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청(宋明淸)대의 사상가 홍명청 ◯ 주돈이(周敦頤) 신유학은 초기 유학자들에게까지 소급될 수 있지만 실제로 그 새로운 기원을 열고 방향을 결정한 사람은 주돈이(1017-1073)였다.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라는 두 가지 짧은 논문에서 그는 이후 신유학의 형이상학과 윤리학에 대한 하나의 범형(範型)을 제시했다. 그가 도교 수련자들로부터 도표를 얻었는가 하는 것은 의심스러운 문제이지만 도가의 영향이 그에게 강하게 작용했던 것은 분명하다. 무극(無極)이라는 개념은 바로 노자(老子)에서 왔으나 그의 도표는 도가의 어떤 다른 사람의 도표와도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태극으로부터 음양을 거쳐 만물에 이르는 그의 구도는 도가보다는 주역(周易)의 체제를 따르고 있다. 실제로 그가 했던 것은 도가의 무(無)의 요소를 유가적 사고에 동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도가의 공상과 신비주의를 제거하였다. 주돈이는 태극도(太極圖)를 합리적인 철학을 위하여 사용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그는 중국철학을 보다 높은 수준의 풍토로 끌어 올렸다. 그가 주역에 근거를 두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이전의 많은 신유학자들이 고전에 대한 주석서를 써서 주역의 사상을 진전시켰지만, 그는 그것에 그의 전체 철학의 토대를 두었다. 그때부터 주역은 신유학에 있어 특히 중요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다양한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이고, 하나는 현실적으로는 다양하게 나뉘어진다."는 사고와 "단일한 것과 다양한 것은 각기 그 자체의 바른 존재 상태를 지닌다."는 관념을 발전시켜 신유가의 또 다른 근본적인 개념을 창조하고 정이(程頤)가 나타나기를 기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또한 리(理) 성(性) 명(命)을 함께 언급하였는데, 이것들은 결국 신유가의 세 가지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태극의 본성과 그것과 리(理)와의 관계 또는 그들과 성(性)과의 관계에 대하여 결코 설명하지 않았다. 이들의 관계를 분명히 한 것은 주희를 기다려야 했다. 성(性)의 사상은 물론 중용(中庸)으로부터 나왔다. 성을 정(靜)으로 묘사함으로써 그는 도가적인 영향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에게서 성이 곧바로 정(靜)은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본성의 토대이며 모든 행위의 원천이다. 그것은 참된 실체이며 오류가 없다. 그것은 순수하고 완전히 선하다. 그 개념은 너무 중요해서 그것은 그의 가르침에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또 성은 사단(四端)이 선과 악에 대하여 미묘하고 중요하며 활동적인 힘인 기(氣)를 탐색할 수 있는 상태라는 사고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주돈이의 생각에 실재에 있어 성은 고요하지만 그 작용은 역동적이다. 이런 사고에 따라 그는 외적인 것을 소홀히 하고 내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도가적 경향을 배재하였다. 그에게서 이상적인 상태는 성인이며 최고의 이상은 중용이다. 성인은 "일상사를 중용(中庸) 직(直) 인(仁)과 의(義)의 원리에 따라 해결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성인(聖人)이 내적인 삶과 외적인 삶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안과 밖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은 이 정자의 "경이직내(敬以直內), 의이방외(義以方外)"의 학설의 노선을 따르는 것이다. 주돈이는 지금 호남의 도주(道州) 태생이다. 그는 그가 좋아했던 염계(濂溪)를 따라 그의 학문 이름을 지었다. 후학들은 그를 염계 선생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를 존경하였다. 이정자(二程子)는 한 때 그의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불교에 열성가여서 정이는 그를 "보잘 것 없는 선(禪)의 추종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에 대한 불교의 영향은 무시할 정도였다. 사실 그는 이렇게 신유가철학의 과정에 토대를 놓았으나 불교도 도가도 근본적으로 유가적인 그의 특성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 소옹(邵雍) 그 형이상학에도 불구하고 신유가(新儒家)는 전체적으로 동질적이다. 그것은 인간으로부터 전체 자연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소옹(1011-1077)의 경우는 그 방향이 반대이다. 그에게 있어 물론 가장 중요하기는 하지만, 인간은 단지 많은 존재중의 하나일 따름이다. 소옹의 기본적인 개념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자연을 지배하는 궁극적인 원리가 있다는 것이고, 둘째 이들 원리들은 다수의 관점에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며, 셋째는 그들에 대한 최선의 지식은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인식하는 것으로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만물은 모두 그 속에 리(理)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있어서 그는 다른 신유가들과 다르지 않다. 그는 그의 황극경세서에서 이런 중요개념을 중점적으로 연구한다. 그는 대부분의 다른 신유가들과 같이 주역의 자연의 진화 즉 태극으로부터 음양을 거쳐 만물에 이르는 진화와 같은 패턴을 따르면서도, 그는 수(數)의 요소를 더한다. 그에 있어 자연의 작용 또는 변화는 신(神)에 근거하며, 신(神)은 수(數)를 낳고 수(數)는 상(象)을 낳으며, 상(象)은 구체적인 사물을 낳는다. 이런 전체 과정은 리(理)에 따라 이루어지며 법칙적이다. 수(數) 개념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노자 주역 오행학파, 서한 시대의 문헌, 그리고 양웅(揚雄:53 B.C.- A. D.18)에게서 보인다. 그러나 소옹은 그것에 그의 전 철학의 토대를 두고 수적 과정의 체계를 세운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분명히 태극이 음양의 조합으로 구성되는 사상을 낳는다고 설명하는 주역의 영향으로 4라는 수를 모든 현상을 분류하는 기초로 삼았다. 