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93
3월11일[사순 제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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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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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wJkYLrTwU4
[한국순교복자 성직수도회 윤흥민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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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오늘 우리 사목자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덕목이 너그러움이요 관대함이요 포용력입니다!>
여기저기 사순 특강을 다니면서, 참으로 은혜로운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다들 현재 한국 가톨릭교회가 위기 상황이다, 위험을 알리는 비상벨이 여기저기서 울리고 있다고 걱정합니다만, 저는 마냥 비관적으로만 봐서는 안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유는? 아직도 소리소문없이 착한 목자로서의 본분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목자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눈만 뜨면 본당 활성화를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신부님들이 계십니다.
교우들이 내 집처럼 편안함을 느끼고, 수시로 찾고 싶은 본당을 만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시는 신부님, 교우들의 영성 생활 증진을 위해 큰 투자를 아끼지 않는 신부님들을 뵈면서, 아직 우리 교회에 희망이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진정한 착한 목자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에게 있어 당신 고향 갈릴래아, 그리고 나자렛은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였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당신에 성장하신 고향이었기에 다른 그 어떤 고장보다 마음이 쓰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신경을 쓰셨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오겠느냐?”며 개무시했습니다.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다면, 아무리 고향이라 할지라도 당신을 무시하고 홀대하는 고향이라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수모와 배척에도 불구하고 다시 고향을 찾습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아들 때문에 상심이 컸던 왕실 관리에게 큰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배신과 배척, 홀대와 거부에도 불구하고 착한 목자 예수님께서는 고향 마을 사람들에게 불벼락을 내리지 않습니다. 큰마음으로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또다시 큰 사랑과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목자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교우들 가운데는 참으로 다양한 유형이 있습니다. 본당 사목에 호의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발목을 잡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반대의 깃발을 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사목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이 너그러움이요 관대함이요 포용력입니다. 나와 전혀 다른 의견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넉넉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잘 맞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잘 맞지 않는 사람들과도 함께 어울려 나아갈 수 있는 큰 마음,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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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때 우리의 눈물은 웃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춤으로 바뀔 것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시대 원거리 비대면 치료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의료진이 환자와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상태에서, 멀리 거리가 떨어진 상태에서도 진료는 물론이고 치료까지 하는 시스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원거리 비대면 치료를 실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카나에 머무시는 동안 한 왕실 관리가 황급히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다보니, 한걸음에 달려온 것입니다.
왕실 관리는 아들이 처한 위기 상황 앞에 체면이고 뭐고 다 무시하고 예수님께 간절히 청했습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요한 복음 4장 49절)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아들의 상태는 위중한데,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시던 카나와 환자가 누워있는 카파르나움은 33Km 떨어져 있었습니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도보로 간다면 적어도 7~8시간은 걸릴 거리였습니다. 낙타나 나귀를 타고 간다할지라도 네다섯 시간은 잡아야했습니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즉시 파악하신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치유와는 다른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원거리 비대면 치료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복음 4장 50절)
한 인간 한 인간의 개인적인 필요성에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대응하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배려가 크게 돋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달려오느라 기진맥진한 아버지를 눈여겨보십니다. 아들을 향한 각별한 사랑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초보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그의 믿음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아직 예수님 당신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물끄러미 바라보십니다.
왕실관리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도는 아직 한참 낮았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한 사람의 기적가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든지 다 현존하시는 멀티 플레이어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굳이 33km나 되는 장거리를 죽어라고 뛰어가지 않으셔도 원격치유가 가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였기에 예수님을 향해 집요하게 같이 가달라고 졸라대었습니다.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졸라대지 않을 수 없었던 아버지였습니다. 늑장부리다간 아들과는 영영 이별하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부탁이 아니라 거의 협박수준입니다.
아직 믿음이 부족한 왕실 관리였지만, 그의 간절한 눈망울과 그의 찢어지는 가슴을 예수님께서는 차마 외면하실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큰 자비를 베푸십니다.
