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값 올해 30% 급등… 인쇄업계 “제작할수록 적자” 휴폐업 속출
[종이값 급등 쇼크]
펄프값 인상에 고환율 겹쳐 직격탄, 잉크 등 부자재값도 30~50% 상승
서울 인쇄업체 월 3, 4개씩 문닫아… 사모펀드 업체 등이 신문용지 과점
작년-올해 각 10%씩 용지값 올려… 학습지-화장지값 등 줄줄이 올라
한창 성수기인데… 쓸쓸한 인쇄골목 수입 펄프 값과 원-달러 환율 인상 등으로 종이 값이 폭등하자 인쇄·출판 등 관련 산업이 큰 타격을 받고 있다. 15일 오후 서울 충무로 인쇄골목에는 성수기임에도 불구하고 기계가 멈춰 있거나 아예 문 닫은 업체도 여럿 눈에 띄었다. 신동진 기자
《종이 가격이 올해만 30% 이상 급등하며 종이를 많이 쓰는 인쇄·출판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주원료인 펄프 가격이 지난달 t당 1000달러를 넘으며 최근 8개월간 57% 올랐다. 펄프는 85%를 수입하는데 원-달러 환율까지 치솟으며 인건비나 임차료 등을 감당 못 하고 폐업하는 인쇄업체가 속출하고 있다. 학습지와 문구류, 화장지 등의 가격까지 도미노 인상 압박을 받고 있다.》
#1. 경기도에서 관공서 소식지 등을 제작하는 중소 인쇄업체 대표 A 씨는 내년에 폐업을 고심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전만 해도 연간 12억 원이던 매출은 반 토막 났고, 5명이던 직원은 1명으로 줄었다. 3년간 적자가 쌓이며 은행 대출도 막혔다. 올해 종이 값이 크게 올랐지만 인쇄물은 지난해 말 계약한 가격에 납품하며 손해를 감수하고 있다. 그는 “당장 적자를 봐도 공공입찰 자격을 잃을까 봐 울며 겨자 먹기로 납품하고 있다”고 말했다.
#2. 학술지를 펴내는 B출판사는 1만5000원이던 신간 가격을 최근 1만7000원으로 올렸다. 인쇄용지 가격은 전지 500장(소설책 50권 분량)을 기준으로 2020년 12월 2만8800원에서 올 7월 4만1600원으로 44% 올랐다. 이 출판사 대표는 “단번에 책값을 2만 원으로 올릴 수 없으니 교정·교열 절차를 줄이거나 띠지 등을 없애는 식으로 제작비를 줄이고 있지만 출판 품질이 낮아지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제지 원료인 수입 펄프 값과 원-달러 환율이 솟구치며 종이를 많이 쓰는 중소 출판·인쇄업체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인쇄용지 가격이 올해만 30% 이상 급등했지만 연간 단위로 계약하는 사업구조와 책값에 대한 심리적 저항선 탓에 원가 상승분을 바로 반영하기 어려운 구조다. 폭등하는 종이 가격에 문구와 학습지 등 가격 인상이 잇따르고 중소 신문사들도 시름을 앓고 있다.
○ 천정부지 펄프값에 고환율 겹쳐 ‘종이 값 쇼크’
20일 인쇄업계에 따르면 국내 1, 2위 제지사인 한솔제지와 무림페이퍼는 이달 초부터 일반 인쇄용지 가격에 적용하던 할인율을 각각 7%포인트씩 축소하기로 했다. 그만큼 가격이 인상되는 셈이다. 인쇄용지 가격 자체도 올해 1월 7%, 5월 15% 인상됐다. 지난해 3월과 6월 할인율이 각각 15%포인트, 9%포인트 축소된 것까지 더하면 1년 반 만에 40% 이상 오른 셈이다.
인쇄용지 원가의 약 40∼50%를 차지하는 펄프 가격이 올 들어 8개월째 오름세다. 산업통상자원부 원자재가격정보에 따르면 지난달 미국 남부산혼합활엽수펄프(SBHK) 가격은 t당 1030달러로 사상 최고치였다. 지난해 12월(655달러)보다 약 57% 올랐다.
1400원을 넘보는 원-달러 환율도 부담이다. 펄프는 국내 사용분의 85%를 수입하고 있다. 그나마 제지업계는 종이 수출로 환율 급등의 타격을 상쇄하거나 종이 값을 올리면 되지만 인쇄업체들은 손실을 만회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수업이 늘고 행사가 취소되며 교재나 팸플릿 등 매출은 급감했는데 인건비, 임차료 등 고정비는 뛰고 금리까지 오르면서 기계 리스비용까지 겹으로 올랐다.
서울에서 인쇄업을 2대째 이어온 김모 씨는 최근 35년간 운영한 공장 문을 닫고 생산라인을 외주로 돌렸다. 김 씨는 “잉크와 기계 세척약물 등 부자재 값도 2년간 30∼50% 올랐다. 직원을 정리해고하고 운영비를 줄여 겨우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에 따르면 2019년 1109개사였던 회원사는 올해 현재 972개사로 12% 감소했다. 매월 3, 4개씩 폐·휴업하고 있는 셈이다.
○ 책·화장지·노트 값 줄줄이 인상… “내년 더 오른다”
제지 가격 인상은 연관업계 연쇄 가격 인상을 부추기고 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출판유통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올해 3분기(7∼9월) 정가를 변경한 종이책 가격은 변경 전 평균 1만5078원에서 1만8605원으로 23.4%(3527원) 올랐다. 출판업계 관계자는 “보통 재판(2쇄)부터 수익을 내는데 종이 값이 폭등한 상태에서 정가를 작년, 재작년처럼 유지하면 이윤이 거의 남지 않는다”고 말했다.
신문용지 가격도 지난해와 올해 각각 10%씩 올랐다. 수입 고지(폐지) 가격이 지난해 초부터 2배로 뛰는 등 원가가 오르자 이례적으로 2년 연속 인상됐다. 신문용지 시장은 사모투자펀드(PEF) 운용사 모건스탠리프라이빗에쿼티(모건스탠리PE)가 최대주주인 전주페이퍼, PEF인 유암코가 주주인 페이퍼코리아, 대한제지 등 3개사가 사실상 과점하고 있다. 한국신문협회에 따르면 용지 가격이 10% 인상되면 연간 50만 부를 발행할 경우 19억5000만 원의 추가비용이 발생한다.
학습지와 화장지 값도 일제히 올랐다. 교원 구몬학습과 대교 눈높이학습은 올해 상반기(1∼6월) 월 구독료를 각각 2000∼5000원(4∼13%) 인상했다. 동화책으로 유명한 그레이트북스는 유아전집 6종 가격을 2만2000원(5∼6%) 올렸다. 유한킴벌리와 깨끗한나라는 화장지류 가격을 7∼10% 올렸다.
문구업계에서는 가격은 유지하되 제품 양을 줄이는 ‘슈링크플레이션’이 두드러지고 있다. 장낙전 한국문구유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장수를 줄일 수 없는 다이어리나 복사용지(박스)는 가격이 20∼30%씩 올랐고 가격을 동결한 노트들은 장수가 8∼16쪽 줄었다. 올해 재고가 소진되면 내년부터 가격 인상 폭이 더 가팔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신동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