그래서 네 종류의 천체, 네 종류의 생물, 네 종류의 감각기관, 세계를 변화시키는 네 종류의 길, 네 종류의 지배자, 네 종류의 천명 등이 있다. 전 체계는 산뜻하고 체계적이면서도 또한 기계적이고 인위적이다. 주역의 괘의 수인 4에서 64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것은 분명히 하나에서 다수에 이르는 진화적인 발전을 지시한다. 게다가 그것은 본질적으로 음과 양의 현상에 침투한 작용과 고요함 속에서 표현되는 정신의 작용이기 때문에, 자연의 작용은 열고 닫는 것으로 생각되며, 변화의 역동적인 특성이 우세하다. 수적인 접근에 있어서 새로운 것은 사물은 유한하며, 수적인 계산에 의하여 그들은 예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역사에 적용하고 계산할 수 있는 시초와 예견할 수 있는 끝을 가진 사계절과 동등하게 생각한다. 이런 구조 속에서 사물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는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사물을 이해하는 것은 주관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에 내재한 원리에 따르는 것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그들의 감정에 중용 상태를 유지시킨다. 이런 사고방식에 있어 그는 다른 신유학자들과 유사하다. 중국철학사가들은 보통 북송오자로 주돈이, 소옹, 장재, 정호, 정이를 언급한다. 그러나 북송철학의 문헌에서 주희는 소옹을 포함시키지 않는다. 다른 중요한 문헌들은 그를 포함시키기는 하나 장재의 뒤에 두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신유가의 정통적인 계승 관계를 주돈이로부터 정이 형제를 거쳐 장재에 이르는 노선으로 고정하였기 때문이다. 소옹을 이렇게 소홀히 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주희와 다른 신유가들의 일방적인 생각에 기인한다. 모든 기록들은 소옹은 도가(道家)로부터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그를 중시하지 않는 보다 중요한 이유는 인(仁)이나 의(義)와 같은 유가의 중심적인 문제들을 토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소옹을 변호하여 그는 인간을 가장 중요한 존재로 여겼으며, 다른 신유가들과 같이 그에게도 성인(聖人)은 이상적인 인간이며, 성(性) 명(命) 그리고 리(理)는 다른 신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기본적인 문제하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신유가들과 달리 사회 도덕적인 문제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가 그와 동시대인들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어떤 추종자도 가지지 못하며, 그의 이론이 후기 신유가들에 의하여 옹호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장재(張載) 다른 신유학자처럼 장재(1020-1077)도 분명히 주역으로부터 그의 영감을 받았다. 태극으로부터 음양, 오행을 거쳐 만물에 이르는 전개과정을 설명하는 주돈이와 태극으로부터 음양의 두 기(氣) 그리고 또 다른 단계의 과정을 거쳐 만물에 이른다고 하는 소옹과 달리, 장재는 기(氣)를 태극 자체와 동일시하였다. 그는 발생적인 힘으로써의 음양과 오행을 배제하였다. 그에 있어 음양은 단순히 기의 두 측면이며 그 자체는 기본적으로 하나이다. 화합이 있기 이전에 실체로써 기는 태허(太虛)이다. 동(動)과 정(靜) 통합과 분리 등과 같은 작용으로써 기는 태화(太和)이다. 그러나 태허와 태화는 도(道)나 일(一)과 같다. 수축하고 팽창하는 것으로써 기의 두 가지 측면은 귀신이다. 여기서 장재는 죽은 사람이나 사물에 관한 전통적인 귀신 이론을 완전히 합리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이론으로 대체하며, 후대의 신유학자들이 결코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론을 확립한다. 또한 존재는 영원히 통합과 분리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는 불교의 공(空)과 도가의 무(無)를 강력하게 공격한다. 이런 통합과 분리의 과정 속에는 자연에 관한 일정한 기본적인 법칙이 따라온다. 현상으로의 전개는 분명한 원리에 따르며 일정한 질서를 가져 어떤 것도 고립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각각 다른 것과 구별된다. 본질적인 세계는 하나이지만 그 현상은 다양하다. 이것은 장재에게 기본적인 생각이며 그와 동시대인과 후대 신유학자둘에게 굉장한 영향을 끼친 사고이다. 삶의 원리에 적용될 때 이런 생각은 서명(西銘)에 있어 우주의 부모로서 천지와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의 개념이 된다. 이것은 신유학의 문헌자료 중에 가장 유명한 글 중의 하나이다. 각각의 인간관계는 각각의 특수한 도덕적인 요구가 있으나 사랑은 그들 모두를 포괄한다. 결국 사랑을 지닌 인간은 모든 사람에게 애정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천지와 동일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장재의 또 다른 기본적인 생각을 살펴볼 수 있다. 그가 유가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않았을 때 방향을 돌려 불교와 도가를 몇 년 동안 연구하였으나 결국에는 유가 경전 특히 주역과 중용으로 돌아와서 그 자신의 철학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그가 수도에서 주역을 강의할 때 학생들 중에는 저명한 신유가이며 학자인 사마광과 그의 두 조카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도 있었다. 그는 정치적인 견해에서 이상하게도 왕안석을 지지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정전제를 포함하는 고대 유가의 경제제도를 회복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부의 한직에서 물러나 그의 집에서 가르치면서 실제로는 다른 학자들이 그와 결합하여 정전제를 실천하게 하려고 하였다. ◯정호(程顥) 정이(程頤) 정호(程顥:1032-1085)와 정이(程頤:1033-1107)는 한 살 차이의 형제로 북송대 신유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는데, 이 둘을 보통 이정(二程)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장재(張載: 1020-1077)의 조카였으며, 당시 북송 사상계의 대표적 인물들인 주돈이(周敦 : 1017-1013)와 소옹(邵雍: 1011-1077) 등과도 가깝게 지냈다. 