다(딤후4:11). 마가의 심볼은 사자입니다. 그는 처음에 연약하여 도망을 잘 갔으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는 사자와 같이 獅子吼를 토하는 복음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연약하고 두려움이 많은 자라 할지라도 예수님 안에서 변화만 되면 獅子吼를 토하는 담대한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1. 복음의 시작(1).
마가복음은 장엄한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1)." '하나님의 아들' 이란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신성을 말합니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임명된 선지자, 대제사장, 그리고 만인의 왕' 을 뜻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 죄와 죽음 권세 아래 있는 인생들을 구원하여 주시겠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복음이 시작되기 이전의 세상은 한마디로 아담의 범죄로 죄와 사망이 지배하던 곳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이 땅에는 죄와 죽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27절을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고 했습니다. 거기에다 심판만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계시록 21:8절을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죄의 결과는 무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채찍과 조롱과 멸시를 받게 하셨습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시고 무서운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 몸으로 내가 받아야 할 죄를 담당케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죄인들이 정결케 되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상처받은 마음이 치료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이 가져다 주는 불안과 절망과 회의와 허무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시작입니다.
창세기 1:1절이 천지창조의 대역사를 선포하는 말씀이라면, 마가복음 1:1절은 인류의 최대 원수인 죄와 어두움과 사망이 물러가고, 죄 사함과 빛과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복음의 시작으로 어두움에서 빛이, 죽음에서 생명이, 절망에서 희망이 시작되었습니다. 율법의 시대에서 은혜의 시대가, 정죄와 심판에서 죄 사함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미움에서 사랑이, 마귀의 지배에서 성령의 지배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속박에서 자유가 시작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자아와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습니다.
본래 우리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거룩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거룩과 사랑과 의입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우리의 내면은 거룩을 사모하기보다는 추하고 더러운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사랑보다는 미움이 가득하고, 의보다는 거짓과 위선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사명을 잃고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 것인가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피비린내 나는 약육강식과 전쟁만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복음의 시작으로 거룩한 사명이 회복되었습니다. 서로간의 관계성이 회복되어 마음껏 웃게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전과 소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정죄나 죄의식에 시달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썩을 소망을 바라고 살던 삶에서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바라며 살게 되었습니다. 병든 내면과 상처가 치유되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2.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2-5).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 후 이 복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메시야의 선구자 세례 요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한 직후부터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3:15). 그 후 하나님은 메시야가 오시기 전 선구자를 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때가 되자 선구자 세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그의 사명은 주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것이요, 그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마가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생략했지만 누가복음에는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눅3:4,5)." 백성들은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 때 세례 요한은 백성들이 메시야를 영접할 수 있도록 백성들의 마음을 준비시켰습니다.
세상에 골짜기, 높은 산과 낮은 산, 굽은 길, 험한 길 등이 있듯이 우리의 내면도 이와 같습니다. 골짜기는 깊이 패인 곳입니다. 사람이 운명의 골짜기, 패배의 골짜기, 절망의 골짜기, 열등감의 골짜기, 사망 권세의 골짜기에 빠지게 되면 헤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기력하고 자신을 자학하고 남을 원망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파괴된 가정에서 자라 미움과 불신과 증오의 골짜기에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증오의 눈초리로 사람과 사회를 저주합니다. 또한 원치 않게 죄를 짓고 사망의 골짜기에서 고통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 말씀으로 깊은 골짜기를 메워야 합니다. 그 때 운명과 패배의 골짜기에서 나와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있습니다.
또 각종 산이 있습니다. 산은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큰 산은 아주 교만한 사람이요, 작은 산은 덜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크게 교만한 사람이나 작게 교만한 사람이나 교만하기에는 다 똑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의가 강하고 자존심이 강합니다. 자존심을 건드리면 불독처럼 눈을 부릅뜨고 덤빕니다. 그리고 자기 광을 내기를 좋아하고 남을 무시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배우려하지 않고 영적인 것을 우습게 여깁니다. 이런 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값싼 자존심을 깨고 죄인으로서의 자아를 발견하여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굽은 길이 있습니다. 굽은 길은 마음이 삐뚤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슨 말만 해도 과민반응을 일으켜 반발하고 냉소적입니다. 모든 것을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고 비판적입니다. 목자의 사랑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관심을 갖고 사랑하면 자기 일에 너무 상관한다고 반발하고, 관심을 두지 않으면 무관심하다고 반발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의 숯불 위에 은혜의 말씀과 이해와 사랑으로 녹여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험한 길이 있습니다. 험한 길은 완악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경질적이고 표독스럽습니다. 그리고 남에게 상처를 주고 분쟁을 일으킵니다. 이런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온유하신 예수님, 겸손하신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이 때 탕자가 성자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광야는 메마른 곳입니다. 광야는 거칠고 맹수가 우글댑니다. 이처럼 우리의 내면은 광야처럼 메말라 있습니다. 사랑이 메말라 있습니다. 정서가 메말라 있습니다. 인정이 메말라 있습니다. 도덕성과 영성이 메말라 있습니다.