아들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을 확인한 가족들과 종들은 얼마나 기뻤던지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왕실관리에게 알리기 위해 동네어귀까지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비탄으로 가득 찼던 집안은 순식간에 축제분위기로 돌아섰습니다. 한바탕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머지않아 우리 눈앞에서도 똑같이 벌어질 풍경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이렇게 힘겹게 견뎌나가고 있지만, 오늘 비록 우리가 이렇게 큰 슬픔에 잠겨있지만, 오늘 비록 우리가 이렇게 큰 십자가에 허덕이고 있지만, 머지않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큰 은총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눈물은 웃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춤으로 바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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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tg4xqg37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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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과 표징의 차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께서 모세가 장대에 구리뱀을 달아 올린 것처럼 당신도 십자가의 죽임을 당해야만 함을 설명하십니다. 구리뱀이 없었다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죽어야만 했습니다. 다만 뱀에 물렸더라도 구리뱀을 바라본 이들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냥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7년 10월 13일, 포르투갈의 파티마 근처 코바 다 이리아 들판에서 일어난 태양의 기적은 가톨릭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에도 대서특필 될 정도로 수천 명의 사람이 목격한 기적이었고 성모 마리아를 여섯 번 보았다고 주장한 세 목동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날 비가 오고 있었는데, 구름 중간이 뚫리며 그 밖으로 태양이 성체 모양으로 땅에 떨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다시 올라갔습니다. 당시 모였던 사람들은 종말이 온 줄 알았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자 땅은 말라버렸고 옷도 말라 있었고 병이 들었던 사람들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실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하는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기적을 보았던 사람이 모두 구원받았을까요? 여전히 기적에 반대하던 이들은 그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고 그 기적을 보고 믿었던 사람들도 분명히 많은 수가 다시 냉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지만, 표징은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한 복음에서 기적이나 이적, 그리고 표징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갈릴래아 지방 사람들은 처음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 예루살렘에 다녀오고 나서는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일으킨 많은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표징은 오늘 카나의 혼인 잔치에 이어 두 번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분명 기적과 이적, 그리고 표징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기적과 이적은 어느 정도 믿음은 줄 수 있지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주지 못합니다. 반면 표징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줍니다. 무엇이 다른지 알아야 합니다.
요한 복음에서 기적은 누군가가 하느님의 사람임을 알려주는 표징이고 이적은 나도 그 누군가가 될 수 있음을 믿게 하는 표징입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표징인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의 믿음이 아니었으면 그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치 않는 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일꾼들이 정결례 항아리에 물을 붓는 믿음도 요구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기적이 인간의 믿음의 순종이 개입하였기에 나도 그렇게 순종하면 나를 통해서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음을 믿게 합니다. 이것이 표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왕궁 관리는 믿고 떠나야 하는 시험을 받습니다. 하루가 지났을 때 집에서 오는 사람들을 만나 그 기적이 일어난 시간이 예수님께서 종의 병이 나을 것이란 시간과 일치함을 알고 온 가족이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왕궁 관리는 자신의 믿음으로도 표징이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반면 기적은 어떤 누군가가 “나는 하느님이 보낸 사람이니까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고 너희는 못 하니까 나에게 순종해야 해!”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이단과 사이비에서 이런 일들을 하며 사람을 모읍니다. 그러나 참 믿음으로 성장하지는 못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또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도 표징이라 말합니다. 여기서는 제자들이 빵을 나누어주는 믿음의 행위가 요구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기적에 당신 제자들을 참여시킴으로써 누구나 그 기적을 이루는 주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태생 소경을 고치는 장면에서도 소경이 믿음으로 흙을 실로암에서 씻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표징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라도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표징의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레지오 단원이 함께한 묵주기도로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마귀가 쫓겨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표징입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표징이 누군가에게 믿음을 줍니다. 기적은 ‘그분이니까 할 수 있고 나는 안 돼!’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면, 표징은 ‘저들도 할 수 있으니 나도 할 수 있겠네!’라는 믿음을 주어 본성이 상승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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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5년 전에 뉴욕에서 지낼 때에 보일러에 문제가 있어서 새로 바꾼 적이 있습니다. 이번 댈러스에 와서도 보일러에서 가스가 누출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간단하게 해결 될 줄 알았는데 보일러의 수명이 다 되어서 새것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보일러를 바꾸면서 형제님이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이동하는 곳마다 보일러를 바꾸시네요.” 제가 가는 곳마다 보일러의 수명이 다 되었던 것 같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제가 가는 곳마다 새롭게 뜨거운 열기를 만들어 내라는 사명인 것 같습니다. ‘Peace Maker'가 있다면 저는 ’Heat Maker'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 성령 강림 대축일에 바치던 기도가 생각합니다. “허물들은 씻어주고 메마른 땅 물주시고 병든 것을 고치소서. 굳은 마음 풀어주고 차디찬 맘 데우시고 빗나간 길 바루소서.” 새로운 곳, 댈러스에서 제가 따뜻한 마음으로 굳은 마음을 풀어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위로의 손길을 내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3시간 넘게 보일러를 교체하는 현장에 함께 했습니다. 보일러에는 물이 50갤런 넘게 들어 있기 때문에 먼저 보일러에 있는 물을 빼 주어야 했습니다.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면서 형제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전날 작업 중에 왼손 중지를 다쳐서 작업에 애로가 많았지만 형제님은 꼼꼼하게 작업을 해 주었습니다. 물이 빠진 보일러를 빼내고 새 보일러로 교체 했습니다. 다시 물을 채우고, 가스를 연결하고, 배기가스가 나갈 수 있도록 연통을 달았습니다. 물을 채우면서 공기를 빼주고, 드디어 불꽃으로 가스에 불이 붙었습니다. 뜨거운 물을 틀어 놓으니 에어가 빠지면서 드디어 따뜻한 물이 나왔습니다. 저는 형제님을 보면서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제가 옆에서 지켜보니 문제가 쉽게 해결 된다면서 좋아하였습니다. 보일러를 교체하는데 순간순간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공간이 협소해서 보일러를 넣은 작업도 힘들었습니다. 