따라서 이들 다섯 사람들을 함께 북송오자(北宋五子)라고 부르고 북송대 신유학 형성에 기여한 대표적 인물들로 간주하고 있다. 정호와 정이는 서로 형제이지만 기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유방식에 관해서도 서로가 독자적인 특색을 보이고 있어서, 이들의 사상 속에는 공통점과 동시에 현격한 차이점도 존재한다. 이들은 리(理)라는 새로운 철학적 범주개념을 확립하여, 두 사람 다 이를 토대로 고대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전개하였는데, 동생 정이가 송대 신유학에 이성주의적(理性主義적) 사유를 현창시켰다면, 정호는 관념론적 사유를 발전시켰다. 리(理)라는 개념은 고대 중국사상과 위진(魏晉) 시대 신도가(新道家), 중국불교 등에서도 이미 쓰이고 있다. 그러나 리(理)를 토대로 철학사상을 구축한 것은 이정 형제가 처음이다. 이들의 성찰에 의하면, 리(理)는 인간과 자연세계가 성립하는 보편적 법칙이자 동시에 인간이 사회적으로 실현해야 할 준칙이다. 자연세계의 생성과 소멸과정도 반드시 리(理)에 따르며, 인간사회의 운영원리도 반드시 리(理)에 의거한다. 자연과 인간의 근거자로서 리(理)는 현상세계에서 다양성으로 표현되지만 이들 다양성은 언제나 동일한 통일성을 갖는다. 모든 개체들은 이 리(理)를 구비하고 있으며, 이 리(理)의 측면에서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은 연대를 이룰 수 있다. 말하자면 리(理)는 자연법칙이자 도덕법칙이며, 일반원리이자 개별적인 법칙과 규범이기도 하다. 이정은 또한 이러한 리(理) 관념을 인간이 투철하게 인식하고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수양론(修養論)을 제기하면서, 경(敬)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시켰다. 경은 내면적인 사유과정 속에서나 바깥으로 나타나는 행위과정 속에서 언제나 유학의 근본이념, 즉 천리(天理)를 지향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정은 인간의 정신적 태도에서 경(敬)의 상태가 항상 기저에 살아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학에 대하여 이정이 제기한 이러한 관점은 북송 초기 신유학의 우주론적 경향을 전환시켜, 유가사상이 성찰해낸 인간의 참다운 본성을 실현해내는 방법과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일에 집중적으로 사유하도록 이끌었다. 이로써 성리학(性理學)이라는 중국사상사의 한 장르가 성립되고 이후 동아시아 역사의 전개과정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정의 지적 편력과정을 보면, 이들도 젊어서는 불교와 도가사상에 심취하였던 적이 있었으며, 당시 지식인들의 관례대로 과거시험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주돈이 등을 통하여 진정한 진리로써 도(道)에 관심을 두게 되고 육경(六經)에 대한 독서를 통해 유학사상에 대한 성찰들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정이 자주 언급하는 천리(天理)의 개념은 이들 자신이 스스로 확립한 개념이라고 말하고 있다. 철학사적으로는 이정의 사상과 주돈이 등의 연관관계가 문제되어 왔다. 이정의 사상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집대성시킨 주희(朱熹: 1130-1200)는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등을 통해서 상호 연관시켜 성리학의 발전을 체계화하고 있지만, 전조망(全祖望: 1705-1755)을 비롯한 많은 후대 학자들은 이정이 당시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를 비롯하여 도가적 색채를 지닌 주장들을 비판하고 수용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정 사이의 차이점에 대하여 말해보면, 먼저 정이가 리일분수(理一分殊) 등의 개념으로 리(理)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강조한다면, 정호는 자발적인 생명력의 원천으로써 리(理)의 개념을 강조한다. 정호는 자연적인 생명력이 자연과 인간 모든 곳에 편만하게 스며있음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체험적 성찰을 통해서 타자와 일체가 되는 의식을 내면에 확충하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우고 있다. 따라서 정호는 수양론에서도 기질에 의한 장애를 변화시키기 위한 규범적 훈련보다 만물과 일체를 이루는 원천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본성을 자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학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둘러싸고 천리(天理)에 대한 객관적인 탐구와 규범적 훈련보다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본성에 대한 자각을 더 중시하는 경향은 육구연(陸九淵: 1139-1193)과 왕수인(王守仁: 1472-1529)에게서 다시 주장된다. 한편 정호는 장재와 주고받은 서신 속에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에 관해 토론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정호는 정서와 욕구를 금욕주의적으로 억제하는 방법을 가지고서는 마음의 참된 안정에 이를 수 없다고 비판하고 천리(天理)에 따라 정서를 자연스럽게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이는 리일분수(理一分殊)라는 명제를 통해 천리의 동일성과 다양성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천리의 객관성과 공(公)으로서의 특징을 강조한다. 그는 천리를 사욕(私欲)과 대립시켜서 천리를 보존하는 공부뿐만 아니라 사욕을 제거하는 공부를 동시에 강조한다. 따라서 그의 수양론은 객관적 법칙이자 도덕적 준칙으로써 가지는 천리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는 궁리(窮理) 공부와 함께 사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공부를 병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이의 이러한 관점은 주희에 이르러 더욱 체계화되고 있다. 정이는 또한 주역에 대한 주석으로써 역전(易傳)을 남기고 있다. 