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妙行無主分 第四
묘행무주분 제사
復次須菩提야 菩薩이 於法에 應武所主하야 行於布施니
所謂不主色布施며 不住聲香味燭法布施니라 須菩提여 菩薩이
應如是布施하야 不住於相이니 何以故오 若菩薩이 不住相布施하면
其福德을 不可思量이니라
須菩提여 於意云何오 東方虛空을 可思量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復여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을 可思量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須菩提여 菩薩의 無主相布施 亦復如是하야 不可思量이니라
須菩提여 菩薩이 但應如所敎住니라
또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그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하나니,
이른바 모양에 얽매임없이 보시를 해야 하며,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감촉이나
생각에 얽매임없이 보시를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어떠한 상(相)에도 집착을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만약 보살이 상에 집착을 하지 않고 보시를 하면
그 복덕이 가히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동쪽허공의 크기를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보살이 상에 집착함이 없이 베푸는
무주상보시(無主相布施)의 복덕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헤아릴 수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지금 내가 가르쳐 준 대로
마음을 유지하여야 하느니라.
제3 「대승정종분」의 주제는 마음을 항복받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현재의 생활 속에서 ‘내가 ~을 한다’는 자랑스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 마음을 항복받고, 무엇을 한 다음에도 ‘내가 ~을 했다’는 생각에 빠지는 것을
항복받으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제 제4 「묘행무주분」에서는 스스로가 발한 보리심을 잘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하고 계십니다.
먼저 경문의 내용을 요약한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이라는
소제목의 뜻부터 살펴봅시다.
‘묘행(妙行)’ 은 보리행(菩리行)으로, 깨달음을 이루는 행, 부처를 이루는 행,
대우주의 진실한 행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그 행을 어떻게 하여야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대우주의 진실한 행, 법계의 무한복덕과 하나가 되는 행이 될 수 있는가?
그 비결은 ‘무주(無住)’입니다.
머무름이 없는 행, 곧 집착이 없는 행이어야 합니다.
집착이 없어야 대우주의 무한복덕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무주묘행분’의 가르침입니다.
이를 잘 명심하시고 경문의 한구절 한구절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부처님께서는
‘보살이 어떻게 보리심을 유지해야 하는가’ 하는 수보리존자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셨습니다.
“보살은 마땅히 그 어디에도 머무르느 바 없이 보시를 해야한다.”
부처님께서는 먼저 ‘머무르느 바 없이(無所維)’, 곧 집착이 없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해탈의 행인 보시 . 지계 인욕 . 지계 . 선정 . 반야의 육바라밀 가운데
일상 생활과 가장 가까운 보시를 예로 들어 나머지 다섯 가지 해탈법도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베풀어 주는 보시행(布施行).
부처님께서는 이 보시행을 집착없이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먼 곳의 일은 그만 두고, 우리의 가족을 생각해 봅시다.
가족의 굴레 속에서 우리는
‘아버지’라는 집착, ‘어머니’라는 집착, 저 아이가 ‘내자식’ 이라는 집착으로 살아갑니다.
집착 속에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리의 길, 깨달음의 길, 대우주의 진실한 행은 정반대입니다.
주하는 바 없이, 집착하는 바 없이 모든 일을 행하여야
보리의 길,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데, 집안의 일에서부터 집착 하나를 떼내지 못한 채
서로에게 베풀고 있으니 어떻게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고해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집착하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끼리 서로 사랑하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집착을 합니다.
그러나 그 집착이 사랑으로 베푼 모든 것을 무위로 돌려 놓습니다.
어떤때는 원결까지 맺어버립니다.
부모들은 흔히 ‘내 자식놈이 내 말 안 듣고 거역한다’며
아들딸에게 톡톡톡 쏘아 붙입니다.
내가 낳고 기른 자식이어서 만만하고, 부모 자식 사이인지라
이해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함부로 합니다.
그 밑바닥에는 ‘자식이니까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 는 집착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아들딸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나름대로의 욕심이 있기 때문에,
부모의 꾸중이나 톡톡 쏘는 말이 섭섭하게 들리고 억울하기까지 합니다.
