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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채움의 세계
- 호박벌, 김제김영 시가 비상하는 원동력
프롤로그
우리가 항상 사용하면서도 헛갈리는 개념들이 많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도 ‘행복’만큼 심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오죽하면 헌법에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즉 행복추구권을 명시해 두었겠는가.
그런데 막상 행복의 실체에 다가가고자 한다면 막막하기만 하다. 일단 의식주를 해결한 상태로 삶에 위협 요인이 없으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정도로는 어림없고 사람마다 간직하고 있는 꿈-이상을 실현해야 행복하다고 할까? 그도 아니면 사회적으로 자신의 위력을 과시할 수 있는 권력을 쥐어야 한다거나, 자신의 의지대로 타인을 부릴 수 있는 금력을 쌓아두어야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고 보니 보통사람들이 꿈꾸는 ‘행복한 삶’의 실체가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이미 한 세상을 살다 간 사람들이 체험적 삶을 통해 터득한 행복에 대한 진실이나, 선각적인 지혜로 인류를 가르치는 성현들의 말씀을 듣고 새기노라면 앞에서 밝힌 행복론에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분들이 깨달음과 체험을 통해서 터득한 행복의 실체는 앞에서 언급한 것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기 마련이고, 그런 행복론이 허구로까지 들리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측면에서 행복의 실체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하나는 육신이 추구하는 실체적 삶과 정신이 추구하는 이상적 삶의 괴리에서 오는 인생의 균형감각에 대한 측면이다. 물론 몸의 부름과 맘의 생김이 일치하는 가운데 삶의 균형을 이루는 행복감이라면 더 이상 다른 무엇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육체의 욕구에 충실하다 보면 정신의 공허함을 느낄 수 있고, 정신적 삶에 비중을 두다 보면 육체의 허약함을 실감하고 그때마다 우리는 삶의 비중이나 행복한 삶의 균형감각에 대하여 고민하게 된다.
몸이 창조적 표현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 분야의 사람들, 이를테면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들에게서 더러 금지약물 복용이 문제가 되곤 한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보다 탁월한 기량을 뽐내려는 과도한 욕망이 빚은 비극이기도 하지만, 몸의 에너지를 극도로 소모하고 난 뒤에 찾아오는 공허감을 메우려는 도피적 행태도 적지 않음을 전해 듣곤 한다. 이와는 다르게 정신 작업에 몰두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런 경우도 있다. 몽테뉴 수상록에서도 읽은 기억이 난다. 책 읽고 글 쓰는 즐거움[행복감]에 빠져서 며칠이고 방구석에서 지내다보면 육체가 형편없이 부실해져서 결국은 읽는 일도 쓰는 일도 지탱할 수 없는 경지에 대한 불평을 토로하곤 한다. 몸의 부름과 맘의 생김을 균형 있게 조율해 나가면 좋겠지만, 사람의 됨됨이가 그렇게 말처럼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또 하나는 행복의 실체에 대한 것이다. 행복이 설정한 목표를 이룬 상태인가, 아니면 순간적인 감정인가에 대한 헛갈림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추구해 마지않는 행복이 일정한 상태에 도달한 경지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의 감정인가하는 점이다. 명예나 재물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달성된 ‘상태’를 행복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달성된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그런 상태를 유지하거나 나아가 부풀리려는 욕구를 잠재우지 못할 때, 행복은커녕 그런 ‘상태’가 오히려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목격하기도 한다.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그것을 누리는 것(몽테뉴)이라는 지적에 공감이 간다.
그래서 지속되는 만족감이 행복이 아니라,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의 감정 작용임을 역설하기도 한다. 평안하고 만족한 삶이 지속되는 감정 상태는 지어서 ‘행복’이라고 규정할 필요도 없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는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이다. 그러나 감정은 조석변이라고 하듯이, 시시각각 변한다. 순간 들었던 햇살이 금방 먹구름이 끼었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쨍하고 다시 햇살이 피는 것이 바로 감정의 파노라마다. 감정이 맑은 날에 느끼는 행복감과 감정이 흐린 날에 느끼는 불행함에 대한 각자의 반응이 바로 행복과 불행의 실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은 달성되어 박제화 된 노획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감정의 파노라마를 다스려가는 과정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 변화무쌍한 감정의 일렁거림을 다스려서 육체의 평안함을 유지하고 정신의 안락함을 지탱할까? 몸의 부름에도 응답하면서 동시에 맘의 생김에도 반응할까? 굳이 ‘행복한 삶’이라고 규정하지 않을지라도, 피동적 객체로서 ‘나’를 능동적 주체로서 ‘나’로 세울 것인가? 이것은 행복의 차원에서 더 나아가 ‘나’라는 존재를 주어진 삶에서 이루어가는 삶으로 승화시켜가는 길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무엇’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다보면 “내가 그때 ‘누군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이 이렇게…”라고 술회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그 ‘누군가’는 사람도 될 수 있고, 기회도 될 수 있으며, 어떤 매체이거나, 어떤 행위이거나, 또는 생활 수단이나 삶의 의미, 인생의 터닝 포인트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무엇은 삶을 전환시키는 동기이기도 하지만, 삶의 목표나 이상-꿈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진술을 이렇게 바꾸어 볼 수도 있다. “내가 그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이라거나, “내가 ‘조실부모’하지 않았더라면…”이라거나, “내가 그 ‘스승’을 만나지 않았더라면…”이라거나, “내가 ‘시인’ 되기로 결심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술회하곤 한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그 ‘무엇’이 그 사람의 삶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 ‘무엇’이 그를 피동적[주어진] 삶에서 능동적[만드는] 삶으로 일대 창조적 전환을 가능케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영 시인의 체험적 시론 「호박벌의 비행」을 읽다보니 바로 그 ‘무엇’이 그로 하여금 자기만의 시세계를 확립하는 계기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그가 진술한 바에 의하면 ‘행복’의 지향점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인간은 꿈을 꿀 때만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NH클라인바움 원작을 영화화한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하여 김영 시인은 자신의 시가 어떻게 자신만의 개성적 세계를 형성하게 되었는가를 피력한다. “시인도 시를 쓰는 시간이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다. 서두르지 않고 나만의 속도와 나만의 방식으로 나의 시를 생육하겠다.”고 진술하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이 진술의 바탕에는 행복의 지향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스스로 밝힌 셈이다. 그것은 바로 ‘자유롭고 개성적인 삶’을 꿈꾸는 것이다. 이어지는 진술이 이를 뒷받침한다. “들꽃은 보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향기를 거두지 않는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나는 세상에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향기를 위해 시를 쓴다.”고 선언한다.