그는 주역에 대한 상수학적 이해를 지양하고 유학의 이념과 결부시켜 해석함으로써 주역이 유학자들의 수양론에 한 기반이 되게 하였는데, 이는 역학사적으로 보면 주역에 대한 의리(義理)적 해석의 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 ◯육구연(陸九淵) 우리는 이정(二程) 형제에서 그들이 단일하고 근본적인 것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육구연(1139-1193)에게 있어 이런 것들은 바로 그의 개성뿐만 아니라 그의 철학과 방법론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인간으로서 그는 단순한 삶을 살았으며 그 대부분을 도덕적인 원리를 강의하는데 할애하였다. 많은 학자들이 모여서 그의 간결하고 명쾌한 강의를 들었는데 항상 근본적인 것으로 방향을 돌렸다. 1183년 의(義)와 리(利)에 관한 그의 강의에서 그는 청중들이 감동하게 하였다. 방법론에 있어서 그는 세세한 것들과 피상적인 글을 거부하고 가장 본질적인 것에 집중할 것을 주장하였다. 도덕적인 수양과 지적인 탐구에 있어서 그는 단적으로 심(心)에 의존하였다. 그는 심(心)을 도덕적으로 자족적인 것으로 여기며, 선에 대한 본래적인 지식과 선하게 되는 본래적인 능력을 부여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로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전 세계를 가득 채우며 자체로 그것은 리(理)와 동일하다. 사물을 탐구하는 것은 심을 탐구하는 이외의 것이 아니다. 이 이론은 어떤 학적인 구체화나 논리적인 고려 없이 전개되었으나, 이후 수 백 년간에 걸쳐 정주학의 합리주의를 반대하는 강력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그가 모든 점에서 주희에 반대했다는 점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주희에게 있어 리(理)와 기(氣)는 아주 다르다. 반면 육구연에 있어서는 도(道)밖에 어떤 사물도 없고 사물 밖에 어떤 도(道)도 없다. 주희는 인성을 매우 심도 있게 다루나, 육구연은 그 문제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주희에 있어 심은 성(性)의 작용이고 성은 리와 같다. 그러나 육구연에 있어서는 심은 리이다. 두 철학자가 모두 심은 하나라고 주장하지만 주희는 인심과 도심을 구분한다. 그러나 육구연은 이런 구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심은 하나로 동일하며 그것은 각 개인에게 있어서나 모든 세계에 있어서나 같다. 주희는 형이상자를 태극이라고 생각하고 형이하자를 음양이라고 여긴다. 육구연은 음양은 이미 물징적인 실체의 영역을 초월해 있다고 선언하면서 이러한 이분법을 부정했다. 두 철학자는 인성은 본래 선하다는 데는 동의하는 반면, 주희는 천리(天理)를 인욕과 대비시켰다. 육구연은 이러한 대비를 지지하지 않았다. 주희에 있어 사물을 탐구하는 것은 사물에 내재한 리를 탐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육구연에 있어서는 모든 리는 마음속에 내재해 완전하게 있기 때문에 탐구는 심을 탐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철학적인 차이는 그들이 양립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롭다. 육구연의 견해로 볼 때 주희의 방식은 목적 없이 유동하는 하나의 나누어진 마음이며, 삶에 별다른 의미가 없는 고립된 조각에 전념하는 것이다. 반면 그는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인성의 보다 숭고한 부분을 확립하면서, 근본적인 것에 눈을 돌림으로써 사람의 본래적인 선을 재발견하는 간명하고 쉬우며 직접적인 방식을 옹호한다. 요컨대 주희의 방식은 도문학(道問學)의 방식이고, 육구연의 방식은 존덕성(尊德性)의 방식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호와 정이가 강조점하는 것의 대립적인 측면을 심화시켰으며 합리적인 리학파와 이상주의적인 심학파라는 신유학의 두 날개를 형성하였다. 결국 육구연의 영향이 주희의 그것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육구연의 이상주의는 명대 합리주의적인 운동을 가리우는 왕양명의 철학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주희(朱憙) 주희(朱熹: 1130-1200)는 송대 신유학의 집대성자이다. 남송이후 중국사상사에서 주희의 사상이 끼친 영향은 공자가 사후에 중국사상사에 미쳤던 영향과 비견될 수 있다. 주희 역시 젊은 시절에 불교와 도가 사상에도 관심을 갖고 접한 적이 있었지만, 자신의 사상적 기반을 이들에 두지는 않았다. 그는 사량좌(謝良佐: 1050-1103)의 저술을 통해 이미 이정의 사상에 접하고 있었으며, 24세 때 이동(李侗:1093-1163)을 통해 이정의 사상을 전하는 한 입장을 만난 이후로 몇 번의 철학적 성찰을 거쳐 유학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심화시켜 갔다. 40세 무렵 심성론에 대한 기본체계를 확립하고, 이후 육구연(陸九淵) 진량(陳亮: 1143-1194) 등등 당시의 학자들과 논변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더욱 정치하게 주장하는 한편, 경전에 대한 주석에도 힘을 기울여 사서(四書)에 대한 자신의 독창적 재해석을 제기하였다. 주희의 사서에 대한 해석은 이후 사서(四書)가 동아시아 유학의 핵심저술이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서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주희의 관점이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특히 주희는 대학의 내용을 재편하고 일부는 자신의 해설을 새로 부가하여 유학의 이념을 보다 선명히 드러내려고 하였는데, 왕수인에 의해 비판을 받는 등 이후 유학자들의 사상적 쟁점이 되곤 하였다. 사서에 대한 주석 이외에도 주희는 시경에 대한 주석서인 시집전(詩集傳) 의례(儀禮)와 예기(禮記)를 상호 연계시켜 주석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상수역과 정이의 의리역을 절충하여 주역을 해석한 역본의(易本義) 등이 있다. 주희는 형이상학 체계에서 리(理)와 기(氣)의 관계를 다양하게 설명하였는데, 만년에는 리(理)가 기(氣)에 대하여 주재자로서 논리적으로 선재한다는 논점을 견지하였다. 한편 심성론에서는 이정뿐만 아니라 장재(張載)의 '마음이 성과 정을 통섭한다(心統性情)'는 논점을 수용하여 수양론에서 마음(心)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형이상학체계의 기본축인 리기(理氣)가 심성론의 핵심개념인 성(性)과 정(情)으로 어떻게 연계되는지에 관해 명료하게 밝히지 않았는데, 존재론과 심성론 사이의 연계문제는 조선 학자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토론되었다. ]주희는 수양론에서 정이의 공부방법을 기본 골격을 삼았다. 