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닭의장초
한겨레신문 [정찬, 세상의 저녁] 2016-10-27
블랙리스트, 공동정범, 브레히트
김일란·이혁상 감독의 다큐영화 <공동정범>을 인상 깊게 보았다. 비무장지대(DMZ)국제다큐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이 영화는 2009년 1월20일 경찰 특공대원 1명과 철거민 5명이 사망한 용산참사를 다룬 김일란·홍지유 감독의 영화 <두 개의 문> 후속편이다. <두 개의 문>이 진압경찰의 진술과 법정 증언, 경찰의 채증 영상 등을 통해 은폐된 진실을 추적하는 작품이라면, <공동정범>은 참사의 가해자로 기소되어 ‘공동정범’(共同正犯)으로 4년 형을 살고 나온 철거민 다섯명의 내면고백을 통해 참사 이후 그들이 겪은 고통의 실체를 보여주는 영화다.
<공동정범>의 제작 의도는 제목에 함축되어 있다. 검찰은 범죄 공모 이후 공모자 일부만이 범죄를 실행했을지라도 나머지 공모자에게도 같은 죄가 성립하는 ‘공모 공동정범’ 혐의로 철거민들을 기소했고, 재판부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신규 ICON 출시
그들이 ‘공동정범’이 된 것은 불이 난 망루에 있었기 때문이다. 망루는 철거민들에게 최소한의 삶을 지키기 위한 거점이었다. 사랑이 꿈과 기적 사이의 어떤 것이라면, 모욕은 절망과 죽음 사이의 어떤 것이다. 그들은 비정한 물신사회에서 오랫동안 모욕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망루는 절망과 죽음 사이에서 삶의 가느다란 끈을 잡으려고 세운 ‘작은 집’이었다. 그 집을 점령하기 위해 국가권력은 경찰 병력 20개 중대 1600여명과 대테러 담당 경찰 특공대 49명을 투입했다.
용산참사에서 목격한 국가폭력이 쌍용차 사태에서 증폭되어 나타난 것은 국민 다수가 용산참사를 묵인했기 때문이다.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로 사망에 이르렀음에도 죽음까지 모욕당하고 있는 것은 국민 다수가 쌍용차 사태를 묵인한 결과다.
<공동정범>의 놀라운 점은 참사 이후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있는 그들에게 영화 작업이 치유 행위로 작용한 사실이다. 카메라는 지옥 같았던 기억의 고통에 갇혀 굳어버린 그들의 마음속으로 섬세하게 스며들어 부드럽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아, 영화가 이런 역할을 하는구나, 하는 감동과 함께 예술의 힘을 새삼 느꼈다.
예술의 영혼은 본능적으로 고통을 응시하는 생명체다. 삶의 고통 속에서 예술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세계의 고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최근 청와대가 문화체육관광부로 내려 보낸 문건에 정치 검열 대상자 예술인 9473명의 이름이 명시된 블랙리스트가 확인되어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예술인 9473명이 청와대에 의해 정부 비판 행위의 죄목으로 ‘공동정범’이 된 것이다. 그 후 예술인들이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라고 선언했으니, 여기에 동의하는 모든 예술인들은 ‘공동정범’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끊임없이 목도하며 살아왔다. 물이 썩어 국토의 젖줄이 녹차 죽처럼 짙푸르게 변하는데도 어떤 대책도 내놓지 않고, 규모 5.8의 지진이 났음에도 그 지진대에 원전을 계속 짓겠다고 하는 정부를 무슨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304명의 사람이 타고 있는 배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는 것 이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연옥의 풍경과, 그 연옥을 기어이 완성시키겠다는 듯이 아이를 잃은 후 존재가 뿌리째 뽑혀버린 고통을 겪고 있는, 죽어야만 벗어날 수 있는 고통임에도 기억 속에는 아이가 살아 있기에 그 기억을 간직하려고 고통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적대하는 또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예술인 블랙리스트까지 목도한 참담한 상황에서 급기야는 최순실이라는 저잣거리 여인이 대통령을 아래에 두고 국가 운영을 좌지우지한, 너무나 기괴해 국가가 통째로 블랙코미디 속으로 들어가버린 사건을 목도하기에 이르렀다.
브레히트가 나치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은 1923년이었다. 1933년에는 브레히트의 모든 작품이 금서가 되었다. 그가 오랜 망명 생활 끝에 귀국한 것은 1949년이었다. 그때부터 1956년 심장마비로 운명할 때까지 브레히트의 예술 활동은 나치에 의해 훼손되고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시키는 데 집중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황폐화되고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일까? ‘공동정범 예술인’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어버렸다.