3. 세례 요한의 생활 양식(6).
6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약대털로 낮에는 의복을 삼고 밤에는 이불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가난한 자들이 먹는 석청과 메뚜기를 잡아 먹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서 얼마든지 성전에서 마음껏 먹으며 좋은 가운을 입고 좋은 환경 속에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검소하게 시대와 구별된 생활을 했습니다. 바로 그 구별된 생활에서 그의 능력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은 금욕적인 삶이 아닌 사명을 중심으로 한 삶입니다. 생활인은 생활을 중심으로 살지만, 사명인은 사명을 중심으로 삽니다.
4. 세례 요한의 증거의 내용(7-8).
그는 메세지나 삶에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회개의 세례를 전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선전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 면에서 예수님을 선전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당시 세례 요한의 인기는 날로 상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혹시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눅3:15). 그는 백성들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자신은 예수님의 신들메도 풀 수 없는 비천한 존재요, 예수님은 자신과 비교할 수도 없는 고귀하고 위대하신 분임을 증거했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신분면에서 뿐만 아니라 하는 일에서도 근본적으로 다름을 증거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물 세례는 회개의 세례로써, 죄 사함을 받도록 마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죄를 사하여 주고 소멸합니다. 우리를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 성령 세례는 죄를 회개하고 자복한 자에게 임합니다(행2:38). 세례 요한은 물 세례를 주는 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성령 세례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말씀을 통해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에 충성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자기를 낮추고 예수님을 높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여자가 난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눅7:28). 우리가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5. 복음 역사를 준비하신 예수님(9-13).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기 위하여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요단 강까지 먼 길을 오셨습니다. 백성들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 죄가 없으십니다(히4:15). 그런데 예수님은 왜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1. 죄인된 인간과 동일하게 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지만 인간과 함께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 있는 인간의 모습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인간과 똑같은 입장에서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갈4:5, 마3:15).
2. 메시야로서의 공포입니다. 예수님은 이때까지 갈릴리 나사렛에서 조용히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메시야로서 공생애(public life)를 시작하셨습니다.
3. 역사 계승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독자적으로 복음 역사를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루어 놓으신 역사를 이어 받으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단절의 역사이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계승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입니다(마1:1).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무슨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곧 물에서 올라오실 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10)" '하늘이 갈라진 것' 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하신 것' 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위로부터 덧입으신 것을 말합니다. 성령은 지혜와 능력의 근원이요, 사단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로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이 음성은 복음 역사를 시작하시는 예수님께 큰 힘과 소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역사를 감당하실 때 많은 환난과 시련과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당한다 할지라도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뻐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실 수 있었습니다.