따라서 그는 인간 속에 주어져 있는 천리로서의 본성을 자각하고 함양하는 일 뿐만 아니라, 학습을 통해서 천리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하고 기질의 혼탁으로 일상의 행위들에서 빚어지는 사욕의 폐단들을 제거하기 위한 공부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희의 논점은 육구연과 왕수인에 의해 인간의 도덕적 자발성을 약화시켰다고 비판받는다. 주희는 일생동안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면서, 한편으로 유가의 이념을 자신의 생활 속에서 꾸준히 실천하였는데, 유학이념에 따른 생활양식을 가례(家禮)로 간추려 남기고 있다. 이 저서에 대하여 후세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주희 자신의 저술인지 여부에 대하여 논란이 많았지만, 유가 지식인들의 생활 규범으로써 이 책의 영향은 매우 컸다. 조선에서는 가례(家禮)를 비롯한 주희의 예론을 더욱 유학 이념에 맞도록 완비시키는데 역점을 두었다. 주희가 관직에 재직한 것은 지방관으로 9년, 조정에서 46일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는 시종일관 군주가 유가적 이념에 따라 정치를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군주 자신이 '천리를 보존하고 사욕을 없애는(存天理, 滅人欲)' 노력을 부단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당시 왕의 측근세력들이 권력을 사적으로 독점하고 외세의 침탈에 대하여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것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그는 당시의 시대적 급선무를 금(金)에 의해 침탈당한 중원을 회복하는 일에 두었는데, 초기에는 금에 대한 물리적 토벌을 강하게 주장하다가 후기에는 내정의 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한 다음 금을 토벌해야 한다는 관점을 유지하였다. 외세의 침탈에 대한 주희의 논점은 17세기 조선 사회가 청의 침탈을 당했을 때 조선학자들에 의해 청에 대응하는 논리로 다시 이용되었다. 주희는 철학적 사유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개혁가로서의 면모도 보이고 있다. 그는 자방관으로서 근무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조건을 개선시키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국가가 빈민들을 직접 구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유가 지식인들 스스로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몸소 자신의 친척과 친구들을 동원하여 사창(社倉)을 세우고 빈민들에게 곡물을 저렴한 이자로 대여해주어 농사를 계속 지을 수 있게 하는 社倉제도를 실행하였다. 후대에도 유가 지식인들에 의해 이 사창제도가 실행되곤 하였는데, 한편으로 향촌의 지주들이 백성들을 자신들에게 예속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나흠순(羅欽順) 송대의 리(理) 위주의 이론과 명대 왕수인의 심학의 풍토에 대해 나흠순은 자신의 독특한 기론(氣論)으로 새로운 노선을 확립하였다. 그는 천지고금을 관통하여 모든 것이 하나의 기(氣)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에게 있어 기는 우주만물의 근본이므로 기에 우선적인 근원성을 두는 반면, 리는 기가 운동하고 변화하는 일정한 조건이나 질서로 인식한다. 따라서 그에게서 리는 기와는 독립되고 초월적인 다른 실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기에 의존하여 이루어지고 기에 붙어서 행해진다. 이러한 관점의 당연한 귀결로서 그는 주희의 리와 기는 두 가지 물(物)이라는 것과 왕수인의 천지 만물이 모두 내 마음의 변화라고 하는 이론을 반대한다. 그러나 그는 정자와 주희의 리일분수설(理一分殊說)을 수용하면서 사람은 사물과 같으며 나는 타인과 같아서 그 이치에 두 가지가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나흠순은 리와 욕(欲)을 논의하면서 사람에게 존재하는 욕(欲)은 천(天)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여 인욕의 존재에는 필연성이 있음을 주장하면서, 송유들이 인욕을 악으로 여기는 금욕주의를 비판한다. 그는 또 앙수인의 양지(良知)가 곧 천리(天理)라는 설을 부정하면서 지금 양지을 천리로 생각하는 것은 천지만물에 모두 이 양지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산하대지와 초목금석에 양지(良知)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주장한다. 학문방법론에 있어서 그는 선학의 돈오적인 방법을 부정하면서 학문하는 일을 유가의 전통적인 학문방법으로써의 단계적인 학문사변독행의 방법을 견지한다. 나흠순은 정치적으로는 백성들의 고통을 근심하면서 당시의 폐단을 개선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도덕적인 풍토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그는 왕수인과 동시대 사람으로서 그의 주요 철학 저작에는 곤지기가 있다. 이 밖에 그의 저작은 정암존고(整庵存稿) 20권이 있으며, 그의 사적은 명사(明史)권282의 유림전(儒林傳)과 명유학안(明儒學案)권47에 상세히 보인다. ◯왕수인(王守仁) 왕수인(王守仁, 字는 伯安, 號는 陽明, 1472 1529)의 활기찬 유심론은 그의 생존 시기와 그의 사후 약 백오십여년간 줄곧 중국인의 사유방식을 지배했다. 공자와 맹자 그리고 주희 등이 중국사상사에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왕수인도 그들 못지 않게 두드러진 영향을 미쳤다. 왕수인이 강렬한 영향력을 지닌 것은 그의 철학이 생기와 활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주희 철학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왕수인 자신의 생활과 시대 상황의 어려움에 기인하여 왕수인의 철학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고 볼 수가 있다. 1313년 이후 주희의 유학에 대한 해석은 정통의 지위를 차지하고 아울러 과거시험의 기초답안 역할을 했다. 주희의 근본원리에 대한 이성적 탐구와 실제적인 연구 정신은 왕수인이 살던 시대에는 이미 타락하고 왕수인이 말하듯이 지리파쇄(支離破碎)한 상태에 있었다. 