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개혁의 핵심을 이야기하다 보면 결국 예배 문제와 하나님나라 문제로 조리개가 좁혀지게 됩니다. 오늘은 예배와 관련으로 머무는 생각이 있어서 글을 쓰게 됩니다.
어떤이들은 제 글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만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릴 것은 제 글이 성경적인 맥락에서 잘못된 것은 통렬하게 비판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다만 그것이 진리 추구의 방편이어야하는데 소위 '전통과 유전의 잣대'와 혼동하는 것에는 주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1. 선지자의 운명
선지자란 뭔가를 '먼저 알게된 사람' 입니다. 그 뭔가는 바로 하나님의 뜻이겠지요. 오늘날에도 당연히 선지자는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예수님이 마태복음 2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선지자들의 처우는 죽임당하고, 매질당하고, 채찍질에 구박덩어리로 살게됩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함축하며 예수님은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가랴의 아들 사가라의 피까지 ...' 라고 지적하지요.
그러면서도 이스라엘 민족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거나 비석을 꾸미는 일에는 열심인 이중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구약에서 보면 많은 선지자들이 현실 세계에서는 칭찬받거나 존경받는 법은 드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한 대로죠. 예수님 또한 같은 처지셨고요.
2. 의인 아벨
아벨에 대하여 구약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창세기 4장입니다. 거기에서는 아벨이 '의인'이었다는 힌트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마태복음 23장에서 아벨을 언급하며 '의인'이라는 호칭을 붙입니다. 왜일까요?
이것에 대하여는 주석들도 각각이고 성경 해석가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정론 해설이 없다는 뜻). 제가 아벨을 언급하는 이유는 글의 서두에서 예배 문제를 꺼냈었고 성경에서는 구약 제사의 표준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벨에게로 소급되게 되는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가 언급하기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설명하면서 구약제사의 속성과 원리를 설명하는 것을 보면 아벨의 제사 방법이 유대인들의 제사의 원형으로 남은 것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히브리서 기자는 그 피흘린 제사의 연속이 종국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로 수렴한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설명하고 있지요.
예수님은 아벨을 의인이라고 칭했습니다. 구약 전체에서 아벨이 의인이라고 묘사된 적은 없었는데 갑자기 예수님은 아벨을 언급하면서 바가라의 아들 사가랴까지 연속선 상에서 그들이 흘린 의로운 피에 대해 설명합니다. 무엇이 의롭다는 것일까요? 그리고 갑자기 여기서 나타난 사가랴는 누구일까요?
3. 구약의 제사
구약의 제사 = 신약의 예배라는 등식으로 대비시키면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사실 예배라는 것이 매우 간결하게 이해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아벨의 제사와 세월을 좀 건너뛰어 아브라함의 제사는 매우 닮아 있습니다. 둘 다 희생 제물이 있었지요. 아벨은 자원하여 양의 첫 새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였지만 사실은 예비된 숫양이 이를 대신하게 되지요.
이 두사람이 행한 제사의 특징은 '내(인간은)가 죽는다. 그런데 진짜로 죽을 수 없으니 양의 새끼를 대신 죽여서 하나님께 보임으로써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고백을 한다'고 이해 될 수 있습니다. 죄덩어리 인간이고 결국 죄의 댓가로 얻어지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숙명을 하나님께 거듭 고백하는 행위 입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구약의 제사 관습을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의 그림자였다고 말합니다.
결국 제사라는 것은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고백'이며 이것이 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는 표현인 것이지요. 물론 이정도 쯤이야 대부분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어떤분들은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제사에 대해 정성이 모자랐다, 가인은 믿음이 없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려는 분들도 있지만 연속된 구약의 제사 속성을 이해한다면 구속사적 측면에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된 처지의 고백'이 아벨의 제사 본질이었다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4. 제사의 본질은 죽음
대신 죽을 짐승의 피흘림이 구약 제사의 거의 모든 형식이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표인 것은 확실하다면 그 연속선상에서 신약의 제사가 설명되는것은 참으로 마땅합니다.
이같은 설명이 성경적으로 하자가 없는 것은 사마리아 지방의 우물가에서 남편을 다섯 바꾼 여자가 제사의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과 나눈 장면에서 확실시 됩니다. 여자는 "내가 보니 당신은(예수님) 선지자인 것 같군요. 나의 궁금증은 어떤 권위 있는 사람은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 하여야만 된다 하고 또 어떤 다른 힘있는 사람은 그리심산 산당에서 제사를 해도 똑같다고 하는데 도무지 어떤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은 혹시 이것에 대해 답해 주실 수 있는지요?"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아주머니 이제는 참 예배를 하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하면서 예수님은 제사와 예배라는 용어를 동일시 합니다. 그러므로 제사와 예배는 동일한 속성임을 말해주며 구약에서는 제사를 신약에서는 예배를 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유권 해석이 있게되는 순간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죽음입니다.
