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환상의 해석에 관하여
-연극 <사라진 것들의 미래>-
전 상 배
2022.1.8.(토)
작:한진오/연출:이채린/출연:정성준,서효림,이예인/무감:채승목/무대디자인:조예나/조명:김동규/음향:신현우/기획:배혜진/제작:JB STUDY
22.1.8.~1.9. 15시,19시. 공간소극장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현실과 환상에 관한 해석이 무대 위에 공존하는 것. 어쩌면 몽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질문인지도 모른다.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섬, 계절을 만들어내는 신의 존재, 신을 찾아 섬에 나타난 여자 아이,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아야 할 무인도에 살고 있는 할멈, 별의 씨앗을 찾고 있는 과학자. 도대체가 현실적이지 않지만 연극 <사라진 것들의 미래>에서는 이 모든 것들을 무대 위에 살아 있는 현실로 보여준다. 어쩌면 작품은 정당하고 합당한 이유들을 찾아 사실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하여, 무대 해석의 본질에 대한 도전을 선언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도전은 잘 구성된 드라마를 추구하는 사실적 작품들이 각종 매체를 장악하며 관객의 태도를 강요하고 있는 현실적 여건을 생각한다면 조금은 무모한 도전이다. 하지만 연극에 있어서 무대 해석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은 연극이 예술로서 존재하도록 하는 기본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이 작품은 예술로서 연극이 무대에 존재하게 하는 기본적 해석에 관한 도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사라진 것들의 미래>는 무대 해석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사라진 것들의 미래>가 가진 본질적인 것들에 대해 고민하자면 우선 자연주의에 관해 언급해야만 할 것 같다. 자연주의에 관한 개념은 사물에 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재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연 안에서 사회적 동물로 존재하게 되는 인간의 철학적 관심, 자연적 동물로서 존재하는 인간이 가진 심리와 환상, 자연과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하나로 연결하는 초자연적 관심. 이렇듯 자연주의 개념을 확장시켜 보면 작품에 대한 이해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연과 함께 존재하며, 그 안에 있으며, 자연 그 자체일 것이므로. 그러므로 무대에서의 연극 또한 자연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연극 <사라진 것들의 미래>는 자연주의의 어떠한 개념에 어우러지는 것일까?
작품에서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세 명의 등장인물을 쫓아가다 보면 하나씩 그 답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듯하다. 먼저, 첫 장면에서 알 수 없는 몸짓으로 무대를 휘젓고 사라진 여자아이의 행동을 보자. 여자아이는 주술을 행하여 폭풍을 불러오기도 하며, 신과 교감하는 행동을 한다.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여자아이의 행동은 자연과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하나로 연결하는 초자연적인 관심에 있는 인물이다.
두 번째 등장하는 과학자의 행동을 따라 가보자. 과학자는 삶에 실패한 세상의 낙오자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연구한 자료에서 일확천금의 꿈을 발견한다. 그가 도착한 무인도에 욕망을 채워줄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 믿어버린 것이다.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섬에서 일확천금의 무엇인가를 찾는다. 욕망에 빠진 인간의 자연스런 모습이다. 다시 말해 자연적 동물로서 존재하는 인간이 가진 심리와 환상에 있는 인물이다.
세 번째 할멈은 자연 안에서 사회적 동물로 존재하게 되는 인간의 철학적 관심에 있는 인물이다. 할멈은 애초에 섬에 살았던 원주민이며, 세상에 나가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으며, 삶의 허무함을 깨닫고 이제는 무인도가 되어버린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사물에 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재현에 있는 인물은 없다. <사라진 것들의 미래>에는 등장인물이 모두 언급한 세 명뿐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인물을 자연주의의 확장된 개념으로 살펴보자면 초자연적 인물, 환상에 있는 인물, 철학적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작품은 사실적 재현을 삭제하고 꿈과 몽상의 세계로 향하고 있다. 큐브를 이용한 상징적인 무대, 등장인물의 그림자를 만들어내기도 하며 부분적인 빛을 주로 사용하는 조명, 상상을 자극하는 음악의 사용. 이와 같은 것들이 몽환적 분위기로 작품을 이끌고 있다. 이러한 측면은 스웨덴 극작가 스트린드베리(Johan August Strindberg, 1849~1912.)의 <꿈의 연극>(1902)을 연상시킨다. 스트린드베리는 그의 작품 서문에서 꿈의 형식을 구현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몽상극 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은 개인적인 꿈에 대해 그저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꿈의 연극>에서 인드라의 딸이 지구에서 경험하는 이야기들을 나열하고 있다고 본다면, <사라진 것들의 미래>에서는 과학자가 무인도에서 경험하는 이야기들이 나열되고 있다. 이처럼 두 작품이 지향하는 형식은 서로 다른 듯 닮아 있음을 발견한다.