배관을 연결했는데 고무 파킹이 낡아서 새것으로 갈아야 했습니다. 배관이 짧아서 더 긴 것으로 교체 했습니다. 3시간 넘게 작업을 지켜보면서 매일 따뜻한 물을 사용할 수 있기 까지 수고하는 분들이 있음에 새삼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새 하늘 과 새 땅은 눈에 보이는 시간과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던 마구간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믿음으로 치유되었던 실로암 연못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자캐오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강도당한 이웃을 정성껏 돌보아 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부어드리고, 정성껏 씻어 주었던 마리아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뉴욕이든, 댈러스이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다면 그곳이 새 하늘 과 새 땅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면 된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다 명확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왕실 관리가 한 일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 청을 드린 것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은 우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고 한 주간 충실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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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4,43-54: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예수께서 갈릴래아의 카나에 가셨을 때, 카파르나움의 왕실 관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죽어 가는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청한다. 카파르나움은 카나에서 80리 정도 되는 먼 거리였다. 예수님은 애원하는 그에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50절) 말씀하셨다. 고관은 그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기 종들을 만났다. 아들이 완쾌되었다는 말을 듣고, 온 집안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먼 길을 찾아와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이 고관의 자세를 살펴보자. 우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고관이 일개 목수에 지나지 않는 예수님께 오기 위해서 먼 거리를 고생하며 찾아왔고 예수님께 간청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48절) 하신다. 그는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49절) 했다.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기 때문에 아이가 죽으면 예수님도 되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기적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 때문에, 당신께 귀 기울이도록 하신다. 기적은 믿는 이들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과 믿음에 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는 기적을 기다리기보다는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50절)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50절) 여기서 믿었다는 것은 완전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덕분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의미한다. 그는 처음부터 불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예수님께 돌아가 감사를 드리는 대신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각부터 물어보았다. 그 시각이 예수님께서 아이가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그와 온 가족들이 믿게 되었다.”(53절) 한다. 예수님의 명령 한 마디에 두 사람이 치유를 받았다. 왕실 관리에게는 뜻밖의 믿음이 생겼고, 아이는 육체적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다. 우리도 지난날을 통하여 하느님께 받은 은혜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보답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삶 속에서 어떤 자리에 모시고 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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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극심한 슬픔 가운데 하나는 자녀의 죽음입니다. 그러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누군가 말하여 준다면 이보다 ‘기쁜 소식’이 있을까요? 오늘 복음과 독서는 죽음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구원을 선포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새로운 생명의 창조가 약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하여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중병에 걸린 아들 때문에 상심한 어느 왕실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아들을 고쳐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믿음’을 강조하고자,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표징과 기적’을 믿는 우리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결국 관리는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납니다. 아들을 고쳐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나는 모습은 참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이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결과로 받아들이겠다는 절대적 순명의 자세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역경의 순간을 건너게 하는 것은 ‘말씀’과 그에 대한 ‘믿음’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말씀이 살아 있고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실재’임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곧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말씀’임을 믿는 것, 그것이 부활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를 모범적으로 보여 준 왕실 관리는 구원을 체험하였고 “그와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 존엄한 믿음이 존엄한 구원을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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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권능, 자비, 우리의 믿음>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요한 4,46-53)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자비’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고, 어떤 왕실 관리를 ‘믿음의 모범’으로 제시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1) 예수님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한 마디 말씀만으로’ 병자를 고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병을 지배하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고,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2) 예수님은 당신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 ‘자비’는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어떤 조건도 걸지 않고, 그냥 베풀어 주는 은총입니다. <사랑하니까 사랑만 주는 것, 그것이 자비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은총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의 믿음과 상관없이, 순전히 그를 가엾게 여기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그 병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고(요한 5,13), 몰랐으니까 믿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을 믿으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은, “건강해지고 싶으냐?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가 전부입니다.(요한 5,6.8.14) <그런데 그 병자는 치유의 은총을 받은 뒤에 믿음으로 응답하기는커녕 곧바로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요한 5,15)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신 은총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뒤의 9장에 나오는 ‘어떤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신 이야기’도 믿음과 상관없이 치유의 은총을 주신 이야기입니다. 그 눈먼 이도 예수님을 몰랐고, 몰랐으니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요한 9,36) 그렇지만 벳자타 못 가의 병자와는 다르게, 치유의 은총을 받은 뒤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요한 9,38)