김영의 ‘시인선언’이 주는 의미는 심장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위험한 함정도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즉 앞선 행복론에서도 언급한 바이지만, 그가 추구해 마지않는 자유와 개성의 확립이 무엇인가를 쌓아가고 이루어가고 만들어가는 삶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비워가고 버려가며 놓아버리는 과정이라는 진실을 외면할 때 그것은 또 하나의 신기루에 불과할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나 김영 시인은 이런 위험한 함정마저도 그의 작품으로 극복해 나아가고 있음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인선언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꿈을 죽이는 것은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불구로 만든다. 꿈은 진실로 우리 모두가 가진 것이면서, 불가해하고, 정복 불가능한 그 무엇이다.”(페르난도 페소아)
페소아의 지적이 아니어도 꿈을 달성했다고 자만할 때마다 꿈은 이미 날 밝은 하늘의 별이 되고 만다. 별을 땄다고 확신이 들 때마다 우리들 삶의 바구니에는 허무만 고이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렇다. 모두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해석할 수 없고, 모두가 정복하려 하지만 끝내 정복할 수 없어서 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을 해석과 정복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세계가 예술[시정신] 말고 또 무엇이 있으랴! 그래도 그 꿈을 죽이면 영혼마저 죽게 됨으로 이룰 수 없는 꿈을 향하여 시인은 나아갈 뿐이다.
해석할 수도 없고 정복할 수도 없는, 영혼이 꾸는 꿈의 세계를 김영 시인은 어떻게 형상화해 내고 있을까? 그의 대표작과 최신작들을 살펴보면서 그의 시세계로 들어가 본다.
행복과 불행의 가늠자
‘김영’은 필명으로 안다. 아마도 본명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 필명으로 세상에 나아간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더러 ‘김제김영’이라는 필명도 즐겨 쓴다. 그의 작품이 이 이름으로 발표된 것을 접하기도 하였다. 본명이 아닌 필명을 쓰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동명이인의 문제나,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싶은 의도가 있을 것이다. 필자가 이 필명을 언급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전북 김제 출신이다. 김제에서 생명이 태동했으며, 김제에 있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생활과 창작의 시절을 경작했다. 뿐만 아니다. 김제지역사회에서 예술 세계의 발전을 위해 주어진 응분의 책임 있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프로필을 따라가다 보면, 고향사랑-생존의 쌈터에 대한 존중감이 유별나게 강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런 내심을 필명 ‘김제김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그의 개성적 단면을 짐작하게 하는 일화여서 언급하였지만, 다음 작품을 보면 그가 이렇게 드러내는 강한 개성적 특성이 시적 진실을 획득해 내는 실체임을 확인할 수 있다.
[1연]부드러운 솜털로 위장하고 있다 바짝 달궈진 어제가 모래언덕을 가로질러 현재에게 왔다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질긴 부끄러움을 살뜰하게 밝혀주는 어제의 뒷모습이 두렵다고 느낄 무렵// [2연]적절한 간섭이 없는 사막에서/ 어제와 현재는/ 불가침 경계를 지키자는 약속/ 아주 쉬운 다짐을 매우 어렵게/ 각자의 방식으로만 고집했다// [3연]어제는 강을 품고 있다 퇴적한 의심 때문에 길어진 강줄기를 현재 몰래 품고 있다 아스라이 멀어질 궁리만 하는 현재는 퇴적층을 들춰내어 관계를 푸르게 재생하는 공정을 일부러 가동하지 않는다 현재와 어제는 상대의 어깨를 감싸 안을 수 있는 손바닥을 가졌으나// [4연]상대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의도를 영리하게 실행하는 손톱을 키운다 커다란 손바닥은 그냥 무심한 자세로 탁자 위에 올라가 있다 손톱들은 의도를 숨기기에 적합한 방법을 재빠르게 찾아낸다 탁자 위에서 손톱들이 군무를 하는 동안, 현재와 어제는 서로에게 파동을 진지하게 감지하라고 제발, 강요한다 의자가 간간히 허리를 꺾으며 이런 현상을 웃어준다 신기루다// [5연]사막의 신기루는 잡히지 않을 정도의 간격을 계산하고 실행하는 공정제어시스템을 가졌다 어제는 햇살의 밀도와 농도를 주입하지만, 현재는 해질성의 자기장을 버리지 않는다// [6연]저 모래알갱이 때문이야/ 모래알갱이 좁디좁은 틈을 간과한/ 확신이 불안을 생산하는 거야/ 휘어지고 끊기는 불연속무늬가 복제되다 결국,/ 오해는 강화되고 불가침 경계는 소멸되는 거라고// [7연]현재가 옷을 짓는 작업실에 어제가 왔다 크게 만들어 입으라고 여러 번 강조하는 어제를 따르느라 줄자는 자꾸 헐렁해졌다 현재는 줄자의 나른함을 원망했다 거침없는 사막에서 무언가가 간섭한다는 걸 알아챈 현재와 어제가 장애물을 탐색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럴 때마다 어제의 물길은 현재의 발목을 감았다가 풀어 주는 걸 반복했다 현재와 어제는 따로 살기로 한다 솜털이 곤두서는 오후 두 시였다 ([연] 표시 필자)
- 김영 「관계회절현상」 전문
필자는 이 작품을 대하면서 어떤 지인과 내 스스로 관계 단절을 선언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라 숙연했다. 필자 역시 시인됨의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겠다는 작심, 그래서 그런 일념으로 창작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을 귀히 여기며 살았다. 이십년 세월이 다하도록 그렇게 밀도 짙은 상호관계를 형성하며 지내온 것으로 알았다. 시업으로 생업도 위로를 주고, 생업으로 시업도 승화시키는 상호관계로 알고 지내면서 지인知人를 넘어 문우文友 시우詩友로 여기며 지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친구라고 여겼던 나의 처신이 우행愚行이었음을 알아차린 것은 아주 간단한 계기였다. 필자가 심정적으로 추위를 타고 정신적으로 흔들릴 때, 그래도 소통하고 싶었던 그 관계를 외면당하는 황당함을 겪은 뒤에야, 필자는 숫타니파타나 에픽테토스의 귀띔에 소홀했음을 후회했다. 그래도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필자의 오래된 좌우명에 기대어 단호하게 관계를 단절했던 경험이 있다.