부모와 자식의 사이이므로 드러내어 놓고 부모의 멱살을 잡지는 않지만,
거꾸로 가슴 속으로 들어가 맺히는 것입니다.
못된 자식을 둔 부모나, 시어머니 며느리 사이도 섭섭함과 원망스러운 감정이 쉽게 맺힙니다.
원망스런 감정의 맺힘! 이 원결은 부부 사이에 가장 많이 맺힙니다.
서로를 배신하는 긴장한 사건이 있어야만 원결이 맺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발단은 사소한 데서 비롯됩니다.
아내의 바가지 긁는 소리가 남편의 가슴에 꽉 맺혀 잊을 수 없게 되거나,
아내에게 막 하는 남편의 소리가 가슴에 꽂혀 풀리지 않게 되면
원결이 성립되고, 그것이 얽히고 설키면
원수같은 사이로 발전하게 됩니다.
물론 모든 대화가 다 가슴에 맺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이 아무런 감정없이 살랑 지나가게 되지만,
스스로의 심기가 불편할 때나 심한 모욕감을 느끼게 되면
가슴에 꽂혀 풀어지지않는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이 나를 이렇게 밖에 생각을 못하고, 나를 이렇게 보아왔구나.’
이렇게 실망감에 젖고 믿음이 깨어지면,
일이 생길 때마다 자꾸만 이상한 쪽으로 몰고 갑니다.
‘저 사람이 지난 번에 그 소리를 하더니만, 자기 마음 속에 저런 속셈이 있었구나.
그래서 나한데 갈수록 이상하게 행동하는 구나.’
마침내는 부부간에 큰 싸움이 불고, 사움 뒤에 갈라서거나 서로를 더욱 미워하게 되면
내생까지 이어지는 원결로 정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할 뿐 아니라 믿고 의지하는 부모 . 자식 . 형제 . 부부 사이일지라도,
사랑하기 때문에, 만만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면 결국은 무서운 원결을 만들게 됩니다.
‘남편이다 . 아내다 . 아버지다 . 어머니다 . 자식이다’ 고 하는 집착없이
그 사람에게 이바지해 줘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 생활도 모든 일 속에서도
구속되거나 집착하는 마음없이 베풀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가족에게 이바지하고 사람들에게 베풀면
‘그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는 보살’ 이 될 수 있으며,
우주의 무한 복덕을 수용하고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감각기관(六根)인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의 대상경계(六境)인 모양(色). 소리(聲) . 냄새(香) . 맛(味) . 감촉(觸) .
법(法)에 얽매여 보시하지 말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른바 모양에 얽매임없이 보시를 하여야 하며,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감촉이나 생각에 얽매임없이 보시를 해야 하느니라.”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보시는 너무나 얽매여 있습니다.
절에서 불사를 할 때도 스님의 권유로 하는 수 없이, 또는 경쟁의식에서,
남의 말이 귀에 걸려 보시를 합니다.
불보살상을 모시는 데는 서로 돈을 내려 하고,
길을 닦고 화장실을 만드는 데는 선뜻 보시를 하려는 자가 드뭅니다.
이것이 참된 보시입니까? 보시는 버리는 것입니다.
물질에 얽매이고 자기애(自己愛)에 얽매이면 반드시 고통의 과보를 초래하게 되므로,
버리는 보시행을 통하여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길로 나아가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는 척 하면서 주지를 못합니다.
버리는 척 하면서 버리지를 못합니다.
물질은 주었어도 마음으로는 그것을 더욱 꼭 붙들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보시를 하였으면 보시를 한 것으로 끝내야 하는데, 그 돈을 쓴 결과에까지 신경을 씁니다.
이렇게 되면 보시 그 자체에, 그리고 보시의 대상에 얽매이는 꼴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시를 하였으면 바로 그 순간에 익어버려야 합니다.
절이든 복지단체든 그 누구에게 보시를 하였든, 바로 그 순간에 입을 닫고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물질을 베풀었건 법문을 하였건 몸으로 봉사를 하였건
그 보시에 대한 생각을 계속 지니고 다녀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여야만 참된 복이 되고 깨달음을 이루는 공덕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존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어떠한 상에도 집착을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만약 보살이 상에 집착을 하지 않고 보시를 하면 그 복덕이 가히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니라.”
