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 희망의 순례자들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100. 희망
세상의 모든 씨앗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한 희망으로 온갖 ‘때’를 거친다. 새해, 진정한 희망을 찾고, 그것을 향할 때다. OSV
지나온 밤이 너무 외롭고 걸어온 길이 너무 멀다고 느껴질 때, 행운은 단지 운 좋은 자들의 몫이고 사랑은 강한 자들만의 것이라는 헛헛한 덧없음이 밀려올 때, 바로 그 때, 고개를 숙여 아래를 바라보라고 한다.
땅 속 깊이에서 죽은 듯 살아 숨 쉬는 생명을 느껴보란다. 한겨울 지독하게 깊은 땅 속, 시리고 차가운 눈 아래에 잠들어 있는 작은 ‘씨앗’이 있단다. ‘때’가 되면 찬란한 태양의 사랑으로 기지개를 펴고 화려한 꽃을 피우는 장미꽃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라고 벳 미들러(Bette Midler)의 곡 ‘장미(The Rose)’는 노래한다.
때로는 ‘사랑이 연약한 갈대의 숨을 조이는 강과 같고, 피를 흘리고 상처를 주는 면도날과도 같아 아무리 사랑해도 허기질 수밖에 없는 결핍’이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아플 ‘때’ 그렇게 외롭고 고통스러울 ‘때’가 바로 한겨울 깊은 곳, 시리고 차가운 곳에서 숨죽이며 버티며 기다리는 아주 작고 작은 ‘씨앗’에게서 희망을 찾는 ‘때’란 것이다.
희망이란 단지 긍정적인 결과만을 기대하는 행위나 불확실함 속에서의 막연한 바람만은 아닐 것이다. 고달픈 현실을 부정하면서 그저 ‘잘 되리라’ 희망하는 심리적 고문도 아닐 것이다. 현재에서 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그저 맹목적 방어막으로 희망한다면 이 또한 희망이 아니다. 누군가는 희망이 ‘공상’이고 살기 위한 ‘도피’라고도 하지만, 이는 ‘희망’이 아닌 ‘열망’일 것이다. 노력하면 반드시 무언가 얻으리라는 확신 역시 희망이 아니다. 만약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과 좌절, 분노의 기운이 올라온다면 희망이 아니라 욕망했기 때문이다.
진짜 희망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로마 4,18)한다. 희망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흔히 옛 이야기의 주인공이나 성경 예언자들은 괴나리 봇짐 하나만 달랑 메고 용감하게 수천·수만 리를 걷고 또 걸어 목적지로 향한다. 대단한 인물도 아니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닌데 숱한 고난과 고통 속에서 멈추지 않고 헤쳐나간다. 이들은 희망하며 순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수많은 사람과의 관계의 끈을 놓지 않는다. 무엇보다 하느님과 시선을 맞추며 충실하게 특별한 ‘때’를 거치고 또 다른 ‘때’를 맞이한다. 희망은 내가 주인이 아니기에 내 마음대로 포기하거나 무릎을 꿇을 수 없다. 희망하며 순례하는 사람에게는 만남도 이별인지라 멈춰야 할 종점도 없다.
하늘 아래 있는 그 모든 존재에게는 다 ‘때’가 있다. 세상의 모든 씨앗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한 희망으로 온갖 ‘때’를 거친다.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흩어지는 이별의 때가 있고, 강한 바람을 타고 높이 날거나 비바람에 짓눌려 헤맬 때도 있다. 눈 속에 묻혀 긴 침묵을 지켜야 할 때가 있고, 먹이를 찾는 새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숨죽여 숨어야 할 때도 있다.
그 어느 ‘때’에도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따스한 태양의 빛을 황홀하게 누릴 때, 시원한 비를 마시며 성숙해갈 때, 그러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길 그 ‘때’를 또 희망한다. 그러다가 딱딱한 흙의 장막을 온몸으로 버겁게 뚫고 올라와 찬란한 세상을 꿈꾸지만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자국에 놀라 몸을 사리며 숙여야 할 때도 분명 있다. 희망은 이 모든 ‘때’를 감내한다.
‘때’는 특정한 순간, 특별한 경험을 하는 희망의 시간이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또 뽑을 때도 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도 있고, 함께할 때가 있으면 또 헤어져야 할 때도 있다. 말할 때가 있으면 침묵을 지킬 때도 있고. 싸울 때가 있으면 평화를 누릴 때도 있다. 서로 사랑할 때가 있으면 또한 미워할 때도 있다.(코헬 3,1-8 참조) 이 모든 ‘때’가 바로 희망하는 순례자가 거쳐야 할 길이다. 무엇보다 순례자는 그 어떤 환난의 ‘때’가 와도 자랑으로 여긴다. 희망은 결코 순례자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로마 5,3-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