“우리는 참으로 친구를 얻는 행복을 기린다. 자기보다 뛰어나거나 대등한 친구와 가까이 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친구를 만나지 못할 때에는 허물을 짓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47) “친구, 동료, 이웃으로 사귈 사람들을 선별하십시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신의 가장 좋은 모습을 고양시키는 사람들과만 사귀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도덕적 영향력은 쌍방향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에픽테토스)
친구건, 이웃이건, 동료건 타인과 사귄다는 것은 매우 단호한 인격적 결단의 산물이다. 그저 나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장삼이사張三李四 대하듯이, 오늘 만났다 내일 헤어지는 관계라면 무슨 인격적 결단까지 들먹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삶의 중심을, 혹은 생명의 애환을, 또는 창조적 에너지를 주고받아야 하는 관계라면 함부로 관계를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사 그렇게 해서 맺어진 관계라 할지라도 앞에서 필자의 사례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려는 인격적 결단을 하지 못한다면, 또 하나의 불필요한 허물을 짓게 될 것이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도 허물이요 죄를 짓는 일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삶은 행복의 절대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자유로움과 개성적 삶’에 역행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문학[시]적 진실은 어떻게 확립되는가? 말할 것도 없이 ‘철학적 사유’와 ‘미학적 쾌감’에서 온다. 평상심으로 그저 호구지책에 전념하다 보면 삶의 이유를 잊고 살기 마련이다. 역시 행복의 지향점을 세속적 가치나 도구적 효용성에 두고 살다보면 삶의 목표를 잃기 쉽다. 왜 사느냐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갖지 못한 사람이나. 무엇을 향하여 사느냐에 대한 지향점이 없는 사람에게 문학은 질문하는 방식으로 삶의 이유와 목표를 제시하곤 한다. 그것이 [시]문학의 역할이다.
이럴 때마다 성현의 말씀을 빌려오면 그 대답을 찾기가 쉽겠지만, 저마다 다른 피땀 나는 치열한 삶이 제대로 오버랩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구체성의 산물이거나 체험적 진실이 아니고서는 사람들에게 선명한 대답으로 환영받을 수 없다. 그래서 미학적 쾌감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핵심사항-사유의 깊이와 미학적 표현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비로소 시적 진실을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작품 「관계회절현상」은 이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충족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을 끌고 가는 핵심어는 ‘어제’와 ‘오늘[현재]’이다. 이 두 명제[命題-these]가 길항拮抗 하면서 작품을 끌고 간다. 독해력 있는, 시를 선호하는 독자라면 어제가 거느리고 있는 파장과 오늘이 보여주고 있는 식솔들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건너짚다 팔 부러질 수 있다.’는 경구를 명심해야 한다. 흔한 세속적 판단으로 시가 내포하고 있는 깊이의 샘물을 성급하게 길으려 덤벼서는 안 된다. 이 작품이 함축하고 있는 사유의 깊이와 미학적 진술이 그것을 대변한다.
우리의 삶은 부단하게 점검을 요구한다. 잘 살고 있는가, 잘 가고 있는가, 잘 해내고 있는가, 잘 죽어가고 있는가? 끊임없는 질문과 확인과 점검을 요구한다. 굳이 well-being이네 well-dying이라고 명명하지 않아도 사람살이의 과정과 단계마다 이를 확인해야 한다. 이런 점검을 단순화 하면, “지금 이대로 사는 것이 과연 내가 설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인가? 자문하면서 수정하거나 보완하면서 걸어가야 한다. 그런 사유가 바로 well being하는 길이요, 그 행위가 바로 well dying에 이르는 길이다.