더욱이 과거시험은 더 이상 인민(人民)을 위하고 정치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방편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겨우 개인의 출세를 위한 도구로 기능할 뿐이었다. 왕수인의 의견에 의하면 이러한 폐단은 정이(程頤 1033 1107)와 주희의 객관사물에 대한 탐구와 처리 방법(格物)에 근본적으로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정호와 주희는 풀 한포기와 나무 한그루에도 보편적 원리가 독립자존 한다고 한다. 이들은 모든 사물에 내재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를 찾아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을 충실히 따르게 되면 인간의 의식과 객관세계를 기계적으로 이분화 하는 것이 타성으로 굳어지게 된다. 왕수인은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원리는 주관의 심성 속에서 비로소 형성되기 시작한다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고 한다. 왕수인은 보편적 원리는 마음에 있으며 객관세계에 마음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부모에 대한 효의 원리는 부모 몸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마음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왕수인에 있어서 마음(心)은 주로 의지를 의미한다. 왕수인은 마음이 무엇을 실현하고자 결단하기 전에는 보편적 원리와 사물은 없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에의 결단 주체가 마음인데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의지에 해당한다. 의지가 지닌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여 왕수인은 성실한 의지(의지의 성실성=의지를 성실하게 하는 공부)가 객관세계와의 교섭 이전에 확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희와 왕수인의 근본적인 차이는 지식에 대한 관점이다. 주희는 일상적 경험의 축적에 의해서 보편적 원리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에 비해서 왕수인은 마음의 성실성와 성실한 의지의 결단에 의해서 바로 즉각적으로 보편적 원리에 대한 자각과 실현이 가능하다고 한다. 왕수인에 있어서의 지식은 객관사물에 대한 정보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객관세계를 질서지우는 가장 강력한 힘이자 원리로 된다. 왕수인에 있어서 객관세계는 나의 마음과 나의 의지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객관세계를 바로 잡는 것은 바로 나의 마음가짐을 바로하고 나의 의지를 성실히 하는 것으로 된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부정한 측면을 교정함으로써 본체의 바른 상태를 완전히 회복한다(去其心之不正, 以全其本體之正)이고 또한 선을 실현하고 악을 제거(爲善去惡)함으로써 세계와 하나가 되는 것(格物)이다. 왕수인에 있어서는 그의 제자인 왕기(王畿)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사물에 나아간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하나가 되는 과정 즉 내외합일의 방법(合內外之道)이다. 왕수인에 있어서 심(心)은 객관세계와 대립하고 있는 주체라는 의미로 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심은 언제나 자기반성적인 상태에 있으며 자신의 모든 활동 과정을 이해하고 장악하고 있다. 심의 이러한 능력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나면서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해서 양지라 한다. 양지는 마음의 본체이고 보편적 원리이다. 양지는 마음에 상주하면서 자신을 조명하는 빛이다. 심의 본체인 양지가 자신과 동시에 세계를 조명하는 능력에 의해서 나와 세계의 진면목이 가감 없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양지는 변화하는 세계의 핵심이다. 세계의 핵심인 양지에 의해서 자연과 사회의 모든 변화가 이루어지게 된다.(良知是造化之精靈, 這些精靈, 生天生地) 양지가 세계를 형성하는 능력은 모든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으로써 이미 주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양지를 극대화 하는 것(致良知)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연에 의해서 세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세계와 하나가 되는 것은 세계의 보편적 원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양지를 극대화함으로써 객관세계에 나아가며(致吾心良知於事事物物) 그 결과로서 객관세계는 다양성 속에서 균형과 질서를 회복(事事物物皆得其理)하게 된다. 왕수인의 이러한 사상은 바로 자신의 본체이자 자신의 자연을 아무런 매개 없이 순간적인 자각과 결단에 의해서 확충한다는 이념으로 정식화 된다. 이것이 본체에 대한 자각의 순간에 바로 본체가 주체로서 현성하게 된다(卽本體卽工夫)는 것으로 추상화 된다. 그리고 공부의 출발점과 중심은 언제나 자연으로서 타고난 양지라는 점에서 모든 공부는 자신의 자연(본체=양지)에 근거해야 된다(卽本體以爲功夫)라는 명제가 생겨난다. ◯황종희(黃宗羲) 기(氣)를 우주의 근본으로 파악하고 리(理)보다 우선하는 나흠순의 철학적인 관점은 명청 교체기에 황종희(1610-1695)에 와서 보다 적극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황종희는 사학분야에 있어 명유학안(明儒學案)을 저술하여 절동사학(浙東史學) 연구의 기풍을 열었다. 철학에 있어서 그는 리를 기의 조리로 파악하는 만큼 리가 기에 앞서 존재한다는 송유들의 주장을 반대하고 우주만물은 모두 물질적인 기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또 기질에 근거한 인심은 나누어지지 않고 온전하게 유행하는 본체로서 공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하며 천지에 가득 차 있는 것이 심(心)이라는 관점을 견지한다. 특히 그는 공(公)과 사(私)를 논의하면서 자사(自私) 자리(自利)의 인간의 일상적인 모습으로 인정한다. 