상(相)!
부처님께서는 이 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보리심을 잘 유지할 수 있고,
위없는 깨달음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상(相)이란 무엇인가?
먼저 이 상과 관련하여 널리 알려진 옛 이야기 한 편을 음미해 보고자 합니다.
☆
당나라 때의 우두선종(牛頭禪宗) 승려인 무착문희(無著文喜, 820~900) 선사는
출가한 지 17년이 되었으나 견성(見性)을 하지 못하자,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깨우침을 얻겠다는 원을 세웠습니다.
스님은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기 위해 남쪽 항주에서부터
북쪽의 오대산(五臺山)까지 절을 하면서 갔습니다.
마침내 오대산 금강굴(金剛窟) 부근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이 소를 거꾸로 타고 오다가 말을 걸었습니다.
“자네는 어떤 사람인데 무엇하러 이 깊은 산중에 앉아 있는가?”
“예,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왔습니다.”
“문수보살을 가히 친견할 수 있을까?”
말 끝에 노인은 그 순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자네 밥 먹었는가?”
“안 먹었습니다.”
“순 생짜로군.”
그리고는 소를 타고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무착선사는 노인이 범상치 않은 분임을 느껴 뒤를 따랐고,
얼마쯤 가니 금색이 휘황찬란한 절이 나타났습니다.
“ 제(均提)야.”
노인이 시자를 부르자, 시자는 뛰어나와 소를 받아 매었습니다.
자시 뒤에 차가 나왔는데 다완(茶椀)은 모두 보석으로 만들어졌고,
차를 마시니 몸과 마음이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상쾌해졌습니다.
‘세상에 이런 차가 있다니!’
혼자 감탄하고 있는데 노인이 물었습니다.
“자네 어디서 왔는가?”
“남방에서 왔습니다.”
노인은 찻잔을 들고 다시 물었습니다.
“남방에도 이런 물건이 있는가?”
“없습니다.”
“이런 물건이 없다면 무엇으로 차를 먹는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날은 저물어갔고,
노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지 없는 평온함을 느껴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단호하게 말하였습니다.
“상(相)이 있는 사람은 여기서 잘 수 없다.”
“저는 출가사문이기 때문에 상이 엇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씩- 웃으며 불렀습니다.
“스님.”
“예.”
“출가한 지 몇 년이 되었는고?”
“17년 되었습니다.”
노인이 또 물었습니다.
“자네, 계(械)를 잘 지키는가?”
“예, 출가한 이래로 지금까지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네는 여기서 잘 수가 없네.”
노인은 시자인 균제를 시켜 무착선사를 배웅하게 하였고,
이렇게 문수보살을 친견한 무착선사는 오대산에서 돌아온 뒤
열심히 공부하여 대도를 성취하였습니다.
무착선사가 ‘상이 없다’ 고 하자, 노인의 모습을 띤 문수보살은 ‘스님’ 하며 불렀고,
출가를 한 지가 몇 년이 되었으며 계율은 잘 지키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무착선사는 ‘예’ 하고 답한 다음, 출가한 지 17년이 되었고
출가한 이래 계율을 잘 지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그것이 바로 상(相)’ 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스님이다.’ ‘몇 년이나 스님 노릇 하였다.’ ‘나는 계율을 잘 지키고 있다.’
이것이 모두 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대산에서 돌아온 무착스님은 이 상을 잘 다스려
마침내 대오(大悟)를 하였습니다.
상(相)!
상은 모양입니다. 물질적인 모양을 갖춘 것만 상이 아니라,
소리 . 향기 . 맛 . 감촉 . 또한 상이며, 고착된 생각 또한 형체 없는 상입니다.
곧 ‘내가 부모’ 라는 생각도 상이요, ‘저 아이는 내 자식’ 이라는 생각도 상이며,
‘내가 저 아이에게 무엇을 해줬다’ 는 생각도 상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해준다’.