이 작품은 우리들 삶이 반드시 거쳐야 할 ‘생각하는 삶’을 개성적인 은유적 패러다임으로 보여준다. 필연적으로 미학적 표현이 사유의 깊이에 두레박을 드리운 격이다. 아무리 진지한 철학적 사유라도 그것이 공감할 수 있는 표현을 만나지 않고서는 샘물을 길어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두레박의 끈 역할을 하는 핵심어가 앞에서 지적한 ‘어제’와 ‘오늘[현재]’이다. 어제는 오늘의 자아에게 구각舊殼을 벗어서는 아니 된다고 요구한다. 그러나 오늘은 탈각脫殼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자기만의 세계를 열 수 없다고 고집한다. 그래서 어제는 오늘에게 “햇살의 밀도와 농도”를 주입하려 하지만, 오늘은 어제에게 “해질성의 자기장”을 버리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세속적 가치를 지향하는 인식들은 언제나 향일성向日性을 중시하며 그리로 몰려가려 한다. 행복은 바로 따스한 햇볕의 농도와 밀도를 받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조적 자기 삶을 중시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가치와 도구적 삶이 주는 피로감에서 해방되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모두가 태양을 향해 몰려갈 때, 혼자서-스스로 그 반대 방향, 햇빛이 비치지 않는 쪽[해질성-식물의 줄기나 잎 따위가 햇빛이 비치지 않는 쪽으로 자라나는 성질]으로 뻗어가려는 자기장[磁氣場-자석이나 전류가 흐르는 전선 주위에 생기는 힘이 작용하는 공간]을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창조적 삶을 지향하는 예술[시]인들은 꿈을 꾸지만 결코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없는 꿈을 꾸는 셈이다. 페소아의 지적이 여기에서 빛을 발한다. 불가능한 그 ‘무엇’을 꿈꾸는 것이다.
어떤 고급한 논의도 아주 쉽게 전개하는 진술법이 있고, 매우 간단한 진리도 어렵게 꼬아가며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이 시가 취한 길은 고급한 은유적 패러다임을 매우 단순하지만 결코 아무나 넘볼 수 없는 미학적 두레박으로 사유의 샘물을 길어 올린다. 그렇지 않은가? 대개 사람들은 그저 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만인 행복을 위하여 달려간다. 모두가 추구하는 경쟁의 출발선에서 신발 끈을 졸라맨다. 하지만 이 시의 화자는 ‘해질성’으로 자기장을 형성하려 한다. 모두가 ‘그렇다’고 할 때, 자기만은 ‘아니다’고 외친다. 그게 바로 예술의 해질성이요, well being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은유적 패러다임은 작품 전체에 중첩한다. 여러 가지 상황과 이미지들을 구축하면서 인식의 구체성을 쌓아간다. 그러다가 마침내 작품의 마지막 7연에서 은유된 진술을 종합한다. 결구하는 셈이다. 앞에서 필자는 ‘고급한 인식의 패러다임’이라고 진술했다. 이 7연을 다시 설명한다는 것은 꿈을 깨뜨리는 일이다. 김영 시인이 매우 고급한 인식 세계를 이처럼 선명한 표현으로 구사함으로써 문학적 진실은 힘을 얻는다. 그러면서 시의 독자들에게 우리의 삶이 맞닥뜨린 절벽 앞에서 어떤 메아리를 들을 수 있는가를 짐작하게 하면서, 우리들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는 쾌감을 맛본다. 시를 읽는 보람이다.
비평적 조망자로서 한 가지 첨가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이 ‘어제’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기장을 형성하는 일이 얼마나 긴박하고 절절한 인격적 결단이었는가를 외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시적 화자가 자기장을 고집하는 배경이나 동기를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설사 이 시의 화자가 꾸는 꿈이 결국은 불가해하고 정복할 수 없다할지라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일임을 자각한 진술이 처연하다. 그때가 바로 “솜털이 곤두서는 오후 두 시”라 할지라도 꿈꾸는 자는 꿈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온몸이 솜털이 아니라 가시로 뒤덮인다할지라도 영혼을 불구로 만들고서 얻는 행복이 무슨 즐거움[의미]이겠는가!
이 작품에는 의외로 물리학적 개념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그 개념어들이 의외로 시적 이미지를 구축하고, 은유적 소통 능력을 배가시키곤 한다. 대표적인 것인 바로 ‘회절현상’이다. 회절현상回折現象은 파동이 장애물을 만날 때 직진하지 않고 휘어서 도달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물리학 용어다. 틈이 있는 장애물이 파동의 진행경로에 있을 때, 파장이 그 틈을 지나 주변으로 퍼지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들 삶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던가. ‘하면 된다’를 신념의 표상으로 여기는 부류들은 군홧발을 신었거나 신기루를 쫒는 마초이스트들이다. 이들은 안 되면 되게 하고, 장애물이 있으면 회피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탱크를 동원해서라도 부수고 나아간다. 그러나 ‘하면 안 된다’를 수용하는 사람들은 헐거운 짚신이나 남루로 에베레스트를 오르겠다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막히는 곳이 있으면 돌아가고, 막는 자가 있으면 회피하며 나아간다. 우리들 삶에 내재되어 있기 마련인 막연한 갈등이나 내면풍경이 물리학 용어를 통해서 거꾸로 은유되는 신선함을 맛보게 한다.
‘해질성’이나 ‘자기장’ 같은 과학적 개념어들도 회절현상으로 비켜갈 수밖에 없는 내면의 파동이 지향하는 현상을 은유하기에 매우 적절한 힘으로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학적 표현의 신선함은 전혀 생경한 것들을 동원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사처럼 풀어헤치는 데서 묘미가 있다. 시가 취할 수 있는 절묘한 작동법이기도 하다.