나아가 그는 사람은 수천 배 힘쓰고 노력하여 사회에 대하여 의무를 다해야 하며 사회도 그에게 이익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한 인륜이라는 것은 매일 행하는 평상적인 일로서 모든 인륜관계는 상호적이며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군신간의 관계에 있어 황종희는 신하와 군주는 명칭이 다를 뿐 실제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종류의 도덕적 관점은 삼강을 핵심으로 하는 봉건도덕에 강한 충격을 주는 것이며, 오륜 평등의 색채를 띤다. 유학의 방법에 있어서 그는 당시 실사구시의 학풍의 영향을 반영하여 널리 배우고 실제적인 것을 숭상하는 기풍을 가지며, 스스로 얻고 창조하는 정신을 제창하여 일정한 설을 고수하는 것을 반대한다. 정치적으로 그는 토지와 조세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고, 공업과 상업이 모두 근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황종희의 저술은 매우 많은데 중요한 것으로는 명유학안 송유학안(宋元學案) 맹자사설(孟子師說)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등이 있다. ◯왕부지(王夫之) 왕부지의 철학적 중요성은 그의 사후 2백년이 지난 뒤 인식되었다. 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642년에 과거에 합격해 관직을 제수 받았다. 이때는 이미 만주족이 중국을 침략하고 있었다. 1648년 만주족이 그의 고향인 호남성을 공격해 왔을 때 그는 의병을 일으켜 명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이 싸움에서 패한 후 그는 33세의 나이에 산으로 은거해 들어갔고 그 후 40여 년 동안 저작에 몰두했다. 그는 고금의 서적을 섭렵했고 유가 불가 도가를 망라했다. 그러나 그는 최근에까지 잊혀져 있었고 66권에 이르는 그의 남아있던 저작은 19세기 중엽에 와서야 출판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의 대담한 정치사상과 비교조적 역사 해석에만 관심이 모아졌다. 그의 독특한 철학이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것은 그의 철학이 기론(氣論)이기 때문에 공산화된 중국에서 그가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철학자로 칭송되어지면서부터이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이해되는 것보다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송대의 이성적 신유학과 명대의 관념적 신유학 양자를 모두 공격하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독창적인 사상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향후 200년의 중국 사상을 촉발시켰다. 그래서 그가 중국 근대철학을 개시했다고 말해지기도 한다. 그는 송대와 명대 유학의 중심 주제인 리(理)는 보편적 초월자이며 기(氣)에 선재한다는 주장을 공격하고 리는 기에 부속되어 있고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사물의 질서임을 주장한다. 리는 심(心), 성(性)과 더불어 기속에 내재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철학은 본질상 장재의 철학과 유사하다. 그래서 왕부지는 장재의 후계자로 이해된다. 그가 추구했던 문제는 단지 기만이 아니라 기의 구체성이다. 왕부지에게는 장재의 태허(太虛)는 추상적 실체가 아니라 구체적 실체이다. 도가의 무(無)는 너무 추상적이어서 그는 맹렬히 이를 공격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가장 중요한 주장은 세계는 구체적 사물(器)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기(器)는 기(氣)와는 구별된다. 기(氣)는 사물을 만드는 일반적 질료이고 기(器)는 개별적이고 형태를 지닌 구체적 대상이다. 구체적 대상은 단순한 질료가 아니다. 그 속에는 질서와 한정된 리(理)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도(道) 또는 리(理)와 기(器)는 실체의 다른 측면이다. 구체적인 사물이 있으면 그 속에는 항상 리가 있다. 그러나 구체적 사물로부터 유리된 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리에 부차적 지위를 부여 했고 송명 신유학의 주요한 개념인 리와 인욕(人欲)의 관계를, 비록 인욕이 바르게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인욕을 리에 종속시키는 것을 반대한다. 리가 어떻게 바르게 될 수 있느냐에 대해 그는 구체적인 사물은 그 속에 바르고자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는 그는 송명 신유학의 전통을 유지시키면서 발전시키고 있다. 그의 사물은 나날이 새로워진다 는 말에서 이러한 점을 볼 수 있다. 이전의 신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우주를 쉼 없는 생성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 과정 속에서 기(氣)의 음양(陰陽)은 끊임없이 섞이고 혼합되어 기(氣)와 리(理)는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 철학을 정치와 역사에 적용하여 비교조적이고 대담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리가 구체적 사물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송명 신유학자들이 적용했던 역사와 사회의 모델로서의 천리(天理)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현재의 구체적 사물은 과거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과거는 현재의 전형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봉건제를 반대한다. 그는 또한 이후에 좀더 시민화 된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진보와 진화의 개념은 명백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구체적 사물이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연계되어 있고 점차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들 속에 내재한 구체적 리를 따른다고 생각했다. 내재하는 경향성 때문에 경향성을 따르는 것이 현명하다. 이러한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혁신적인 철학이지만 보수적 성향을 찾을 수 있다. 왕부지는 분명 신유학과는 구별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는 연속적인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다. 