3) 48절의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거절하시는 말씀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아니고, “기적만 바라지 말고 나를 믿어라.”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믿지 않으면 은총을 줄 수 없다.”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왕실 관리의 아들을 고쳐 주시기로 작정하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네 아들을 고쳐 주겠다. 그러니 앞으로는 기적만 바라지 말고 나를 믿어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4) 50절의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라는 말은, 그가 원하는 것을 아직 얻기 전인데도 예수님 말씀을 믿었음을 나타내고, 예수님께서 권고하신 대로 기적만을 바라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금방 그렇게 변화된 것인지, 시간이 좀 걸렸는지 알 수 없지만, 어떻든 그는 예수님을 믿으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라는 53절의 말에서, ‘그’와 ‘그의 온 집안’은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의 온 집안’은 그의 증언을 듣고, 또 그의 아들의 병이 치유된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는 이미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자기의 믿음이 올바른 것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5) 이 이야기의 전개 구조를 보면, ‘어떤 가나안 여자의 이야기’와(마태 15,21-28) 비슷합니다. 그 여자는 자기 딸 때문에 예수님께 왔다가, 그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는 ‘더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청했던 것도 받았고, 청하지 않은 것도 받은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어떤 왕실 관리’도 그의 아들이 치유되는 은총과 함께, 그 자신이 신앙인이 되는 ‘더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도 은총’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은총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은총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은총을 받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받았으니까, 또는 받고 있으니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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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정근 테오디모 신부님]
<우리의 믿음을 보여줄 때가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죽어가는 고관의 아들을 살려주는 장면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부모님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식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식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것입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사랑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 피부색이 다르다고, 사는 지역이 다르다고 차이가 있겠습니까? 아파하는 자식 더 나아가 죽어가는 자식을 보고있는 부모의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때 부모의 마음은 딱 한가지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식을 살릴 수 있을까하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치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죽어가는 자식 앞에 무능력한 부모의 마음은 하늘을 원망하는 것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부모의 심정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고관의 마음일 것입니다. 이때 예수라는 인물이 자기 지방 근처에 지나간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고관도 예수의 소문을 듣긴 들었을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으로는 불가능한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이야기,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던 세례자 요한과의 관계이야기,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메시아라고 증언했던 이야기 등을 정리하면서 예수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아들을 고쳐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종합적인 판단아래에서 예수를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고관의 청을 들어주시기 보다는 기적만을 믿고 당신을 믿지 않는 그의 행동에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곧 “선생님”이라는 말로서 자신의 신분을 낮추고 주님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가 구하는 것은 바로 이 겸손함이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기적만을 바라고 당신을 찾는 이보다는, 있는 그대로 자신을 믿고 있는 이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믿는 주님께서 누구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으로, 그리고 주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인 자기를 인정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주님께 보여줄 때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여줄 때가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 하루 내 삶을 통해 주님을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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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병으로 앓아누워 있는 왕실 관리의 아들을 고쳐 주시는 기적 사건을 전합니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이 사건을 “두 번째 표징”(4,54)이라고 명시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 사건, 곧 ‘첫 번째 표징’(2,11 참조)을 상기시킵니다.
이 ‘두 번째 표징’으로 앞서 요한 복음 4장 1-42절에서 소개된“세상의 구원자”(4,42)로서 예수님의 신원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왕실 관리는 카파르나움에서 카나로 예수님을 찾아와 병들어 누워 있는 아들을 고쳐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외적으로 드러난 기적에 의존하는 왕실 관리의 믿음을 꾸짖으시며 그의 요청을 거절하셨지만, 절박하게 매달리는 왕실 관리의 부탁을 물리치지 못하시고 그의 아들이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왕실 관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갔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표징과 기적을 보고 믿었는데(4,48 참조), 그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서 보여 주신 아들의 치유를 체험하면서 더욱더 굳건해졌습니다. 그 결과 왕실 관리의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말씀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이 치유 사건을 생명의 주인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표징’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눈으로 볼 수 있는 신기한 일이나 기적에만 의존하지 말고 ‘말씀’의 힘을 굳게 믿으라고 요청하십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없을 경우 믿음이 쉽게 약해질 수 있는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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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레아의 카나라는 지방에 가십니다. 그리고 그때에 카파르나움에 사는 왕실 관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카나에 이르는 거리는 약 32㎞의 먼 길입니다. 왕실 관리는 그 먼 길을 걸어와서는 예수님께 병으로 죽어가는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곡히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책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표징이란 무언가를 알려주는 ‘특별한 표식’을 의미하고 이적이란 ‘놀라운 일, 기묘한 일, 경이로운 일’을 뜻합니다.