“시인은 꿈에서 깨면 바보가 된다.”(장 콕토) 이 진술의 뒤를 “지적知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라고 덧붙인 이 말은 미셸 투르니에가 그의 저서 『외면일기』에서 전한다. 시인이 꿈꾸는 언어[시적세계]는 그러므로 지적인 세계에서 논의 되는 시시비비나 흑백논리의 연장선이 아니다. 시인이 불가능을 꿈꾸는 언어는 한사코 지적인 경계를 가볍게 뛰어넘어 순전히 감정의 파노라마다. 혹여 김영 시인의 작품들에서 지적이고 지성적인 후각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고 짐작한다면 그건 잘못 짚은 넌센스다. 조석변이하고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감정을 도대체 어떻게 잡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에 대한 대답을 김영 시인에게서 찾는 일은 독서의 재미를 충족시키는 일이다.
김영 시인이 담아내는 시세계가 여기에서 멀지 않다. 물리학의 과학적 개념들을 빌려 쓴다 할지라도 그것은 순전히 감정의 파노라마를 형성해 내기 위한 고육지책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진술이 결과적으로 자기만의 개성적 세계, 행복한 삶의 과정을 밟아가는 가늠자임을 공감하게 하는 것이다.
관념과 실체의 가늠자
앞에서 김영 시인이 과학적 개념어들을 빌려 쓰는 시법을 지적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다음에 살펴보고자 하는 작품도 그런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동원된 제목이나 시어들에서 풍기는 인상일 뿐 그 속내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가 자선한 대표작 중의 하나인 다음 작품을 본다.
[1연]지평선을 유산으로 받았다면/ 매매할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 [2연]지평선 한 필을 뚝 끊어다가/ 장마당에 내다판다면/ 세기의 지평을 열겠다는 정치인들은/ 대를 이은 노동이 완성한 지평선의 값을/ 얼마나 놓을까?// [3연]건물을 높이 키우고 싶은 사람들은/ 쓸모없는 질경이나 길러내는/ 지평선을 얼마나 견디어 줄까// [4연]나는 이제 자라는 나이가 아니다/ 오늘도 산만큼 죽음을 길러냈다// [5연]말문에 빗장을 지른 저 지평선이/ 가슴 깊이 품어 키우는 문장을/ 또박또박 받아쓰는 필경사이고 싶다// [6연] 수많은 사유의 고랑을 헤매며/ 지평선의 푸른 입술을/ 단숨에 열어젖히는 시인이고 싶다 ([연] 표시 필자)
- 김영 「직류를 꿈꾸다」 전문
김영 시인의 시세계를 가늠하기에 좋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접하면서 다음 두 가지 장면이 필자를 사로잡았다.
하나는 오래 전에 전국체육대회가 전북에서 열렸다. 그런데 하키 경기던가 어떤 종목이 김제에서 치러진 적이 있다. 이때 강원대학에 재직하던 시우가 김제를 방문하는 김에 필자를 찾았다. 식사 자리에서 그가 하던 말이 지금까지 생생하다. “이형! 우리나라에 지평선이 보이는 땅이 있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김제를 보고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야~ 우리나라에 이렇게 드넓은 곳이 있다니!”하며 연신 감탄하던 장면이다. 하긴 첩첩산중 강원도에서 태어나서 강원도에서 자라나서 강원도에서 생활하는 사람에게 지평선이 보이는 김제평야는 놀라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또 하나는 몇 해 전 도올 선생의 강연에서다. 김제 지평선을 거론하며, “예전에는 김제 지평선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너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듯 감동스러웠지만, 지금은 무슨 쓸데없는 것들을 지어놓고 세워놔서 그 지평선이 가려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지평선이 보이는 땅이 사라졌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자연을 망가뜨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가 될 수 있다며 못내 아쉬워하였다.
두 가지 사례 모두 자연 경관으로서의 지평선-열린 공간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제시에서도 ‘지평선축제’를 통해서 지역자산을 관광자원화 하고, 소득 증대의 수단으로 승화시키려 애쓰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 모두 자연공간으로서의 지평선을 대상으로 자신의 인식의 범주를 펼쳐 보여주는 셈이다.
그러나 「직류를 꿈꾸다」에서는 조금 다른 세계가 그려진다. 지평선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나, 지평선을 소재로 삼겠다는 발상이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김제김영’에서 출발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위의 사례들과는 전혀 다른 매우 독특한 구체성의 세계를 그려낸다.
예술 작품이 그려내는 세계를 감상하거나 해석해 보려거나, 시업에 뛰어든 초보자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조언 중에서 가장 어려운 개념이 바로 ‘관념과 구체성’이다. 예술적 표현은 관념을 구체적인 진술[表現]로 바꾸어 놓는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하고 설득해도 결국은 기껏 습작해 낸 것은 자신의 생각의 범주에서 일렁거리는 관념의 외피를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관념적 존재다. 손으로 가꾸느라 아프고, 발로 밟아가느라 지친 것이 바로 구체성의 삶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를 ‘역사’라는 관념어로 바꾸어 놓고는 무슨 대단한 것을 발견한 양 희희낙락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안고 싶어 하는 감정의 일렁거림이 사람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감정의 작용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를 ‘사랑’이란 말로 관념화시켜 놓고는 무슨 고상함의 극치인 듯이 설레발을 친다. 호모사피엔스의 고유한 버릇이다.