12, 13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예수님이 사단에게 시험받으신 것은 성령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홀로 사단과 영적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을 보면, 40일간 광야에서 먹는 문제, 명예와 안일 문제, 영적 경배에 대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아담은 부족함이 없는 에덴에서 시험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험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아담은 사단에게 패배하여 모든 인류를 사단의 종으로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승리하심으로 모든 자에게 승리의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복음 역사는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사명인의 삶을 살고자 할 때 반드시 시험이 있습니다. 사단은 물질과 명예, 안일과 영적 교만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참소하고 대적합니다. “꼭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는가?”, “세상 재미를 즐기며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가?” 이런 사단의 유혹과 싸우기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영적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위대한 사명인의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단의 유혹과 참소와 대적은 우리의 힘과 지혜와 의지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능력을 덧입을 때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사단의 세력을 파하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능히 사단의 대적과 유혹과 참소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주의 오심을 예비하라
마가복음 1:1-8
다사다난했던 2003년을 보내면서 여러 가지로 마음과 몸이 분주한 계절, 12월 중순을 맞이하였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점점 타락과 죄에 깊이 빠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최대의 사건은 아마도 연일 쏟아져 나오는 정치인들의 불법 대선자금 뉴수일 것입니다. 그리고 불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성탄과 연말연시를 맞이하면서 술자리만 늘어나고 비싼 몇백만원짜리 양주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젊은이들이 대학을 졸업해도 직장 실업률이 점점 높아만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더 취업의 문이 더 좁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서울시 구로구청이 13년 만에 실시한 환경미화원 선발시험에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가 대거 몰려 경제불황 속의 취업난을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18명 모집에 127명이 지원해 7.1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고, 이 가운데 대졸 이상은 34명으로 전체 응시자의 26.9%를 차지했으며, 고졸 학력 응시자가 55.3%인 71명, 중졸 학력 응시자가 13.5%인 17명이었다는 것입니다. 응시자들 가운데 대학원 졸업자도 있어 구청직원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이것은 그만큼 힘든 취업난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반문했습니다. 대졸이 환경미화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고급 인력이 제대로 일할 곳이 없는 어려운 가운데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어려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여전히 성탄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구주성탄을 앞두고 진정한 성탄의 복을 받는 성탄절과 연말이 되시길 바랍니다.
진정한 성탄의 복은 어떻게 받습니까? 마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에 대하여 잘 알고 마음을 잘 지키고 관리해야 합니다. 그만큼 마음이 중요합니다.
잠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빌2:5에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주님을 믿으면서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며 참된 승리도 축복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제는 모두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을 바꾼다는 것,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을 바꾸고 그 마음을 지키려면 그 마음속에 주님이 오셔야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마음속에 주님이 오시는 길을 내야 합니다.
본문의 세례요한도 주님이 오시는 길을 내고 있습니다.
막1:2-3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우리 마음속에 주님이 오시도록 길을 내어야 함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시84:5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우리 마음속에 첫 번 성탄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는 것이 바로 성탄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이제 주의 오심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의 사역을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절)
본문 1:1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주목해야할 엄청난 일은 바로 “복음의 시작이다”라는 말입니다. 시작하면 두 가지를 기억하게 되는데, 먼저는 이 세상의 시작입니다. 이 세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창1:1절 말씀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모든 자연적인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시작은 본문 막1:1절로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기쁨의 소리라는 뜻입니다. 복된 소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복된 기쁨의 소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시작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복음이라는 기쁨의 소식이 필요합니까?
처음에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어 놓으신 다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사람을 지으시고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아름답다 하면서 만들어 놓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자신의 욕심과 잘못된 판단으로 인하여 불순종함으로 죄가 들어 왔습니다. 그 뒤로부터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한 이 세상에 분열과, 시기와 미움이, 저주와 증오가,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이로 인하여 이 세상은 마음의 상처와, 불만과, 불안, 두려움, 원망과 분노, 소외와 무력감, 열등감 등이 들어오게 됩니다. 또한 이것을 빌미로 삼아 우리를 계속해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신으로 끌어가는 사단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죄를 짓게 만들고 그 죄는 다시 우리에게 또 다음 세대들에게 또 그 다음 세대들에게 반복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들고 시기하게 만들고 열등감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럼으로 이 세상에서 인간의 모든 역사는 바로 이러한 죄의 사슬이 주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막1:1절에 나오는 “복음의 시작이다” 라는 말속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러한 죄의 고리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다는 소리가 바로 복음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그 시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원치 않는 아픔과 고통 그리고 나쁜 감정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려면 이 시작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여기서 복음의 시작이라고 했으니 복음 이전에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율법이란 것은 사람을 얽어매고 있는 것입니다. 빠져 나오면 애쓰면 애쓸수록 더 심하게 조여 매는 것입니다. 수렁에 빠진 사람이 빠져 나오려고 허우적 거리면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풀어주는 것입니다. 수렁이 아닌 마른 땅을 딛고 마음대로 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이 시작은 구원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을 의미합니다. 무대의 막이 올라가는 것을 알리는 징소리와 같은 그런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은 우연한 시작이 아닙니다. 예정된 시작입니다. 준비된 시작입니다. 복음의 시작은 시작만 해 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흐지부지되는 그런 시작이 아님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 같은 시작이 아닙니다. 시작만 해놓고 끝을 보지 못하는 그런 시작이 아닙니다. 구원 역사의 완성을 향해서 줄기차게 달려가는 시작입니다. 말구유에 아기 예수로 탄생하심만이 아니라, 30년의 사생애, 3년의 공생애,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승천,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이제 그리스도 재림은 구원역사의 완전한 완성입니다. 인류의 죄 문제 해결의 우렁찬 시작이요, 구원의 성취가 보장된 그런 시작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장엄한 선언을 해 놓고 아주 빠르고 생동감 있게 예수님의 생애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는 예수님의 족보, 탄생 이야기, 이런 것으로 시작하는데 마가는 세례 요한 이야기 잠깐 소개하고 바로 예수님의 전도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우물쭈물하지 않고 확실하고도 빠르게 마가복음은 진행이 됩니다.