하지만 <사라진 것들의 미래>는 <꿈의 연극>과 분명 다르다. <꿈의 연극>에서의 대사들은 은유적, 환상적인 말들이 난무하여 한참을 음미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사라진 것들의 미래>에서의 대사들은 무척 사실적이다. 사실적인 작품의 대사들은 정당성을 요구하며, 인물들의 행동에 제약을 가한다. 연출 또한 은유나 환상을 그려내는 몽환적인 분위기의 연출과 사실적인 분위기의 연출에서 갈등하게 된다. 이러한 점은 현실과 환상이 부딪치며 튕겨 나가기도 하며 전쟁을 일으키게 만든다. 하지만 이 전쟁이 숙성되면 대 타협의 평화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꿈을 무대화 한다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예술이라면, 창의적인 상상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모방이 아니라 창조에 의해서만 가능함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사라진 것들의 미래>가 지향하는 지점은 현실과 환상에 대한 해석에 도전하는 것이며, 동시에 창의적인 상상력에 도전하는 것이다.
"JB STUDY“는 젊은 연극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단체의 이름 ‘STUDY’에서 보듯이 그들은 연극을 탐구한다. 젊은 예술가들의 도전이다. 잘 구성된 사실적 드라마를 추구해 왔던, 뭐든 고전 텍스트라면 완벽한 모범 답안이라도 되는 냥, 어쩌면 지금도 그러한 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기성 극단들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여기까지 생각에 이르고 보니, 비록 숙성되지 못한 여러 측면에 대해 입을 댈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문제일까 싶기도 하다. 제작비는 턱없이 부족할 게 뻔히 보이고, 주어진 여건에서 열정을 불태우고 있음을 알기에 더욱 그렇다. 나 또한 기성 연극인이 되어버렸기에 후배 연극인들 앞에서 모든 행동거지를 자제할 수밖에.
모두들 보러 가시라~ 젊은 연극인들의 도전을~ 그리고, 힘찬 박수를 보내 주시라~
끝으로, 스트린드베리의 『꿈의 연극』 서문을 소개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할 말을 대신한다.
『꿈의 연극』 서문 _ A. 스트린드베리 (김지명 옮김)
나는 이전에 쓴 몽상극 『다마스커스로(To Damascus)』에서처럼, 『꿈의 연극(A Dream Play)』에서도 무관심하고 얽매이지 않는-분명 논리적이기는 해도-꿈의 형식을 재생하려고 시도했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어떤 일도 가능하고 그럴 듯해 보인다.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 사건의 얄팍한 기초에서 상상은 새로운 형식으로 회전하고 엮인다. 말하자면 회상과 경험과 변덕과 공상과 생각과 가상이 부조리와 즉흥, 그리고 마음의 독창적인 창조가 뒤섞인다.
성격은 분열되어 이중성을 띠고 증식되고 사라지고 강화되고 퍼지고 흩어지고 강조된다. 그러나 인물들을 지배하는 일치단결한 의식이 있다. 즉 몽상가의 의식. 몽상가에게는 비밀도 없고 불일치도 없으며 주저함이나 도덕, 법칙도 없다. 그는 판결을 내리거나 면죄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이야기할 뿐이다.
꿈은 환희보다는 고통을 수반하기에,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우울이나 동정의 음계가 절름발이 이야기를 관통한다. 해방자인 잠은 괴롭힘을 주는 사람, 고문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고통이 심하면 깨달음이 고통 받는 사람을 구제하고 현실과 화해시킨다. 현실이 아무리 괴롭다 해도, 이 순간만큼은 그 현실이 고통스런 꿈으로부터의 해방으로서 열렬한 환영을 받을 것이다. (출처 : A. 스트린드베리, 고승길, 김지명, 『줄리 양』 과 『꿈의 연극』 서문, 공연과리뷰, (77), 2012.6, p.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