그러나 예술은 이런 길을 한사코 외면한다. 관념의 허울을 벗고 구체적인 실체를 잡아내려 애쓴다. 왜냐하면 관념은 만인이 똑같은 사전적 의미를 갖게 하지만, 구체성을 띤 사건들은 만인이면 만 개의 체험적 진실과 닿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이 겪은 구체적인 역사의 기록을 통해서 나의 역사적 진실을 추체험하는 존재이지, 남의 역사를 답습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타인의 불타는 사랑을 읽으며 나의 말라버린 사랑에 마중물을 부어주는 존재이지, 남의 사랑을 부러워하며 한탄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예술-시정신은 바로 자신만의 역사와 사랑이야기를 구체화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이 작품이 그런 경지를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시의 열쇠가 되는 말은 ‘지평선’이다. 그런데 이 시어의 태생지는 물론 [김제평야]지평선이겠지만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관념적 개념을 구체화하거나 확장된 개념의 실체로 자주 등장시키는 ‘지평선地平線’이다. 이 말은 ‘지평을 열다’ ‘지평을 그리다’나 혹은 ‘지평에 걸리다’ ‘지평을 확장하다’처럼, 논의되는 대상이 넓게-멀리-열린 상태를 지향해 간다는 뜻을 구체화할 때 동원되는 표현들이다.
‘시인이 꿈에서 깨면 바보가 된다. 지적知的이 된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바보가 되어 지평선을 풀이하면 이렇다. 하늘이 땅과 만나는 것처럼 보이는 경계가 지평선이다. 하늘이 바다와 만나는 것처럼 보이는 경계를 수평선이라고 하지만 그 의미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관측자의 위치가 높을수록 눈에 보이는 지평선은 더 낮아지고 멀리 있게 된다고 한다.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것처럼~”이다. 실제로는 닿지 않았지만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지평선-수평선이다.
이를 굳이 바보가 되면서도 풀이한 것은 시인은 꿈꾸는 사람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 작품은 실재하지 않으나 실재하는 듯이 여겨지는 세상의 온갖 관념적 가치들에 대항하고 대립하는 원관념의 실체로 지평선을 세워둔다. 그런 배치가 ‘열림-자연-노동의 현장-건강한 생태’여야 할 지평선이 ‘부동산 투기-정치적 프로파간다-자본주의적 욕망’들과 대치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사고팔 수 없는 자연 유산을 자본적 매매수단으로 여기는 고루한 인식들, 정치인들이 선전 선동의 소재로 함부로 동원하는 수사들,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지평선을 지워가는 탐욕의 그늘들이 고유한 ‘지평선’을 허물고 있는 구도를 그려낸다.[나를 낳아준 부모 외에 또 다른 부모가 있다. 그게 바로 하늘과 땅이다. 그 하늘과 땅을 어떻게 사고 팔 수 있겠는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인디언 추장의 연설문] 1연과 2연과 3연이 그런 대치 상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대치는 필자가 앞에서 언급했던, 김제지평선에 대한 국외자들의 관람 소감과도 일치하면서 공감의 지평을 확장하는 듯하다.
이 작품은 전체 여섯 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1,2,3연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지평선과 이의 대립적 실체들을 병치하는 데 소용된다. 이 작품이 전환점을 맞는 것은 4연이다. “나는 이제 자라는 나이가 아니다/ 오늘도 산만큼 죽음을 길러냈다”에서 대회전을 맞이한다. 시적 화자가 살만큼 살고 보니[1,2,3연] 어느 사이 우리의 지평선[열림-자연-노동의 현장-건강한 생태]이 지워지고 있다는 탄식이요 뒤늦은 발견이다.
‘자라는 나이가 아니다’에는 성숙이나 젊음을 구가할 때가 아니라기보다, 이제는 뭔가를 쌓고 이루며 더하는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굳이 지천명知天命이라거나 이순耳順이라는 켜켜이 이끼 묻은 고전의 숲을 빌리지 않더라도 ‘알만큼은 알 수 있는 연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동시에 깨달음과 발견을 이제는 행동으로 구체화시켜야 할 꿈꾸는 자의 사명 같은 것을 인식할 때라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오늘도 산만큼 죽음을 길러낼’ 수 있는 것이다. 뭔가를 채우고 쌓으며 더하고 이루기보다는, 허물고 줄이며 덜고 비울 수 있을 때 제대로 죽을 수-well dying 있다. 비로소 이 작품의 화자는 제대로 잘 죽을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구두선口頭禪에 그친 발견이 아니다. 꿈꾸는 자의 영혼이 꿈틀거리는, 잘 사는 만큼 소중한 잘 죽는 길을 지평선에 걸어둔 셈이다.
그런 각성과 결단의 행동이 5연과 6연에 진술되었다. 시인은 꿈꾸는 자이다. 그 꿈을 깨면 바보가 된다고 했다.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 바보가 되는 역설을 감내한다. “말문에 빗장을 지른 지평선”이 키워낸 문장을 “또박또박 받아쓰는 필경사”가 되고 싶다는 꿈은 바보의 꿈이다. 자연이 머금고 있는 침묵의 언어나 받아쓰는 필경작업이 바로 김영 시인의 시세계에 걸쳐져 있는 지평선이 된다.
그러므로 그렇다. 김영 시의 출처나 원동력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자연이 머금고 있는 침묵의 소리를 또박또박 받아 적는 일일 뿐이다. 필경사의 작업일 뿐이다. 누가 있어 자연의 언어를 능가하는 진실을 피력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저 자연이 던져주거나 넌지시 보여주거나 침묵의 손짓을 제대로 받아 적기만 해도 훌륭한 필경작업일 수 있다. “지평선의 푸른 입술을/ 단숨에 열어젖히는” 시인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연[지평선]의 침묵을 견강부회牽强附會하기를 즐겨한다. 제 입맛에 맞게 재단하고 왜곡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바다처럼 일렁거려야 할 지평선에 뭔가 자꾸만 쌓고 짓고 세우면서 그 자연의 말문을 자꾸만 막아서고 있다. 허물고 지우고 비워야, 비로소 바로 서는 자연의 하소연을 들을 수 있다. ‘열린 지평’을 바로 볼 수 없는 사람은 ‘닫힌 지평’을 행복으로 아는 진짜 바보다.