얼핏 보면 기적과 비슷해 보이지만 ‘기적’과 ‘이적’은 명확히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기적이 하느님의 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단어라면 이적은 놀라운 현상을 강조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당시의 사람들이 특별한 표식 혹은 놀라운 현상만을 원했으며 심지어 이를 보고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흔적과 권능을 많이 베푸셨으나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 베싸이다 등의 마을을 꾸짖는 예수님의 모습,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체험하고도 예수님을 따르려 하기 보다는 현세의 임금으로 모시려는 사람들의 모습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책에도 불구하고 왕실 관리는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라고 애원합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어서야 예수님께서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때 그의 아들은 완쾌되고 왕실 관리의 온 집안은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왕실 관리의 모습은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할 기도의 자세의 가장 전형적인 모범입니다.
이를 정리해 보자면, 첫 번째로 그는 매우 굳센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왕실 관리가 나자렛의 일개 목수에 지나지 않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간청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이는 자신의 신분, 권위를 벗어 던지고 주위 사람들의 시선 또한 신경쓰지 않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어떤 분들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못하겠어?’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아프면 그를 명의에게 데려가지 시골 출신의 청년에게 데려가는 부모는 없습니다.
특별히 당시의 유대인 문화 안에서 출신지는 매우 중요했으므로 왕실 관리가 작은 고장 출신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찾아와 간청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의 믿음이 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실망하지 않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단념하고 자리를 떠나 버렸다면 그의 아들은 결코 치유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즉 그는 어떠한 시련에도 예수님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않는 성실한 자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왕실 관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대로 따릅니다. 그는 오직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하시는 말씀에 이를 믿고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동행 해 주지 않으시지만 그에 대한 더 이상의 간청도 없이 그저 믿을 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며 이를 마음에 새기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에는 어떠한 미련도 의심도 없습니다. 굳센 믿음, 실망하지 않는 자세, 의심 없이 그대로 따르는 자세. 이를 보면 이 왕실 관리는 리액션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멀리까지 찾아와 간청하는 간절한 행동, 핀잔에도 굴하지 않는 성실한 행동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겸손한 행동 이보다 더 예수님이 원하시는 리액션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행동들이 모여 마침내 아름다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절망적인 아들의 고통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온전히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나는 과연 예수님 앞에서 어떠한 리액션을 취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종종 우리의 질문과 의심은 개인적인 시련으로부터 비롯되곤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주님은 나에게 왜 이런 십자가를 주셨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는 우리의 표정은 예수님 앞에서 지나치게 무표정하고 나아가 공격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을수록 우리는 실망하지 말고 더욱 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의지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고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요청되는 겸손한 믿음의 자세를 유지할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여러 가지 표징과 이적들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당장 느껴지지 않을 수 있어도 분명 우리 곁에는 수많은 표징들과 이적들이 있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훗날 찬찬히 돌이켜 보면 매 순간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먼 길을 다시 집에 돌아가 실제로 기적을 깨닫게 된 왕실관리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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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4,49~50)
사순시기에 들어 처음으로 요한복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순 제4주간 월요일인 오늘부터 성주간 화요일까지 줄곧 요한복음이 평일 미사의 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서술상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공관복음과 매우 다릅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공관복음은 대략 1년에 해당하는 예수님 공생활의 기간을 다루고 있는 반면에, 요한복음은 3년의 공생활 기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이 예수께서 3번이나 예루살렘에서 과월절 축제를 지낸 기록(2,13; 6,4; 12,12)을 통해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은 저자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20,31)이며, 이 목적을 향한 예수님의 자기 계시적 활동이 곧 복음서의 주제인 셈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약 26Km 떨어진 가파르나움에도 가시지 않고 멀리서 치유 기적을 일으키신 내용이며, 요한복음이 보도하는 혼인 잔치에서의 포도주 기적(2,1-11)에 이은 두 번째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의 왕실 관리는, 마태오와 루카 복음의 앓는 종의 치유를 간청한 백인대장과 같은 인물로 추정됩니다. (마태 8,5-13; 루카 7,1-10 참조) 백인대장의 믿음과 같이 황실 관리의 믿음은 어떤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은” (요4,48)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믿음과 대조를 이룹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마태 8,10) 하고 백인대장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던 것처럼, 고향 사람들과 달리 당신의 말만 듣고서도 믿고 떠난 황실 관리에게도 동일한 칭찬을 하셨으리라 짐작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한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만납니다. 이런 부성애나 모성애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그들의 딱한 처지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은 것도 우리 역시도 언제 그런 어려움과 아픔을 겪었기에 혹 겪을지 모르는 동질감이라고 봅니다. 