다만 신약에서의 다른 점은 이미 예수님께서 짐승의 피를 흘려 번제하던 방식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단번에 끝내셨다는 점에서 일단락 지어졌고 그 후의 예배는 로마서 12장 1절에 명시된 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것의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함으로써 명백해 졌습니다.
구약 제사가 제물과 제사장이 필요하였는데
신약 제사는 스스로(너희 몸)가 제물이 되고 스스로가 제사장(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 벧전 2장 9절)이 됩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의 역할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개입되어 봉사를 한다는 측면에서 보았을때 이것을 신약적인 방법으로 해석한다면 '내 몸을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제물로 사용한다'는 것이 곧 신약적 예배의 해석이 됩니다. 이것만 이해하면 예배의 문제가 참으로 쉽고 명쾌해집니다.
그런데 교회개혁 측면에서 예배 문제를 다루다보니까 5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형성되어진 고착화된 의식행사가 그만 예배의 전형으로 오해하게되어 예배 문제를 이야기 하면 서로 이전투구의 양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단순히 구약제사와 신약예배의 연속상에서 있는 예배의 설명은 정말 간결하고 쉬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설명을 놓고 전통과 유전에 굳어진 (소위)예배 현상을 이해하려 하니까 난해해 지는 것이지요. 만약 이웃을 위해 봉사로 드려지는 '삶의 예배'가 맞다고 인정하는 순간 목사들과 성직자들의 설자리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그런 충돌은 사실 불가피한 것이긴 합니다만 액면 그대로의 성경상에서의 예배에 대한 설명은 이렇듯 쉽고 명료합니다.
신약 예배의 본질은 내가 이웃을 위해 희생제물이 되어 죽는 것입니다. 더 이상 구구한 설명은 필요없이 간결합니다.
5. 사가랴의 운명
하나님 나라의 패러다임을 열어야했던 사가랴의 죽음 참으로 거룩하기만 합니다. 예수님은 아벨부터 사가랴까지 구약시대의 모든 의로운 선지자와 하나님의 일꾼들을 언급하시면서 '의로운 희생'을 은근히 말씀하십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는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아니라 스가랴 선지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맥락으로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의로운 희생의 표본을 설명하는 상황에서 아담의 아들 아벨부터 자신 앞에서 죽은 사가랴를 언급한 것이지요.
실제로 카토릭의 연구보고에는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순교하였다는 사실을 발굴해낸 사실이 있습니다.
사가랴는 왜 그런 비참한 죽임을 당했을까요?
시계를 좀 거꾸로 돌려보면 제사장 신분이었던 사가랴는 어느날 갑자기 천사의 방문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놀라운 비밀을 알게되었지요. 유대인 조상 대대로 그렇게 목마르게 기다려 왔던 메시아가 드디어 태어나게 되었고, 메시아왕국(하나님나라)이 시작되게 된다는 엄청난 비밀을 알게됩니다. 그 즉시로 그는 입을 봉해버립니다(벙어리가 됨). 그리고 그의 아들 요한을 제사장으로 키우지 않고 메시아를 예비하는 사람으로 준비시키게 됩니다. 그는 전통과 유전속에 있는 유대교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도록 그의 아들 요한을 그 유대교 문화와 완전히 격리시켜 키우게 됩니다. 제사장 수업도 받게하지 않고 완전히 광야에서 비밀스럽게 교육하며 키우게 되지요.
아마도 사가랴의 죽음은 그러한 결과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예수님은 그 사가랴의 죽음을 의로운 죽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날 교회가 개혁되어야 하는 여러 요소중에 예배 문제는 핵심 요소 중 하나입니다. 예배 문제의 핵심은 예수님의 선언과 사도들의 기록한 성경 속에서 직접 힌트를 찾아야 합니다. 성직자들과 목사들의 전횡을 합리화 하기 위해 예배라는 현상을 설명하고 이용하는 일은 천부당 만부당 한 일입니다.
by 하나님나라 빌더 -iDeaRush-
@김다정 한편으로는 교회개혁을 추구하는 카페에서 이러한 내용이 진지하게 공론화 되지 못하는게 아쉽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개혁은 그저 기독교 욕먹이는 심각한 범죄를 지지르는 목회자들의 일탈을 꾸짖는 것인지....
@김다정 개혁이라는 것의 참 뜻은
改革으로써 가죽을 새로 뒤집어 쓴다는 말입니다.
가죽을 새로 입으려면 있던 가죽을 벗겨 내야되는데 불가불 피를 흘려야죠. 아픈 일입니다.
영어로는 reform으로써 모양을 새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글자 그대로 개혁이란게 쉽지 않은 단어입니다.
교회개혁 측면에서는 간혹 remodeling 이 reform과 혼동되어 쓰여집니다. 리모델링이란 그저 보기 싫은곳
빵꾸난곳 이런데를 좀 뜯어 고치는 것입니다.
개혁자를 자칭하면서도 사실은 리모델링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고, 리포머와 리모델러를 구분하는 것 조차 용납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글이 써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으로 위안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