더구나 마가복음은 문체가 간결하고, 해설이 별로 붙어 있지 않고,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빠르게 넘어가는 것이 마가복음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국어에서 문장의 문체에는 건조체도 있고 강건체도 있고 화려체도 있고 우유체도 있고 "아!" "오!"가 많이 들어가는 영탄체도 있는데 마가복음의 문체는 건조체인데 이 말은 간결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하드 보일"입니다.
마가복음에 아주 많이, 마흔한 번이나 나오는 단어가 헬라어의 "유두스"인데 "곧" "즉시", right away란 말입니다. 사건 중심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행동의 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에도 나를 따르라 말씀하실 때 베드로와 그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곧 버려두고 예수룰 좇으니라 했습니다.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내 병이 낫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질 때 즉시 곧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복음을 받았으면 우물쭈물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가의 고백처럼 확고하고 빠른 걸음으로 신앙의 길을 걸어 나가야합니다. 결단할 때까지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비교도 해보고 여러 가지 예측도 해 보고 그렇지만 일단 결단한 다음에는 주저하지 말고 빠른 걸음으로 결단한 내용을 실천에 옮겨야합니다. 믿었으면 마가복음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즉시, 바로 믿고 결단해 나가야 합니다. 뒤돌아보면 안됩니다.
여러분, 도움이 되지 못할 일에 붙들려 있지 말고 새롭게 시작하시기 바람니다. 한번 시작했으면 마가복음처럼 힘있게, 뒤돌아보지 말고, 생동감 있게 앞으로 나갈 수 있기 바람니다.
2.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2,3절)
본문 2절과 3절에 '준비'라는 말이 한번씩 나옵니다. 2절,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이 말씀은 말라기 말씀을 인용한 것이고 3절에,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이 말씀은 이사야서40:3의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마가가 구약을 직접 인용한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마가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을 준비한 세례 요한을 그 출발점으로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례 요한을 '세례자 요한'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요한은 세례자이면서 동시에 '준비자'였습니다. 준비자 요한은 동시에 시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사람 세례 요한을 먼저 보내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의 예언대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함이 어떠합니까? 3절에 보면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했습니다. “첩경”이란 말은 지름길을 말합니다. 곧은 길이란 뜻이고 대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뜻은 예수님의 가는 길에 장애물을 모두 거두어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시키란 뜻입니다.
이 일을 위해 세례 요한이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마 3:22에 보면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으니 메시야가 오셨으니 그를 만나려거든 영접하려거든 회개하라 그런 뜻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해주시는 분이다! 그 분을 만나려거든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명백합니다. 세례 요한이 가르친 예수님 만나는 길은 아주 분명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가르친 회개란 무엇일까요? 아주 행동적입니다. 구체적입니다. 마3:17에 보면 세례 요한이 그 시대에 매우 종교적이고 또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보고 호되게 책망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의 헛된 자존심을 완전히 뭉개버렸습니다. 그들의 자존심, 독선적인 생각, 왜곡된 편견이 예수님을 만나는 데 큰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자기 의를 믿는 사람,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자기 생각이 최고인 것으로 생각하는 독선적 사로를 버리지 않는 사람은 결단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례 요한의 가르침은 매우 도덕적이었습니다. 눅3:11~14 말씀이 그것을 가르칩니다. 회개를 요구하는 세례요한의 강렬한 메시지를 듣고 백성들이 놀랐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세례 요한의 대답은 회개의 심정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지니라. 세리들이 와서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묻습니다. 정한 세금 외에는 늑징치 말라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군인들까지 와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소리칩니다.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죄없는 자를 괴롭히지 말고 받은 월급으로 족한 줄 알라고 말씀했습니다.