역시 이 작품에도 과학 개념이 차용된다. ‘직류를 꿈꾸다’에서 ‘직류’는 전기 공학에서 쓰이는 개념이다. 우리가 시의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직류의 개념을 시시콜콜 알려고 해서는 안 되겠지만, 시가 함축하고 내밀한 시적정서에 닿기 위해서는 조금은 바보가 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지적이 되어야 할 필요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 작품이 그런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초·중등학생 정도의 과학상식만으로 해석해도 시적정서에 접선할 수 있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전자제품을 사용할 때 이 직류와 교류의 전기를 별 불편 없이 쓰듯이, 이 작품에 등장한 ‘직류’라는 시어도 그러리라고 짐작해서는 안이한 독서법이 될 법하다. 여러 세세한 전기공학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이것만은 시의 섬세한 정서에 닿기 위해 필요하다고 본다. 직류는 시간이 변함에 따라 전압이나 전류가 변하지 않고 일정하다[時不變]는 특징이 있는 반면, 교류는 시간이 변함에 따라 전압과 전류가 변한다[時變]는 특징이 있다. 그러니까 직류는 양극[+]과 음극[-]이 정해져 있지만, 교류는 양극[+]과 음극[-]이 서로 변경된다는 것이다.
이런 바보시인의 상식에 근거해서 보자면 이 시의 화자가 꿈꾸는 ‘직류’는 ‘지평선은 지평선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단순 대입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지평선이 빗장을 걸어두고 있는 문장을 필경하기 위해서, 지평선의 푸른 입술을 단숨에 열어젖히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의 정서가 시불변時不變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효용성의 개발 논리로, 투자 대비 손익 계산으로, 정치적 선전 선동의 노림수로, 그리고 무엇보다 자꾸만 자연을 허무는 일이 발전이요 성장이라는 헛된 구호와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런 세계를 지켜나가고 싶은 시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다. 직류를 꿈꾸는 시인의 영혼처럼 세상이-사람이 시간이 지나고 여일한 자연의 속성을 잃고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그것은 관념의 세계를 뛰어넘는 실체적 진실과 마주해야 가능하다. 자연과 인간이, 인간과 인간이 직류로 연결될 때만 가능한 꿈이다.
단 두 편의 작품을 보았는데도 김영의 시세계를 모두 본 듯한 충만감을 가진다. 그가 근래 보여주고 있는 시적 정서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최근작 한 편을 보기로 한다.
기억과 추억의 가늠자
김영의 시세계가 획기적으로 변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기는 지평선의 필경사를 꿈꾸는 시인, 직류를 꿈꾸는 시인의 전류가 쉽게 바뀔 수 없을 것이다. 최신작 다섯 편이 모두 일관된 시적 정서를 끌어안고 있다. 어느 작품을 봐도 그렇게 조망할 수 있겠다.
「하얀 변곡점」에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사물들에 사유의 단서를 붙여주는 진술이 신선하다. 「저녁이 만지작거리는 기억들」에서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산처럼 길러낸 이의 진중한 기억들이 추억의 고샅을 트래킹 하는 모습들로 비친다. 「동행」에는 역시 지평선과 직류 하려는 친자연적인 꿈의 세계를 실체화 했으며, 「팽팽한 귓등」에서는 상실과 결핍의 비극조차도 추억의 자락으로 펼쳐냄으로써 새로운 치유를 시도한다. 그리고 「내 몸을 환산하면」이다.
기억은 과거를 단순히 재생하는 것이지만, 추억은 그 기억에 정서의 옷을 입힌다. 기억이 기억에 머물고 말면 우리의 삶에 하등의 변곡점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기억에 추억의 옷을 입히거나 감성의 빗물을 흐르게 하면 우리의 삶을 진동시킬 수 있는 변곡점이 될 수 있다. 인간만이 과거를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이며, 그 기억이 현재를 제대로 풀어내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1연]비누 일곱 개/ -씻어 내고 복원하는 기억보다 더 무거운 거품/ -모든 구멍은 거품의 자생지 -거품 내는 일에 골몰하는 비누들// [2연]못 한 개/ -예각의 사명보다 예리한 사색에 충실한 신경/ -모든 오해를 처절하게 잡아 두려는 습관/ -멍청하거나 달관한 못대가리// [3연]연필심 이천 자루/ -그림자를 그리다가 스스로 전복되는 달빛/ -모든 허공을 채록하려는 야망으로 탕진하는 하루/ -끝내 부러지지 않겠다는 연필심// [4연]오남용되는 미소는 아직도 로딩 중 ([연] 표시 필자)
- 김영 「내 몸을 환산하면」 전문
과학개념을 과학지식으로만 받아들이면 경색된 수학의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과학적 개념마저도 꿈꾸기 위한 도구로 빌려와 시적 정서를 형상화하는 데 쓰인다면, 연화된 정서적 패러다임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이 그것을 그리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의 세계관으로 보나, 유기체적 특성으로 보나 생명의 탄생은 사대[四大-地水火風]의 결집일 뿐이요, 생명의 소멸은 사대의 흩어짐일 뿐이다.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을 그 원소들로 모아보면 이렇다는 것이다. 비누 일곱 개를 만들 수 있는 지방질, 못 한 개를 만들 만한 철분, 연필심 이천 자루를 만들 수 있는 흑연, 그리고 피돌기를 했던 수분이나, 숨쉬기를 가능하게 했던 공기는 뿔뿔이 흩어져 제 자리-왔던 자리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누구는 뇌의 무게를 계산한 이도 있다. 1250g에서 1400g 정도라거나, 남녀 간의 뇌의 무게가 다르다거나 호사가들의 입말이 무성하다. 