그는 왕양명과는 반대되지만 그래도 주희에 접근해 있다. 그는 리와 기(氣)를 일치 시킨 최초의 사람도 유일한 사람도 아니다. 유종주(1578 -1645)와 왕부지와 동시대 사람인 황종희(1610-1695)도 동일한 사고를 피력했다. 그러나 누구도 이 개념에 기초해 전체적인 철학 체계를 구성하지는 못했다. 그의 리를 반대하고 구체적 사물을 옹호하고 천리에 반대해 인욕을 옹호하는 사상은 안원(1635 - 1704)과 대진(1723 -1777)의 출현을 기대하게 했고 멀리 담사동(1865 - 1898)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대진(戴震) 18세기 중국에서는 아직 주희의 이성적 신유학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시대적 조류는 그에 대항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연무와 염약거에 의해 시작된 객관적 진리를 찾고 추상적 사유를 회피하는 운동은 이 시기에 강력하게 대두하고 있었다. 학자들은 증거가 없는 것은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들의 지적 관심은 구체적 사실을 통한 진리의 획득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사조는 '명백한 증거에 기반한 연구(實事求是)'라 불려졌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여전히 유교 경전이었지만 언어학, 역사학, 천문학, 수학, 지리학, 고증학 같은 구체적 문제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들은 이성적 신유학이라는 성과를 남긴 송대의 추상적 학문에 반대하여 명확한 자료를 얻기 위해 한대의 초기 경학 연구로 관심을 돌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학문 운동은 역시 한학으로 알려졌다. 이 운동의 특징은 철학적으로는 주희에 반대하는 것이었고, 방법론적으로는 객관적, 귀납적 비판적이었다. 이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 대진이다. 사실 대진은 실사구시의 대표자로 보다는 철학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관찰과 철학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상호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수학, 천문학, 치수, 시학, 고증학의 권위자로 이런 분야에 비판적으로 귀납적 비교연구의 방법을 적용했다. 동시대의 학자들이 실사구시를 자체로 추구하였던 것과는 달리 그는 진리를 밝히기 위한 기본 방법으로 생각했다. 동시에 그의 방법과 구체적인 연구 때문에 그는 진리를 구체적인 인용의 문제와 인륜의 체계적 조리인 질서로 보았다. 분명히 이 정열적인 사상가는 송 명의 신유학자들이 마치 존재하는 대상으로 해석한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리의 관렴에 대해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리란 사물들의 질서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었고 사물이란 일상의 먹고 마시는 것이었을 뿐이다. 리를 질서로 보는 것은 한대로 소급된다. 그래서 이러한 생각은 그의 독창적인 관점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 생각을 그 만큼 완전히 발전시키지 못했고 강력하게 밀고 나가지 못했다. 이런 리의 개념을 전제로 주희와 같은 관념적 공론이나 왕양명과 같은 심의 직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비판적, 분석적인 세밀하고 객관적인 사물의 연구를 통한 리의 관찰이 이루어 졌다. 그는 이러한 리의 개념 하에 인간의 정과 욕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맹렬히 송명 신유학을 반대했다. 그는 그들이 정과 욕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해쳤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리는 정이 충족되지 않으면 결코 유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리는 잘못되지 않은 정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사실 송명 신유학자들은 결코 정과 욕을 이렇게 보지 않았다. 그들은 정과 욕을 단지 이기적이고 정상에서 벗어나 것으로 나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송명 신유학자들은 리를 선한 것으로 욕을 나쁜 것으로 보았지만 대진은 이런 대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를 위해 그는 맹자의 성선설을 인용하여 자신의 이론의 근거를 대고 있고 잘못을 이기심이란 의미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리가 잘못되지 않은 정이라 주장하였기 때문에 불변하며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리를 기준으로 가정했다. 이것은 그가 말한 필연적인 도덕 원리이다. 그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사물에 내재하는 한정된 진리를 주장했지만 결국은 보편적 진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는 송명 신유학의 주요학설을 영속시켰지만 동시에 그것을 질서라는 용어로 해석했다. 송명신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자연은 끊임없는 생생의 과정이다. 그러나 이과정은 단지 자연의 작용은 아니다. 여기에 더해서 그것은 자연의 질서이고 그 속에서 기본적인 도덕 가치가 드러나는 질서이다. 대진은 청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 일 것이다. 그는 가난하게 살았고 한번도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다. 그는 말년이 될 때까지 주희를 공격하지 않았다. 맹자자의소증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며 가장 철학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의 이론이 그렇게 심오하지 않고 또 청대에는 철학적인 부분에 관심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백 여 년 동안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20세기에는 그의 철학이 시대적 경향에 부합되었기 때문에 갑자기 주목 받았다. [출처] 동양과 서양의 철학 개요-학자별|작성자 [출처] 송명청(宋明淸)대의 사상가 |