요즘 우리가 보고 있듯이 재물과 권력은 참으로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한 평생을 헌신해 오던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 재물과 권력을 손에 쥐니까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사례들을 우리는 수도 없이 보아 왔습니다. 그들 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재물과 권력의 마수에서 벗어나기가 정말 힘듭니다. 재물과 권력은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우상입니다. 이 우상을 버리지 않고는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다! 이것이 세례요한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부른 찬송가 102장은 수많은 성도들의 심금을 울린 찬송입니다. 요즘 같이 물질만능주의, 권력제일주의, 세상 쾌락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더욱 귀한 찬송입니다. ♬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얼마나 귀한 찬송입니까! 어떻게 우리 주님 사랑과 이 세상의 재물 사랑을 맞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까?
어느 검사를 지낸 분이 그랬답니다. 재물과 권력의 맛을 몰라서 그러지요. 재물과 권력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일 것예요! 했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재물과 권력의 힘이 강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세례 요한은 외침니다. 재물의 우상, 권력의 우상을 버리지 않으면 결단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회개함이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수백 번 수천 번 아기 예수로 이 땅에 태어나신다해도 그를 영접하지 않고서는 구원도 없습니다. 은혜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적인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되십시오. 기독교인이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새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날에 천국에서 우리가 다시 뵈올 수가 없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성탄은 우리 인생에 예수님을 만나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3.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위해 광야로 나가야 합니다(2-6절).
본문 4절 말씀을 보면 처음 부분에 “세례요한이 광야에 이르러”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복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길을 예비하고 가르쳐 주는데, 세례요한이 외친 장소가 바로 광야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세례요한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과 조건입니다. 그러면 광야라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광야 그러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광야는 황량하고 부족하고 서글퍼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생활을 지탱해줄 기본적인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낮에 열기를 피할 나무 한 그루 없습니다. 목마른 목을 축일 샘물 하나 없습니다. 밤에 자신을 추위로부터 지킬 무엇을 발견할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는 쓸쓸하고 외롭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이는 것이라곤 나하고 비슷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위 몇 개, 말라죽은 풀뿌리 몇 개. 불모지의 황량한 바람. 아름다운 것도, 귀한 것도, 우거진 것도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는 고통스럽고 힘든 곳입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기에 불가능한 곳입니다. 한 모금의 물이라고 어렵게 구해야 합니다. 빵 한 조각도 구할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내 손으로 살기 위하여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사실 여러분 이 광야가 어디라고 생각되어집니까?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람니다. 우리가 사는 곳, 이 세상이 바로 광야입니다. 매일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살벌한 생존 경쟁만 있는 곳이 우리가 사는 곳임을 보여 줍니다. 어디 마음 둘 곳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세상입니다. 좋은 때에는 간이라도 빼 줄 것 같은데 언제든지 내 뒤통수를 치고, 내 가슴에 비수를 꽂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곳, 광야 세상입니다. 주위에 정말 믿을 사람이 없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대통령을 믿겠습니까? 국회의원을 믿겠습니까? 이제는 어떻게 된 것인지 부모형제도 믿을 수 있는 곳에 못되는 장소가 바로 우리가 사는 장소입니다. 이만하면 우리가 광야에서 산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광야에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주변 환경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황량한 바람과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엄청 추운 배반과 불신만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살아야 한다는 생존 경쟁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무엇인가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때로는 착각하면서 삽니다. 또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얻으려고 무척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력투고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서 얻지 못하면 우리가 죽는다고 생각하면서 사력을 다해 이 세상으로부터 무엇인가 얻으려고 합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 이 세상의 방법을 따릅니다. 이 세상의 꾀를 쫓습니다. 이 세상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광야와 같아서 생존과 외로움과 경쟁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았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람니다. 내 주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고 괴로워하거나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옆 사람으로부터 고통을 당했다고 아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원래 세상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이런 광야에서도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도 없고, 복음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주의 길을 예비하고 만드는 소리는 바로 광야에서 들립니다. 광야가 아니고는 들리지 않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 광야같은 세상에서 세상이 주는 것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자기들의 것으로 살지를 아니했습니다.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나오게 하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하늘의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 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어 기적적으로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광야같은 세상에서 성도가 사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로 사는줄 믿습니다.자신이 자신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곳이며 그것을 깨닫는 순간 사람은 바로 자신을 지켜줄 그 무엇인가를 찾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광야에서 내 자신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내 인생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죄의 사슬에서 구원할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때로는 자녀의 문제로, 때로는 배우자의 문제로, 때로는 경제적인 문제로, 때로는 인간관계의 문제로, 때로는 가족간의 문제로 자기 손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자기 스스로 어떻게 해보고자 노력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길 원합니다. 