정찬 소설가
한겨레신문 [정찬, 세상의 저녁] 2016-10-27
블랙리스트, 공동정범, 브레히트
김일란·이혁상 감독의 다큐영화 <공동정범>을 인상 깊게 보았다. 비무장지대(DMZ)국제다큐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이 영화는 2009년 1월20일 경찰 특공대원 1명과 철거민 5명이 사망한 용산참사를 다룬 김일란·홍지유 감독의 영화 <두 개의 문> 후속편이다. <두 개의 문>이 진압경찰의 진술과 법정 증언, 경찰의 채증 영상 등을 통해 은폐된 진실을 추적하는 작품이라면, <공동정범>은 참사의 가해자로 기소되어 ‘공동정범’(共同正犯)으로 4년 형을 살고 나온 철거민 다섯명의 내면고백을 통해 참사 이후 그들이 겪은 고통의 실체를 보여주는 영화다.
<공동정범>의 제작 의도는 제목에 함축되어 있다. 검찰은 범죄 공모 이후 공모자 일부만이 범죄를 실행했을지라도 나머지 공모자에게도 같은 죄가 성립하는 ‘공모 공동정범’ 혐의로 철거민들을 기소했고, 재판부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신규 ICON 출시
그들이 ‘공동정범’이 된 것은 불이 난 망루에 있었기 때문이다. 망루는 철거민들에게 최소한의 삶을 지키기 위한 거점이었다. 사랑이 꿈과 기적 사이의 어떤 것이라면, 모욕은 절망과 죽음 사이의 어떤 것이다. 그들은 비정한 물신사회에서 오랫동안 모욕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망루는 절망과 죽음 사이에서 삶의 가느다란 끈을 잡으려고 세운 ‘작은 집’이었다. 그 집을 점령하기 위해 국가권력은 경찰 병력 20개 중대 1600여명과 대테러 담당 경찰 특공대 49명을 투입했다.
용산참사에서 목격한 국가폭력이 쌍용차 사태에서 증폭되어 나타난 것은 국민 다수가 용산참사를 묵인했기 때문이다.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로 사망에 이르렀음에도 죽음까지 모욕당하고 있는 것은 국민 다수가 쌍용차 사태를 묵인한 결과다.
<공동정범>의 놀라운 점은 참사 이후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있는 그들에게 영화 작업이 치유 행위로 작용한 사실이다. 카메라는 지옥 같았던 기억의 고통에 갇혀 굳어버린 그들의 마음속으로 섬세하게 스며들어 부드럽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아, 영화가 이런 역할을 하는구나, 하는 감동과 함께 예술의 힘을 새삼 느꼈다.
예술의 영혼은 본능적으로 고통을 응시하는 생명체다. 삶의 고통 속에서 예술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세계의 고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최근 청와대가 문화체육관광부로 내려 보낸 문건에 정치 검열 대상자 예술인 9473명의 이름이 명시된 블랙리스트가 확인되어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예술인 9473명이 청와대에 의해 정부 비판 행위의 죄목으로 ‘공동정범’이 된 것이다. 그 후 예술인들이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라고 선언했으니, 여기에 동의하는 모든 예술인들은 ‘공동정범’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끊임없이 목도하며 살아왔다. 물이 썩어 국토의 젖줄이 녹차 죽처럼 짙푸르게 변하는데도 어떤 대책도 내놓지 않고, 규모 5.8의 지진이 났음에도 그 지진대에 원전을 계속 짓겠다고 하는 정부를 무슨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304명의 사람이 타고 있는 배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는 것 이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연옥의 풍경과, 그 연옥을 기어이 완성시키겠다는 듯이 아이를 잃은 후 존재가 뿌리째 뽑혀버린 고통을 겪고 있는, 죽어야만 벗어날 수 있는 고통임에도 기억 속에는 아이가 살아 있기에 그 기억을 간직하려고 고통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적대하는 또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예술인 블랙리스트까지 목도한 참담한 상황에서 급기야는 최순실이라는 저잣거리 여인이 대통령을 아래에 두고 국가 운영을 좌지우지한, 너무나 기괴해 국가가 통째로 블랙코미디 속으로 들어가버린 사건을 목도하기에 이르렀다.
브레히트가 나치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은 1923년이었다. 1933년에는 브레히트의 모든 작품이 금서가 되었다. 그가 오랜 망명 생활 끝에 귀국한 것은 1949년이었다. 그때부터 1956년 심장마비로 운명할 때까지 브레히트의 예술 활동은 나치에 의해 훼손되고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시키는 데 집중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황폐화되고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일까? ‘공동정범 예술인’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어버렸다.
정찬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