오늘 복음의 이방인인 왕실 관리 역시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나 위치에 상관없이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아들만 살릴 수 있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못 할 것 없는 부성애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카파르나움에서 카나까지 전혀 짧지 않은 거리를 한걸음에 달려와 예수님께 자기 아들을 살려 주십사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예수님의 태도는 냉담하십니다. 마귀 들린 딸의 치유를 간청한 가나안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첫 반응처럼(마태15,21~28) 그리고 왕실 관리에게 들어보아라는 듯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4,48)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은 물론 유다에서 만난 사람들의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선입견과 편견이 못내 가슴 아프셨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이 세상에 파견된 의도와는 달리 표징과 이적만을 요구하고 보려는 사람들의 좁고 닫힌 마음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왕실 관리를 통해 분출하신 것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아들을 둔 그는 여타의 다른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태도가 다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표징이나 이적이 아니라 다만 아들의 생명을 살릴 힘이 필요했습니다. 아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님의 불편한 심기로 가득 찬 냉정한 말씀을 뛰어넘어섭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4,49) 그는 비록 왕실을 관리하는 고관이었지만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일념에 주님의 조금은 부정적인 말씀에 연연하지 않고 주님께 이렇게 간절히 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왕실 관리의 마음을 헤아리신 건지 아니면 건성으로 응답하신 건지 잘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4,50)라고만 하실 뿐, 왕실 관리가 그토록 간청한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라는 요청을 거절한 듯 혼자 가거라, 라고만 하십니다. 가능하다면 예수님께서 직접 내려가시어 아들의 병든 몸에 손을 얹어 치유해 주셨으면 더없이 좋았을 텐데, 함께 내려가시겠다는 말씀은 없으시고 그저 한 말씀,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라고만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큰 도전입니까? 그럼에도 왕실 관리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믿고 혼자 내려갑니다. 실제로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알지 못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갑니다. 마치 밤새도록 고기를 잡기 위해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만을 믿고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5,5)라고 했던 베드로처럼 그 왕실 관리는 확인하고 싶은 애절한 마음을 접고 그 말씀만을 믿으며 행동으로 그것을 실천합니다. 참되고 용기 있는 믿음은 축복을 거두어 드립니다. 열매를 맺습니다. 왕실 관리에게 있어서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를 믿고 찾아와 아들의 치유를 간청하였으며,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을 더욱 확신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비단 왕실 관리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당신과 왕실 관리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목격자를 향한 말씀이며, 더 나아가 오늘 복음을 읽고 들은 우리를 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왕실 관리가 집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을 통해서 아들이 살아났다, 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이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물었고,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4,52)라는 대답을 듣고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떠 올렸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다시 살아난 이유를 아버지만이 유일하게 압니다. 아들이 살아난 것은 물론 예수님의 능력이지만, 모든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믿었던 왕실 관리의 믿음과 그 믿음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아버지의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아들에 대한 사랑이 그에게 자신의 고정관념을 뛰어넘고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 힘이었습니다. 왕실 관리의 자식을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과 그의 진심이 이루어 낸 믿음의 승리입니다. 이 일로 인해 왕실 관리와 그의 온 집안이 예수님을 모두 믿게 되었다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오늘 왕실 관리의 믿음에 따른 치유의 기적은 단지 그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도 비록 같은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기도의 고리를 통해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믿음과 믿음의 행동입니다. 사실 많은 유대인이 그랬듯이 예수님께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믿음의 표현이 아니라 불신의 표현입니다. 오히려 왕실 관리처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의할 때, 비록 다른 장소에서 누군가가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필요한 사람의 치유를 일으키리라 믿습니다.
한때 유행했던 Abba의 노래 「I have a dream.」의 한 소절을 인용합니다. 『When I know the time is right for me 내게 알맞은 때가 오면, I'll cross the stream 나는 강을 건널 거예요, I have a dream 내겐 꿈이 있어요.』 그래요. 모든 그리스도인은 아빠 하느님의 큰 꿈에 초대받고 있기에, 언젠가 그때가 되면 “다시는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즐거움과 기쁨으로 함께 춤추며 노래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 주실 것이다.”(이65,19,17)라는 약속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구원의 때가 가까이 다가왔기에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행한 카나로 다시 내려가셨고, 처음과는 달리 사람들은 그분을 맞아들였습니다.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화답송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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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13년 엘리너 H.포터가 집필한 고전 소설 ‘폴리아나’(Pollyanna)를 기억하시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초등학생을 위한 세계 명작으로 꼭 등장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만화 영화로도 나왔었다고 하더군요. 이 책의 주인공은 이모 집에 얹혀삽니다. 그러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자기 사는 곳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 나간다는 아주 훈훈한 내용입니다.