광야에 있으면서도 이 세상의 온갖 잡동사니로 포장하고 위장하여 그렇지 않은 것처럼 살아갑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도 이러한 위장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도움이 없어도 나는 이 돈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지식으로 나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애써 자신을 위로하고 다른 사람에게 외칩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모든 것을 벗고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광야에 하나님의 복된 역사의 시작 소리가 있습니다. 광야에 설 때만이 우리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러한 광야에서 홀로 버려져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우리가 서 있는 그곳이 바로 복된 소리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할 장소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다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입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가장 복된 장소에 머물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4. 우리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 하필이면 광야로 나가야 합니까? 많은 곳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 문화와 문명이 있는 곳, 권력이나 재력이 있는 그런 궁궐이 아니라 광야로 나갈 때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진리를 깨우쳐 줍니다. 바로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 7절에서 8절까지 말씀을 보면 두 가지가 비교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요한 자신을 나타내는 말이요,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말을 가만히 살펴보면 자신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 모습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세례를 선전한 것도 아니요, 자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행동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은 오직 자신의 뒤에 나타나실 주인공을 위한 들러리일 뿐, 예비자일뿐, 자신은 그 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 선지자 시대를 지난 후 400여 년을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선지자도 없는 영적인 암흑의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얼마든지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오직 자신의 사역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힘써야 할 것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닙니다. 성도가 힘 쓸 것은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자신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본분 외의 일을 하게 되면 칭찬이 아니라 심판이 따르게 됩니다.
세례요한의 말의 초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자신의 모든 노력이나 자신의 모든 행동이나 자신의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 주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광야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너의 인생이 주인은 네가 아니라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이다”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 분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 하시기 바람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모두 주님이 하신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람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찬송하시기 바람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광야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내 생명도 내 생활도 오직 하나님에게만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되는 광야가 되시기 바람니다. 우리 가정에 큰 행복이 있습니까? 평안이 있습니까?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집니까?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인줄 믿으시기 바람니다. 우리 중에 여러 가지 어려움과 아픔, 마라의 쓴 물을 마시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것을 내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와 우리 가정의 모든 주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광야에서 기쁨을 주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5. 외치는 자, 준비하는 자의 생활입니다(6절).
본문 6절을 보면 “요한은 약대털 옷을 입고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고 요한의 생활방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생활방식을 보면, 그의 의복은 약대 털옷과 가죽 띠였고, 음식은 메뚜기와 간간이 들꿀인 석청을 먹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잠자리는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방바닥으로 삼은 세상에서 가장 큰집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산 것은 당시 사람들과는 다른 생활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아주 단순한 생활입니다. 자신의 목적과 사명을 위하여 거추장스러운 생활방식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의식주 문제로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것이 요구됩니다(눅12:22-34).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를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는 일을 제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행할 가장 귀중한 선행인 복음 증거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냥 주어진 상황에 따라 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❶ 목적이 분명합니다. 그 목적을 기키고 이루기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버립니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그런 삶입니다.
❷ 생각이 분명합니다. 생각이 분명하다는 것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❸ 행동이 분명합니다. YES와 NO가 분명합니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한 것을 말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이루려고 할 때에 복잡해집니다.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 하려고 할 때 복잡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복잡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성공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사는 방법이 명확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저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가정과 직장 그리고 이웃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역사하심으로 인한 하늘의 기쁨을 은혜를 풍성케 하기 위한 분명한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명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고 주장하는 단순한 생활방법이어야 합니다.
이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성공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곧 이 세상을 다스리고 주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탄을 앞두고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세례요한과 같이 광야에서, 오직 그 분의 오심과 임재하심만을 그 분의 나라만을 구하며 확장하는 귀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하여 불필요한 것들 거추장스러운 것들 다 버리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다 되어 그 은혜 누리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