이 셋 중 하나만 남아 있어도 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 가지 상을 모두 떠나 보시를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상을 비우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상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를 하도록 권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까닭은 ‘상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를 하여야 그 복덕이 헤아릴 수 없기 때문’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실로 이 법계는 무한의 행복과 무한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 스스로가 만든 상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
대우주의 무한한 영광과 행복과 상서(祥瑞)를 거절하며 살고 있습니다.
스스로가 불행하고 괴롭고 슬프게 만든것일 뿐, 그 누가 있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나’ 라는 상에 사로 잡혀 일으킨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비우고 살게 되면,
대우주의 무한 행복과 영광이 모두 ‘나’에게로 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부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디 불자들이여, 상(相) 없이 살도록 합시다.
부모라는 상, 자식이라는 상, 윗사람이라는 상, 불자라는 상, 스님이라는 상,
공부를 많이 했다는 상 등을 비우고 삽시다. 이러한 상들이 대우주의 행복을 차단시킵니다.
반대로 상을 비우면 무한 행복이 저절로 찾아옵니다.
결코 겉모습만 벗어버리지 마십시오. 일체의 상에 대해 마음으로 벗어야 합니다.
어찌 해탈이 바깥에서 오는 것이겠습니까?
상을 벗어 마음이 열리게 되면, 일체의 고통으로부터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이제 다시 보시로 돌아가 이 명제를 함께 생각해 봅시다.
상에 얽매이는 보시는 훗날의 조그마한 복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이루는 공덕과는 무관하며, 해탈로 이어질 수가 없습니다.
장차 부처가 될 불자의 보시는 ‘조그마한 복을 지어 다음에 어떻게 태어나느냐’ 에 있지 않습니다.
불자의 보시는 지금 이 몸을 가지고 해탈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정녕 빨리 해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가까운쪽부터 시작하여 자꾸 벗어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하였듯이, 보시는 버리고 벗어버리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상에 집착함이 없이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보시를 하며 살아야 해탈을 이루고
가히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동쪽 허공의 크기를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수보리여, 남쪽 서쪽 북족 등의 허공과 동남 . 서남 . 동북 .
서북쪽과 위 . 아래 허공의 크기는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보살이 상에 집착함이 없이 베푸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복덕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헤아릴 수가 없느니라.”
이 금강경의 말씀처럼 허공의 크기를 상상할 수 없듯이, 상에 집착함이 없이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보시를 하게 되면 대 허공과 같은 크기의 복과 공덕이
‘나’ 에게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시를 한다’, ‘내가 보시를 했다’ 는 생각, ‘나’ 라는 상이 붙을 때에는 그저 자그마한 복이 될 뿐입니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불교에서 무주상보시를 그토록 강조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허공을 측량할 수 없듯이, 상에 집착하지 않고 행하는 무주상보시의 복덕 또한
측량할 수 없으며, 그 결과가 부처의 지위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심의 유지’를 주제로 삼고 있는 「묘행무주분」의 결론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지금 내가 가르쳐 준 대로 마음을 유지하여야 하느니라.”
이 말씀의 골자 또한 무주상(無住相)입니다.
무주상으로 보리심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주상을 강조하다보니,
금강경이 모든 상을 부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금강경의 ‘무주상’ 은 부정이 아닙니다.
이 때까지 살아온 중생들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相)을 부정하여
참모습과 실체를 보게끔 하자는 것입니다.
“법계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법계와 하나가 되려면
이제까지처럼 집착에 가린 눈으로 겉모습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이제 집착을 벗어버린 실제의 눈을 뜨라. 실제의 눈을 뜨고 참모습을 바라보아라.
이 세상이 없는 것이 아니듯이 실제 또한 또렷하게 있고, 모든 것이 그대로 실재(實在)하고 있다.
눈을 뜨고 그것을 보아라. 눈을 뜨고 참모습을 바라보아라.”
이것이 금강경의 핵심 가르침인 ‘무주상’ 에 숨겨진 뜻입니다.
상에 집착하지 않는 무주상!
이것이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상에 집착하지 않도록
자꾸자꾸 노력하면 차츰 보리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마침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곧 부처님과 같은 대각(大覺)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무주상으로
대우주의 진실한 행, 진리의 행을 실천하여 대해탈을 이루고
대자유와 무한행복을 누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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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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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