주인공 폴리아나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불행한 삶 속에서도 매 순간 ‘다행한 일 찾기’ 때문입니다. 저택 같은 집에서 아주 좁고 퀴퀴한 다락방에 살게 되었지만, 전망이 좋아서 그림 같은 경치만 봐도 정신 수양이 되어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또 방에 거울이 없지만, 주근깨 난 얼굴을 안 보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다행한 일 찾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신부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모임에서 한 신부가 방귀를 시원하게 뀌었습니다. 모두가 그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말이지요. 그러자 한 신부가 “야~ 그러다 똥 싸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그 당사자 신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똥 싸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마음에서 행복이 가까워짐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폴리아나처럼 ‘다행한 일 찾기’ 놀이를 해 보면 어떨까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주님을 체험하는 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매 순간 느끼는 방법이 있으니 참 다행이 아닙니까?
왕실 관리의 아들이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이 왕실 관리는 예수님을 찾아와 고쳐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거절의 뜻을 비치지만, 왕실 관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부탁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
왕실 관리이니 재산이 많이 있고 또 권력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가지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만을 전해주십니다. 만약 재산과 권력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에 화를 냈을 것입니다. 자기 권력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끌고 갈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고 떠나갑니다. 믿음만으로 충분한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재산과 권력에만 매여있었다면, 그는 다행한 일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너머에 있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다행한 일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매여있는 것이 혹시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우리 편이라 정말로 다행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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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말씀하시는 분의 말씀만 있다면>
요한 4,43-54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시자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분을 맞아들였다. 그들도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축제 때에 그곳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어 두 번째 표징을 일으키셨다.
<말씀하시는 분의 말씀만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요한 3,50)
말씀하시는 분이 곧
말씀이요
말씀이 곧
말씀하시는 분이니
말씀을 믿음은 곧
말씀하시는 분을 믿음이요
말씀하시는 분을 믿음이 곧
말씀을 믿음이라
말씀하시는 분
비록 곁에 없어도
말씀만으로도
더 바랄 것 없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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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구원을 부른 고통>
왕실의 한 관리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앓아누웠습니다. 그러자 그 관리는 예수님께 쫓아가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관리는 예수님께 관심도 없던 사람입니다.
갈릴래아 카나에서 기적을 행하실 때는 자기와는 상관없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들에게 고통이 왔기 때문에 위신 체면 다 버리고 예수님께 달려와서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에게 닥친 시련은 불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발견하게 되는 은총의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주님,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요한 4,48-49) 하며 사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거라. 네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응답을 얻어냈고 그 시간에 아이는 나았습니다.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께 사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들 때문입니다. 아들의 고통이 관리를 사정하게 했고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는 면박도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네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 는 말씀에 두말없이 믿음을 걸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이는 살아났고 온 집안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고통이 하나의 시련이었지만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왕실의 관리의 믿음이 만나서 아이는 살아났고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요한4,53)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야고5,15) 시련과 고통은 은총의 기회이고 기적을 낳는 원천입니다.
믿음 없이 살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그제서 밤을 지새가며 기도하고 부산을 떠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매달리면 주님께서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십니다. 우리의 간청에 당신의 계획마저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채워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가시길 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을 낫게 해준 것은 약초나 연고가 아닙니다. 주님, 그것은 모든 사람을 고쳐 주는 당신의 말씀입니다.”(지혜16,12)
그러므로 내 방식으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이루어 주심을 믿고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 하십시오.”(로마12,12)
“아무것도 걱정 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피4,6-7)
고통은 결코 죄의 벌이 아닙니다. 한편으로 하느님의 섭리요, 은총의 기회입니다. 또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부활의 기쁨으로 끝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꼈을 때는 곧 다가올 부활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모두가 다 귀한 것입니다.
고통 이라할지라도....이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아듣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더욱 튼튼하여지고 아름다워지길 빕니다. 우리는 믿음의 특권에서 오는 고난의 특권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곧 영광의 특권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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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 하늘과 새 땅>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서 이사야가 펼쳐 보여주는 유토피아 하늘 나라 꿈의 세상이 참 멋지고 내적 힘의 원천이 됩니다. 이런 꿈과 희망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이사야 예언자처럼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가 되어 주님의 은총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실현하며 살게 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이사65,17-18)
이사야 예언자는 참으로 멋진 대영성가이자 하느님 사랑의 신비가이고 시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 나라 꿈을 실현하며 살도록 격려하십니다. 이런 생생한 하늘 나라 꿈에서 샘솟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여기서 “창조하다(create;히브리어bara)”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오는데 모두가 하느님의 고유한 창조활동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생명으로 충만합니다. 태초에 한번의 창조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오늘 지금 여기서도 끊임없이 펼쳐지는 하느님의 창조활동입니다. 주님은 은총의 사순시기,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새롭게 창조하시며 거듭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어지는 이사야의 하늘나라 꿈은 얼마나 멋지고 고무적인지요! 이런 샘솟는 하늘나라의 꿈과 희망이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힘차게 살아낼 내적 힘의 원천이 됩니다. 이런 생생한 하늘나라의 꿈과 희망이 타락과 부패를 막아주고,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며, 존엄한 품위의 삶을, 늘 새롭고 놀랍고 아름다운 참 좋은 삶을, 영육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합니다.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도 없고,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으리라.”