그 중에서도 이 뇌의 무게를 영혼의 무게로 환산하기도 하고, 단명하기 전의 몸무게와 절명한 뒤의 몸무게를 비교해서 그 차이를 영혼의 무게라고 단언한 사례도 봤다. 어찌하든 숨이나 물이나 영혼은 붙잡아 둘 수 없으니, 실체적으로 쓰일 수 있는 물질은 여기에서 열거한 것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 몸은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의 물질가치로만 본다면 참으로 하찮기 그지없다. 겨우 이 정도의 물질이 내 몸을 이루고 있단 말인가! 새삼스럽게 환물가치로만 셈하자면 그리 귀할 것도 없는 것이 바로 내 몸이다. 그런 몸이 귀하게 되기 위해서는, 귀하게 쓰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물음은 두 가지 질문을 동시에 안고 있다. 하나는 나는 누구인가이며, 또 하나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반절은 나온 셈이다. 육체[물질]로서의 나는 겨우 이 정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저렴한 물질적 구성체인 나를 귀하다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 몸을 귀하게 쓰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의 대답이 바로 두 번째 질문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이 작품은 그것을 친절하게 그려낸다.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실체화해서 진술한다. 과학개념이 정서적 패러다임으로 전환시키는 대목이다. 그 진술들이 김영 시세계의 특성들을 잘 보여준다. 시적 정서가 어떻게 문학적 진실로 승화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를테면 [비누 일곱 개]의 내 몸으로 -기억을 복원하여 유한성과 유일성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깨달아야 하거늘, 오히려 ‘거품’내는 일에 몰두함으로써 그 비누마저 낭비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비누 일곱 개의 질량으로 비누 일곱 개만큼의 허물[오물]을 지우는데 충실해야 하거늘, 오히려 과대포장, 탐진치貪嗔痴 생식적 욕망의 거품 만들기에 몰두하는 몸의 허물을 경계한다.
겨우 [못 한 개]에 불과한 내 몸으로 -예리한 사색에 충실하거나 이해의 지평을 확장해야 마땅하거늘, 오히려 못의 [못된]성질 그대로인 몸의 허물을 지적한다. 그래서 이해하려 하기보다 오해하기를 일삼는, ‘멍청한 달관’의 못대가리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삐죽이 솟은 못대가리는 필연코 제 자리에 박히기 위한 망치를 불러올 뿐이다.
그래도 [연필심 이천 자루]를 만들 수 있는 내 몸으로 -그림자를 그리기도, 모든 허공을 채록하기도 하는 야망을 가지지만, 그것들이 비록 ‘전복’되고 하루를 ‘탕진’할지라도, 끝내 ‘부러지지’만 않는다면, 연필심은 창조적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물질적 용처의 쓰임이 바로 ‘미소’에 귀결된다. 비록 오·남용된다 할지라도 우리들의 미소는 끊임없이 로딩 되어야 한다. 물질이 사람다운 삶을 위한 쓰임에 충실할 때 세계는 보다 서정적 패러다임이 가능한 시의 세계-시인의 나라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 길은 내 몸이 자행하는 오류를 지워나갈 때 가능하다.
거품 내기보다 허물을 지우고 욕망을 제어하는 비움의 정신, 멍청한 달관보다 예리하고 충실한 사색, 결코 부러질 수 없는 기록[연필심]의 인문정신이 발휘되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시정신이 김영의 최근작들에 일관되게 형성되어 있음을 주목한다.
에필로그
김영 시인의 패러디와 비유가 매우 유효하다. 창조주께서 호박벌에게 ‘너는 날 수 없다’는 귀띔을 해주지 않은 것은 실수라는 것이다. 날개보다 더 크고 무거운 몸뚱이로 어떻게 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호박벌이 날 수 없다는 조물주의 언질을 미리 들었더라면…, 김영 시인뿐만 아니라 필자도 이렇게 시를 쓰네, 평설하네, 주제넘게 설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개가 있으니까 당연히 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성인지 수준이 저급하며, 신인이네 중진이네 원로네 하며 작품성보다 사람살이의 개념들이 앞서기도 한다. 이런 모든 차별적 인식들을 감안하더라도 김영 시인에게는 굳이 여류라며 따로 이름붙이기가 마땅치 않다. 그는 스스로 다져온 시정신의 질량과 시적 노작을 위한 탐구의 중량감이 그의 시세계에 충만함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호박벌[시인]이 날기 위해서는 몸[세속]의 무게를 비우고 지우고 덜어낸 자리에 날개[시정신]의 부력을 채우고 기르는 길 뿐임을 잘 안다. 그리고 시업을 통해서 일관되게 들꽃의 향기를 피우는 일에 전념하였음을 그의 작품들이 보여준다. 그의 이런 시정신은 「동행」을 통해서 드러난다. “어미를 따라다니던 새끼 기러기가/ 오늘은 혼자서 왔다// 새끼의 맨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농부가/ 나락 몇 포기를 그냥 둔다” 이런 농부가 바로 시인이다. 농심이 바로 시심이다. 그렇다면 농심이나 시심이나 욕망의 ‘비움’과 시정신의 ‘채움’이 ‘행복’과 같은 길에 놓여 있음을 아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그렇다. 행복은 따로 있지 않다. 몸은 영혼의 그릇이다. 육체의 궁핍함으로 행복한 대지를 경작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맘은 정신의 근원이다. 정신의 건조함으로 행복한 수원지에 이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에게 허용된 삶의 대지에 단비를 내리게 해야 한다. 그러자면 맑게 비운 자리마다 시심이 향기롭게 피어날 수 있도록 분발하는 일뿐이다. 호박벌이 비상할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