오늘 이사야를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의 하늘 나라의 꿈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심으로 실현됩니다. 주님 말씀의 창조와 치유의 구원입니다. 왕실 관리의 간청과 예수님의 응답입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말씀하신 바로 그때 왕실 관리의 아들은 살아났고,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합니다. 하느님의 창조활동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통해 계속되고 있음을 봅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표징중 두 번째 말씀을 통한 하느님 창조의 표징입니다. 참고로 우리의 믿음을 북돋우는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일곱 표징을 순서대로 소개합니다.
1.가난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다(2,1-11).
2.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시다(4,46-54;오늘의 복음).
3.양문 곁에 있는 못가에서 앉은뱅이를 고치시다(5,1-18).
4.굶주린 5000명을 먹이시다(6,1-15).
5.에수님은 물위를 걸으시다(6,16-21).
6.태생 소경을 고치시다(9,1-41).
7.나자로를 살리시다.(11,1-44)
얼마나 고무적인,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 하느님의 빛나는 기적의 표징들인지요! 하느님의 창조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자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늘 새 하늘과 새 땅이요, 눈만 열리면 오늘 지금 여기가 참으로 역동적인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우리 베네딕도 수도회의 정주서원, 정주영성이 얼마나 역동적인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인지 깨닫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정주서원입니다. 이런 감격을 노래한 얼마전 “산과 강”아라는 자작시를 다시 한 번 나누고 싶습니다.
“아니, 산이 산에 갈 수가 있나?
강이 강에 갈 수가 있나?
나 머물 때는 산이고 나 움직일 때는 강인데
나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밖으로는 한결같이 임기다리는 산인데
나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안으로는 끊임없이 임향해 흐르는 강인데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인데
늘 임을 만나 임과 함께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의 영원한 삶인데
어찌, 산이 산에 강이 강에 갈 수가 있나?”
죽어서 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 제자리에서 살아야 할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의 꿈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당신의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창조하시어, 우리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 꿈을 실현하며 살게 하십니다. 다음 행복기도 내용 그대로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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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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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4,50)
<참신앙인의 모습!>
오늘 복음(요한4,43-54)은 예수님께서 카나에서 일으키신 두 번째 표징(기적)인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가셨을 때, 왕실 관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고쳐 달라고 간청합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이 말씀을 믿고 떠나갑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으로' 죽어가던 왕실 관리의 아들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두 가지'를 함께 묵상해 봅니다. 첫째는 '말씀에 대한 믿음이 낳게 되는 기적'입니다. 둘째는 이 기적이 또 다른 기적, 곧 '복음화의 기적'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왕실 관리는 예수님의 '한 말씀만'으로도 자기 종이 나을 것이라는 큰 믿음을 드러냈던 백인대장처럼,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자기 아들을 살렸고, 이 기적을 보고 그의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렇듯 하나의 기적은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나의 작은 믿음, 특히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기적을 낳고, '또 다른 기적, 곧 복음화의 기적'을 낳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준 왕실 관리의 모습은 우리가 살아야 할 '참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왕실 관리가 보여준 믿음, 말씀에 대한 믿음을 따라갑시다! 그래서 내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만들고, 또 너를 다시 살리는 기적, 나의 남편과 아내 그리고 나의 가족을 다시 살리는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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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_wuN4gLI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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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 50)물이 얼었다풀리듯이봄은 믿음처럼우리에게오고 있습니다.빼앗길 수 없는믿음의 몫입니다.표징과이적에만집착하고의존하는믿음은오래 갈 수없습니다.실은보이지 않는은총이믿음의감사입니다.믿음의이야기는아직 끝나지않았습니다.우리의믿음을반성합니다.믿음의 삶은생명을 살리는생명의삶입니다.멈출 수 없는믿음의 여정이며믿음의 생활입니다.믿음의하느님께서하시는하느님의일입니다.믿음이우리에게남아 있지않다면하느님을 향한간절함도남아 있지않을 것입니다.쓰러진 믿음을다시 일어서게하는 믿음입니다.그래서 믿음은단순한도피처가 아니라치열한 우리삶의 자리에서일어나는치유이며화해이며회복입니다.십자가와사람이한 몸이듯이가장 소중한믿음과사람 또한한 몸입니다.마음이 무너지고억장이 무너진자리에서믿음의 주님을만납니다.우리가할 수 있는 것이란주님께 도움을청하는 일뿐입니다.믿음으로살아가고믿음으로다시일어섭니다.소중한모든 관계가믿음으로다시 만나는은총과 생명의만남이길기도드립니다.믿음을 따라번지는은총과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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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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